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과 약속
희망과 약속
희망은 일반사회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희망은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는 특수한 환경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사람은 별로 쓸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명절 때 귀성길이나 혹은 여름휴가철에 길이 막혀 수 킬로, 수 십 킬로미터 콱 막힌 도로상에서 제일 앞에 내 차가 거기 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거나, 시각장애인이 눈을 팍 떠졌으면 하고 염원하거나, 종신복역자가 내일 출소했으면 하고 바라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할 때에만 이 희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희망이라는 단어가 그런 특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필요한 단어만은 아닌 데도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인생은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를 아껴줄 사람이 나를 아껴주지 않는 것만 같아 허무하고, 어떤 날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필요할 때 아무리 손을 꼽아 봐도 그 싯점에 딱 맞는 마땅한 친구가 없을 때가 허무하다. 무엇이 좋아 한나절 골몰해 있다가도 그 일에 지치게 되면 외로움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또 한없이 허무하고, 나는 나혼자 힘으로만 살아가야 하는가하고 느껴지고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허무하다. 어릴 때 그렇게 좋아했던 친구도 일이 바빠 여러 해 멀어져 있다 보면 그 사이 너무나도 변해져 있어 말이 통하지 않고 생각이 달라 이제는 친구가 될 수 없나 하고 느껴질 때 허무하다. 바쁘다보면 연락하지 않게 되고 그러니 자연 만나지지도 않게 된다.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지 무엇이 많은 사람에게는 많고 적은 사람에게는 적은가! 친구도 그렇고 재물도 그렇고 사회적 지위도 그밖에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낙이 없다면 정말 곤란하다. 이런 세상이 아니라면 신도 인간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들었다 해도 모두 바로 자살하고 아무도 살아있지 않을 것이다. 낙! 그건 삶의 의지처이며 희망이며 장래에는 이보다는 더 나아 질 것이라는 미래를 기다릴 수 있는 약속이기도 하다. 자살은 왜 하는가? 그건 바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자전거도 이름그대로 믿고 자전하는 거라고 하여 그냥 타고만 있으면 넘어지는데, 서 있을 때 페달을 밟아야 간다. 자동차도 움직일려면 순서가 있는데 먼저 시동을 걸어야 하고, 그 다음단계로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아야 하고 그리고 엑설레이터를 밟을 때 비로소 앞으로 전진한다. 공짜로 되는 것은 없다. 밥이 밥그릇에 담겨있어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어야 내 것이 되고, 많이 먹어줘야 배도 부르고 살도 찐다. 적게 먹는데도 뚱뚱한 사람은 없다. 공부도 열심히 하면 성적이 향상되듯이 한우물을 파면 노력의 대가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은 거의가 다 공짜이다. 산이 공짜이고(산에 들어가지 않고 남의 산을 보기만 보는 것) 물이 공짜(인위적으로 정수한 수도물 빼고)이고 공기가 공짜이고 태양빛과 열이 공짜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남을 사랑해야 하고 남을 나보다 더 아껴야 한다. 마음을 바르게 써야만이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남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