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측근 반대 물리치고 파룬궁 탄압 강행한 사건
세르비아 정보요원 숨겨주고 폭격당한 사건


“1999년 5월 나토군이 세르비아를 폭격했을 때 중국대사관을 철수시키지 않고 대사관 안에 세르비아 정보요원을 숨겨준 것은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또 “1999년 7월 파룬궁수련자들이 크게 늘어나자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룬궁을 탄압하기로 결정한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중국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평생 동안 한 일 중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이 두 가지를 꼽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내용은 장쩌민이 자식의 입장에서 작성한 미공개 회고록 ‘부친을 회고한다’ 라는 내용에 포함돼 있다고 홍콩 잡지 ‘첸싸오(前哨)’가 최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1999년 나토군이 세르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했을 당시 중국대사관은 세르비아군 정보요원들을 지하에 숨겨두고 있었다. 나토 공습에 의해 국방 · 정보 · 경찰본부가 모두 파괴된데 당혹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요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는 요청이 있자 중국정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나토군은 중국대사관을 폭격했고 이 폭격으로 세르비아인 14명과 중국시민 3명이 사망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공습으로 당시 중국 내에서 반미 시위가 촉발됐고,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의 타격 목표를 잘못 설정한데 따른 오폭이었다며 사과했지만 중국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공은 이 사건을 ‘파룬궁 수련생이 중난하이를 포위한 사건’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며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장쩌민은 파룬궁수련자들이 점점 증가해 수천만 명에 육박하자 질투심과 권력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탄압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결정은 시작부터 정치국 상무위원 내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부 상무위원들은 기공수련인 일종인 파룬궁을 그렇게 전면적으로 탄압할 필요가 있느냐고 탄압 결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장쩌민은 가족으로부터도 반대를 받았다고 하는데 장쩌민의 부인인 왕예핑(王野平)과 손자도 파룬궁을 수련했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탄압하는 결정을 정치국에서 강압적으로 통과시켰다.

장쩌민이 내세운 이유는, 공산당 통치 아래의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한 개 조직이 큰 규모로 발전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파룬궁은 중국 내외에서 중공의 죄상을 파헤치는 가장 유력한 단체가 됐다. 탄압에 관여한 중공 관료들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박해반대와 항의활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뿐만 아니라 장쩌민을 추종해 적극적인 파룬궁 탄압을 진행해왔던 관리들은 해외 법원에 기소됐으며 이로 인해 해외에서 구속될 위기에 처해있다. 또 많은 관리들은 탄압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고 있어 장쩌민은 이 일로 인해 매우 고립되는 상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