Elvis Presley (1935년 1월 8일~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 미시시피주 투펠로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일일 노동자여서
집안이 몹시 가난하였다.





그가 16살이던 해에 부모님이 엘비스에게 키타를
선물해 주어, 그것은 그가 가수로 데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54년 7월 평범한 한 청년이 멤피스의 한 레코드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생일 선물로
어머니에게 드릴 노래를 녹음하러 왔다고 했다. 이 청년이 바로 당시 19세의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직업은 트럭 운전사. 그가 부른 노래는 「괜찮아」(That’s All right)였다. 혹은 곡목이
'my happiness '였다는 기록도 있다.

다른 가수가 부른 노래였다. 그런데 바로 이 노래 한곡이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꾸리라곤 아무도 생각치 못했다.





그때 그 레코딩을 한 회사가 Sam Phillips가 사장이었는데
엘비스에 주목을 하고 이듬해 Sun레코드 사에 전속 가수가 되었다.

엘비스는 가수로 활동하는 동안 18개의 곡을 빌보드차트 1위에
올려놓음으로서 현재까지 가장 많은 곡을 빌보드챠트에 기록한
가수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쌍둥이 형제로 태어나 형이 일찍 죽자 그의 마음속은 혼자만 살아남은데 대해
항상 송구스러움이 도사리고 있었고 58년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 클래디스가
사망하는 바람에 또 한차례 슬픔을 맛보았다.






백인이면서 흑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프레슬리의 인기는 폭발적이었고 록과 블루스를
묶은 로큰록이란 음악으로 전세계 팬들을 열광시켰다. 프레슬리가 백인들 사이에 특히
인기를 얻고있는 것은 그가 흑인 가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미국 대중 음악계에
판도를 바꾼 백인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프레슬리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흑인 방문자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여기다가 그의 인기에 더욱 기름을 부은 것은 그가 미국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의 본보기였기 때문이다. 즉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영화관 안내원과 트럭 운전사를 전전하면서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이름 없던 청년이 상상을 초월하는 부와 명성을 쌓은 것이 미국인들의
꿈을 대리 만족시킨 것이다.




미국의 십대들은 1950년대 전까지만 해도 수동적인 아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제인스 딘의
'이유없는 반항' 이후 10대가 아주 조금씩 달라지고 있긴 했다.
그러다 멤피스에서 일기 시작한 로큰롤 음악은 미국의 십대들을 흔들어 놓았다.
이때부터 자기 세대를 규정하는 음악ㆍ옷ㆍ머리 모양 등을 가지고 어른들의 청교도적인
세계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멤피스는 바로 「십대의 반항」이란 전 세계적인 지진의 진앙지가 됐다. 미국의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미국 역사상 프레슬리 만큼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도 멤피스는 미국의 자유가 살아있는 꿈의 고향이 되고 있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끓이지 않고 멤피스를 찾아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의 조명을 한몸에 받으며 화려한 명성과 부를 쌓은 '록의 황제'에게
불운이 닥쳐오고 있었다.
7년간이나 교제하던 프리실라 보류우(priscilla Beaulieu)와 결혼으로 딸 리사 마리를
얻으며 행복을 맛보는가 했지만 엘비스가 장기간 공연과 영화촬영으로 집을
자주 비우자 공허를 달래려고 시작한 프리실라의 태권도 수업은 엘비스의 개인
태권도 사범이자 보디가드였던 마이크 스톤의 품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그의 삶은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Love Me Tender'는 엘비스의 부인이었던 프리실라가 결혼 전 처음 듣게 되었던
노래로 그녀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1962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Love Me Tender"가 연주되는 담배 케이스를
프리실라가 엘비스에게 선물 했었다 한다. 그런데...


그후 엘비스는 여인의 배신감과 스타로서의 인기관리에 불안으로
약물을 복용케 된게 후일 그가 사망케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어버렸다.




이때서 부터는 은둔생활에 들어가 베일에 감싸인채 외롭고 무의미하게
살다갔는데 그보다 7개월전인 77년 1월 진저 올든(Ginger Alden)양과
전격적으로 약혼을 올리면서 그 표시로 15캐러트 짜리 다이야몬드 반지를
선물로 주며 다시금 삶다운 삶을 살려다가 77년 8월 16일 42세를 일기로
약물복용 과용에서 오는 부작용으로 아까운 삶을 마쳤다.





엘비스는 멤피스의 대저택에서 약혼녀 진저 올든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는데 그해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고 한다.
엘비스의 죽음을 전해들은 당시 카터 대통령은
"엘비스의 죽음은 미국의 한 부분을 빼앗아 갔다"고
슬퍼한 가운데 그는 생을 마쳤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한때,U S Army에 지원복무한 적도 있었다.
http://blog.joins.com/liberum/7444750





엘비스 사후 관광명소로 바뀐 그의 멤피스 저택 '그레이스랜드'



그가 20년 동안 살았던 멤피스의 저택은 대지 2만평으로 지금은 프레슬리의 기념 박물관으로 바뀌어 공개되고 있다. 이 대저택은 거실ㆍ침실ㆍ식당을
비롯해 오디오 룸ㆍ당구장 등 23개의 화려한 방들로 꾸며져 있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보인 거실과 피아노

여러 침실 중의 한곳.

이 저택은 프레슬리 생전엔 공개를 꺼려해 오랫동안 신비의 집으로 불리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동안 공개를 하지 않 다가 열성 팬들의 성화가 하도 극성스러워 사후 5년 뒤인 82년에야 기념 박물관으로
꾸며져 일반에 공개됐다.

다이닝 룸

태권도 할 때 입었던 도복

이 박물관은 그가 평소에 살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타던 승용차와 자가용 비행기까지 전시되어 있다. 또 그의 생애를 담은 영화가 상영되고 기념 티셔츠ㆍ음반ㆍ흉상ㆍ배지 등 다양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다.

"그래이스랜드"에 사격장도 있다. 생전 사용했던 총기들

사격장 타겟

말도 키우고...

프레슬리의 모든 것을 사랑한 열성팬들에게 있어서 프레슬리의 박물관을
찾는 것은 일종의 성지순례와 같다. 프레슬리는 그의 집 앞 「명상의 뜰」에
다른 가족과 함께 묻혀있다.






이 박물관은 현재 프레슬리 유족들이 설립한 프레슬리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박물관 종업원이 3백명 정도다. 대부분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안내원들이다.

휘황 찬란한 앨범들과 무대복들



이 박물관이 가장 바쁜 시기는 프레슬리의 생일인 1월 8일과 기일(忌日)인 8월 16일이다. 이때는 「프레슬리 의 주간」으로 공연 등 갖가지 행사가 열려 세계에서 몰려든 프레슬리 팬들로 북적된다.

골드 앨범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은 1년에 평균 10만 여명이나 된다. 이곳은 입장료를 받는데 15달러다. 그러니까 입장료 수입만도 1년에 13억원 정도다.
여기에 각종 기념품 판매로 얻는 수입도 1년에 약 1백50억원 쯤 된다.



1997년 출간된 전기작가 피터 해리 브라운과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기자 팻 H. 브로스키가 공동 집필한전기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연보, 디스코그래피, 영화와 TV 출연작 목록, 동시대 음악인들에 대한 소개까지 망라한 책이다.
멤피스의 어린 시절부터 라스베이거스에서 보낸 말년까지 꼼꼼히 복원한 서술은 때로 대중소설처럼 읽힌다.


저자들은 아내와 어머니, 매니저와 관계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남자의 복잡한 면모를 밝히려고 애썼다. 평생 그는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머무르고 싶은 아들이었다. 요란한 스캔들 뒤에는 유약하고 소심한 남자가 있었고 섹시한 이미지는 용의주도한 매니저의 기획이었다.

이 책의 내용이 전하듯 프레슬리는 결코 최상의 예술가도 위인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문화사의 ‘위대한’ 지점을 점령했다고 평가할 수있다.옮긴이는 ‘로큰롤 스타’의 개념 자체가 프레슬리의 생애로 형성됐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참고 정리 : 'A legendary Performer-Elvis Presley,Google.com,
empas 음악 리뷰 (글 /박성균), 김준식의 여행 칼럼.
사진 : 인터넷 등에서 1년전부터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