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것일까? 고사 2013. 1. 18. 11:39

맹자가 살던 時期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나라에는 世世代代로 귀족 出身인 진중자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의 兄인 진대는 한 地方을 다스렸는데 해마다 1만종의 양식을 거둬들였습니다.
진중자는 自己 兄이 의롭지 못한 方法으로 財物을 얻는다며 싫어했습니다.


“百姓들이 힘들여 지은 곡식을 이렇게 누워서 받아먹다니!”


그래서 兄이 주는 밥은 먹지 않았으며 兄의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母親과 作別하고 다른 마을로 떠났답니다.
한번은 진중자가 집에 가게 되었는데 누군가가 兄에게 큼직한 거위 한 마리를 선물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왜 이따위 꽥꽥거리는 怪物을 보내온 담!”


며칠 후 어머니가 그 거위를 잡아 맛있게 料理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진중자에게 고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진중자는 고기를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그의 兄이 이를 보고 말했습니다.


“니가 먹고 있는 건 바로 그 꽥꽥 소리치는 怪物의 고기란다.”


그러자 진중자는 방에서 뛰쳐나가 먹은 것을 몽땅 토해버렸답니다.
이에 대해 맹자는 말했습니다.


“진중자는 淸廉하다는 名義를 얻기 위해 이같이 行動했다. 이런 人間들은 지렁이의 뒤꽁무니나 따르면서 정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後世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名聲만 탐내는 자는 머리에 名聲만 빛내려는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父母 兄弟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時期시기  世世代代세세대대  出身출신  兄형  地方지방  自己자기  方法방법  財物재물  百姓백성  母親모친  作別작별  怪物괴물  料理요리  淸廉청렴  名義명의  行動행동  人間인간  後世후세  名聲명성  父母부모  兄弟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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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한마디 말 고사 2011. 12. 22. 20:51

간디의 한마디 말


印度의 한 어머니가 砂糖을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아들은 좀체 父母의 말을 듣지 않고 每日 砂糖을 찾고 執着했답니다.어머니는 結局 아들을 데리고 印度精神的 指導者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 아들이 砂糖을 지나치게 좋아해요. 제발 砂糖을 그만 먹도록 忠告해주세요.아마 선생님 말씀이라면 따를 거예요.”

간디는 그윽한 눈길로 어머니와 아들을 보며 말했습니다.보름 후에 아들을 데리고 다시 찾아오세요. 그때 말씀드리지요.”보름 후,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간디는 少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얘야, 砂糖을 많이 먹지 말거라. 健康에 좋지 않단다.”少年은 간디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어머니는 왠지 아들이 이제 砂糖을 먹지 않을 거라는 豫感이 들었습니다.어머니는 간디에게 感謝表現한 뒤 물었습니다.선생님, 왜 보름 전에 이 말씀을 안 해주셨나요?”간디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저도 砂糖을 먹고 있었답니다.”

우리는 온종일 수많은 對話를 나눕니다. 그 말들은 얼마만큼 무거운가요? 어느 만큼 眞實한 것일까요? 砂糖執着하는 少年에게 訓戒할 수도 있고, 타이를 수도 있고, 다른 方法을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간디의 實踐에서 나온 한마디 말은 少年의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우리들의 말에 實踐이 담겨 있다면 自身周邊保證하고 더 眞實한 모습을 띨 것입니다.

맞게 읽었나 확인해보세요

印度인도 砂糖사탕 父母부모 每日매일 執着집착 結局결국 精神的정신적 指導者지도자 忠告충고 少年소년 健康건강 豫感예감 感謝감사 表現표현 對話대화 眞實진실 訓戒훈계 方法방법 實踐실천 自身자신 周邊주변 保證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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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 고사 2011. 11. 5. 14:09


獨逸의 宰相 비스마르크가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親舊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정신없이 사슴을 쫓다가 그만 親舊가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비스마르크는 多急히 들고 있는 銃대를 내밀었는데 親舊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이보게, 제발 나 좀 살려줘.” 親舊는 絶望感에 빠져 소리를 질렀습니다.

비스마르크는 唐慌하며 긴 막대를 찾아보았으나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 친구는 점점 더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 이제 목만 겨우 남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안되겠어. 나는 이제 끝이야. 난 여기에서 죽게 될 거야.” 이미 氣盡脈盡한 친구는 눈마저 감고 살아갈 意欲을 抛棄한 것 같았습니다.


一觸卽發의 瞬間. 이때 비스마르크는 非常한 機智를 發揮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銃의 가늠쇠를 맞추고 친구를 향해 銃口를 겨누었습니다. “이, 이보게. 지금 무슨 짓인가!” “어차피 죽기로 마음먹었다면 차라리 내 손에 죽게. 빨리 죽는다면 苦痛도 덜 할 거야. 부디 죽어서도 내 友情을 잊지 말게.”

悲壯한 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본 親舊는 갑자기 안간힘을 쓰며 銃口를 피하기 始作했습니다. 몇 秒가 지나자 조금씩 가장자리로 나온 親舊는 곧 늪에서 완전히 기어 나와 瀕死 狀態가 되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寸刻을 다투는 緊迫한 刹那에 超人的인 힘이 나올 것을 豫測하고 親舊를 향해 銃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이보게 親舊, 내가 銃을 겨눈 것에 대해 誤解하지 말게. 나는 자네의 머리를 겨눈 것이 아니라, 挫折하고 諦念하는 자네의 懦弱함에 銃을 겨눈 것이라네.

이 이야기는 眞正한 親舊란 無條件 나에게 잘해주는 親舊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맞게 읽었나 확인해보세요

眞正진정 親舊친구 爲위 獨逸독일 宰相재상 多急다급 銃총 絶望感절망감 唐慌당황 氣盡脈盡기진맥진 意欲의욕 抛棄포기 一觸卽發일촉즉발 瞬間순간 非常비상 機智기지 發揮발휘 銃口총구 苦痛고통 友情우정 悲壯비장 始作시작 秒초 瀕死빈사 狀態상태 寸刻촌각 緊迫긴박 刹那찰나 超人的초인적 豫測예측 誤解오해 挫折좌절 諦念체념 懦弱나약 無條件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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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향(黃香)의 효행(孝行)

황향(黃香)은 동한(東漢) 강하(江夏) 사람이다.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고 간절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효자라고 하였다.

황향은 고생을 낙(樂)으로 삼아 부지런히 일하고, 한결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그는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의 베개와 이부자리에 부채질하여 시원하게 해드리고,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의 이부자리를 먼저 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해드렸다.

황향이 열두 살 때, 그 지방 태수 유호(劉護)가 그의 효행을 듣고 그를 보고는, 문하효자 (門下孝子)라고 쓴 큰 액자를 보내 그를 기특해하고 고귀한 효행을 칭찬하였다.

황향은 어릴 때 이미 경전을 열심히 읽어, 해박한 지식으로 글을 지었으며, 그가 문장으로 경성(京城)에서 이름을 날렸다. 사람들은 그를 “강하의 천하무쌍(天下無雙)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십사효(二十四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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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로 변한 불효자 周拔주발

주발(周拔)은 중국명나라 사람으로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평양현(平陽縣)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 불리어, 한 번 본 책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7살 때 벌써 시를 읊고 글을 지었다.

그가 16세가 되자, 그의 시문(詩文)은 한때 세상에 명성을 떨쳐 ‘평양재원(平陽才子)’이라 불렸다.

그는 사람들의 칭찬과 부모님의 총애를 받으면서 점점 오만방자해졌고,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고 안하무인이 되었다.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항상 그의 난폭한 성질을 감수하며 참고 살았다.

어느 해, 주발은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수도로 가려고 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여기저기에서 여비를 빌리고, 재봉사에게 새 옷을 만들게 하면서 이것저것을 힘들게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발은 “여비가 적다. 옷이 크다. 바지가 너무 길다. 모자도 구식이고 신발 색깔은 너무 짙다”고 하며 부모가 애써 준비한 마음을 모르고 불평불만을 토로(吐露)하였다.

아버지는 참다못해 “애야! 너는 이런저런 불평을 하지 마라. 부모가 이번 과거 시험을 위해 여비를 마련하고, 새 옷을 만들고, 온갖 신경을 너무 써서 머리가 백발이 될 지경인데 도리어 이렇게 불평만 하니 나 역시 어찌할 방법이 없구나”하며 타이르자, 주발은 아버지 말씀에 감동은 고사하고 오히려 큰소리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문창성(文昌星)이고, 위대한 영재인데 당신 같은 바보 늙은이가 무슨 자격으로 나의 아버지가 된단 말이오? 나는 이제 당신의 아들이 아니며, 당신도 나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소”라고 하자 아버지는 하도 기가 막혀 그 자리에서 기절해 쓰러졌다.

그날 밤, 주발은 지옥의 관아로 끌려갔는데 염라대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평소 부모에 불효막심하니 사람의 허울을 썼다고는 하나 오히려 짐승 같은 심보구나. 너의 마음속에 있는 짐승의 씨앗은 열매로 맺어져 너는 곧 사람의 육신을 잃게 되고 짐승으로 태어날 것이다.”

주발은 대꾸하였다. “저는 다만 부모님께 있는 그대로 바른말을 하였는데 어찌하여 불효막심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저는 대단히 총명한 영재인데, 어찌하여 우둔한 짐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염라대왕님의 말씀에 승복할 수 없습니다.”

염라대왕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네가 이생에서 총명한 것은 전생에 선행하였기 때문인데, 이생에 태어나서는 오만방자하고 성질이 난폭한데다 불효막심한 악행을 저질러서 짐승의 씨앗을 키웠기 때문에, 전생의 선량한 씨앗을 철저히 망가뜨렸다.

이에 대한 응보로 당나귀로 환생하여, 사람들에게 두 눈이 가려져, 끊임없이 채찍질을 받으면서 맷돌질을 하게 될 것이다.”

주발이 들으니 아주 일리가 있는데다가 업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라 허둥거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그날 주발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입이 꽉 닫혀 말을 하기 어려웠고, 목구멍에서는 당나귀 소리가 났는데, 유명한 의사가 보아도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이틀도 못 가서 주발은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면서 죽었다.(《암실등(暗室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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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는 두가지 근심이 있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면 그 신하는 장차 자기의 현명함을 이용하여 그 임금을 위협할 것이다. 함부로 아무나 가리지 않고 등용하면 무능한 신하들 때문에 일의 진취가 저해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면 여러 신하들은 행실을 꾸며서 임금이 좋아하기를 꾀한다. 그렇게 되면 여러신하들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신하들의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 임금은 그 신하들의 참과 거짓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월나라 임금이 용맹을 좋아하자 백성들 중에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자가 많았으며, 초나라의 영왕이 허리 가는 미인을 좋아하자 나라안에 밥을 굶는 사람이 많았다. 제나라의 환공이 질투심이 많고 나인을 좋아하였으므로 수조란 사람은 스스로 불알을 거세하여 나인이 되어 나인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환공이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니 역아라는 사람은 임금이 오직 사람고기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하여 자기의 맏아들을 삶아서 바쳤다. 연나라 역왕의 아들 자쾌가 어진이를 좋아하였으므로 신하인 자자라는 사람은 임금이 자기에게 나라를 선양하는 일이 있더라도 나라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러므로 임금이 미워하는 바를 분명히 드러내면 여러 신하들은 자기 마음의 단서를 숨기고 임금이 미워하는 바를 자신도 미워하는 체한다. 임금이 좋아하는 바를 드러내 보이면 여러 신하들은 자신이 임금의 좋아하는 바에 능한 것처럼 속인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 보이면 여러 신하들의 마음의 동태는 어디에 利가 있는가를 알게 되어 그것을 이용할 발판으로 삼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자는 어짊을 빙자해서 아버지 역왕의 지위를 빼앗았고 수조와 역아는 임금의 하고자 하는 바에 인연하여 임금을 쳤던 것이다. 그 결과 연왕 자쾌는 반란에 죽고 환공은 그의 시신에 벌레가 생겨 문밖으로 흘러나올 때까지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임금이 자신의 性情을 신하들에게 내보였기 때문에 생긴 환란이다. 신하된 자의 성정이란 반드시 그 임금을 사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리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제 임금이 그 성정을 덮어두지 아니하고 그 단서를 숨기지 아니하여 신하로 하여금 이를 빌미로 해서 임금을 침노할 수 있게 한다면, 신하가 임금을 해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하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신하들이 본래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임금은 눈이 가려지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은 여기서의 임금을 단체의 대표로, 신하는 하부직원으로 볼 수도 있겠다.

‘三尺(1미터) 머리 위에는 확실히 신령이 있고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반드시 충직하고 믿을만한 사람이 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자신이 나쁜 일을 한다고 여기지 않고 몰래 속임수를 쓰면 신도 모르고 귀신도 모르며 사람들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이런 속임수는 오래가지 못하며 결국에는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명나라 때 문장가 귀유광(歸有光 1507-1571)은 정직하고 충실하며 효와 의리를 강조하던 사람이다. 그가 지은 《항척헌지(項脊軒志)》, 《선비사략(先妣事略)》 등의 유명한 문장은 일반 학자들의 귀에도 익숙하다.

그가 장흥현(長興縣) 현령으로 있을 때 겪었던 실화이다. 그는 평소 시와 문장에 심취해 사교적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바르지 못한 심보를 지닌 자들은 이런 충직한 사람이 오히려 속이기 싶다고 여겨 그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마침 이곳에 한 토호(土豪 토착 호족)가 있었는데 자신의 며느리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러다 집안 하인에게 발각되자 다급한 나머지 칼을 휘둘러 남자 하인을 죽여 버렸다. 토호가 생각해보니 살인정황을 은폐할 방법이 없는지라 곧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

그는 침실에 들어가, 자고 있던 여종을 이유 없이 죽여 버렸다. 그런 후 두 사람의 머리를 함께 들고는 관아에 가서 이들 두 사람이 간통하는 장면을 목격해 함께 죽였노라고 고하려 했다. 그는 이런 방법을 쓰면 자신의 죄를 은폐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가 현성(縣城 현 소재지)에 들어가려 하던 날 갑자기 큰 비가 내려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바로 그날 밤 귀유광의 꿈에 성황신(城隍神)이 나타나 모모 토호가 두 사람을 살해한 정황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오전 귀유광이 마침 관아에 앉아 있을 때 토호가 두 사람의 머리를 들고 들어왔다. 그가 미처 입을 떼기도 전에 귀유광이 “저 놈이다! 바로 저놈이 사람을 죽였다! 이리 붙잡아 오너라!” 라고 크게 외쳤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란 토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들 신기하게 여겼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더는 귀유광을 우습게 여기거나 속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귀유광 본인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분명 신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신불(神佛)을 더 확고히 믿게 되었다.

자고로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小不忍則亂大謀)”는 말이 있다. 모욕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함양이 있고 흉금이 넓으며 미래를 멀리 내다볼 수 있다는 상징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온갖 모욕을 참아내며 나라를 되찾았고, 한나라의 명장 한신(韓信)은 모욕을 참아내며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아래에 필부(匹夫)의 용기를 과시하지 않고 일시적인 치욕을 참아내 큰 화를 면한 3가지 이야기를 들어본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전국시대 말기 위(魏)나라의 명사(名士)였다. 진(秦)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킨 후 장이와 진여는 이름을 감추고 진현(陳縣)에 숨어 남의 집 문지기로 있었다. 어느 날 현지의 하급관리가 진여를 비난하며 구타하자 진여가 몸을 세워 반항하려 했다. 하지만 장이가 몰래 그의 발을 밟으며 맞서지 말라고 했다.

관리가 떠난 후 장이가 진여를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 “전에 내가 어떻게 말했는가? 오늘 자그마한 치욕을 받고도 참지 못했는데 설마 그 하급관리의 손에 죽고 싶단 말인가?” 진여가 생각해봐도 역시 맞는 말이었다. 얼마 후 장이와 진여는 모두 한 나라의 공경과 승상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애초에 하급관리와 다퉜더라면 나중에 좋은 결과가 없었을 것이다.

장주(長洲)에 우(尤)씨 성을 가진 노인이 전당포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해 연말 어떤 사람이 빈손으로 찾아와 맡겨둔 옷을 찾아가려 했다. 전당포 직원이 동의하지 않자 그 사람은 곧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우며 소란을 피워댔다. 그러자 우 노인이 나서며 차분히 말했다. “당신이 설 쇠는 것이 걱정되어 그런 거라면 굳이 이런 작은 일로 다툴 필요가 있습니까?”

그리고는 곧 그 사람이 전에 맡겨 두었던 옷을 4-5벌 꺼내오게 했다. 우선 솜옷을 가리키며 “이 옷이면 추위를 막는데 충분할 것이오.” 그리고 또 다른 웃옷을 가리키며 “이 옷은 설을 쇨 때 사용하도록 하시오. 나머지 물건은 잠시 이곳에 보관해 둡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받아 들고는 돌아갔다. 이날 밤 그는 다른 사람의 집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아울러 그의 가족들이 그가 사망한 집 가족들과 수년 동안 끈질긴 소송을 벌여 가산을 거의 탕진하게 만들었다.

원래 그는 아주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죽기를 작정하고 독약을 먹은 상태였다. 그는 본래 우 노인을 찾아가 돈을 뜯어내려 했지만 우 노인이 모욕을 참아내며 너그럽게 대해주자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해를 끼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사건의 경과를 우 노인에게 알려주자 노인은 “대체로 사람이 이렇게 무리하게 소란을 피우는 데는 반드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작은 일을 참지 못한다면 그럼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승덕(承德)에 호창영(胡昌穎)이란 사람이 살았다. 그에게는 육(陸) 씨 성을 가진 사촌형이 있었는데 무뢰한이었다. 사촌 형은 일찍부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호창영은 매번 웃어넘기며 그가 요구하는 것을 잘 들어주었다. 어느 날 사촌 형인 육 씨가 아무 이유도 없이 호창영의 집에 찾아와 큰 소리로 욕을 해대면서 물건을 달라고 요구했다. 호창영이 웃으면서 “생각해보니 제가 형님께 도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쌀을 꺼내 주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이틀 후 육 씨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호창원이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고 말했다. 까딱 잘못하면 사망사건에 연루되어 소송을 치를 뻔했기 때문이다. 호창영은 “만약 무리하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에게 이치를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증상이 너무 심해 방자하기 그지없었으니 그와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주역 곤괘전에

積善之家는 必有餘慶이요, 積惡之家는 必有餘殃이라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악지가 필유여경)

"선을 행한 집안은 반드시 복이 있고, 악을 행한 집안은 반드시 재앙이 있다."

천리라하는것은 고정불변입니다

그러나 천리를 집행하는것은 천상신계에서 하지요

타고난 사주팔자(천리)가 고정되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人事로 생명의 덕을베풀었을때는 神佛道의 은혜로

당연 또다른 생명의 길이 열립니다.

물론 이것 또한 하늘의 이치지요.

南宋에 원료범이란 20살 청년이 과거를 보러 남경에 가던 중에

소강절 선생을 찾아뵈었는데,소강절은 당대의 역학자로서

“이 우주밖에 또다른 우주가 없다면 모르거니와

이 우주 안에서 내가 모르는 것은 없다” 라고 공언했었고,

그것을 다른 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처지였고,

그런데 원료범을 만난 소강절 선생은 다음날

청년의 사주를 책으로 한 권을 써주었다고 합니다.

- 당신은 금년 과거엔 급제 못한다.

- 3년 뒤 시행하는 과거에 3등으로 급제할 것이다

- 첫 발령지가 광동성 어느 지방 어느 현에 발령을 받게 되고,

- 관아의 관리인들 곡식을 나눠 주는게 당신의 첫 직무다 .

- 첫 녹봉이 콩으로 57말 6두다.

(녹봉은 1년치 연봉으로 받는 곡식)

- 수명은 55세까지 살고 그 성(城)의 장관까지 지낼것이다.

- 자식은 한 명도 없고,

- 몇 년 몇 월 몇 시에 무슨 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또 언제무슨일이 생기며 장가는 옆 마을 무슨 성씨 집안의 여자인데

중매로 결혼할것이라는 등등이었다.

일생의 일을아주 치밀하게 써놓았다고 합니다.

소강절 선생으로부터 자신의 사주를 본 다음, 원료범은 과거를 보러 떠났는데

정말로 당해에는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3년 뒤에 3등으로 합격을 하고,

거기다 첫 발령지가 광동성 그 고을에 곡식 나눠 주는 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녹봉을 받아보니 콩으로 57말 6두라고 했는데 56말 7두가 나온 겁니다.

원료범 선생은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眞人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蘇선생이라도 모든 운명을 다 맞추는 건 아니구나"

하고 내심 다행스럽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운명은 바뀔수 있다'라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중앙정부에서 새로 명령이 내려왔는데,

중앙에 어떤 관리가 관리들의 녹봉을 조금씩 착취를 했다는군요.

그래서 1인당 착취당한 콩이 몇 두씩 더 내려왔습니다.

새로 책정 내려온걸 합하니58말 9두...

그래도 틀린 건 마찬가지. 원료범은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그러다가 두 달 뒤 여름에 황하지역에 대홍수로

수재민이 수백만이 생기는 재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중앙정부로부터 공문이 내려 왔어요.

수재의연금으로 녹봉에서 조금씩 거출해서 황하지역 백성들을 도와 주기로해서

갹출해내고 나니 남은 것은 57말 6두가 된 것입니다.

정말 족집게입니다.

그때부터 원료범은 '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것은 피해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고 매년을 살아가게 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료범이 4월 초파일 날 절에 가게 되었습니다.

4월 초파일 남녀 할 것 없이 탑돌이를 하고 절을 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을 바라 보면서도,

원료범은 말없이 혼자 앉아서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그 절의 주지승이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처사 , 당신은 범상한 사람이 아닌 거 같소.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부처님께 소원을 빌고 기도를 하는데 당신 소원이 바라는 바도없고

그렇게 앉아술잔만 기울인단 말이오?” 하니,

원료범이 소강절선생을 만난 그 사연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자 노승이 말하기를 “元 처사,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오이다” 하고 말하면서

책 두 권을 꺼내주는 것입니다.

한권은 공과격(攻過格)이란 책이고 또 하나는 둔제주란 주문입니다.

즉 생전의 그 사람의 공덕과 과실을 따지는 점수를 매기는 책이 었습니다.

죽을 사람 한 명을 살려주면 + 100점

한 여자의 정절을 지켜 주면 + 100점

사람을 한 명 죽이면 - 100점

연고 없는 시체를 묻어주면 + 50점

등등.........

그 다음 둔제주(遁除呪)란 주문을 매일 읽고 修行을 하는 것입니다.

원료범은 아침저녁으로 한 時辰(2시간)씩 수행하고 점수 관리를 하니

3년 뒤부터 운명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자신의 운명에 아들이 하나도 없는데 아들 둘을 낳았고,

본래 수명 55세인데 75세까지 살았습니다.

그 당시 평균수명이 40세였으니훨씬 장수한 것입니다.

지방 장관까지 진급한다고 했었는데 중앙 정부의 장관급까지 승진을 했습니다.

이 원료범선사는 實際 인물이고, 원료범선사가 창시한 문파가

대만의 도교5대 문파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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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과격(功過格): 공덕과 죄과를 기록한 표

100 점짜리 공덕 (功德 : 현재 또는 미래에 행복을 가져올 선행(善行)

* 한 사람 죽는 것을 구제해 주는 것 * 한 여자의 정절을 지켜 주는 것

* 한 자녀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 (기타 여러 죽음을 저지하는 것)

* 다른 사람의 후사를 이어 주는 것

100 점짜리 죄과(罪過 : 죄가 되는 악이나 그릇된 허물)

* 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 * 한 부녀의 정절을 잃게 하는 것

* 다른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이도록 내버려 두는 것 (기타 여러 죽음으로 유도하는 것)

* 한 사람의 후사를 끊는 것

50점짜리 공덕

* 낙태를 못하게 하는 것

* 욕망에 오염될 처지에 부딪쳐서도 정도(正道)를 지키고 오염되지 않는 것

*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거두어 양육해 주는 것

* 주인없는 시신을 거두어 장례 지내 주는 것

* 한 사람이 유랑을 안하도록 구해 주는 것

* 한 사람이 유배나 징역등의 중죄 짓는 것을 모면하도록 구해 주는 것

* 한 사람의 원한을 풀어 주는 것

* 좋은 말 한 마디로 백성에게 그 이익이 미치는 것

50점짜리 죄과

* 한 번 낙태시키는 것 * 한 쌍의 결혼을 파경에 이르게 하는 것

* 한 시신을 아무렇게 버리는 것 * 남의 아내나 딸을 범하는 것

* 한 사람을 못 살게 굴어 떠돌아 다니도록 만드는 것

* 한 사람에게 유배나 징역의 중죄를 짓게 만드는 것

* 한 사람에게 불충, 불효나 큰 죄악을 짓도록 하는 것

* 백성에게 해를 끼칠 한 마디의 말을 하는 것

30점짜리 공덕

* 묘터를묻을곳 없는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

* 비행을 저지른 한 사람을 교화하여 행실을 바꾸게 하는

* 한 수계 제자를 인도하는 것

* 부부간의 이별,이혼,싸움,파탄 등의 불화를 화해시켜 다시 살게 하는 것

* 주인없이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 기르는 것

* 한 사람의 덕을 이루도록 도와 주는 것

30점짜리 죄과

* 근거없는 비방을 지어 한 사람을 모욕, 훼손하거나 함정에 빠뜨리는 것

* 남이 사사로이 은밀히 어떤 나쁜 짓을 행하려다 참회하여

그만둔 일을 적발하여 떠벌리는 것

* 한 사람에게 소송을 교사하는 것

* 한 사람의 청정한 계율을 훼방하거나 수행을 못하게 훼방 놓는 것

* 스승과 어른을 배반하는 것 * 부모 형제에게 거역, 반항하는 것

* 사람의 골육지친을 이간시키는 것

* 흉년에 오곡을 사재기해 놓고 폭리를 취하는 것

10점짜리 공덕

* 덕망 있는 사람을 천거하여 인도하는 것 * 한 사람의 해악을 제거해 주는 것

* 모든 법문과 경전(진리의 말씀)을 편찬하는 것

* 의술이나 약 처방으로 한 사람의 중병을 치료해 주는 것

* 지극히 덕 있는 말을 하는 것

* 부릴 수 있는 재력과 권세가 있는데도 그것을 부리지 않는 것

* 자기에게 속박된 첩이나 노비를 잘 대해 주고 해방시켜 주는

* 사람에게 보답할 힘이 있는 짐승의 생명을 구해 주는 것

10점짜리 죄과

* 덕망 있는 사람을 배척하고 따돌리는 것 * 나쁜사람을 천거하여 등용시키는 것

* 고아를 능욕하거나 과부를 핍박하는 것

* 절개 잃은 한 과부를 받아들여 소실로 거느리는 것

* 중생을 죽일 수 있는 기구 하나를 간직해 두는 것.

* 존친이나 스승, 휼륭한 이에게 악담(욕설)하는 것

* 남을 해칠 수 있는 독약을 만들거나 조제하는 것

* 관리가 죄수에게 불법 고문하는 것 * 모든 正법 경전을 훼손하거나 파괴하는 것

* 경전을 읽을 때 마음 속에 단순한 잡념망상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는 살기를 품거나

음욕등의 나쁜 일을 생각하는 것 * 사이비 道나 간사한 邪법을 남에게 전수해 주는 것

* 덕을 손상시킬 수 있는 말을 내뱉는 것

* 사람에게 보답할 힘이 있는 가축(집지키던 개)을 한 마리 죽이는 것

5점짜리 공덕

* 한 사람의 법정 소송을 그치도록 권하는 것

* 한 사람에게 심성과 생명을 보호하고 유익하게 하는 일을 전해 주는

* 심성과 생명을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법문을 한 권 편찬하는 것

* 약 처방이나 민간요법 등으로 한 사람의 가벼운 질병을 고쳐 주는 것

* 남의 악을 퍼뜨리지 말도록 권하는 것 * 한 어질고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

* 중생을 위해 천재지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단지 착한소원만 빌기만 하고

제물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 사람에게 보답할 힘이 없는 가축의 생명을 구제해 주는 것

5점짜리 죄과

* 일체 정법과 경전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것

* 풀어줄 수 있는 원통한 사정을 보고도 그 원통을 풀어 주지 않는 것

* 한 병자가 구제해 줄 것을 청하는 데도 구제해 주지 않는 것

* 한 도로나 교량을 막거나 끊어 버리는 것

* 미풍양속을 훼손시키는 문장이나 시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

* 명예를 손상시키는 가요 또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

* 험담을 하여좋은 사이를 깨뜨리는 것

* 사람에게 보답할 힘이없는 가축(기르던 닭) 한 마리를 죽이는 것

* 적절한 요리법에 의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삶아 죽이거나

털 달린 채 구워 죽이는 등 극도의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

3점짜리 공덕

* 뜻밖의 횡액(봉변)을 당해서도 화내지 않는 것

* 남의 비방을 감당하면서 변명하지 않는 것

*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는 것

* 마땅히 책망할 한 사람의 책임을 면제(용서)해 주는 것

* 양잠,어부,수렵인,도살꾼 등에게 직업을 바꾸도록 권하는 것

* 저절로 죽은 가축을 묻어 주는 것

3점짜리 죄과

*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고 화를 내는 것 * 위 아래의 차례(장유 질서)를 어기는 것

* 마땅히 책망치 않아야 할 사람을 문책하거나 한 사람의 잘못을 남에게 퍼뜨리는 것

* 두 말로서 사람을 이간질시키는 것 * 무식한 사람을 속여 등쳐 먹는 것

* 남이 공덕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것

* 남의 근심 걱정을 보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것

* 남이 이익을 잃고 명예를 잃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는 것

* 남이 부귀한 것을 보고, 그가 망해 빈천해지기를 바라는 것

* 일이 여의치 않아 상심하거나 실의한 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것

* 자기 분수 외의 것을 탐하고 추구하는 것

1점짜리 공덕

* 한 사람의 선(착한 일)을 칭찬하는 것 * 한 사람의 악을 덮어 주는 것

* 한 사람의 싸움을 그치도록 권하는 것

* 사람이 한 가지 나쁜 일을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

* 한 사람 배고픈 것을 구제해 주는 것

*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을 하루밤 잠재워 주는 것

* 한 사람의 추위를 구제해 주는 것 * 약 한 첩을 주는 것

* 남을 제도하도록 권하는 글을 나누어 주는 것 * 경전 한권을 독송하는 것

* 반성,참회의 예로 절 백 배 올리는 것

* 부처님이나 보살의 성호를 천 번 염송하는 것

* 선법을 강연하여 열 사람에게 가르침이 미치는 것

* 좋은 일을 일으켜 그 이익이 열 사람에게 미치는 것

* 내버려진 글 일천 자를 주워 처리하는 것

* 한 스님에게 한끼 공양 드리는 것 * 스님 한 사람을 잘 보호 하고 지켜 주는 것

* 걸인이 구걸하는데 거절하지 않는 것

* 사람이나 가축이 일시 피곤한 것을 구제해 주는 것

* 남이 근심하는 것을 보고 잘 위로해 풀어 주는 것

* 육식을 하는 사람이 하루동안 육식 않고 재계하는 것

* 짐승을 잡는 것을 보거나 그 비명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않는 것

* 자기때문에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

* 저절로 죽은 짐승(야생) 한 마리를 잘 묻어 주는 것

* 한 생명(방생)을 구해서 살려 주는 것

* 한 미세한 습생과 화생(곤충이나 벌레)을 구해 주는 것

* 공덕과 과업을 쌓아 회향해서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천도하는 것

* 돈과 곡식, 옷 등을 배풀어 사람을 구제하는 것

* 남의 부채를 용서(연기 또는 면제)해 주는 것

*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워 돌려 주는 것 * 의롭지 못한 재물을 취하지 않는 것

*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 빚을 다 갚아 주는 것

* 땅을 양보하고 재산을 양보하는 것

* 남에게 재산을 내어 갖가지 공덕을 쌓으라고 권하는 것

* 남이 맡긴 재물을 가로채지 않는 것

* 창고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게 하고,길이나 다리를 새로 놓거나 복구하고,

막힌 강물을 뚫고 우물을 파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고,

도량을 짓고 삼보의 불상들을 만들거나

향이나 등촉 등 필요한 공양물을 보시하고,

길손에게 차, 물 등을 보시하고,죽을 사람을 위하여 관목을 보시하는 것 등

일체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는 것

1점짜리 죄과

* 한 사람의 선을 못하게 방해하는 것

* 한 사람의 투쟁(싸움)을 교사(선동)하는 것

* 마음 속에 은밀히 남을 해칠

악의를 품는 것 * 남이 한가지 나쁜 일을 하도록 돕는 것

* 남이 조그만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고도 저지하지 않는 것

* 남이 근심하고 놀라는 것을 보고도 위로하지 않는 것

* 남의 가축을 부리면서, 그 가축이 피곤하고 힘든 것을 동정하지 않는 것

* 남에게 말하지 않고서 그 사람의 바늘

이나 볏짚 하나라도 취하는 것 * 글씨가 써진 종이를 버리는 것

* 오곡이나 하늘(자연)이 주신 사물(천연물)을 함부로 내버리고 방치하는 것

* 한 번 약속을 어기는 것 * 취해서 한

사람을 침범하는 것 * 한 사람의 굶주림과 추위를 보고도 구제하지 않는 것

* 경전을 독송할 때 한 글자나 구절을

잘못 읽거나 빠뜨리는 것 * 스님이 시주를 구하는데 주지 않는 것

* 한 걸인의 구걸을 거절하는 것

* 술, 고기, 오신채를 먹고 경전을 독송하거나 도량에 들어 가는 것

* 법복이 아닌 옷을 입는 것 * 사람에게 보답할

힘이 있는가축의 고기를 먹는것

* 미세한 습생이나 화생(곤충이나 벌레)의 생명을 죽이거나,

새집을 뒤집고 알을 깨는 것

* 대중의 공익을 위반해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거나,

남의 재물을 손상시키고 사용하는 것

* 남에게 빌린 물건(빚)을 돌려주지 않는 것

* 남이 흘린 물건을 돌려 주지 않는 것 * 남이 맡긴 물건을 돌려 주지 않는 것

* 공적인 일을 빙자하거나 권세를 이용하여 남에게 재물을 달라고 요구하거나

약취하여 자기 소유로 가지는 것

* 불법승 삼보의 형상이나 도량(법당) 및 그곳에서 쓰는 기물 등을 파괴하는 것

* 저울이나 되(도량형)를 내줄

때는 작은 용량으로, 받을 때는큰 용량으로 사용하여차익을 먹는 것

* 도살에 쓰이는 칼이나 어망을 파는 것 등



天 薄 我 以 福 吾 厚 吾 德 以 迓 之

천 박 아 이 복 오 후 오 덕 이 아 지

天 勞 我 以 形 吾 逸 吾 心 以 補 之

천 노 아 이 형 오 오 심 이 보 지

天 阨 我 以 遇 吾 亨 吾 道 以 通 之

천 액 아 이 우 오 형 오 도 이 통 지

天 且 奈 我 何 哉

천 차 나 아 하 재

하늘이 나에게 복을 적게 내리면

나는 내 스스로 덕을 쌓아 극복하고

하늘이 나의 몸을 고난에 놓이게 한다면

나는 나의 마음을 편히하여 그것을 보충 한다,

하늘이 나의 처지를 역경에 놓이게 하면

나는 내가 믿는 도로써 역경을 뚫을지니

결국 하늘도 나를 어쩌지 못할것이다.

<채근담>


글; 조용헌

명문가名門家는 왜 필요한가? 오랫동안 나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명문가는 필요하다. 사회가 혼란기에 처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드러난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나, 경제 위기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상황이 되었거나, 이념의 갈등으로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었을 때 명문가의 존재가 부각된다.

명문가가 명문가인 이유
명문가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집안을 가리킨다. 존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만한 역사적 검증을 거쳤기 때문이다. 평소에 존경이 축적되어 있어야만 난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여론을 통합시키는 힘이 있다. 존경이 없으면 말발이 먹히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기야말로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명문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명문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자본에 해당한다. 이 사회적 자본이 없는 나라는 난세에 피를 흘리기 마련이다. 그동안 필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해 본 명문가는 이렇다.



3백년 만석군 집안다운 넉넉한 베풂
경주의 최부잣집이다. 경상도는 호남과 달리 들판이 적다. 3천석 이상의 부자는 배출되기 어려운 지형적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부자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상도에서 최부잣집은 3백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만석군을 유지해 왔다는 점이 독특한 것이다. 3백년 동안 만석군 기록은 서울이나 충청, 호남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최부잣집의 만석군 비결은 독특하다. 첫째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철학을 가졌었다. ‘그 이상은 내 재산이 아니다’ 라는 깨달음이었다. 만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 보아야 아무 필요도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유사시에는 화가 될 수 있다는 이 집안사람들의 선견지명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환원 방법은 소작료를 대폭 낮추는 방법이었다. 다른 부자들은 7할의 소작료를 받았던 데에 비해 최부자는 4~5할 정도만 받았다. 소작인들로 보아서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둘째는 흉년에 논을사지 않는다는 방침이었다. 흉년이 되어 굶어 죽는 상황에 직면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던 논마지기를 10분의 1가격에 내 던졌다. 이때가 부자에게는 기회였다. 하지만 최부자는 이때 가난한 사람들의 논을 사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원망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망을 받을망정 지금 눈앞에 닥친 재테크의 찬스를 잡을 것이냐, 아니면 돌아올 원망의 과보를 현찰보다 더 무섭게 생각할 것이냐? 여기에서 다른 부자와 최부자의 판단이 갈라졌다. 다른 부자들은 전자를 택하였고, 최부자는 후자를 택하였다. 전자를 택한 다른 부자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로 유행한 활빈당活貧黨에게 걸려들어 떼죽음을 당하였고, 가지고 있던 재산을 탈취 당하였다. 활빈당들은 최부잣집에 대해서는 손 하나 까딱 안했다고 한다. 활빈당도 여론 조사는 치밀하게 한 다음에 부잣집을 털러 다녔다는 증표이다. 셋째는 과객대접을 후하게 한다였다. 1년에 과객대접 하는데에 들어간 쌀가마가 약 1천 가마 분량이었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두가마 반 분량은 밥을 해 댔다는 결론이다. 최소한 하루에 1백 명 이상의 삼시세끼를 공급할 수 있는 분량이다. 이 밥을 공짜로 얻어먹은 과객들이 전국에 돌아다니면서 입소문을 낼 수밖에 없었다. 최부잣집에 대한 소문이 전국에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넷째 ‘벼슬은 진사이상 하지 않는다’였다.
최부잣집은 9대 진사를 지낸 집안이다. 고위벼슬을 하면 당쟁에 휘말려 몸 뺏기고 재산 뺏길 수 있다고 여겼던 탓이다. 조선후기에 영남 지역은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에 속한 집안이 많았다. 기호 노론老論이 2백년 동안 장기집권 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의 남인들은 숨죽이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자칫 벼슬한다고 나섰다가는 어떤 정치적 풍랑에 휩싸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은혜를 베풀어 대代와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명문가
전남 여수 봉강동에 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한옥 저택이 자리 잡고 있다. 집의 당호는 봉소당鳳巢堂이다. 몇 년 전에 영화 ‘가문의 영광’에 등장했던 집이기도 하다. 영광김씨靈光金氏인 이 집의 사연도 기가 막히다. 이 집은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현 종손의 증조부인 김한영金漢永 대이다. 1만2천석을 했다. 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가난한 과객 대접에 후했다고 전해진다. 김한영은 과객이 오면 반드시 주특기를 물어보았다. 덕석을 짜는 것이 주특기인 과객에게는 덕석을 짜게 하였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게 해서 돈이 모이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도와주곤 하였다. 이 집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자식들이 8~9명 되는 소작인들은 자식들 먹이느라고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자식들 많은 소작인들에게는 수백 가마의 쌀을 배에다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을 대신 맡겼다. 화양면 고진古津이라는 곳에서 여수항까지 배에다 쌀을 싣고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보기에도 공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평소에 쌓아둔 이러한 적선이 난리가 났을 때에 그 효력을 발휘하였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에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의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들에게 잡혀갔다. 공교롭게도 당시 좌익의 지도부 인물 가운데 하나가 평소 이 집의 혜택을 보았던 바로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의 주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 감아 줌으로써 그 보답을 하였다. 그 전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터졌을 당시에, 여수의 대지주였던 여수 봉소당의 11대 후손인 김성환(1915~1975)은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김성환이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장소는 여천군청 2층이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소작인 아들로서 반란군의 책임자급으로 있었던 인물이 책상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김성환이 끌려오니까 이 책임자는 옆에 있던 2명의 호위병들에게 ‘너희는 밖에 나가 있어라!’하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김성환을 의자에 앉도록 한 다음, 이 책임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신문만 보고 있었다. 자신의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놓고 신문만 들여 다 보았다. 이런 침묵 상태로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끌고 왔으면 심문을 해야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을 향해서 신문만 보고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고 있던 김성환은 30분쯤이 지날 무렵 그 이유를 알았다. ‘아! 나 보고 도망가라는 뜻이구나!’ 김성환은 군청의 창문을 살며시 연 다음에 홈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야산으로 도망을 하였다. 이 소작인의 아들은 자신의 직책이 반란군의 책임자급이었으므로 대 놓고 ‘너 도망가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렇다고 자기 조부 때부터 은혜를 입은 봉소당 아들을 죽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여순사건 당시 12대 후손인 김재호(1942~ )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봉소당 머슴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는 17세였다. 반란군에 가담하여 팔에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완장을 찬 머슴아들이 봉소당 대문을 열고 들어오니까, 여섯 살 먹은 어린 김재호는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삶은 밤을 ‘형! 이 밤 좀 먹어봐’하면서 건넸다. 이 밤을 받아든 머슴 아들은 한참동안 주인집 아들인 재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한다. 김재호는 ‘지나고 보니까 그때 무심코 내가 내밀었던 삶은 밤 한주먹이 내 목숨을 살렸다’고 회고 한다. 논리論理 위에 정리情理가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여순반란사건’에서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현재에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이다.



누구나 능히 열 수 있었던 너그러운 뒤주
지리산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삼고, 섬진강을 임수臨水로 삼고, 그 가운데에 넓은 들판을 문전옥답으로 삼은 수십 칸 규모의 저택이 있다. 바로 류씨 집안인 운조루雲鳥樓이다. 전망도 좋고, 풍수상으로 대명당에 해당하는 터이지만 이 지리산 아래 동네는 동학, 빨치산, 6?25의 중심현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주집인 이 운조루가 불타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알고 보면 대단한 사실이다.
왜 부잣집인 운조루는 빨치산과 6?25에서도 살아남았는가? 이 집의 사랑채 옆에는 나무통으로 만든 뒤주가 하나 있다. 두 가마 반이 들어가는 원통형 뒤주이다. 이 뒤주 아랫부분에는 조그맣게 네모진 나무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글씨가 적혀있다. ‘다른 사람도 능히 열수 있다’는 뜻이다.
이 부잣집의 뒤주에 들어 있는 쌀은 지나가던 과객이나, 아니면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나 와서 마개를 열고 1~2되씩 쌀을 퍼갈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운조루에서 배려했던 쌀의 양은 1달에 두가마 반이었다. 만약 월말에 뒤주의 쌀이 남아 있으면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책망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집안이 덕을 베풀어야 하는데, 이렇게 쌀이 남아 있으면 덕을 못 베풀었다는 증거 아니냐!”
평소에 어려운 이웃들이 이 쌀을 퍼갔다. 6?25 때 빨치산들이 수없이 이 지역을 들락거렸지만 이 집은 피해가 없었다. 다른 동네 출신들이 뭣 모르고 운조루를 불태우려고 하면, 이 동네 머슴 출신의 좌익들이 이를 말렸다고 한다. “다른 집은 다 태워도 저 집은 태우면 안 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적어도 1백 년은 지나가 보아야 그 이치를 깨닫는 것 같다. 그 이전에는 알 수 없다.


정승도 따르지 못했던 한 명의 처사
충남 논산의 노성리에 가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 고택이 있다. 함양 개평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고택이 명재고택이다. 이 집안은 보통 노성魯城 윤씨尹氏라고 불린다. 충청도에서 1급 양반으로 꼽히던 집안이 회덕의 송씨(우암 송시열 집안),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 집안), 그리고 노성의 윤씨 집안이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한 처사處士로 유명하다.‘정승 세명이 대제학 한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처사는 벼슬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가리킨다. 명재는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이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대제학 세명이 처사 한명만 못하다’는 경우는 바로 일생동안 처사였던 명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명재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명재가 지닌 카리스마는 대단하였다. 그만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소론少論의 당수로서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다. 제사상의 크기를 가로 세로 석자(90㎝)를 넘지 말게 하라는 당부였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지금도 명재 고택에 가보면 석자 안 되는 제사상이 남아 있다. 음식 몇 가지 올리면 상이 다 차버린다. 당시에 명재 집안의 윤씨들이 뽕나무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를 안 명재는 “우리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면 안 된다. 이는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심는 나무인데, 우리 같은 양반 집안마저 뽕나무를 키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겠느냐, 절대로 뽕나무를 심으면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윤씨들은 이를 그대로 지켰다. 현재 남아 있는 명재 고택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이다. 집안에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집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이다. 이 집안의 이러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에 6?25 때에도 이 저택은 불에 타거나 손상당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을 대표하는 집안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가 망하면서 양반도 몰락하였다. 양반들도 약자를 착취하는 토색질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양반의 나쁜 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같이 사라졌다. 양반의 자존심과 주변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해방 후에 남은 것은 ‘상놈정신’이다. 상놈정신의 좋은 점은 체면 따지지 않고, 근면성실하고, ‘너와 내가 동등하다’는 평등의식이다. 상놈 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순흥 만석군’- 글; 이규태

모질도록 인색하게 돈을 모아 망신하는 것을 ‘놀부 제비 후리질’이라 한다면 피눈물 나도록 검약하게 돈을 모아 좋은 일에 쓰는 것을 ‘순흥 만석군(순흥 만석군)’이라 한다. ‘동야휘집(동야휘집)’이라는 문헌에 버려진 돌밭을 일구어 근면 일변도로 만석군이 되는 순흥골 황 부자 이야기가 있다. 어찌나 검약하던지 부자가 된 연후에도 밴댕이 세 마리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하여 소문이 났었다. 한데 만석을 채운 그 당일로부터 행려병자를 먹이고 재웠으며 과거치러 가는 어려운 서생들 노자를 대주고 상경하는 데 말을 주어 타고 가게 했다.

이 황 부자의 덕으로 대과에 급제한 많은 서생 가운데 하나인 최생이 경상도 감사가 되어 순흥골의 이 은인을 찾아 보았다. 황 부자는 자선에 재산을 다 쓰고 헛간에 거적 쓰고 죽어갔으며 그 웅장했던 고대광실은 쑥밭에 폐허가 되고 논밭 한뙈기 물려받지 못한 아들은 밀양 염전에 가 지게질하며 연명하고 있었다.

고금을 통틀어 우리나라 부자는 놀부나 옹고집처럼 수전노요 인색한이며 심사마저 고약한 것으로 돼있지만 순흥골 만석군 같은, 자수성가하여 이룬 그 부를 일푼 남기지 않고 또 물리지도 않고 공수거(공수거)한 이도 없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순흥골 만석군’ 같은 부자를 헤티형(형) 백만장자라고 한다. 황 부자는 밴댕이 세 마리로 제사를 지냈지만 19세기 말 월가(가)의 모든 돈이 이 여인의 손으로 집산하여 마녀로 소문나 있던 헤티 그린은 연료비 아깝다고 겨울에도 찬 오트밀만 먹고 14세 난 아들이 무릎을 다쳤을 때 무료진료소를 찾아다니는 바람에 합병증이 생겨 다리를 절단해야했을 만큼 돈을 아낀 여인이다. 그가 죽은 후 궤짝으로 맞춘 침상 아래의 식품 양철통에서 당시 2억2500만달러의 재산이 사회환원 유서와 더불어 발견되었던 것이다.

보도된 바로 우리 나라 대표적 벤처기업 사장이 경영권을 자식에게 물리지 않고 능력있는 사원에게 물렸고 자식들도 재산보다 그 정신의 유산이 더 값지다 했으며, 미국에서도 한 평생을 자기 공장의 뒤편 트레일러 집에서 살며 모은 돈 5000억원을 가족 아닌 사회에 환원하고 공수거하고 있다. 동에서 순흥골 만석군이, 서에서 헤티형 백만장자가 탄생한 정초다.

헨리8세와 천일의 앤 고사 2009. 3. 11. 08:57

옛날, 그러니까 세기가 16세기로 들어서고 한 세대가
흐를 때 영국에
헨리 8세라는 군주가 나타났다.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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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에서 보시다시피 그래 보이지 않는데 장가를

여섯 번이나 간 호색한(好色漢)이었다.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을 위해서 아실만한 분은 다 아는 영국식

기독교인 성공회라는 새로운 교파를 연 용감한 바람둥이 인간이다.


이 사람은 여자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옛 가장같이
후사를
이을 아들에게걸스럽게 굶주린 사람이었다.


현대의 의학은성별의 구분이남자의 염색체가 결정한다는
것이지만
알 길이 없었던 1500년대에 헨리 8세는 여자만
바꾸어대면 되는 줄 알고
줄기차게 왕비를 바꾸어 댔다.


그의 여자들은 통상 여덟 번이나 그의 피를 받은
아기들을 유산했다.


의학자들은 그가매독을 앓은 전력이 있었고 그의 병력이

아들 출산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 장가를 든 스페인 출신인 캐더린 왕비가 있었다.

그런 그가 40대가 되어서부터 카톨릭이라는 이혼 금지의 종교의

굴레가 풀리자 왕비들을 무수히 갈아 치는 늦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눈독을 드린 것은 케더린 왕비의 시녀[여관-女官]였던

앤 볼린[1507년-1536년]이었다.


앤은 토마스 볼린 경이라는 귀족의 딸이었다.
토마스 볼린경은 영국의 명문이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자질이 뛰어나서 중요한 국제관계로 외국에

자주 사신으로 파견 다녔었고 해외 주재도 오래했었다.


헨리 8세와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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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에게는 언니 메리와 동생 조지가 있었다.

그녀는 유년시절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 오래 살았었고

교육도 받았다.

일찌감치 프랑스 왕에게 시집간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의
시녀를 했었다.

앤 볼린은 프랑스어에 능했고 프랑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스무 살에 영국으로 들어와서 그녀의 사촌인 제임스 버틀러라는

사람과 혼담이 진행되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그뒤 앤은 궁중에 들어가 캐더린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의 언니 메리도 궁중에서 시녀로서 근무했었다.


메리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족과 스캔달을 일으켜아버지가

불러들여 윌리암 케리라는 낮은 신분이 귀족 가문과 결혼시켰다.


결혼 후에도 메리는 궁중에서 시녀로 계속 근무했다.

헨리 8세와 염문을 뿌린 것은 언니 메리가 먼저였다.


그러다가 헨리 8세의 관심은 동생 앤에게로 돌려졌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그렇다고경국지색의
수준은 아니었다.

입도 좀 큰 편이고 목도 너무 긴 편이지만 풍부한 표정을
담은큰 눈만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빛내 준 것은 그녀만이
가진 똑똑함과 지성미였던 것 같다.
박학다식하고 시를 사랑했으며 더해서 여러 가지 악기도
잘 다루었고
노래도 잘했다.


그녀는 교양있는 매너와 지성적인 매력으로

일찌감치 궁중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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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헨리 8세는대시했다.

허나 앤은 왕의 은밀한 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그의 집요한 구애를 피해서 자주 궁에서 나와
그녀 가문
소유였던 헤버 성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렇게 애먹이는 세월이 장장 4년이나 흘렀다.

왕의 구애가 길어지자 그녀는 헨리 8세에게 정식 결혼이 아니면

그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앤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은 먼저 케더린 왕비와 이혼해야 했다.


이혼에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사람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영국 내에서 여론도 캐더린 왕비를 편드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힘없는 민초들도 장희빈에 혹한 숙종이 민중전을

내쫓자 그녀를 열렬히 응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듯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왕은 앤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불가능하자

헨리 8세는 영국 천주교를 로마와 단절시켜서 영국 국교의

시발점을 열었다.


헨리의 첫 왕비 케더린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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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교황청이라는 방해물이 없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케더린 왕비와 이혼하고 1533년 5월 28일 이미

사실혼 관계였던 앤 볼린과의 결혼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42살 앤이 26세 때였다.
그녀는 이 때 이미 헨리 8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혼 후 왕비로 책봉 의식까지 한 앤은 그린위치에서
출산을 준비한 후
그 해 9월에 첫 아이를 낳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헨리 8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작명하였다.


앤의 왕비 책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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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들의 밀월은 그렇게 길지가 않았다.

그녀의 지나치게 똑똑함은 한 남자의 아내라는 위치에만
만족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앤은 헨리8세와의 말다툼도 예사로 했고 정치에도 관여해서

왕과 신하를 피곤하게 하고 은근히 안과 밖에 적을 만들었다.


그녀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취향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헨리8세는 점점 너무 튀는 앤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혼 다음 해인 1534년 크리스마스 무렵, 헨리 8세는 측근들과
은밀하게
과의 헤어짐을 논의 했었다.

그러나 다음해도 그냥 지나갔고 1935년 앤은 다시 임신하였다.

그러나 바라던 아기는 아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를 향한 여론도 계속 좋지 않았다.

케더린 왕비를 내 쫓은 악녀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던 그녀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고
폭정을 일삼는
헨리 8세의 행태도 그녀 때문이라는 세평이
그녀의 인기 추락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나쁜 인기가 그녀가 처형되고 나서
금방 뒤돌아서서
추모 분위기로 바뀐 것은 여론이 얼마나
바람 같은 것인가를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1536년1월 첫 왕비 캐더린이 딸 메리를 남겨놓고 사망했다.

앤은 캐더린의 딸 메리를 위로하고 화해의 노력을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배후에 앤이 있다고 믿던 그녀는 이 화해의 손길을 거부했다.

반면 앤은 다시 임신했지만 삼 개월 반 만에 유산하고 말았다.

아기는 그렇게 바라던 남자 아이였다.


이제 변덕쟁이 헨리 8세의 인내는 한계에 온듯하다.
그는 아들을 낳아줄 여자가 필요했었다.

이미 그에게는귀족의 딸이고 역시 궁중의 시녀,

그것도 앤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머라는 여성이 새로운 연인으로

등장한 뒤였다.


그녀는 미인이었으나 앤과는 반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재기발랄한 것이 아니라 온순하고 가정적이었다.
이름을 겨우 쓸 정도였지만 뜨게질 같은 것을 좋아하는
여성적인성격이 강했다. 지나치게 똑똑한 앤에게
실증이 난 헨리 8세가 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이든다.


제인 세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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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536년 4월 앤의 전속 플란더즈[네델란드]음악가였던
마크 스메튼이
체포되어서 호된 고문과 무죄 방면 유혹과 그가
앤과 밀통했다고 자백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앤과의 간통혐의를 자백했다.

역사가들은 이들이 모두 고문과 강압에 감언이설 의해서

허위 자백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앤의 남동생 조지도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어처구니 없었던 죄목은 조지가 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었다.

1536년 5월 2일 앤은 체포되어 런던 타워로 끌려가서 구속되었다.


런던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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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앤과 밀통을 했다고 혐의를 받았던네 명의
남자들에게
재판이 있었다.

세 명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으나 음악가 마크 스메튼만이

혐의를 인정했다.

역시 그 사흘 뒤 앤과 남동생 조지가 취조를 받았다.


앤에게 쓰인 올가미는 간통과 근친상간과 반역죄였다.

반역죄는 그녀가 헨리 8세를 제거하고 밀통하던 헨리 노리스와

재혼하려고 했다는 것이라는 혐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궁중의 시종이었다.


근친상간이니 반역죄니 하는 것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파괴하여 처형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헨리 8세의 조종에 날뛴 간신들은 앤을 마녀이며 그 표시로

그녀의 손가락이 6개라는 헛소문까지 퍼뜨렸다.

[6손이는 마녀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헨리 8세 같은 권력자가 마음먹고 죽이겠다고 골고루 죽일 죄목만

뒤집어 씌웠다면 어떠한 결백한 사람도벗어날 수가 없었다.


1536년5월 17일,단 한 번의 억지 재판만 받았던 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헨리 8세는 마녀의 혐의까지 받아서 화형에 처해졌던
앤의 형을 화형에서
참수형으로 ‘경감’시켜 주었다.

참수형은 그때 통상 하던 대로 도끼로 절단하던 방법을 피해서
칼을
사용하도록 하고 처형인[망난이]을 프랑스 카레에 있는
센트 오메르에서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처형 도끼와 목을 놓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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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의 처형자를 요청했던 것은 앤이 요청했다는 전언이 있다.

프랑스 처형자들의 솜씨가 좋아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바램에서였을 것이다.


앤 볼린이 죽고 한참 뒤인1587년 도끼로
전통 방식으로 처형된 스코트랜드 여왕 메리 스츄어드.
엘리자베스 여왕의정적으로서 20년 가까운
수감생활 끝에 제거 되었다.
조선의 사약을 내리는 처형 방법에 비해서
유럽의 처형 방법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잔인했다.
명군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메리 여왕 시절
제거될 위험에처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적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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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고 미리 처형일을 통고 받았다.

그녀는 처형 전날 밤 런던 타워의성주 앤소니 킹스턴 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처형 전날 밤의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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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에도 처형당하기 전의 많은 사람들을 보았었다.

사형수들은 처형일 전에는 깊은 비탄에 잠겨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죽음을 관조 하듯이 담담해 보였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에서 목에 손을 대면서 슬프게 웃으면서 말했다.

“처형자가 솜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고 나의 목은 가느니까
고통없이
죽을 거예요.”


앤 볼린은 5월 19일 금요일 아침 처형되었다.

그녀는 두 명의 시녀와 같이 처형 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처형대위로 올라와서 허리를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앤 볼린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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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의 마지막 기도는

“주님께 나의 영혼을 맡기나이다. 저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 그녀의 시녀들이 머리장식과 목걸이를

제거하고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녀의 눈을 가릴 때까지 처형대 밑바닥에 깔아둔 짚 밑에
감추어둔
칼을 꺼낸 프랑스 망나니의 칼질은 단 한번이었다.

젖은 수건으로 말뚝을 후려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 녀의

머리는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피를 분수같이 내뿜던 몸은
앞으로 쓰러졌다.


앤 볼린이 처형되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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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그녀의 관을 준비할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처형된 앤의 몸과 머리는 화살을 넣는 박스 안에 넣어져

런던 타워에 바로 인접한 세인트 피터 에 빈큐라 교회에 급히

매장되고 아무 표식도 하지 않았다.

이 교회는 헨리 8세가 세운 새 교회였다.


앤이 매장된 세인트 에 빈큐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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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350년쯤 흘러 1876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피터 교회를 다시 증축 할 때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는 앤 볼린의 묘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대리석으로
표시가 되어졌다.

발견된 유골은 화장되었다.


헨리 8세는 그녀가 처형당하던 날 사냥을 나갔던 숲에서 그녀의

처형소식을 듣고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도 어김없이

새 애인인 제인 세이머와 열정을 나누었다.


앤이 처형되고 나서 불과 열하루 만에 제인 세이머가
왕비가 되었다.


제인 세이머는 헨리 8세에게 그렇게 갈망하던 아들을 선사했지만

아기를 낳고 불과 2주 만에 죽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삼년간 참다가 빈 왕비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주었다.


영국 역사를 여자 문제로 휘젓던 헨리 8세는 1547년
저 세상으로 갔다.
그 자리에 그와 제인 세이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에드와드 4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아직 어린 아홉 살의 어린 아이였다.


에드워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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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즉위 6년만인 1553년 에드와드 4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죽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왕위를 이을
사람들을
정해놓았는데 물론 세자 에드와드가 후계 1순위였고

다음이 제일 연장자인 첫 왕비 캐더린과의 사이 소생인 메리,

그리고 앤 블린과 사이에 낳은 엘리자베스가 다음이었다.

메리는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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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메리다.

메리 여왕은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제 영국의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한 영국 국교를 폐지하고

다시 로마 교황청으로 회귀하고자 시도했는데 이 시도는
이미 영국적 독립 교회의 맛을 본 사회각층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메리는 반대하는 사람들 300여명을 처형해서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란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얻었을 따름이다.


현대 사회에 대형 여객선 이름과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 이름은
남긴 것은 특기할만하다.

병약하던 그녀는 1558년에 죽고 운명은 돌고 돌아

비명에 간 앤 볼린의 딸이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헨리 8세가 자기 아들이 그렇게 일찍 죽고

또 메리도 그렇게 일찍 죽어 자기 손에 죽은 앤 볼린의
딸에게까지
왕위가 흘러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내다보는 조심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앤 볼린을처형하지 않았거나왕위 계승 순위에
엘리자베스를 얹어 놓지를 않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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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볼린의 딸이 바로 영국 역사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44년 치세 아래서 불어온 대 항해시대라는
시운을 탔고 많은 현신(賢臣)을 등용해서
이를 최대로 활용했던
출중한 리더십으로 영국은 부동의 세계 최고 강국이 되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가 그녀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여러 여자를 탐닉한 잔인한 난봉꾼
아버지 헨리 8세를
통해서 남자의 속된 모습을 느끼고
혐오감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후세 사람들의 추측이다.


앤이 가고 나서 후일담은 계속된다.

처형된 그녀의 유령이 목격된다는 속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유령은 그녀가 처형된 런던 타워와 그녀의 가문이 소유했던
헤버성에서
자주 나타났다.


유령이 나온다는 블린 가문의 헤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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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은 저승
에 가지 못하고 구천에 떠돈다는
구전설화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꼭 같은듯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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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일의 앤'앤처형장면

천일의앤 (OST) - FareWell My Love (rain version)

출처: http://kr.blog.yahoo.com/waterview33/folder/377.html

일반적으로 여자는 수학을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을 입증하기 온갖 생리학적, 사회학적 예를 들고는 하는데 사실 이것은 개인적 편차일뿐 모두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여성 수학자 중 가장 찬란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그리스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본다.


1900년 매리 앤더슨이 연기한, 히파티야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무세이온(오늘날의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와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오기도 했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특히 남을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어 당시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물론 이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한 몫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수 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 끙끙거리던 문제를 단번에 풀어냈다고 하니 단순히 외모 때문에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수학자이기도 하지만 철학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신플라톤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세속적인 욕망이나 물질적인 면을 매우 낮게 취급하기도 한 여성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철학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던 학생 중 하나가 그녀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월경 때 입었던, 더럽혀진 옷가지를 모아 그 학생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나의 참모습이다."


이라며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해 헛된 것으로 이야기했다. 구혼자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마음을 바꾸었다고. 이러한 점 때문에 그녀는 '철학과 결혼했다'고 불리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굳은 신념 때문에 그녀의 생애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알렉산드리아의 교구에 키릴루스라는 인물이 주교로 오며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오기 이전만 하더라도 비록 종교적 관점은 달랐지만 히파티아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호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시기심이 많던 키릴루스는 히파티아가 거리를 지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히파티아의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하지만 실제 신플라톤주의의 여러 사상적 이론이 훗날 기독교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만이 아닌 키릴루스와 정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지도자 오레스테스와의 대립에 히파티아가 악영향을 주고 있어 제거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프랑스 소설가인 드니 게디는 히파티아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415년 어느날,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이 길을 지나던 그녀의 마차로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가벗긴 채 성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깎은 굴껍데기로 그녀를 고문한 뒤 산 채로 불태워버렸다"

1885년 찰스 윌리엄 미셸이 묘사한 히파티아의 죽음


이러한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발가벗겨지고, 조개껍데기와 같은 날카로운 것에 온몸이 난자된 뒤, 불에 태워졌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 그녀의 저서들과 기록들은 대부분 불태워져 현재까지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정리된 것들이다. 기나긴 암흑시기 동안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졌던 것에는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인한 사회적 풍조도 한몫한게 아니었나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reference

http://en.wikipedia.org/wiki/Hypatia_of_Alexandria

http://user.chollian.net/~badang25/bmk/bmk2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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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의 지식...


* 맹사성 [재상, 1360 ~ 1438]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열아홉에 장원급제한 맹사성은
자만심 가득함으로 스님을 찾아가는데...


그림 : 김판국 화백


-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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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39)

재상 이임보(李林甫)(1)

ⓒ 삽화 박영철
방탕한 젊은 시절

[대기원] 李林甫(이임보)는 山西(산서) 출신이며 唐 皇室 (당 황실)의 宗親(종친)이다. 당 현종 때 宰相(재상)으로 있으면서 각종 법전을 정비하여 당률소의를 편찬하는 등 일부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현종 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專權(전권)을 휘두르며 조정의 기강을 문란케 하였다.

奸臣(간신)으로 일찍이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口密腹劍'(구밀복검)(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이라는 말을 낳았으며, 당나라를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승상 이임보는 兒名(아명)이 哥奴(가노)이며, 호는 月堂(월당)이다. 어렸을 때부터 방탕하여 이십 세가 될 때까지 글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양에서 살면서 하루 종일 사냥하다가 공놀이(打球:타구)하고, 개와 매를 풀어놓고는 말을 달려 뒤쫓기도 하였다. 늘 성 바깥 느티나무 숲으로 나가서 나귀를 타고 칼싸움을 하다가 지치면 나귀를 팽개치고 숲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곤 하였다.

어느 날 하루 이임보가 평소와 다름없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땅바닥에 벌렁 누워 있는데 그때 그 모양새가 누추한 도사 한 사람이 이임보 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볍게 한마디 던진다. “이렇게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놀이가 몸만 수고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한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임보는 벌컥 화를 내면서 대꾸한다.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잔소리를 하는가?”

이임보 드디어 가르침을 청하다

도사는 담담히 한번 웃더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난다. 그 다음날에도 그 도사가 이임보가 놀고 있는 자리에 나타나서 이임보에게 어제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때서야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이임보는 적지 않게 놀라면서 이 도사가 보통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임보는 옷을 털면서 일어나 그 도사에게 거듭 사죄를 한다.

그 도사는 “그대는 하루 종일 나귀를 타고 칼싸움을 하거나 사냥을 다닌다.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나귀에서 떨어져 의외의 일이 발생하면 아마 후회막급일 것이다”한다.

그 도사의 이러한 관심 있는 말은 이임보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임보는 곧 태도를 바꾸어 도사에게 많은 가르침을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이후부터 더 이상 놀이와 오락에 빠져서 젊은 시절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그 도사는 “그럼 좋다. 삼일 후 오경 무렵 그대와 이곳에서 만나자”한다. 이임보는 그 말에 연거푸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약속한 날짜가 되자 이임보는 성밖 약속한 그 장소로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도사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임보가 느릿느릿 다가오자 몹시 불쾌한 듯이 “이미 약속을 하였는데 왜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가? 삼일 후에 다시 오시오!”하고는 먼저 자리를 떤다.

다시 약속한 삼일 후가 되자 이임보는 더 이상 태만을 부릴 수 없어 한 밤중에 미리 약속한 곳으로 가서 공손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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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7훈 고사 2008. 3. 27. 09:03
인 생 7 훈



 
1.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2.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다.



3.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4.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5.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6.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7.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제비처럼 -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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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덕이 있어야 복을 오래 누려




글/청언(淸言)

주공(周公)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그는 주나라가 건립된 초기에 무왕과 성왕(成王)을 보좌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또 예악을 제정하고, 규장과 제도를 정해 공자의 깊은 존경을 받는 성인이다. 당시 성왕이 노나라 땅을 주공에게 봉했지만 주공은 왕을 보좌할 중대한 임무를 지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역주: 주나라 시대에 제후가 나라를 분봉 받으면 수도를 떠나 자신의 임지로 떠나야 했다. 하지만 주나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성왕의 나이가 어려 주공이 정치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떠날 수 없었다.) 그러자 성왕은 노나라 땅을 주공의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주었다. 백금이 노나라 땅으로 떠날 때 주공은 의미심장하게 아들에게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교만하거나 음탕하고 방종하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겸손한 덕이 있어야지만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고 긴 복을 누릴 거라고.

주공은 백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떠나거라. 너는 노나라를 봉지로 받았다고 교만하여 사인(士人)들을 태만히 하거나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현제 성왕의 숙부이다. 또 천자를 보좌할 중임(重任)을 겸했으니 내 지위가 천하에서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번 목욕하는데 중지하고 머리를 세 번이나 움켜쥐었고 한번 식사하는 데 세 번을 뱉어내면서 나아가 선비를 맞이했다. 이렇게 하면서도 혹 태만하여 천하의 사인을 잃을까 걱정했다. 내가 들으니 덕행(德行)이 큰 사람은 겸손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영광을 얻을 수 있고, 넓은 토지를 지닌 부유한 사람은 욕망을 절제하고 검소함을 유지해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지니면 더욱 존귀할 수 있다. 사람이 많고 군사가 강해도 두려움을 유지한다면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총명하고 지혜롭지만 우매(愚拙)함을 보존하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고 널리 듣고 많이 알아도 스스로 겸허하면 식견이 더욱 넓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겸허의 미덕이다. 군왕이 된 사람은 사해(四海)를 가진 부자지만 겸허하지 않으면 먼저 천하를 잃고 이후 자신을 망칠 수 있다. 하나라의 폭군 걸(桀)과 상나라의 폭군 주(纣)가 곧 이런 예이다. 그러니 네가 겸허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역》에서 말하길 ‘크게는 천하를 지킬 수 있고 중간에선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작게는 마음과 몸을 보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이 바로 겸허이다’ ‘하늘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덜고 겸허한 것을 이롭게 하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겸허한 곳으로 흐르게 하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허한 것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리는 가득찬 것을 싫어하고 겸허함을 좋아한다.’ 그러니 너는 꼭 기억해야 한다! 네가 노나라에 봉해졌다고 하여 태만하거나 사람들을 경시하지 말아야한다!”

주공은 또 아들에게 훈계했다. “덕행이 있는 군자는 설사 힘이 소보다 강할지라도 소와 힘을 다투지 않으며, 말보다 빨리 달릴지라도 말과 빨리 달리는 것을 겨루지 않을 것이다. 지혜가 높은 선비는 남과 더불어 누구의 지혜가 높은지 따지지 않을 것이다.”

주공이 ‘겸덕(謙德)’을 말한 것에는 여러 가지 오묘한 곳이 있다. 가령 겸손하고 공경하게 사람을 대하면 더욱 남들의 존경을 받으며, 욕망을 절제하고 검소함을 알면 오랫동안 사람을 평안하게 할 수 있다.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방자하지 않는 사람은 늘 승리할 수 있다. 겸손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수익이 더욱 많을 것이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겸허하면 견식을 더욱 넓힐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람간의 관계를 처리하고 수행을 학습하는 방면에 있어 이런 미덕을 많이 공부한다면 수익이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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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에 정기(正氣)가 있다
글/지진(智眞)

天地有正氣 : 천지에 정기가 있으니
雜然賦流形 : 섞이어서 흐르는 형상을 받았도다
下則爲河岳 : 아래인 즉 하천과 뫼이고
上則爲日星 : 위인 즉 해와 별이로다
於人曰浩然 : 사람에게는 가로대 호연이니
沛乎塞蒼冥 : 둥둥 떠서 창명을 막고
……
時窮節乃見 : 때가 궁함에 절제하여 보니
一一垂丹靑 : 하나 하나 단청을 내리도다”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 중에서]

중화민족의 문화는 신이 전한 문화이다. 절개는 신이 사람에게 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중요한 이념이다. 정기와 신념에 의지해 우리 민족은 오늘날까지 전승해왔다. 무수한 인인지사(仁人志士)들이 자신의 신앙과 추구를 확고히 하여 자신의 품격과 절조를 닦았으니 물결이 세차면 세찰수록 더욱 이처럼 했다.

  절개의 원천은 신념이다. 맹자(孟子)는 전국시기, 예와 악이 붕괴하던 시대에 도덕을 널리 발양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았다. 제선왕(齊宣王)이 무력을 이용해 천하를 정복하려 할 때 맹자는 그만두라고 설득하면서 “임금님께서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려 하시는데 마치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으며 아무런 성과도 없이 쓸데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난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제나라는 천하 사람들의 적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어진 사람만이 천하에 적이 없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맹자가 제창한 인정(仁政)은 제후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비굴하거나 거만하지도 않는 고도의 원칙으로 표현된다.

다른 사람들이 맹자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와 담량이 있게 되었는가 라고 물으니 맹자는 “그들이 부유함으로 자처하면 나는 나의 인(仁)으로 대하고 그들이 벼슬로 자처하면 나는 나의 의(義)로 대하니 내 어찌 부족함이 있으리오!”(『맹자(孟子)』) 라고 했다.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숭고한 절개는 인생의 이상과 추구이며 또한 사회의 가치가 지향하는 바이며 사람들이 처세하는 인격을 가늠하는 표준이다.

  북송(北宋)의 범중엄(范仲淹)은 청렴했고 과감히 직간(直諫)할 줄 알았으며 마음으로 천하를 걱정한 전형적인 관리였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범중엄은 “매번 국사를 논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한때 사대부들이 엄하게 바로잡고 불굴의 기개를 숭상함은 중엄이 주창하여 시작된 것이다.”라고 했다. 범중엄은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직간하다 여러 차례 귀양을 가기도 했지만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그의 마음은 시종 고치지 않았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중에서 관리로서 사람이 되는 도리를 논술했다.

“물건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며, 조정의 높은 곳에 거하면 그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 먼 곳에 있으면 그 임금을 걱정하니, 이는 나아가도 걱정하고 물러나도 또한 걱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때에나 즐거울 것인가? 그는 반드시‘천하의 근심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니라.’라고 말할 것이다.(不以物喜, 不以己悲, 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 是進亦憂退亦憂. 然則何時而樂耶? 其必曰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

역대로 큰일을 이룬 사람은 그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던지 모두 영혼의 정토를 지킬 수 있었고 사회의 혼탁한 시류에 영합해 오염되지 않았다. 스스로 절개와 지조를 지켜 청운의 꿈을 타락시키지 않았다.

그 어떤 시대건 늘 이런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며 그들의 사적은 청사에 영원히 남아 후인들이 영원히 기념하고 앙모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호번한 24사는 바로 절개와 신념을 “부귀에 현혹되지 않고 빈천에 뜻을 굽히지 않으며 위무(威武)에도 굴복하지 않는” 절개를 기록한 열전이다. 오두미(五斗米 5말의 쌀) 때문에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은 도연명(陶淵明), 정충보국(精忠報國)의 악비(岳飛) 부자, 육유(陸游)의 민족 대의, 청대 유명화가인 정판교(鄭板橋)의 대나무 그림 등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인물들은 민족의 동량이자 국가의 주춧돌이다. 그들은 명리를 담담하게 보았고 뜻이 높았으며 백성들의 질고에 관심이 많아 후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 시대는 물욕(物慾)이 횡행하고 사회 기풍이 일락천장이다. 우주의 眞善忍 대법이 인간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과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위대한 신전문화가 부흥되는 오늘날 신운예술단의 순진(純眞)하고 지선(至善), 지미(至美)한 공연은 사람들에게 중국 신전문화의 아름다움을 펼쳐주었다. 예술 표현을 통해 진리를 전하고 보급하며 사람들이 인성, 생명, 우주의 많은 심오한 뜻과 진리를 깨치게 하여 동서방 다양한 나라,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폭넓은 감탄과 찬사를 받았다. 갈수록 많은 지식인들이 진리를 실천하고 정의를 수호하며 각종 형식으로 선을 전파하며 보다 많은 세인들을 각성시키고 있다. 바로 “속세에서 뒹군 지 얼마이던가, 오늘날 다행히 법광에 잠기나니, 생명의 영원한 순수는 선념으로 되돌아가고, 진상을 널리 전하니 정기(正氣)가 드날리네!”이다.

출처:명혜천인사이신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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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을 때는 개도 안 팬다는데--

--- 정말로 패 보면 어떻게 될까? -글: 산사람-


독자 여러분은 위의 말을 가끔 듣기도 하고 가끔 하기도 했을 것이다.


점심시간을 빼앗아 가며 일을 시키는 상사에 대해서 샐러리맨들이

볼멘소리로 투덜대며 잘 쓰는 말이기도 하고

공부는 안하고 군 것 질에만 시간을 보내는 아들을 어머니가 나무랄 때

퉁명스럽게 돌아오는 아들의 변명이기도 하다.


언뜻 들어 보면 일개 미물인 개에게까지도 생존을 위한 취식의 권리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점잖은 유학자님의 가르침에서 유래됐다고 짐작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블로그를 계속하는 동안 필자가 여러 번 인용할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적어도 옛 부터 내려오는 말 중에서 동물과 관계된 것의 상당수가 사실적 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말도 사실적 근거가 있음을 강하게 입증해주는 사건을 나는 목격

했었다.


수 십 년 전 필자의 어린 시절 고향 시골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에서 이 유명한 말이 사람이나
개의 권리 존중을 위한 듣기 좋은 도덕적 가르침의 소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밥 먹는 개를
건드리면 큰 봉변을 당 할 수 있다는 동물 행태학적인 경고의 말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우리 동네에 봉길이라는 잘 생긴 소년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아주 친해서 하루 건너 만나다시피한 관계였다.


그의 집은 부자여서 나는 넓은 마당을 가진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그 집에 동네에서 단 한 마리밖에 없는 진돗개가 있었다.

복구라 불리던 이 녀석의 성깔이 대단히 드세어서 수틀리면

아무나 물어 버리는 난폭자였다,


그래서 항상 마당 구석에 줄로 묶어 두어야 했다.

줄에 묶여서도 이 녀석은 집 식구만 빼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죽을 듯이

맹렬히 짖어 대는 바람에 사람들은 이 집 출입을 피했었다.


나와도 이미 안면을 틔워 놓은 지가 일 년이 넘었건만 복구는 나를 볼 때 마다 그 안면을
몰수하고 인상을 쓰거나 짖어 댔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저와 항상 놀아 주는 봉길이에게 만은 어리광 부리는

아기처럼 순하게 따랐었다.



어느 주말, 친구들과 고기잡이 하러 멀리까지 갔다가 어둑어둑해서

돌아 와 보니 동네가 수런수런하고 이상 했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할머니에게 동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봤다.


할머니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집단 개싸움이 있었다고 오해 할만한

대답을 해 주셨다.


“동네 개가 진돗개에게 물려서 읍내 병원에 실려 갔단다.”


동네 개는 봉길이의 아명이다.

옛날에는 아이들에게 병을 부르는 역신들이 안 찾아오도록 동네 개니 개똥이니 하는
천한 이름들을 잘 붙였었다.

대개 학교 갈 무렵이면 정식으로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는데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이
정식 이름을 갖게 되어도 버릇대로 아기 때 이름을 불렀었다.


나는 놀랐지만 시간이 이미 늦은 저녁이어서 봉길이를 찾아 가지를

못했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 사건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 그렇게 사이가 좋던 봉길이를 복구가 마구 물어 버리다니---”


나는 어머니에게 다시 물어 보았다.

어머니는 간단히 대답했다.

“개가 미쳐버린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난동을 필수가 없지 ?”


속으로 생각해보았다.

맨 날 묶어 놓기만 했던 복구가 광견병에 걸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다음 날 나는 학교가 끝나자 바로 봉길이네 집으로 달려갔다.

복구가 봉길이의 온몸에 걸쳐 만들어 놓은 상처가 열 곳이 넘어 보였다.


정 떨어지는 표현이지만 마치 복구가 마음 먹고 종길이의 전신을

잘근잘근 씹어 놓은 것 같았다.

나는 아파서 말도 못하는 봉길이에게 차마 사건 경위를 물어 보지도 못하고

치료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일주가 지나고 아직 온 몸에 딱지를 여기저기 얹은 봉길이가 학교에 나오고 서야
자세한 내막을 알 있었다.


사건이 터진 날.

복구는 매일 밥을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집에 다니러 가느라 밥을 얻어먹지 못하고
하루를 꼬박 굶은 터였다.

그래서 신경이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점심이 지나서야 돌아온 아주머니가 서둘러 밥을 챙겨주자 굶주린 복구는 미친 듯이
덤벼들어 밥을 먹어댔다.


그 앞을 지나가던 봉길이가 보아하니 복구가 저렇게 급히 먹었다가는

배탈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대나무를 집어 들고 별 생각 없이 복구의 등을 한 대 치면서

“ 야! 임마 작작 처 먹어라!” 하고 한 마디를 했다.


순간 캥! 하며 증오의 눈길로 봉길을 돌아보던 복구는 일초의 여유도

없이 봉길의 다리를 물어 쓰러뜨렸다.


그리고 사정없이 기관총 사격 같은 연속 공격을 가해 봉길의 여기저기를

물어뜯었다.

봉길의 비명 소리에 아주머니가 달려와서 복구에게 물을 한 바가지

끼얹고 봉길을 끌어 냈다.

그리고 결과는 내가 본대로의 만신창이가 다 된 봉길의 전신이었다.


봉길은 나에게 말했다

“ 형!우리집은 이제 죽어도 진돗개 안 기를 거여!”

그 진돗개는 그의 형이 광주에 사는 군대 동기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쌀 두어 가마의 돈을 지불하고 사온 것이었다.


동네에 오직 한 마리뿐인 진돗개였었고 봉길이 집안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런 훌륭한 개가 왜 너를 배신해서 이렇게 만들어놨냐고 물었었다.

열 두어 살인 봉길이가 그런 것을 알 이유가 없었다.


뭐라고 뭐라고 했는데 세월이 이만큼 흐른 뒤 내 기억에서는 다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기억하는 말이 있다.


몇 달 뒤 학교에서 봉길이를 놀리던 학교 소사(그 무렵의 관리인)가 그에게 하던 말이었다.

“ 봉길아! 저 풀 뜯는 소도 가서 한번 패 줘라. 우리도 소고기 국 한번 원없이 먹어 보게!”

봉길이는 놀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 아니라우. 울 할매가 짐승은 밥 먹을 때는 패는 것이 아니라고 혔어요.”


뒤의 봉길이의 말은 어쩐지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다.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팬다는 말을 그 후 자주 들어서였나보다.


봉길이의 봉변을 똑똑히 본 나는 그 뒤 군 생활이나 직장 생활을 할 때에는
업무 때문에 부하 직원들의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을 절대 방해 하지를
않았었다.

밥 먹을 때는 절대 방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변변치 않은 내가 온통 망가져
반창고와 붕대 투성이가 된 봉길이의 수난에서 시청각 효과로 배운 처세훈이며
꼭 후배들에게 권장하고 싶은 금언이다.


다 쓰고 블로그에 올리기 전 생각해보니 어쩐지 독자들이 궁금해 할듯하다.


봉길이를 박살낸 복구의 운명이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최후를 복구는 맞이했다.

봉길이가 병원으로 실려 가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의 형은
복구 집
옆에 있던 절구통의 떡메를 들고 휘둘렀다.


결과는 한 방으로 끝나고 무참하게 세상을 떠난 복구는 옆집의 젊은이들에게 주어져
보신탕으로
산화해 버렸다.

앞서 학교 소사가 봉길이를 놀리던 것을 이런 배경이 있어서였다.


뒷 끝이 씁쓸해서 5,60년대 인기 가수 페티 페이지가 부른 강아지 노래 하나를 유튜브에서
퍼와 선사한다.


패티 페이지는 한국의 패티 킴이 그녀에게서 예명을 빌려온 대가수였다.

지적이고 조용한 멜로디의 테네시 월츠나 체인징 파트너, 아이 웬트 유어 웨딩 등의 히트곡을
냈는데 여기 붙인 노래는 역시 그 녀의 히트곡인
“ How much is that doggy in the window?"이다.

여성 애견가들이 좋아 할만한 노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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