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5일자 기사인 '사대파 이방원도 공짜로 조공하진 않았다'에 대해 어느 독자분께서 "조선은 대륙을 호령한 강국이었는데 어떻게 조공을 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 민족의 과거역사를 좀 더 웅장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주문성' 혹은 '압력성' 이메일이 필자에게 가끔씩 도착하곤 합니다. 진실 여하에 관계없이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간혹 계신 것 같습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조공국의 정체성에 대해 사료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기자 주>

독자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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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과거 역사와 관련하여 한국인들 사이에는 두 가지의 상반된 인식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대륙을 호령한 웅장한 역사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의 역사는 대국에 빌붙은 굴종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앞의 것에는 '우리 민족은 당당한 자주국가였다'는 인식이, 뒤의 것에는 '우리 민족은 구차한 조공국가였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데 실제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주국과 조공국이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얼마든지 상호 양립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한 근거로서 많은 사례들이 지적되고 있지만, 위의 독자께서 조선시대의 상황을 거론했으므로 여기서는 그 시대의 사료를 근거로 생각해보기로 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조선-명나라 사대관계 개창의 중국 측 장본인인 명태조 주원장(재위 1368~1398년)의 유지에 나타난 인식을 살펴보는 것이 보다 더 신뢰할 만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조공국이었나, 자주국이었나

조-명 사대관계의 본질에 관한 인식을 담고 있는 명태조의 유지가 조선 측의 <태조실록> 태조 6년(1397) 6월 23일자 기사에 인용되어 있다. 그중에서 문제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산으로써 경계를 삼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풍속이 (중국과) 다르다.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풀었으니 본래 동이의 나라다. 그러나 중국과 가깝고 왕자(王者)가 도리를 알아서 이웃과 돈독히 하는 우호를 닦고 (상호간의) 왕래를 예로써 떠받드니, 때에 따라 찾아오는 것이 마땅하다."(朝鮮之國限山隔海風殊俗異天造地設本東夷之國然與中國相邇王者有道修睦隣之好禮尙往來撙節時宜而至是其當也)

참고로, '인터넷에 공개된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에는 원문에 표점(쉼표나 마침표 등)이 찍혀 있는데 여기에는 왜 그런 표기가 없느냐?'라는 의문을 가질지 모른다.

그러나 표점 표기는 근대 학문의 소산이다. 그리고 표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표점을 찍지 않고 원문 그대로 제시했다. 한자가 통용되던 시대의 동아시아인들은, 문장 단위로 글을 이해하는 현대인들과 달리, 인접한 두 단어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통해 글을 이해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쉼표나 마침표가 없이도 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소개된 두 문장은 각각 자주국으로서의 조선과 조공국으로서의 조선에 관한 명나라 측의 인식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천조지설 = 자주국

첫째 문장에서는, 조선이 '천조지설(天造地設)의 나라'라는 인식이 표출되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베푼 나라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 풍속이 (중국과) 다르다"라는 표현과 더불어, 조선과 명나라의 태생이 근본적으로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명나라가 조선을 만든 게 아니라 하늘이 조선을 만들었다는 표현은 조선의 태생적 독자성을 인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조선과 명나라는 별개의 기반 위에 존립해왔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한규(서강대 사학과 교수)의 <한중관계사> 등에서 한·중 두 민족(혹은 역사공동체)의 자율적 관계를 나타내는 사례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위의 사료는, 동아시아에서의 천(天)과 정치권력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보다 더 명확히 이해될 수 있다.

주나라 최고 권력자의 칭호가 천자(天子)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동아시아에서 정치권력은 천(天)의 의지를 지상에 집행하는 합법적인 대리인의 역할을 자처했다. <예기> '왕제편'에서 천(天)에 대한 제사 즉 제천행사를 천자의 독점적 권한으로 명시한 것도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한 하늘' 밑에서 '두 개의 제천행사'가 열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천행사를 따로 연다는 것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별개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제천행사를 따로 열려면 그 민족이 천조지설의 나라라는 명분이 조성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원장의 유지에서 '조선은 본래 천조지설의 나라'라는 인식이 나타난 것은 조선이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율적인 정치·경제·문화적 실체임을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민족이 과거에 독자적인 제천행사를 수행한 것은, 조선은 중국과 별개의 민족이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향유한 나라를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사료상으로는 '자주국'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듯하다. 1876년에 일본 대표단이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일종의 외교부)을 방문하여 조일수호조규(일명 강화도조약)상의 '조선은 자주국'(제1조) 조항을 보여주자, 총리각국사무아문 측은 조선은 본래부터 그런 나라였다면서 그 표현이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고대 제천행사의 전통을 계승한 한국의 원구단(왼쪽)과 중국의 천단. 두 민족이 상당 기간 동안 별도의 제천행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두 민족이 정치적으로 별개의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김종성
원구단

때에 따라 찾아오는 게 마땅 = 조공국

이와 같이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식하면서도, 위의 둘째 문장에서는 '조선은 조공국'이라는 인식이 함께 표출되었다. "때에 따라 찾아오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말은, 때에 따라 황제를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조공을 하는 게 마땅하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위의 유지에서는 조선이 왜 조공을 하는가에 관한 명나라 측의 인식이 드러났다. 둘째 문장에 나타나듯이, 지리적으로 인접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서 조선이 자국에 조공을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유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명나라 측은 '조선은 본래 자주국이지만 국제평화를 위해 중국에 조공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 하늘이 달라서 서로 다른 나라이지만, 가까이 붙어 있다 보니 국제평화를 위해서 조공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면, 조-명 사대관계 개창 시기의 명나라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도 자주국과 조공국이 양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공국은 자주국이 아니다'라거나 '조공국은 나라도 아니다'라는 인식이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현대의 서양 학문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조공 등의 형식으로 강대국에게 사대를 하면서도 국가로서의 자주성 혹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중국인민항일전전쟁기념관 마당에 있는 표어
ⓒ 김종성
중국인민항일전쟁

역사를 교훈 삼아 현재와 미래를 봐야

물론 조공 자체가 상하관계를 전제로 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중국에 조공을 했다는 사실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에 우리가 중국에 조공을 했다'는 사실로부터 얻어내야 할 역사적 교훈은, '지난날의 조공 사실을 감추자'가 아니라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과거에 조공 사실이 전혀 없었다고 강변한다면, 반중국 감정이 강력했던 1894년에 조선 정부가 '개국 503년 6월 23일자 유지'를 통해 "다시는 중국에 조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우리 자신의 반성을 위한 것인데, 우리 역사에는 온통 위대한 면들만 있었다고 한다면 굳이 힘들게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김종성 (qqqkim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