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넷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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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해
"철종 7년, 10월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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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 | 판전 현판 | | 사진크기 | : | 800*533 | | 출처 | : | © encyber.com | | 설명 | : | 서울 삼성동. 불교 경전을 보관하기 위한 불전이다. 판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 | 관련항목 | : | 봉은사, 김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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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이다.
'선게비불(禪偈非佛, 사진 위편`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이고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高會夫妻兒女孫)다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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