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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여동빈(呂洞賓) ⑦‘신선이 된 후 다시 세상에 출현하다’
황룡선사의 가르침에 오도송을 짓다
황룡선사의 ‘먼저 마음속에는 물건(욕)이 없어야만(先要心中無物) 바야흐로 삼라만상을 싸안
을 수 있다(方能包羅萬象)’는 한마디에 크게 깨달은 여동빈은 즉석에서 오도송을 지었다.
棄却瓢囊擊碎琴 기각표낭격쇄금
從今不戀汞中金 종금불연홍중금
自從一見黃龍後 자종일견황룡후
始覺當年錯用心 시각당년착용심
하나있는 표주박 주머니도 버리고, 거문고도 깨뜨려 버렸다.
이제부터 불사약(금단)에 더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네
이제 황룡선사를 한번 만나본 후
비로소 그 당시 마음 잘못 쓴 것을 깨달았다네
여동빈은 낭랑히 오도송을 읊으면서 황룡선사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표연히 떠나갔다.
여동빈, 신선이 되어 올라가다
여동빈은 세상에서 백여세까지 지내다가 무창 황학루 3층 누각 위에서 신선이 되어 올라갔
다고 한다. 신선이 된 후 여동빈은 걸핏하면 인간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로 그가
인간세상에 와서 놀다가 세상과 사람을 제도한 전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중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여동빈, 200여년 후 송(宋)나라 때 악양루에 출현
宋 경력 4년(1044년), 등자경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나 파릉군 태수가 되었다. 부임한
다음해 그가 다스리던 파릉군은 정치를 잘하여 백가지 폐단이 바로 서고 모든 것이 순조로
웠다. 이때 등자경은 당나라 때 연국공 장열(張說)이 세웠던 악양루가 낡아 보수를 하였다.
악양루 보수가 끝난 날 큰 잔치를 열었다. 연회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등자경은 문득 이름
만 적힌 명첩 하나를 받았다. 그 위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고 다만 ‘화주(華州)도사가
삼가 문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등태수는 사람을 보내 그 도사를 악양루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얼굴을 보니 긴 수염이 가슴
까지 드리웠고 등 뒤에는 장검을 메고 있는데 그 모습이 청수하고 기이한 도사였다. 도사는
누각 위로 올라와 등태수와 마주하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호쾌하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좌중을 압도하였다. 악양루 중창 경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술에 취한
후 각자 붓을 들고 시와 글을 짓기 시작했다. 화주도사 또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朝游東海暮蒼梧 조유동해모창오
袖裏靑蛇膽氣粗 수리청사담기조
三醉岳陽人不識 삼취악양인불식
郞吟飛過洞庭湖 랑음비과동정호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가 저물어 창오군(광서성)으로 간다
소매 속 들어있는 단검(푸른 뱀)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
악양루에서 크게 세 번 취했으나 사람들은 내가 여동빈인 것을 모르는데
낭랑히 시를 읊으면서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갔다
등자경은 화주도사의 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 자리에 있던 화공에게 화주
도사의 취한 모습을 급히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등태수는 친히 예를 취하면서 나아가
화주도사에게 성명을 물었다. 화주도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성은 ‘여’요 이름은 ‘암’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마치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자경과 그 자리에 있던 문사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그 도사가
당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 여동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이 악양루 우측에는 삼취정(三醉亭)이 세워져 있다. 이 삼취정은
청나라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졌고, 그곳에는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모양의 여동빈
상과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여동빈(呂洞賓) ⑧‘중생들이여, 수행에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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