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관변학자, 역사 왜곡 드러날까 문자 조작해 ‘위품’ 주장

 

 

박 소장의 논문을 검토한 중국의 저명한 고문자학자인 중산(中山)대학 진위담(陳煒湛) 교수는 “홍도관 바닥부위의 '점(口안에 占)'자는 갑골문과 동일해 위각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며, 처음 발견된 것으로 그 의의를 깊이 탐구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사진=소장자 제공)

 

8월 25일 토요일 오전. 중국 은상(殷商)문화학회 왕우신(王宇信) 회장은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한국학자가 밝혀낸 고대중국의 갑골문이 적힌 홍도관(紅陶罐)이 위조된 것이라고 발표할 계획이다.


홍도관은 3000년 전 고대 상(商)왕조의 마지막 황제 제신이 별점을 친 뒤 이를 직접 새겨 넣은 도기다. 평범해 보이는 이 붉은 도기는 지금 역사의 큰 소용돌이 중심에 서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이 홍도관에 새겨진 갑골문을 해석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이 있다.


박 소장은 자신의 ‘商帝辛(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2006)’ 논문에서 홍도관의 은문(殷文) 61개 글자가 상왕조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 주왕紂王)이 주(周, BC1046~BC256)나라 무왕(武王)과의 국가 흥망이 걸린 결전을 앞두고 별점(星占, 角星占)을 친 내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한편, 홍도관은 최소 1500억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는 언론보도도 나오고 있다. 한국 내 언론을 비롯한 대만 언론에서도 상나라 유물로 밝혀진 홍관을 취재해 보도했다.


하지만, 왕우신 회장은 홍도관의 각문은 단지 장식성 문자이며 홍도관은 가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목야전투 앞둔 황제, 홍도관에 60자 새겨

 

홍도관 위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제신황제가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홍도관이 상나라 제신의 왕실유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홍도관에는 모두 61개의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점(口안에 占)’자 1개는 바닥부위에 있고, 나머지 60개 글자는 도관 견부에 단원횡행(單圓橫行) 방식으로, 우측에서 좌측 방향으로 서사돼 있다. (사진=소장자 제공)


3000년 전, 고대 중국 상 왕조의 도읍이 있던 ‘은(殷)’에서 대낮에 금성이 오방(午方:정남향)에 출현했다.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천자인 황제 역시 한 명인데, 태양이 떠있는 낮에 금성이 나타나는 것은 천하의 기강이 어지러움을 나타내며, 혁명이 일어나 왕이 바뀌는 천문현상으로 여겨졌다.


상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재한 최초의 중국 왕조다. 흔히 은(殷)나라로 부르기도 하는데, 상왕조의 수도이름인 ‘은(殷)’에서 비롯됐다. 1899년 은허(殷墟) 유적이 발굴되면서 상나라의 실체가 알려졌으며, 당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은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상 왕조는 마지막 황제 제신에 이르러 국운이 기우는데, 제신이 총애했던 비(妃) 달기가 온갖 악행을 저질러 민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강태공과 함께 상나라를 멸하려 한 주나라 무왕은 이에 전쟁을 감행한다. 이 전쟁이 바로 목야전투. 제신 황제는 국가 흥망이 걸린 결전을 앞두고 별점을 쳐 홍도관에 60자를 새겼다.

 

<전문=金見. 率辛師 亡周侯元西伯行 右師田自州西邑 祖丁乙爪 有明紀斁任 允自西伯侯. 祖丁乙! 征文夕祀, 辛丁乙師眉走 亯井, 朕御皿(蠱) 曰: 角眀, 有余征導舟0玄, 田封, 它肯御.> (0=民밑에 巴)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나(辛)의 군대를 이끌까요? 周侯西 서백의 항오와 그 우군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승하하신 조왕과 부왕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조왕과 부왕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끝가지 갈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정벌된 문의 땅 서읍은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가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해석 박대종 소장)

 

위 60개 글자는 홍도관 어깨부위에 새겨져있으며, 바닥에는 ‘점치다’는 뜻을 가진 은나라 때만 쓰였던 ‘占(口안에 占)’자 1개가 새겨져 있다. 서백후는 제신황제의 삼공 중 한 명으로 강태공을 만나 상나라를 멸하려는 뜻을 품고 주나라를 세운 문왕이다. 문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아들 무왕이 목야전투를 일으켰다.

 

박 소장 “홍도관, 상나라 황제가 직접 글자 새긴 진품”


박대종 소장은 자신의 ‘商帝辛(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2006)’ 논문에서 홍도관이 고대 중국 상나라의 도기임을 밝혔다. 그리고 위에 새겨진 문자는 사관(史官) 외에 제신 황제가 직접 새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견을 말했다.


홍도관 바닥면에 있는 ‘占’자는 학술계에서 인정한 오직 상나라 때만 쓰였던 갑골문자이다. 이 상대 ‘占’자는 갑골문이 발견된 1899년에 처음 그 실체가 드러났으며 도기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도관의 각문 중에는 ‘余(여)’자와 ‘朕(짐)’자가 있는데 두 글자 모두 상나라 왕이 자신을 지칭하는 대명사다. 이는 홍도관이 왕이 남긴 유물임을 입증한다.


홍도관 연대에 관해서는 이미 과학적으로도 검증됐다.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의 열석광(TL) 연대측정 결과 홍도관은 1700~27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왕우신 회장이 주장하듯 ‘지금 사람의 작품’이 아님이 이미 밝혀졌다.

 

왕우신 회장 “홍도관은 今人의 위품이다”


홍도관은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도 그동안 진위 논란에 시달렸다. 이는 왕우신 회장이 홍도관이 현대에 만들어진 위작품일 수 있다는 논지를 폈기 때문이었다.

 

왕 회장은 2011년 12월 홍도관을 위품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을 투고했고, 이는 지난 3월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회지 ‘은도학간(殷都學刊)’에 게재됐다. 


그가 논문에서 홍도관이 위품이라고 든 근거 중 하나는 ‘角’자였다. 홍도관에 있는 ‘角(  )’자는 밑이 터져있는 형태로 ‘뿔각’자에 해당한다. 박 소장은 ‘角明’을 ‘각성이 밝게 빛나니’로 해석했다. ‘角’자는 갑골문 사전에서 인명(人名)으로 쓰인 예가 있는데 홍도관 상에서는 첫 글자인 금성과 연결해 ‘角星’으로 풀이했다. 이는 왕만이 별점을 쳤다는 점과 이 문자들이 별을 칭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角’자는 전체 문장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왕 회장은 상대에 ‘별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언급하며 박 소장의 논문에 실린 ‘角’의 형태를 밑이 봉하도록(  → )한 뒤 “홍도관 상의  은 밑이 봉해져 있어 角(각)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중국 학자는 왜 홍도관을 부정하나

 


홍도관의 연대는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들과도 관련된다. 최첨단 천문학으로 낮에 금성이 나타난 정확한 날짜가 밝혀지면 중국정부가 1996년부터 4년 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연표를 검증할 수 있다. 만약 틀리다면 하상주단대공정은 뒤집어진다. 기원전 841년 이전의 하(夏), 상(商), 주(周) 시대의 연표를 확정시킨 하상주단대공정은 역사학계에서도 고대문명의 기원 탐구보다는 정치적 목적으로 진행돼 연구방법이나 결론에서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 金자가 금성으로 쓰인 것은  춘추전국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홍도관이 진품일 경우 더 선대인 상나라 때로 올라가게 된다.  이 경우 인도 천문학과 무관한 중국 천문학의 독자성을 입증할 근거도 마련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홍도관이 위조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왕우신 회장이 “중국 천문학은 인도 천문학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 회장이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홍도관을 위작으로 몰아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앞으로 홍도관의 진위 여부에 따라 중국·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고대사가 달라질 수 있기에 홍도관의 실체는 초미의 관심사다.

 

중국 학자가 못 푼 갑골문, 한국학자는 어떻게 풀 수 있었나

 

2008년 4월, 홍도관에 관한 홍콩 성대의 검측결과 1465년 전 유물로 확인됐다. 하지만 며칠 뒤 상해박물관은 100년 미만이라는 검측결과를 발표해 홍도관이 위조품이라고 주장했다. 양측 감정결과가 1000년 이상 차이 나 둘 중 하나는 거짓으로 보인다. 2012년 3월, 세계적 권위의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에 검측을 맡긴 결과, 홍도관이 1700~2700년 전 유물이라는 검측결과가 나왔다. 도기는 출토 후 뜨거운 태양열에 노출되거나 뜨거운 물로 세척하면 열석광연대가 감소되므로, 옥스퍼드의 결과는 홍도관이 최소 2700년 전 유물임을 의미한다. 사진은 각국에서 조사한 연대 측정 인증서. (사진=소장자 제공)


박대종 소장은 세계적인 갑골문학회 왕우신 회장이 장식성 문자라고 말한 홍도관의 점문을 해석해냈다. 박 소장은 평소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이 점이 갑골문 해석의 열쇠였다고 말한다.


60개 글자 중 첫 글자인 金이 금성으로 풀이된 것이 제신황제의 각문을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였다. 金은 보통 흙 속에 있는 쇠의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뒤의 글자인 見과 더불어 고대 천문술어로 태백주현(太白晝見)을 나타낸다. 이를 역사서에서는 보통 줄여서 태백현(太白見) 또는 금주현(金晝見)으로 나타내는데 홍도관 각문에는 낮 주(晝)자를 생략해 금현(金見)으로 기록한 것이다. 천문을 읽을 수 있는 박 소장에게 홍도관의 갑골문 해석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학자가 풀어낸 갑골문자를 중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학자가 풀지 못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중국 갑골문 학자들은 대부분 천문을 미신이라 여겨 공부하지 않으며 별점에 대한 문헌을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고대 천문학을 부정하거나 모르니 천문을 토대로 쓴 갑골문을 풀어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상나라 유물 홍도관, 왜 한국에 있을까


중국에서는 갑골문이 새겨진 유물은 비싼 값에 거래된다. 반면 도기는 깨져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헐값에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홍도관도 도기라는 이유로 중국 어느 시장에서 헐값에 나와 골동품을 수집하는 한국인 안모 씨가 여러 물건들과 함께 홍도관을 구입하게 됐다. 그저 오래된 흙그릇 정도로 여겨졌던 홍도관은 이후 여러 명의 주인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소유주에게 왔다.


현 소유주 역시 홍도관을 장식용 공예품 정도로 여겼다. 그러다 홍도관에 새겨진 문양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에 고대 토기 전문가 및 고문자 전문가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인연을 맺은 게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이었다.


홍도관을 연구한 박 소장은 “홍도관은 신기원을 이룰만한 발견”이라며 “중공(이하 중국공산당)이 진행해온 역사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고, 그들이 부정하는 중국 천문학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공 학자가 세계과학을 무시하고 거짓말과 위조로 홍도관을 위조품으로 둔갑시키려고 해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고.


그는 “학문권력을 쥔 학자들이 권력을 위해 진짜를 가짜로 둔갑시키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 다시 권력을 나눠주고 키워주는 것을 지켜봤다”며 “이는 도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홍도관이 있어야 할 곳은 중국국가박물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은 아직 홍도관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중국기관에서 브로커들을 보내 비밀리에 접촉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적과 방법이 사악하고 비상식적이라 그는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한다.
 
중공, 고대과학과 전통문화 철저히 부정


4대 고대문화 중 하나로 꼽혔던 황하문명의 주인공인 상왕조의 마지막 황제 제신의 홍도관이 오늘날 나타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고대 중국인은 하늘의 변화가 곧 땅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때문에 천문 현상과 가뭄·장마 등 기상현상에 관심이 컸다. 그 중 천문은 왕실 기밀이었다.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천재와 인재를 만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과오를 찾아 참회를 했었다.


지금 중국은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천재와 인재가 일어나고 있다. 지진, 기차 충돌, 비행기 추락, 배 침몰에서 광산의 갱이 무너지고 각종 폭발과 독가스 유출 등 사망사고와 홍수재해 등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고대 황제들이 백성과 나라를 위했던 것과 달리 중공 관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문제를 덮어 감추기에 바쁘다.


달리 보면 중국 언어학자들도 피해자다. 그들이 고대 천문학을 배우지 못한 이유는 중국의 공산체제의 집권 역사동안 이루어진 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동안 중국 고대 과학과 전통 문화를 철저히 부정하고 파괴해왔다. 휘황찬란했던 왕조들의 문명과 고대 과학을 부정하고 파괴한 것은 중공이 인민에게 전통 사상을 버리고, 인간도 하나의 사물이라고 하는 ‘유물주의’와 ‘계급 간 투쟁’에 바탕을 둔 공산이데올로기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각국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는 이 때 중국은 오래전부터 공산체제에 의해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지성·김가영 기자 valor09@epoch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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