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정기'도 못피한 中 검열 폭탄

“중공 치부 드러낸다.”…100곳 이상 수정 명령

드라마 녹정기 포스터
[대기원] 영화 '색계' 이후 중국에 불고 있는 ‘사오황다페이(掃黃打非·음란물을 소탕하고 사이비를 척결한다)’불똥이 드라마 '녹정기(鹿鼎記)'로 튀었다.

대중매체를 통제하는 중공 광전총국(廣電總局)은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녹정기에 나오는 전쟁장면·일부다처제 등 '불량한 내용' 100 군데 이상을 수정할 것을 명령했다.

녹정기는 중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작가인 김용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톱스타 황샤오밍(黃曉明)이 출연한 화제작이다. 청대 강희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김용의 마지막 무협소설 녹정기는 국내에도 출간돼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당국이 문제삼은 녹정기의 전쟁장면은 어떤 것일까?

주인공인 위소보(韋小寶)가 강희제를 도와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반청(反淸)의 선봉장이었던 정성공(鄭成功)의 손자가 다스리던 대만을 수복한다는 내용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중국(청나라)과 러시아와 관계를 다루는 대목에 있다. 강희제는 러시아와 싸워 약 1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확장했다. 여기에는 지금의 외몽골(몽골공화국)과 연해주 일대가 포함된다. 또 극중에서 위소보는 연인인 러시아 공주 소비아를 도와 섭정여왕이 되게 한 후 중국과 러시아의 첫 번 째 국경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실제 역사 사실인 네르친스크 조약의 내용은 러시아 상인의 중국 출입을 허용하는 대신 러시아가 헤이룽(黑龍) 강 유역에 설치한 전초기지를 철수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1999년 12월 9일 당시 중공 주석 장쩌민은 중국을 방문한 옐친 러시아 대통령과 맺은 ‘중러국경협정(中俄全面勘分邊界條約)’을 떠올리게 한다.

60년대 무력분쟁으로 치닫을 정도로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자주 벌여 왔다. 장쩌민은 협정을 통해 외싱안링(興安嶺) 남부, 헤이룽강 북부 60여 만 평방킬로미터 지역, 우수리강 동부 40만 평방킬로미터 지역, 현재 러시아 투바공화국 지역인 17만 평방킬로미터, 사할린 지역 7만 평방킬로미터를 러시아에 넘겼다. 이는 대만 면적의 40배에 달하는 규모이지만, 중국이 러시아에게 받은 대가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이는 중국 최초의 평등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싸워 영토를 확장한 강희제의 업적과 비교된다.

중공 당국이 중러국경협정에 얼마나 민감한 지는 홍콩 문회보 부편집장을 역임한 전 싱가포르 스트레이츠타임스의 홍콩특파원 청샹(程翔)을 통해 알 수 있다.

청샹은 홍콩 명보(明報)에 중궈런(鍾國仁)이라는 필명으로 몇 편의 글을 발표했다. 청샹은 글에서 비공개로 진행된 ‘중러국경협정’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후 중공 당국의 표적수사에 걸려 2005년 4월 전중공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인터뷰 사본을 입수하다 체포됐다. 청샹은 간첩죄로 3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지난 2월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당국이 문제 삼은 또 하나의 '불량한 내용'은 일부다처제에 관한 것이다. 위소보는 극중에서 부인을 7명이나 둔 것으로 나온다. 광전총국은 이를 두고 ‘불량’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당국이 우려한 것은 실제로는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위소보를 보고 떠올릴 ‘누군가’에 있다.

지난해 실각한 전 상하이 당서기 천량위(陳良宇)는 톱모델, 여성공무원 등 여러 명의 얼나이(二奶·둘째 부인, 즉 첩)를 두었고 손녀뻘 되는 호텔 직원 사이에 자식까지 뒀다. 한때 상하이방(장쩌민 측근 세력)의 황태자로 불렸던 천량위는 거액의 부정축재와 문란한 생활이 드러나면서 철창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최근 중국 언론들은 공산당 간부 낙마의 90%는 축첩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부자와 고위 관료들 사이에 축첩이 성공의 징표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무협 매니아들은 이미 여러편의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된 녹정기의 2008년 황샤오밍 버전을 학수고대했지만, 아쉽게도 ‘완전판’ 녹정기를 보기는 앞으로 점점 힘들어질 것 같다. 지난 11월 중국에서 30분 분량이 삭제된 색계가 개봉됐다. 하지만 극장은 텅텅 비었고 중국인들은 무삭제판 색계를 보기 위해 대거 홍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