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신정아가 발견한 변양균의 힘
zamzari
2007. 10. 19. 16:06
- ▲ 강효상 사회부장
- 과거 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수석을 지낸 한 인사의 얘기이다. 임명장을 받은 직후 대통령이 불러서 갔더니 수백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건네주더라는 것이다. 이게 뭐냐고 묻자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신세 진 사람들인데 잘 챙겨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대통령 경제수석으로서 국가의 예산과 주요 인사(人事)를 다룰 때 소위 ‘대통령의 사람들’을 특별히 배려하라는 지시였던 것이다.
그가 이후 대통령의 지시를 잘 따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임명된 지 1년 만에 정치권의 표적이 되어 경질된 것으로 보아, 비교적 공사(公私)를 구분하려 애썼던 공직자였던 것 같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청와대의 정책기능을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비서실장과는 별도로 정책실장이란 고위급 자리를 신설했다. 과거 경제수석의 업무뿐 아니라 사회·교육·복지 등의 분야까지 포함, 정무(政務)를 제외한 사실상 국가의 모든 정책을 관장하는 막강한 자리다. 정책실장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정우, 박봉흠, 김병준, 변양균씨 등 대통령의 최측근들로 짜여 왔다.
이번 변양균-신정아 게이트 수사에서 드러났듯이, 예산 전문가인 변씨의 청와대 정책실장 기용은 예산 배분에 있어서 당연히 청와대의 입김이 크게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과거 정부에서는 예산 사업을 추진할 때 억(億) 단위는 청와대에서, 조(兆) 단위는 예산처에서 결정했지만, 지금은 그 반대라는 얘기들이 관가(官街)에서 나오고 있다. 대북경협사업 등 조 단위의 대형 프로젝트들이 청와대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애당초 노무현 정부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대통령의 국정 운용 방향에 맞게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어쩌면 상식적인 일이다. 분배를 강조하는 대통령이 취임할 경우 복지분야 예산이 늘어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하지만 변씨를 정책실장에 기용한 이유가, 예산 전문가를 권부(權府)에 앉혀 놓고 예산을 주물러 정치적 민원을 해결하려는 의도라면 이는 정말 안 될 일이다. 200조원에 달하는 국가예산이 합리적으로 편성되지 않고 집권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될 경우, 머지않아 국가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국민은 이런 것까지 대통령과 집권당에 위임한 적이 없다.
미국도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예산편성은 의회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미국은 1970년대 소위 ‘예산 7년 전쟁’을 통해 의회예산처(CBO)가 신설돼, 대통령이 쥐고 있던 예산편성권의 주도권을 의회가 찾아오게 된다(신해룡 지음 ‘예산정책론’). 미국은 지금도 대통령 산하 예산관리처(OMB)에서 예산제안서를 의회에 제출하지만, 이는 참고사항일 뿐 예산을 편성하고 확정하는 권한은 의회가 갖고 있다는 설명이다.
우리도 과거엔 예산 담당 부서가 경제기획원이나 재경원 등에 속해 경제부총리의 통제를 받았었다. 당시 부총리들은 경제장관회의의 의장으로서 타 부처 장관들과 예산실장(1급)을 지휘, 외부의 정치적인 입김을 막고 불합리한 예산편성을 줄여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기획예산처가 독립되면서 과거에 비해 국가경제 운영 차원의 예산편성보다는 정치적인 예산편성이 늘어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후 시스템 개혁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하지만 예산편성에 있어서는 대통령과 청와대의 영향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시스템의 개악(改惡)을 초래했다. 이런 맹점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온 이가 바로 영리한 신정아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