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가우디 펌)세계의

본명-Antonio Gaudi y Cornet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
출생 : 1852년 6월 25일출생지 : 스페인
사망 : 1926년 6월 10일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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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족(聖家族)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평가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G. R. Collins 글

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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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이 코르네트 [Antonio Gaudi y Cornet, 1852.6.25~1926.6.10]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로 자유롭게 흐르는 선의 형태를 3차원의 표현력을 갖는 건축으로 전환시킨 아르누보 건축가중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다. 그는 자연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얻어 유추한 형상을 시각적, 공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인체의 골격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유추해내기도 하여 현대건축의 표현주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예시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은 시대와양식 그리고 작품이 이루어진 시대 그 모든것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놀랄 만한 관찰력과 자연에 대한 대단한 관심은 하늘, 구름, 물, 바위, 나무, 동물이나 산과 같은 자연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독특한 건축 철학을 만들었으며 가우디 자신의 "성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만들어 놓은 그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건축물들에서, 마치 떡 주무르듯 해 놓은 집이며 사람의 뼈를 흉내낸 기둥, 옥수수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첨탑 등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건축가의 꿈이 얼마나 엉뚱하고도 원대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발레의 나진스키, 성악의 마리아 칼라스가 그러했듯이

안토니오 가우디는 건축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천재다.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아주 미세한 부분의 장식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나 스테인글래스로 만들어진 창호, 다양한 용도와 디자인의 금속장식 등 공간에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공간적, 시각적 요소를 디자인하였다. 오직 하나의 건축물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작품들과는 유사한 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건축물을 살펴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좀 뒤틀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건축물들은 들쭉날쭉한 파사드는 바로크식 건축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한편 불합리한 면도 다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자연에 대한 영감에 의한 건축 구성은 다른 건축가와는 달라서 평면에서 나타나는 선으로서 추상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기하학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100년전의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금속 세공업자였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어린 가우디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17세에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향했고 이후 바르셀로나는 그의 평생의 고향이며 가우디 건축의 성지가 된다.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영국의 예술학자 존 러스킨의 "장식은 건축의 근원이다"라는 말에 중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의 과제는 그 유례 없는 대담함으로 종종 건축학교 교수들의 논쟁과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가 남긴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슬아슬한 점수를 받으며 건축 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 바로 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에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자는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가우디는 여기에 가담해 지역의 토착 예술을 공부하고 중세의 고딕 양식에 심취해 있었다.

1883년 이후 가우디는 모든 작업을 중단한 채 바르셀로나 교외에 짓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건축에만 매달렸다.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된 이 성당의 건축은 이후 40여년간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보더라도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전차에 치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차림새는 검소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남루한 행색의 가우디를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바람에 그는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3일 후, 가우디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가우디의 시신은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가 사망한 1926년 무렵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설계한 제2기 시립바우하우스 新校舍가 데사우(Dessau)에 들어섰다.

그 당시에는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지그프리드 기드온(Siegfried Giedion, 1888-1968) 등이 주창하는 합리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사르라다 파밀리아

바우하우스는 가우디 작품과는 대치되는 개념으로 가우디의 작품을 "구시대적 바로크 양식이며 비합리적이다"라는 등 많은 건축가들이 가우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1952년 가우디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계기로 많은 건축평론가와 이론가들이 가우디건축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 가우디에 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논문전시회, 연구, 강의가 개최되는 등 가우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정작 기존 건축가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자신의 스승의 건축 철학을 계승하는 것이 전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우디의 작품은 모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수많은 재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가우디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의 해결책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자연에서 영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연적인 형태에도 다양한 해결책이 있기에 결코 반복될 위험이 없다.

가우디의 건축은 항상 자연속에서 직접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에 결코 식상하지 않으며 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의 건축은 시간을 초월하였으며 그 이유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유용한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유명한 말 중에 "독창성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든것의 근원은 신이 창조한 자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글출처-네이버 유럽 유학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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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이님 글-http://blog.daum.net/in2984/10179714

안토니오 가우디, 자유로운 꿈의 곡선

Antoni Gaudí (Antoni Gaudí i Cornet 1852 - 1926)

스페인 여행의 또 다른 재미는 독창적 기법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기 보이는 나무가 나의 가장 좋은 건축 표본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자연 속에서 건축 영감을 찾았고,

그 결과 이전 그 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후손들에게 걸작을 남겨 주었다.



자연의 다양한 형태는 가우디를 통해서 딱딱한 건축물에 생명을 넣어 주었다. 가우디의 건축물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스페인판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그의 건축물에는 산이 많고 해안에 있는 카탈루냐의 지형적 특징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l898∼1914), 구엘공원(l900∼1914),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로(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그리고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l908년 완성) 및 탑 ·조각(l903∼1926) 등이 있다.
카사 바트로의 내부와 스테인드 그래스 디테일들
Casa Batllo / Stained Glass,Batllo parlor partition, Casa Batllo / Cabinet-work








카사 바트로의 내부와 스테인드 그래스 디테일들 Casa Batllo / Stained Glass
유럽을 여행한 많은 사람들이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잊어도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가족 교회」는 건축학도라면 유럽에서 제일 먼저 달려가 보는 곳이며 우리에게는 100년 넘게 짓고 있는 건축 역사로 알려진 건물이다. 바로 이 「성가족 교회」를 설계한 현대 최고의 건축 천재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엣도 몇차례 전시 되었었다.


「공기 단축」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과 생애는 적잖은 놀 라움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피카소나 미로에 비하면 가우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 의 없는 편이다.


스페인인들이나 건축학도들에게도 가우디는 글이나 강연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 물에 대해 메시지를 전한 바가 없다. 그는 자식이나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으며 그 흔한 학파도 구성돼있지 않다. 오로지 건축물을 통해서만 그와 대화할 수 있다.

‘각’의 건축만 있던 시대에 자유로운 곡선 강조

그의 최대 걸작은 역시 「성가족 교회」다.

1883년 건축이 시작된 「성가족 교회」는 지금도 돌을 쌓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56년 이후 인조돌과 콘크리트로 쌓고 있다(다행히 가우디가 재료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성당의 3개의 정면 중 「나시미엔토」(탄생)는 가우디의 생전에 거의 완성이 됐고 「글로리아」(영광)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며 「파시온」(수난)이 완성돼가는 단계에 있다.


아랫부분은 땅으로 가라앉는 듯하고 윗부분은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건 물은 성서에 나오는 상징들로 물결치듯 이어져있으며 각각의 면은 보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야기 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종탑의 끝부분은 가우디가 즐겨 사용했던 도자기 모자이크로 마감 됐다.



기능주의적인 건축물에 익숙한 우리에게 「성가족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인상을 준다. 사실 스페 인 안에서도 적잖은 이 비현실적인 건축물에 조소를 퍼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우디는 이 건 물을 돌과 종교와 예술로 지탱해나갔는데 스스로 「속죄사원」이라 칭함으로써 건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여겼다.
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건축물 하나하나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저택이나 교회건물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원의 벤치와 가로등, 의자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 창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만든 구엘공원의 벤치는 도시 위를 물결치듯 자유롭게 흐르는 바람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며, 레알 광장의 가로등은 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몽환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져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성사족교회와 내부 스테인드 그래스 Sagrada Familia / Stained Glass

‘바람 돌 꽃의 노래’가우디 건축


가우디 사상의 씨줄이 종교였다면 날줄은 자연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모든 형태는 자연물에서 얻어 온 것이다. 그는 꽃과 나무를 관 찰한 뒤 건축적 형태와 완벽하게 결합시켜 가장 새로우면서도 스페인의 자연과 어울리는 예술품 을 만들어냈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1852년 태어나 일평생을 바르셀로나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1926년 「성가족 교회」의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던중 차에 치여 숨졌는데 빈민병원으로 실려간 남루한 그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건축비평가 전진삼씨는 『그의 건축물이 있는 거리에 서면 누구라도 풍요로움을 느낀다. 가우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건물의 각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에게 누구도 상상못했던 자유로운 곡선을 가진 집을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가 아직도 편협한 시각에 갇혀있는 우리 건축을 보다 넓 은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과 예술로서 건축물을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 씩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우디의 작품은 건축가의 자유로운 예술적 감성과 이를 수용하는 사회 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로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가우디 Antoni Gaudí in 1878

"건축가는 비범한 재능과 더불어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희생이 뒤따르는 길이다... 건축가는 종합적인 인간이다. 건축가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전체적으로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연구와 인내의 반복속에서 희생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매우 고차원적인 것이며 고통과 가난을 동반하는 가운데 균형을 잡는 추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균형을 잃고 만다.."

다빈치에서 출간된 책 <가우디 공간의 환상>에는 가우디가 청년시절에 쓴 논문초고와 만년의 그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어록(語錄)이 그의 건축세계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141개의 사진과 함께 실려있어 흥미롭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에서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예술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했다. 그는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책 속에서 예술을 일궈낼 줄 알았고,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카사밀라 The Casa Milà, in the Eixample, Barcelona.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보자면,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독특한 '카사 바트료',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구엘공원'은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공원으로 가우디는 이곳 택지를 분양받아 20년을 살았다. 또한 그는 같은 이름의 '구엘궁전'과 '구엘별장', '구엘성지교회' 등을 건축했다.

가우디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속죄의 교회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로 꼽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는 청년시절 반교권주의자였던 가우디를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만든 건축물로써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장식이 특징이다. 이 교회는 착공된 지 이미 115년이 지났지만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의 미완성에 대해 가우디는

"슬프게도 내 손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타라고나 대성당의 예에서 보았듯이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 완성까지 보았다면 그 만큼의 웅장함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라며 아쉬움과 겸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책 <가우디 공간의 환상>의 미덕은 성인과 현자들의 명언처럼 가슴을 울리는 가우디의 말들과 한 장 한 장 칼라로 인쇄된 그의 건축물을 보는 장엄함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


"건축의 탁월성은 모두 빛에서 나온다",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채이다", "완전한 아름다움은 살아있을 수 없다" 등, 가우디의 예술관과 종교관을 보여주는 말들은 경이롭지만, 그가 평생 단 한 차례의 강연도 하지 않았고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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