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탐방2 건축물,건축가 2010. 10. 28. 17:23
대문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시야




아파트에서는 꿈같은 장독대, 아파트문화로 우리의 장독대는 다 사라져갑니다




벽을 황토로 했습니다 오래전에 다시 황토시공을 한듯합니다 예전에 흙벽은 흘러내리지 않도록 짚을 썰어넣어 색이 흐릿하고 그것마저 신문화가 들어오면서 모조리 다 철거했습니다




대청과 마루





처마와 부연/ 처마대로 두면 앞이 축쳐져서 시야를 차단하므로 우리 옛선조들은 처마끝쪽에

연이라는 처마윗쪽에 보이는 처마 연장한 것을 대어 처마를 들어올리고 지붕에 곡선미를 주었습니다 (둥근것이 처마, 끝쪽에 각진 재목이 부연)





가정집 대문간에도 별도로 지붕을 이어 구조물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대문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겠지요 우리몸의 중요부는 갈비뼈로 싸여있지 않습니까



이중대문입니다 정면중앙의 대문은 바로 하인들의 방인 행랑채가 보이고 우측의 대문은 들어가면 안채입니다 격식을 중시 했으니까 이렇습니다 한옥을 구경하는 손님을 위하여 특별히 국악단을 초청한 모양입니다



초청된 국악단의 모습입니다 이름은 '마루'라 하는 예쁜이름인데 판소리도 연주도 아주 좋았습니다 한옥은 지금은 대부분 한옥이 식당으로 쓰입니다 이집도 식당입니다 마루에 앉아 연주를 들었습니다 단원은 5명으로 구성되었고 국악기는 장구, 북, 해금, 대금, 소금, 가야금, 국악기는 아니지만 국악을 보조하기 위해 신디사이저등입니다








운이 있어 국악 판소리 몇곡을 들려주었습니다 앵콜을 하여 두곡을 더 들었습니다 그리고 공짜로 이집이 전문인 쇠고기 국밥 한 그릇을 먹을수 있었습니다 물론 오늘은 발품한 사람은 구경부터 먹는것까지 다 공짜였습니다 예전에 가정집이었을 개인의 한옥에서 국악을 감상하는 멋은 무엇으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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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구경1 건축물,건축가 2010. 10. 2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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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을 따라갑니다.
경상도말로 '길다'를 '질다'고합니다. 그래서 '긴골목'을 '진골목'이라 부릅니다.대구 중구에 그런마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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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옥은 긴쪽에 문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집은 측면에 문을 내어씁니다. 남쪽 마당에 있는 조경수를 감상하기 위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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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는 예전 대구의 재벌들이 살았던 곳이라 합니다. 골목폭이 1.5m남짓 됩니다. 돈이좀 있으면 측면을 지붕을 잇는데 이것을 팔작지붕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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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이 나무를 재료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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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에 오르면 지붕아래 서깨래와 보가 보입니다. 우리나라 주로 소나무가 많고 소나무는 곧지 못하고 굽고 휘어 자랍니다. 이것을 사용하여 지붕서까래를 만드니 곡선미가 세계서 제일일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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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기와를 사용하여 이은 지붕과 지붕아래 서까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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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앞마당의 조경과 담장 옆집지붕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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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의 보와 기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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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틀을 받치는 보는 굽은 소나무를 사용하여 처짐을 일부러 잡아주지 않아도 위쪽으로 휘게 하여 처짐을 보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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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송판을 사용하여 마루바닥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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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臺山 月精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慈藏이 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선덕여왕 12)에

오대산 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석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8각 9층석탑 (국보48호) 과 상원사 중창권선문이 있다.

이 밖에 일명 藥王菩薩像이라고도 하는

보물 제139호인 석조 菩薩坐像이있다

팔각구층석탑 (국보 제48호)

석조보살좌상-보물 139호

월정사팔각구층석탑내발견유물일괄-보물 1375호

육수관음상

삼성각

五臺山上院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月精寺의 말사로,

월정사와는 이웃하고 있다.

원래의 절은 724년(신라 성덕왕 23) 신라의 大國統이었고

通道寺등을 창건한 慈藏이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종각만 남고 건물은 8·15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현존 유물 중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36)이 있다.

상원사 문수전

청량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상원사의 중심건물로 탄허스님이

오대산의 본래 이름을 따서 이 선원을 열었다.

청량선원이라는 이름은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는 데서 연유한다

상원사 만화루

상원사 만화루

상원사동종(上院寺銅鍾) - 국보 제36호

목조문수동자좌상 - 국보 221호

상원사 문수전 불상

왼쪽은 목조문수동자좌상이고, 오른쪽 목조보살좌상이다.

고양이 석상

상원사 관대걸이

상원사 적멸보궁

상원사 소림초당

상원사 요사채

상원사 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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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天 - 松廣寺

順 天 松廣寺

한국의三寶사찰 가운데 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통도사ㆍ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吉祥이라 하였는데,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守愚가 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언제 송광사로 개명하였지는 알려져 있지않다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며

1922년부터 1928년까지 雪月· 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로,

木彫三尊佛龕 (국보 42), 高麗高宗制書 (국보 43)

國師殿 (국보 56)을 비롯해

大般涅槃經疏 (보물 90) 經帙 (보물 134)

經牌 (보물 175), 金銅搖鈴(보물 179)등 보물10점과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秋史 金正喜의 書帖 英祖의 御筆흥선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禪修行의 도량이며

曹溪叢林이 있는 곳이다.

침계루(枕溪樓 시냇물을 베고 있는 누각)와 계곡

보조국사 부도

승보전에 있는 싸리나무로 만든 비사리 구시 ( 밥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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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의 '큐브하우스'
숲을 닮은 집

/글·사진=류혜숙 객원기자

움직이는 조명탑이 있는 광장. 1997년 West8 설계.
움직이는 조명탑이 있는 광장. 1997년 West8 설계.
38개 마름모꼴 입방체의 반복적인 조합. 그 형태의 독특함을 증폭시키는 것이 선명한 노란색이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에 건설되어 아래로는 자동차와 전차가 지나간다.

2차 세계대전은, 로테르담을 완전히 쓸어 버렸다. 한 채의 집도 남기지 않고. 과장일까. 7만7천여명이 집을 잃었다니, 저 정도 과장은 해도 된다고 우겨야지. 라인강과 마스강 하구에 자리한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자 유럽 내륙으로 가는 관문. 게다가 공업지대와 대 소비시장까지 끼고 있으니 오죽 없애버리고 싶었을까. 그러다 보니 로테르담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생김새가 좀 다르다. 네덜란드답지 않게 운하도 적다. 1950년대부터 재건이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기존의 운하들은 도로가 되었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과도하지 않게 들어섰다.

# 환상을 자극하는 목조주택 ' 큐브하우스'

콘크리트와 유리로 빚어진 새로운 도시 속에서, 그들은 동화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1984년에 완성된 목조주택 큐브하우스(Cube house)는 이제 나이가 꽤 들었지만 여전히 바라보는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든다. 38개 마름모꼴 입방체의 반복적인 조합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인 숲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 형태의 독특함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이 선명한 노란 색깔이다. 배우와 캐릭터의 환상적인 조화다. 빨강이나 파랑, 혹은 다른 모든 색깔의 큐브하우스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바로 곁에 있는 연필모양의 타워 형 아파트도 큐브하우스의 판타지를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다.

큐브하우스는 오래된 항구(Old Habour) 재개발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에 건설되어 아래로는 자동차와 전차가 지나간다. 마름모꼴 입방체를 지지하는 육각의 콘크리트 기단부에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각 가구는 3층으로 구성되어 1층은 조망이 아래로 향하는 길가의 집, 2층은 창문이 위아래로 향하는 천상의 집, 3층은 유리창이 많은 온실로 다락의 집이라 불린다. 1층에는 입구와 주방·화장실이 있고, 2층과 3층은 수납 등 최소공간을 제외하고 모두 입주자의 취향에 따라 사용된다.

단지 내의 중심역할을 하는 문화관은 상점들과 산책로, 도서관, 주차장 등의 시설과 연결되어 있다. 일종의 작은 공동체, 도시 속의 마을이다. 큐브하우스를 만든 건축가 피에트 블룸(Piet Blom)은 197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도시 속의 마을'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큐브하우스는 기능보다 시각적인 연출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지만 경직되지 않은 사고가 낳은 파격의 미로 로테르담의 흥미로운 경관을 만들고 있다.

# 우아한 백조 한 마리 '에라스무스 다리'

큐브하우스 곁으로 마스강이 흐른다. 강변을 따라 도심 방향으로 가다보면 강 위에 우아한 백조 한 마리가 도도하게 앉아 있다. 로테르담 출신의 철학자
큐브 하우스. 내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 가구를 개방해 놓고 있다. 내부를 둘러보는 비용은 7유로. Piet Blom 설계. 1984.2
큐브 하우스. 내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 가구를 개방해 놓고 있다. 내부를 둘러보는 비용은 7유로. Piet Blom 설계. 1984.
에라스무스 다리(Erasmus Bridge). 1996년 12월에 개통한 이 다리는 길이 800m, 높이 139m, 폭 30.8m 규모로 명실상부한 로테르담의 랜드마크다. UN Studio(Van Berkel & Bos) 설계. 1996.3
에라스무스 다리(Erasmus Bridge). 1996년 12월에 개통한 이 다리는 길이 800m, 높이 139m, 폭 30.8m 규모로 명실상부한 로테르담의 랜드마크다. UN Studio(Van Berkel & Bos) 설계. 1996.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딴 현수교다. 이곳 사람들은 에라스무스 다리를 '백조'라고 부르지만 언뜻보면 생각의 짐을 드리운 채 고독하게 걷는 철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다리의 모든 스케일들이 변하면서 멀리서의 연상들이 모두 지워진다. 커다란 것의 디테일도 미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리는, 압도적이다.

다리는 마스강이 가르고 있는 남북을 연결한다. 30m가 넘는 너비 안에 트램과 버스길이 가운데에 자리하고 자동차길, 자전거길, 그리고 인도까지 배려되어 있다. 이 다리를 설계한 'UN Studio'는 우리나라의 서울 갤러리아 명품관 서쪽 건물을 설계한 팀이다. 건축가와 그래픽 디자이너, 뉴 미디어 디자이너, 사진가, 시공 기술자 등의 협업 연결망(United Network)이라는 의미의 UN Studio는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비교적 젊은 건축가 집단이다. 그들에게 있어 건축은 실용과 철학의 결합이며 그것들을 통합하고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것,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 모든 기술, 효과, 그리고 사상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모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 다리 건설을 위한 초기안은 막대를 가지고 유연성을 실험하는 것이었다. 막대 끝에 손가락을 대고 힘을 가하여 구부러지는 정도를 실험한 것으로, 더 많은 힘을 가하면 막대는 파괴된다. 이는 하나의 게임이었다. 힘들의 게임. 자연의 힘과 벌이는 생리학적 게임이자 정치적 차원의 게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도출된 에라스무스 다리의 휘어진 목선은 지금, 철학자 에라스무스보다도 더 강력한 로테르담의 상징이 되었다.

■ 움직이는 조명탑

태양의 움직임 따라 탑도 움직여

조명탑이 움직인다. 사마귀 다리처럼 날씬한 저 붉은 철 덩어리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사이 후다닥 모양새를 바꾸곤 시치미를 뚝 뗀다. 로테르담 역의 남쪽, 도심으로의 진입과 동시에 만나는 광장에 있는 조명탑이다. 조명탑은 하루 동안의 태양 광선 이동에 초점을 두고 설계되었다. 사물의 그림자가 변하듯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탑도 변한다. 물의 나라답게 동력은 수압이다. 마찬가지로 광장 역시 향후 예상되는 이용 기능에 대처할 수 있도록 했다. 광장 바닥은 에폭시 수지, 나무, 금속 부분으로 명료하게 나누어져 그 재료에 따라 분수가 치솟기도 하고 춤판이 벌어지기도 하고 장이 서기도 한다. 장이 설 때, 그리고 가변적인 행사가 있을 때마다 포장 면 아래에 접혀져 있는 레일을 올려 자동차의 진입을 막는다. 이 조명탑과 광장을 설계한 조경 건축 사무소 'West 8'은 땅이 갖는 다양한 차원의 시공간과 주변 상황의 특수성에 초점을 두고 통시적인 국면과 공시적인 국면을 동시에 분석하여 설계한다. 도시경관을 단순히 회화적인 요소가 아닌 동적으로 기능하는 생산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경관도 도시와 함께 진화한다고 믿는다.

[유럽건축기행 ] 암스테르담의'비잔티움'
'러' 구성주의 건축의 현대적 부활 '평범했다'

/글·사진=류혜숙 객원기자

암스테르담 비잔티움 전경. 비잔티움 모서리에 매달린 듯 공중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암스테르담 비잔티움 전경. 비잔티움 모서리에 매달린 듯 공중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리움과 서울대 미술관을 떠들썩하게 설계하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알려진 건축가 렘 쿨하스의 1991년 작품이다. 사진을 통해서 수 없이 봐왔던 건물인데도 실제 눈으로 확인한 비잔티움은 조금 실망스럽다. 피상적이고 얄팍한 기대감,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에 내가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쇼핑가에 가겠네. 유럽에서 한국의 전자제품이 꽤 유행인 건 알죠? 비싸서 잘 못 사요. 그래도 암스테르담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자제품은 좀 싼 편이어서 휴대폰 같은 기기들을 많이 사러 와요. 다른 도시에서 일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홍등가에도 가 볼 거죠? 어두워지면 카메라 조심해요. 메고 있어도 뺏어 달아나는 사람들이에요. 가방에 넣는 게 제일 안전하겠네. 가방을 뺏어 가면 그건 운이라 생각하고."

도심으로 간다고 하니 주인 언니의 부연 설명이 길어진다. '유럽에서는 물 한모금도 돈'이라며 챙겨주는 작은 물통과 직접 구운 쿠키 몇 조각을 들고 차가운 아침을 나선다. 뺏어 가면 운이라니, 온 몸에 힘이 꽉 든다.

# 비잔티움(Byzantium)

하다 만 숙제처럼, 짜다 만 스웨터처럼, 꼭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마무리해야지 하면서도 몇 년간 직접 대면을 미루어왔던 건물이 있다.

비잔티움. 리움과 서울대 미술관을 떠들썩하게 설계하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알려진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1991년 작품이다. 그것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렘 쿨하스는 90년대 이후, 네오 모던의 건축적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원천인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 건축의 추상적 디자인을 최초로 현대에 다시 부각시킨 사람이었다. 스스로 신 구성주의자로 분류하는 그는 구성주의가 추구했던 혁명 이상을 후기 산업사회의 대중주의와 결탁시키고, 그러한 대중적 공공성을 메트로폴리스의 밀집 문화에 기원을 둔 자신의 건축 언어와 결합시켜 표현했다. 구성주의의 건축적 표현이 새로운 계층인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집합주택, 노동자 클럽 같은 체제 수호를 위한 수단 내지는 도구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현실주의적 선언이었다면, 그의 신구성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밀집문화가 야기시키는 집합적 쾌락의 공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변형이었다.

그에게 있어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쾌락적인 장소는 클럽이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후 새로운 에너지의 축적을 위한 휴식과 다양한 문화적 행위의 장소로 계획되었던 노동자 클럽의 현대적 변형이다. 비잔티움은 장방형건물의 꼭대기 모서리에 매달린 '공중 카페'라는 형태적 유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금빛으로 칠해진 고속도로 휴게소의 감자그릇 같은 그것. 이러한 형태는 1987년 지어진 헤이그의 국립 무용 극장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그곳 역시 극장 내의 레스토랑이다.

사실 비잔티움은 평범하다. 구성주의 특유의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다면, 그렇다. 사진을 통해서
댄스 씨어터. 1984년부터 시작하여 87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기하학적 블록에 둘러싸인 거꾸로 끝이 잘려진 황금빛 원추의 이 앗상블라쥬는 비잔티움보다 앞서 만들어져서인지 좀 더 저돌적으로 느껴진다. 헤이그 시청사 바로 앞에 있다.2
댄스 씨어터. 1984년부터 시작하여 87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기하학적 블록에 둘러싸인 거꾸로 끝이 잘려진 황금빛 원추의 이 앗상블라쥬는 비잔티움보다 앞서 만들어져서인지 좀 더 저돌적으로 느껴진다. 헤이그 시청사 바로 앞에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3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
수 없이 봐왔던 건물인 데도 불구하고 실제 눈으로 확인한 비잔티움은 조금 실망스럽다. 그의 신구성주의 어휘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건물을 대하면 건물보다도 '렘 쿨하스'라는 이름이 더 크게 작용한다. 피상적이고 얄팍한 기대감, 아무래도 나는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 암스테르담의 도심풍경

반나절, 쇼핑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홍등가를 기웃거릴 호사의 시간을 갖는다. 이 도시 중심부의 상점들은 13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 도심은 고도가 30m로 제한되어 암스테르담에서 용적률이 가장 높다.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겠지만 네덜란드에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을 허무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있던 그 자리 원형 그대로'라는 고집은 부리지 않는다. 건물을 분해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융통성은 개발을 위한 공간 마련, 즉 기존의 땅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대지 자체의 융통성을 의미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복잡한 쇼윈도, 고급 상점에서부터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 싸구려 물건들까지 합세해 와글와글한 길을, 황금의 17세기에 몰려들었던 예술가들처럼 잔뜩 부풀린 멋으로 걷는다. 평화로운 운하를 따라 길게 이어진 화초와 꽃씨 가게들이 있는가 하면 마약을 파는 카페들이 공존하는 도시.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쉽게 편리하고 진기한 물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데카르트의 말을 곱씹으면서.

# 네덜란드에서 性은 산업으로서 법적권리를 보장받는다

작은 운하를 끼고 붉은 빛의 긴 공간을 만들고 있는 홍등가는 차가운 날씨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누구하나 남 눈치를 살피는 사람 없이 모두들 당당한 걸음으로 유리창 속의 여인들을 본다. 쇼윈도의 휴대폰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과 다를 바 없다.

네덜란드에서 성이 산업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들도 질병휴가나 세금 혜택, 임신 휴가, 월경 휴업 시 보상 문제, 연금 등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투쟁했고, 2001년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그녀들의 노동조합인 '붉은 실'은 지금도 투쟁 중이다.

이곳의 여인들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당당하게 세금을 내며 정식 노동자로 인정받고 있다. 국가는 성 행위를 인간의 권리로 보고 있으며 그것을 박탈당할 위험에 처한 국민은 복지정책의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증 장애인에게 '섹스 도우미 여성 노동자(female sex aid worker)'를 방문할 비용을 지방당국이 지불하라는 판례가 있었다고 한다. 지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믿기 어려운 자유의 형태들 앞에서 잠시 당황한다. 아니,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외면에 익숙한 풍경들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유럽건축기행] 암스테르담 외곽의 건물들
'상상은 현실이 된다'

/글·사진=류혜숙 객원기자

MVRDV가 설계한 노인 아파트 WoZoCo.
MVRDV가 설계한 노인 아파트 WoZoCo.
조금 무리를 해 볼까. 느긋한 호사의 시간을 가졌으니 하루는 바지런을 떨어야 한다. 남쪽의 오피스 지구, 서쪽의 전원마을, 동쪽의 신도시, 이를 커다랗게 연결해 암스테르담 외곽을 한 바퀴 도는 대장정에 나선다. 가방엔 맥주 두 캔과 초콜릿 한 봉지, 주머니엔 주소와 가는 방법을 메모한 종이 한 장, 나머지 필요한 것은 튼튼한 두 다리와 언제든 '익스큐즈 미'를 외칠 수 있는 배짱. 그리고 미소는 필수.

# '곧장 우주로 날아갈 것 같은' ING그룹 본사

암스테르담의 저 아래 남쪽. 고층 빌딩이 몰려 있는 오피스 지구인 소우다스(Zuidas)지역이 있다.

국제무역센터와 같은 굵직한 현대 첨단 건물이 많은 이곳은 순환도로를 사이에 두고 녹지대인 뉴메이르(De Nieuwe Meer)지역과 마주보고 있다. 녹지대가 시작되는 순환도로 가에 네덜란드의 대표 기업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험사인 ING 그룹의 본사 건물이 있다. 각 나라마다 ING 그룹의 건물은 특이하고 파격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본사 건물은 그야말로 절정이다.

투명성과 적극성 그리고 혁신이라는 기업 이념에 맞는 상징적인 건물을 원하던 이들은, 자신들이 막연하게 바랐던 건물을 확실하게 얻은 듯하다. 이 투명하고 즐거운 디자인을 보면 인간의 상상력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만화적이고 동화적인 건물 앞에서 정서적인 휴식을 느낀다. 자연 친화성의 테크놀로지적 구현이라는 현대의 추세에 따라 이 건물도 런던 시청사처럼 자연 친화적이고 경제적인 환경 컨트롤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중으로 된 유리벽은 도로와 철로의 소음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차단함과 동시에 환기 장치의 역할을 한다. 또한 공기 처리 장치, 지하수 이용, 냉·온수를 저장하는 자동 펌프 시스템이 에너지의 효율성을 높여주기도 한다.

네덜란드의 전통 목각 신발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고도 하고 ING 로고 곁에 순하게 앉은 사자 모양 같다고도 하지만 내 눈에는 우주 열차다. 이제 한량 한량씩 덧붙여 백년쯤 뒤에는 우주로 날아갈 것 같은, 22세기형 은하철도. ING 그룹은 그렇게 쭉쭉 뻗어가고 싶은가 보다.

# '커다란 장난감 가게 같은' Almere-Stad 지역

알미르 슈타트 지역은 암스테르담 동쪽에 있는 신도시로 도심의 인구과밀로 인한 주택난 해소를 위해 바다를 매립하여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커다란 장난감 가게 같다. 뭘 고를까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어린 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빛이 되고 만다.

마스터플랜은 렘 쿨하스가 맡았다. 그는 호숫가를 따라서
알미르 알솝(W. A. Alsop)의 엔터테인먼트 센터와 레네 반 쥐크의 시티센터 더 웨이브.2
알미르 알솝(W. A. Alsop)의 엔터테인먼트 센터와 레네 반 쥐크의 시티센터 더 웨이브.
로베르토 마이어와 예뢴 판 스코텐이 디자인한 ING 본사 건물.3
로베르토 마이어와 예뢴 판 스코텐이 디자인한 ING 본사 건물.
나 있는 큰길과 시청 광장 사이의 부지, 그리고 역 주변의 두 군데 부지를 9개의 건축가 팀과 함께 디자인했다. 기반시설을 포함한 주거 유닛과 주차 공간, 레저 공간, 극장, 콘서트 홀, 도서관, 학교, 병원, 사무 공간, 호텔, 중앙 역 확장 등을 내용으로 한다. 이곳을 다니다 보면 굉장히, 지나치게 깨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새롭게 만들어진 개봉 박두의 도시여서도 그렇지만 비밀은 땅 속에 있다. 도로 아래에 미로 같은 관이 숨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쓰레기 관로수송 시스템이다. 쓰레기를 투입구에 버리면 지하에 매설된 관을 통해 중앙 집하장으로 운반되고 그곳에서 종류에 따라 분리되어 제 각각의 운명대로 처리되는 장치다.

2000년에 설계를 시작, 중심지역의 3천가구를 대상으로 2003년 운영을 시작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최초이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고정식 시스템이다. 또 한 가지,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일정 가구에 부여된 마그네틱 카드가 있어야만 투입구를 열 수 있고, 카드에 기록된 사용량에 따라 이용료를 부과하게 된다. 이곳의 마그네틱 카드는 우리의 종량제 봉투와 비슷하다. 대신 얌체 짓을 할 구멍은 없다. 철저한 사전 봉쇄. 진정, '더치 페이'의 나라답다.

이제 암스테르담을 떠나야 할 때. 다음엔 로테르담에서 만나요.


# '건물만 봐도 심심치 않다' WoZoCo 노인아파트

"심심하지 않아. 여기 있으면 세계 각국의 사람이 다 오거든." 트램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도 한참을 가야 하는 한적한 서부 전원마을, 건물 하나가 세계의 사람들을 부른다. 실로담을 설계한 MVRDV의 또 다른 실험 주택 WoZoCo 노인아파트 때문이다. 이 소박한 동네에서 이 건물을 놓치고 지나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 건물의 기하학적 박스의 조합은 도미노식 블록에 익숙해져 있는 시각의 습관을 확실하게 깨트려 준다.

돌출되어 있는 박스들은 조각적 효과를 위한 형태적 유희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해 환경을 극복한 결과다. 원래 한 블록 안에 100가구가 들어가야 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부지는 87가구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머지 13가구를 매스의 외부로 돌출시킨, 거대한 캔틸레버 유니트들이 탄생한 것이다. 딱 요만큼의 땅밖에 못 사용하니 나머지는 공중으로 띄워버린 그 깜찍함이라니!

노인들이 살기에는 조금 외진 곳이 아닌가 싶었지만 호숫가에서 만난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심심하지 않아." 건물만 보고 지내도 '심심하지 않을 거 같아.'

바다 한 가운데에 우뚝, 별 일곱개 ‘정글 호텔’ 화제
팝뉴스 |

두바이 인근의 바다 한 가운데에 세워질 예정인 ‘칠성급 정글 호텔’이 해외 네티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영국 건축 회사 시버라이트가 추진 중인 이 프로젝트의 공식 명칭은 ‘아페리온’이며, ‘정글 호텔’로도 불린다. 호텔 꼭대기 두 개 층을 열대 나비가 날아다니는 ‘인공 정글’로 꾸미겠다는 것이 설계 회사 측의 설명.

해변에서 300m 떨어진 바다 한 가운데에 건설될 예정인 정글 호텔은 헬리콥터 및 요트를 이용해야 도착할 수 있다. 28층, 185m 높이인 정글 호텔은 350개의 호화 객실 및 온천 시설, 미술관, 해저 레스토랑, 극장 등을 갖추고 있어 두바이의 또 다른 명물이 될 것이라고 13일 영국 건축 전문 매체인 ‘빌딩’은 내다봤다.

인공 해변, 산호초 군락까지 있는 총 정글 호텔의 면적은 200,000 제곱 미터이고, 건축비는 약 5억 달러(약 4600억 원).

곡선형 디자인이 인상적인 칠성급 정글 호텔은 언론을 통해 소개된 후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중.

(사진 : 바다 한 가운데에 건설될 예정인 칠성급 호텔의 모습)

캐비닛 아파트? ‘길 위로 튀어나온 아파트’

방과 발코니가 도로 위로 불쑥 튀어나온 아파트도 있다?


건물은 대체로 수직으로 뻗어 올라가며 거주 공간을 확보한다. 그러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워조코 아파트 (Wozoco's Apartment)의 방과 발코니 등이 수평으로 뻗어 있다.


그 결과 아파트의 발코니 등이 인도를 침범한다. 심한 경우 아파트 한 채가 거리의 공중을 점거한 경우도 있다. 행인들은 그 아래를 이동하게 된다.


이런 독특한 구조는 거주 공간의 독립성과 조망을 확보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낸다. 거주자는 공중에 떠 있는 집에 사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워조코는 답답한 무개성 성냥갑 건물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캐비닛형 아파트.


네덜란드의 건축회사 MVBDV 1997년에 세워 큰 주목을 받은 획기적 건축물로, 해외 네티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사진 : 건축회사의 홍보 사이트에서)

김경훈 기자 (저작권자 팝뉴스)

건축물로 보는 신전문화(神殿文化)

▲ 카르낙신전

고대 이집트 신앙과 신전

고이집트인은 사후에 부활하고 천당이 있다는 것을 믿어서,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바로 견고한 능묘를 건조하기 시작하였고, 시체보존방법을 발명하였으며, 이 모든 것은

사후세계 준비를 위한 것이다. 또 고이집트인은 신의 영이 파라오의 신체 안에 거주

하여 세계를 다스리려 왔다고 믿었다.


▲ 이집트 신전중 신화고사를 새긴그림

▲ 아부심벨의 신전

▲ 이라크 바그다드에 위치한 탑묘



▲ 고바빌론 성문



▲ 마웨이야(馬威雅)탑

"英 스톤헨지는 원뿔형 건물"
[노컷뉴스 2007-06-22 09:38:09]



세계 10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스톤 헨지의 비밀이 마침내 풀렸다. 분석 결과 이는 원뿔 모양의 거대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톤 헨지의 본 모습이 브루스 베들럼(56)이란 퍼즐 연구가에 의해 완성했다고 영국 일간 메일리메일이 2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브루스는 수년 전 원뿔형 건물 이론을 정립했고 나무와 타일을 이용해 본 모습을 복원한 뒤 최근 공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톤 헨지는 영국 윌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30개의 열석이 늘어선 고대 거석기념물로, BC 1700∼BC 1400년께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브루스에 따르면 스톤 헨지의 원형 건물은 햇빛이 10개의 문을 통해 내부로 비쳐들어 내부가 하루 종일 밝은 조명을 유지하도록 정교하게 설계됐다. 지붕은 들보로 떠받치게 된 구조로, 각각의 들보는 중력에 의해 지탱되며 음향학적 측면에서 완벽한 형태라고 그는 설명했다. 남아있는 30개의 열석은 외벽을 감싸고 있는 기둥이다.

브루스는 이 원형 건물이 종교적 용도라기 보다는 주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는 권력자들의 건물에 더 가깝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없어져 버린 숱한 건물 조각들을 짜맞추는 퍼즐 맞추기 과정을 거쳐 원뿔형 건물의 모형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일리노컷뉴스 송강섭 기자 ericsong@nocutnews.co.kr


안토니오 가우디 펌)세계의

본명-Antonio Gaudi y Cornet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
출생 : 1852년 6월 25일출생지 : 스페인
사망 : 1926년 6월 10일

1852. 6. 25 스페인 레우스~1926. 6. 10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출신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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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자유분방한 형태, 풍부한 색채와 질감, 유기적 통일성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가우디는 거의 평생을 바르셀로나그 근처에서 일했으며 '성가족(聖家族) 교회'(Sagrada Familia)를 짓는 데 일생을 바쳤으나 이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생애

가우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카탈루냐 지방에서 비천한 집안의 구리세공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연로한 아버지와 조카딸과 함께 살았다.

일찍부터 건축에 흥미를 갖기 시작하여 건축을 공부하려고 1869~70년에 스페인의 가장 근대적인 도시이자 카탈루냐 지방에서 정치와 지식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군복무와 다른 활동 때문에 8년 뒤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가우디의 건축양식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878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학교의 설계과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란한 빅토리아 양식을 썼다. 그러나, 곧 기하학적인 모양의 덩어리들을 희한하게 병렬시키는 구성방식을 만들어냈고 그 표면에 무늬를 새긴 벽돌이나 돌, 화려한 자기 타일 및 꽃이나 파충류 모양을 세공한 금속을 붙여 생동감을 주었다. 다른 형식을 띤 세부(細部)를 빼면 이 양식의 전반적인 효과는 이슬람 양식과 그리스도교 양식을 혼합한 스페인 특유의 무어 양식(또는 무데하르 양식)이었다. 무데하르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은 카사 비센스(1878~80)와 엘 카프리초(1883~85), 그리고 1880년대말에 지은 구엘 저택과 구엘 궁전이 있으며 엘 카프리초를 빼고는 모두 바르셀로나에 있다.

2번째 시기에서 가우디는 역사상 유명한 양식들의 역학적 가능성을 실험했다. 고딕 양식으로는 아스토르가의 주교 궁전(1887~93)과 레온의 카사데로스보티네스(1892~94)를 지었고, 바로크 양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카사 칼베트(1898~1904)를 지었다. 그러나, 1902년부터는 이런 전통양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건물들은 몇 가지의 뚜렷한 자연적·종교적 상징물을 제외하고 본질적으로 구조와 재료를 표현했다. 바르셀로나의 벨 에스과르드 별장과 구엘 공원,콜로냐 구엘 교회는 내부 기둥이 외부 부축벽 없이도 지탱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 구조는 평형구조(equilibrated)로 일컬어지는데, 가우디는 이것을 나무가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 구조의 기본 요소는 사선으로 미는 힘에 견디도록 설계된 비스듬히 서 있는 기둥과 미는 힘을 거의 받지 않도록 얇은 판과 타일로 이루어진 볼트 등이다. 그는 자신의 평형구조를 바르셀로나에 있는 두 고층 아파트 건물에 적용했다. 카사 바틀로는 기존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특히 정면에 새로이 고안한 평형구조 요소들을 덧붙였다. 카사 밀라에서는 몇 층의 구조에서 마치 연꽃의 잎맥처럼 철근을 이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자주 그랬듯이, 그는 이 두 건물의 형상과 표면에 산이 많고 해안에 자리잡은 카탈루냐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괴짜였지만 훌륭한 건축가였던 가우디는 카탈루냐 문예부흥에 크게 공헌했다. 미술과 공예 부흥운동인 카탈루냐 문예부흥은 열렬한 반(反)카스티야주의인 '카탈루냐주의'로 일어난 정치부흥운동과 결합되었다. 이 두 운동의 목적은 카스티야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고 마드리드가 중심이 된 스페인 정부 밑에서 오랫동안 압박받던 카탈루냐의 생활방식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가족교회는 카탈루냐 르네상스를 종교적으로 상징한다. 이것은 가우디가 전 생애를 바친 계획으로 1883년에 이 교회 건설을 위탁받았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신앙이 깊어졌으며 1910년 뒤에는 실제로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은둔하며 일에만 매달렸다. 75세 때 그는 저녁기도를 하러 가다가 전차에 치어 죽었다.

미완성된 성가족교회(계획되었던 탑 4개 중 하나만 세워진 트랜셉트만이 그가 죽기 전에 완성되었다)의 설계도와 모형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나선기둥, 쌍곡면의 볼트와 측벽, 쌍곡포물면 지붕 등이 복잡하게 상징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 경이로운 성당 구조는 1960년대의 많은 엔지니어들과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떠한 콘크리트 골조물보다 가우디의 것이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밖에도 초현실주의자와 추상표현주의 화가, 조각가들로부터 거의 무비판적으로 찬사를 받기도 했으나 그의 영향은 그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평형구조를 따르는 몇 사람에 의해서만 표현되었다. 그는 국제주의 양식이 성행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전문가와 비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에 그에게 다가온 디자인의 난관들을 헤쳐나갔던 무한하고 끈질긴 상상력 때문이었다.

평가

가우디의 작품들은 형태, 질감, 다색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사용하며 이 요소들을 자유스럽고 표현적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 가우디 건축의 복잡한 기하학은 그 건축 구조와 훌륭하게 일치되어, 외벽면을 포함한 전체가 마치 자연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 자연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전체적인 통일성에 대한 감각은 가우디의 생애를 말해준다. 그의 사생활이 바로 직업이었으며 건축예술에 관한 침착한 그의 비평은 삶의 예술에 관한 격언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을 송두리째 건축에 바쳤으며 그에게 건축은 모든 예술의 총체였다.

G. R. Collins 글

출처 엠파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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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디 이 코르네트 [Antonio Gaudi y Cornet, 1852.6.25~1926.6.10]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건축가로 자유롭게 흐르는 선의 형태를 3차원의 표현력을 갖는 건축으로 전환시킨 아르누보 건축가중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이다. 그는 자연에서 디자인 모티브를 얻어 유추한 형상을 시각적, 공간적 표현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인체의 골격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유추해내기도 하여 현대건축의 표현주의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경향을 예시하였다. 가우디의 작품은 시대와양식 그리고 작품이 이루어진 시대 그 모든것을 초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놀랄 만한 관찰력과 자연에 대한 대단한 관심은 하늘, 구름, 물, 바위, 나무, 동물이나 산과 같은 자연의 여러 가지 모습에서 독특한 건축 철학을 만들었으며 가우디 자신의 "성지"인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만들어 놓은 그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건축물들에서, 마치 떡 주무르듯 해 놓은 집이며 사람의 뼈를 흉내낸 기둥, 옥수수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첨탑 등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 건축가의 꿈이 얼마나 엉뚱하고도 원대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발레의 나진스키, 성악의 마리아 칼라스가 그러했듯이

안토니오 가우디는 건축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천재다.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능력을 지녔다. 아주 미세한 부분의 장식에서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나 스테인글래스로 만들어진 창호, 다양한 용도와 디자인의 금속장식 등 공간에 사용되는 모든 종류의 공간적, 시각적 요소를 디자인하였다. 오직 하나의 건축물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작품들과는 유사한 면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완벽하게 건물을 지었다. 하지만 가우디는 자신의 작품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가우디가 디자인한 건축물을 살펴 보면 그의 정신 상태가 좀 뒤틀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의 건축물들은 들쭉날쭉한 파사드는 바로크식 건축 개념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한편 불합리한 면도 다소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자연에 대한 영감에 의한 건축 구성은 다른 건축가와는 달라서 평면에서 나타나는 선으로서 추상적인 형태에 기초를 둔 기하학을 처음부터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100년전의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레우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금속 세공업자였으나 집안은 가난했다. 어린 가우디는 병약한 소년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고 한다. 17세에 건축 공부를 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향했고 이후 바르셀로나는 그의 평생의 고향이며 가우디 건축의 성지가 된다.

바르셀로나 대학 이공학부를 거쳐 바르셀로나 시립 건축전문학교에 입학한 가우디는 영국의 예술학자 존 러스킨의 "장식은 건축의 근원이다"라는 말에 중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후 그의 과제는 그 유례 없는 대담함으로 종종 건축학교 교수들의 논쟁과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졸업할 때 학장 에리아스 토헨트가 남긴 말은 아직도 유명하다.

“우리가 지금 건축사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놈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슬아슬한 점수를 받으며 건축 학교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 바로 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시에는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 지방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시키자는 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가우디는 여기에 가담해 지역의 토착 예술을 공부하고 중세의 고딕 양식에 심취해 있었다.

1883년 이후 가우디는 모든 작업을 중단한 채 바르셀로나 교외에 짓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 건축에만 매달렸다. 지극히 정교하게 설계된 이 성당의 건축은 이후 40여년간 아주 느리게 진행됐다.

가우디 자신이 즐기는 건축학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는 그의 스튜디오 창문밖을 가리키면서, "저기 보이는 나무가 자기의 제일 좋은 건축 교본"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건축한 작품은 얼마 안되는 건물이지만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보더라도 건물 한 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69년 이후 그의 17가지 작품이 스페인의 국립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1926년 6월 7일, 가우디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산책을 나섰다가 전차에 치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차림새는 검소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다. 남루한 행색의 가우디를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바람에 그는 너무 늦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3일 후, 가우디는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배려로 가우디의 시신은 성자들만 묻힐 수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가우디가 사망한 1926년 무렵 독일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설계한 제2기 시립바우하우스 新校舍가 데사우(Dessau)에 들어섰다.

그 당시에는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지그프리드 기드온(Siegfried Giedion, 1888-1968) 등이 주창하는 합리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사르라다 파밀리아

바우하우스는 가우디 작품과는 대치되는 개념으로 가우디의 작품을 "구시대적 바로크 양식이며 비합리적이다"라는 등 많은 건축가들이 가우디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1952년 가우디 탄생 100주년 기념전시회를 계기로 많은 건축평론가와 이론가들이 가우디건축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그 이후 가우디에 관한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논문전시회, 연구, 강의가 개최되는 등 가우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나 정작 기존 건축가들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대부분의 건축가들은 자신의 스승의 건축 철학을 계승하는 것이 전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우디의 작품은 모방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며 수많은 재현이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가우디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어떠한 사람의 해결책을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자연에서 영감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자연적인 형태에도 다양한 해결책이 있기에 결코 반복될 위험이 없다.

가우디의 건축은 항상 자연속에서 직접 해결책을 찾았기 때문에 결코 식상하지 않으며 그가 살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의 건축은 시간을 초월하였으며 그 이유는 예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유용한 형태를 만들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가우디의 유명한 말 중에 "독창성이라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든것의 근원은 신이 창조한 자연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글출처-네이버 유럽 유학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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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이님 글-http://blog.daum.net/in2984/10179714

안토니오 가우디, 자유로운 꿈의 곡선

Antoni Gaudí (Antoni Gaudí i Cornet 1852 - 1926)

스페인 여행의 또 다른 재미는 독창적 기법의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기 보이는 나무가 나의 가장 좋은 건축 표본이다’라고 말했듯이 그는 자연 속에서 건축 영감을 찾았고,

그 결과 이전 그 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으로후손들에게 걸작을 남겨 주었다.



자연의 다양한 형태는 가우디를 통해서 딱딱한 건축물에 생명을 넣어 주었다. 가우디의 건축물은 모든 면에서 곡선이 지배적이며, 벽과 천장이 굴곡을 이루고 섬세한 장식과 색채가 넘쳐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유럽을 풍미하였던 아르 누보(art nouveau)의 스페인판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1890년대를 경계로 하여 2기로 나눌 수가 있다. 전반기의 작품은 건축 그 자체의 몸체는 비교적 중후하며 극단적인 변형은 보이지 않으나 세부의 장식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가우디의 진가는 어디까지나 후반기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그의 건축장식에서 보였던 미로와 같은 구불구불한 공간의 이미지가 전체의 건축디자인으로 확장되어, 계획부터 구조의 형태 및 세부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을 지배하고 있다.그의 건축물에는 산이 많고 해안에 있는 카탈루냐의 지형적 특징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는 코로니아 구엘교회의 제실(祭室:l898∼1914), 구엘공원(l900∼1914), 주택건축으로 독특한 형태와 내부공간을 지닌 카사 바트로(1907년 완성)와 카사 밀라(1907년 완성), 그리고 1884년에 착수하여 결국 필생의 대작이 된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익랑(翼廊)의 정면(正面, l908년 완성) 및 탑 ·조각(l903∼1926) 등이 있다.
카사 바트로의 내부와 스테인드 그래스 디테일들
Casa Batllo / Stained Glass,Batllo parlor partition, Casa Batllo / Cabinet-work








카사 바트로의 내부와 스테인드 그래스 디테일들 Casa Batllo / Stained Glass
유럽을 여행한 많은 사람들이

루브르의 「모나리자」는 잊어도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가족 교회」는 건축학도라면 유럽에서 제일 먼저 달려가 보는 곳이며 우리에게는 100년 넘게 짓고 있는 건축 역사로 알려진 건물이다. 바로 이 「성가족 교회」를 설계한 현대 최고의 건축 천재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엣도 몇차례 전시 되었었다.


「공기 단축」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들과 생애는 적잖은 놀 라움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사실 피카소나 미로에 비하면 가우디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 의 없는 편이다.


스페인인들이나 건축학도들에게도 가우디는 글이나 강연을 통하여 자신의 건축 물에 대해 메시지를 전한 바가 없다. 그는 자식이나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으며 그 흔한 학파도 구성돼있지 않다. 오로지 건축물을 통해서만 그와 대화할 수 있다.

‘각’의 건축만 있던 시대에 자유로운 곡선 강조

그의 최대 걸작은 역시 「성가족 교회」다.

1883년 건축이 시작된 「성가족 교회」는 지금도 돌을 쌓아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채석장의 돌이 바닥난 56년 이후 인조돌과 콘크리트로 쌓고 있다(다행히 가우디가 재료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성당의 3개의 정면 중 「나시미엔토」(탄생)는 가우디의 생전에 거의 완성이 됐고 「글로리아」(영광)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며 「파시온」(수난)이 완성돼가는 단계에 있다.


아랫부분은 땅으로 가라앉는 듯하고 윗부분은 하늘로 솟구치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이 거대한 건 물은 성서에 나오는 상징들로 물결치듯 이어져있으며 각각의 면은 보는 사람에게 하나의 이야기 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종탑의 끝부분은 가우디가 즐겨 사용했던 도자기 모자이크로 마감 됐다.



기능주의적인 건축물에 익숙한 우리에게 「성가족 교회」는 참으로 놀라운 인상을 준다. 사실 스페 인 안에서도 적잖은 이 비현실적인 건축물에 조소를 퍼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우디는 이 건 물을 돌과 종교와 예술로 지탱해나갔는데 스스로 「속죄사원」이라 칭함으로써 건축을 자기희생의 과정으로 여겼다.
가우디의 작품들을 보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건축물 하나하나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저택이나 교회건물들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공원의 벤치와 가로등, 의자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 창적인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만든 구엘공원의 벤치는 도시 위를 물결치듯 자유롭게 흐르는 바람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며, 레알 광장의 가로등은 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몽환적인 조각으로 만들어져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성사족교회와 내부 스테인드 그래스 Sagrada Familia / Stained Glass

‘바람 돌 꽃의 노래’가우디 건축


가우디 사상의 씨줄이 종교였다면 날줄은 자연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모든 형태는 자연물에서 얻어 온 것이다. 그는 꽃과 나무를 관 찰한 뒤 건축적 형태와 완벽하게 결합시켜 가장 새로우면서도 스페인의 자연과 어울리는 예술품 을 만들어냈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1852년 태어나 일평생을 바르셀로나에서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1926년 「성가족 교회」의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던중 차에 치여 숨졌는데 빈민병원으로 실려간 남루한 그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건축비평가 전진삼씨는 『그의 건축물이 있는 거리에 서면 누구라도 풍요로움을 느낀다. 가우디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건물의 각을 당연시하던 사람들에게 누구도 상상못했던 자유로운 곡선을 가진 집을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가 아직도 편협한 시각에 갇혀있는 우리 건축을 보다 넓 은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과 예술로서 건축물을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금 씩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우디의 작품은 건축가의 자유로운 예술적 감성과 이를 수용하는 사회 의 관계를 보여주는 예로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가우디 Antoni Gaudí in 1878

"건축가는 비범한 재능과 더불어 정상을 정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희생이 뒤따르는 길이다... 건축가는 종합적인 인간이다. 건축가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전체적으로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연구와 인내의 반복속에서 희생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매우 고차원적인 것이며 고통과 가난을 동반하는 가운데 균형을 잡는 추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균형을 잃고 만다.."

다빈치에서 출간된 책 <가우디 공간의 환상>에는 가우디가 청년시절에 쓴 논문초고와 만년의 그를 방문했던 사람들이 기록한 어록(語錄)이 그의 건축세계를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141개의 사진과 함께 실려있어 흥미롭다.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레우스에서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가우디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예술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했다. 그는 수많은 책들을 읽으며 책 속에서 예술을 일궈낼 줄 알았고,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괴테의 자연론에 영향을 받아 스페인 고유의 고딕 양식과 이슬람 양식을 재창조하여 대담하고 환상적인 건축양식을 완성했다.



카사밀라 The Casa Milà, in the Eixample, Barcelona.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보자면, 밀가루 반죽으로 빚어 놓은 듯 구불구불한 6층 아파트 '카사밀라', 기묘하고 아름다운 창문장식이 독특한 '카사 바트료',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구엘공원'은 환상적인 돌조각과 타일장식이 공원 전체를 구불구불 덮고 있는 공원으로 가우디는 이곳 택지를 분양받아 20년을 살았다. 또한 그는 같은 이름의 '구엘궁전'과 '구엘별장', '구엘성지교회' 등을 건축했다.

가우디가 남긴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속죄의 교회라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로 꼽힌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는 청년시절 반교권주의자였던 가우디를 독실한 가톨릭신자로 만든 건축물로써 하늘을 향해 치솟은 네 개의 탑과 생동감 넘치는 우아한 조각장식이 특징이다. 이 교회는 착공된 지 이미 115년이 지났지만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200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교회'의 미완성에 대해 가우디는

"슬프게도 내 손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완성시키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서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교회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타라고나 대성당의 예에서 보았듯이 처음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 완성까지 보았다면 그 만큼의 웅장함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와 함께 유능한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은 빛을 발한다"라며 아쉬움과 겸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책 <가우디 공간의 환상>의 미덕은 성인과 현자들의 명언처럼 가슴을 울리는 가우디의 말들과 한 장 한 장 칼라로 인쇄된 그의 건축물을 보는 장엄함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


"건축의 탁월성은 모두 빛에서 나온다", "아름다움은 진실의 광채이다", "완전한 아름다움은 살아있을 수 없다" 등, 가우디의 예술관과 종교관을 보여주는 말들은 경이롭지만, 그가 평생 단 한 차례의 강연도 하지 않았고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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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해운대구에 들어설 106층건물

(월드비즈니스센터)


부산 해운대구 센텀시티 내에 들어설 106층짜리 초고층 부산월드비즈니스센터(WBCB)당선작은 30층 높이까지는 건물 구조가 같이 묶여 있다가 나중에 3줄기로 나뉘는 파격적인 형태가 특징. 높이도 텔레콤타워 등을 포함하면 전체 488m로 126층 정도

-착공시기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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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교또역사내부 공간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 중앙횡구조물: 연결통로<8층계단에서 내려다 보며 찍은것>

역사11층 옥상 전망겸 휴게장소로 활용(에스커레이터로 계속타고 오르면 이곳이다)

비싼 금싸라기땅에 이렇게 많은 공간을 남겨 계단과 E/S를 설치하여 전망을 구경하고 쉬도록 공간을 마련하였고 내부공간 대부분을 엄청난돈을 들여 지붕을 덮었다.

역사내 1층에서 11층 역사옥상까지설치된 에스컬레이터와 계단규모가 웅장하다(지붕때문에 해질녘이라 연기같이보인다.)

역사 내부 중앙 조명: 에스커레이터를 내려가며 찍은것

4층부분에서 찍은 역사앞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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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있는 절 - 현공사(懸空寺)
중국 북경에서 버스로 3~4 시간 걸리는 대동이란 오지 마을에 중국의 5악(五嶽)
북쪽에 위치한 항산(恒山. 해발 2016m)이 있고 거기엔 현공사란 절이 있다.
어떻게 운반하여 어떻게 공중에서 지붕을 잇고했는지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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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데서 살면서 일년에 몇번이나 나올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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