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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회상에 해당되는 글 32건
- 2018.06.25 아카시아 꽃과 할머니
- 2012.04.21 흑 고래떼를 만난 親舊
- 2012.03.07 잘먹지 않는 아이(동화)
- 2012.01.10 유자(儒者)는 학식(學識)이 넓고 의관(衣冠)이 단정해야 한다
- 2011.10.27 고승의 억울함을 씻어 신령의 보호를 얻다
- 2011.10.27 양심(良心)은 값을 매길 수 없다
- 2010.10.19 작교선-詩
- 2009.03.13 동방무례지국
- 2008.10.13 중공군 종군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 1
- 2008.06.21 외국인이 그린 우리의 옛풍물, 인물 1
- 2008.02.15 50년전 마을풍경 5
- 2008.02.15 옛날 남대문 동대문 주변의 모습 5
- 2008.02.04 그때 그시절 쌀팔러가요
- 2008.02.04 핵, 개발 하시오!
- 2008.02.02 호랑이는 죽어서도 호랑이
- 2008.02.02 바다뱀에 물려서 세상 떠난 인천 선원 2
- 2007.09.04 아돌프히틀러 미공개 X파일 1
- 2007.07.16 1954우리생활상(5) 1
- 2007.07.16 1954우리생활상(4) 1
- 2007.07.16 1954우리생활상(3) 2
글
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절박하면서도 가슴 아픈 소원인가.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런 꿈을 갖기에는 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고 처참해서 그런 사치스런 꿈이나 희망은 다 저버린 것이 아닐까 .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사십 여년 전만 해도 쌀밥을 온 가족이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 심지어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70년대초 아카시아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5월 하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씩 받았었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 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짓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그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찾아왔노라고 말하고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쓰러지다 만 조그만 초막 같은집에는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산자락에서 따 온 흰 아카시아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아무 말도 더 못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박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천정을 쳐다보시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을 친다.
60년대초 서독에 가 있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현지에서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벌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야멸차리 만큼 무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이런 결심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증서에는 이런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돕고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가난뱅이 나라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 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함께 70년대초 성남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김 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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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알래스카의 自然과 사람들을 담아냈던 世界的인 野生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逸話입니다. 호시노에게는 도쿄에서 出版社 편집자로 일하는 親舊가 한 명 있었습니다.
大都市의 바쁜 日常 속에 빠져있던 親舊는 時間을 내어 호시노가 있는 알래스카에 찾아왔습니다. 호시노와 親舊는 작은 배를 타고 남동 알래스카의 여름 바다를 鑑賞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우연히 흑 고래떼와 마주치게 됐답니다. 그들은 고래를 천천히 따라갔습니다. 고래의 숨소리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답니다. 感激에 젖은 親舊는 이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고래 한 마리가 海面에서 높이 떠올라 춤을 추듯 空中을 가른 뒤 천천히 바다로 떨어지며 엄청난 물보라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시 고래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호시노의 親舊는 고래의 갑작스러운 跳躍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巨大한 고래를 包容하는 바다의 크기, 自然의 크기, 宇宙의 크기에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親舊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世界의 全部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이 큰 宇宙 속에서 그저 작디작은 하나의 生命일 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얼마만 한 時間이 지났을까요? 하늘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별이 이내 반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호시노는 ‘친구가 처음으로 自身이 살아가는 世界 외에 또 다른 世界가 存在한다는 것을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예전에는 무수한 별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별똥별도 쉽게 볼 수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더욱 크고 넓은 自然 속에서 自身의 存在를 感覺的으로 느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을 보아도 반짝이는 별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巨大한 自然과 宇宙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世界의 全部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欲心을 부리게 됩니다.
우리 自身은 이 世界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自身보다는 내 周邊에 많은 關心을 쏟아야 하는 理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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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게 읽었나 확인해보세요
親舊친구 自然자연 世界的세계적 野生야생 逸話일화 出版社출판사 大都市대도시 日常일상 時間시간 鑑賞감상 感激감격 海面해면 空中공중 跳躍도약 巨大거대 包容포용 宇宙우주 全部전부 生命생명 自身자신 存在존재 實感실감 感覺的감각적 欲心욕심 周邊주변 關心관심 理由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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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지 않는 아이
작가: 엘리자베드 브로조브스카
① 한수는 아주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나쁜 점이 있었어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달걀, 우유, 빵, 심지어는 맛있는 사과를 주어도 “난 먹기 싫단 말이야.”했습니다. 밥은 아예 보기도 싫어했지요.
“한수야 제발 먹어서 날 기쁘게 해 주렴.”
엄마 아빠가 아무리 타이르고 걱정을 하셔도 한수는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수가 귀여워하는 개 룸피나 고양이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엄마는 화가 났습니다.
“한수야, 너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무럭무럭 자라는 대신 점점 조그맣게 줄어든단다.
한수는 엄마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던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② 다음날인 일요일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자리에서 막 일어나 옷을 입자마자 한수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한수는 달걀만큼 조그맣게 도어 버렸습니다.
“야, 재미있는데......” 한수는 신이 났어요.
“엄마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아이가 됐어요 !” 하지만 조그마한 한수의 목소리는 삐약거리는 병아리 소리만큼 작아서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고양이 뿐이었어요.
“이것 봐라, 새앙쥐가 있네 ! 잡아서 가지고 놀아야지.”
고양이는 한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수는 깜짝 놀라서 의자 밑으로 숨어서 말했습니다.
“야옹아, 난 쥐가 아니고 한수야. 조심해. 네 발톱에 할퀴겠다.”
③ 한수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문을 열고 아줌마가 청소하러 들어 왔어요.
“야옹아, 밖으로 나가라 ! 방 좀 쓸어야겠다.”
“어휴, 살았다 ! 나 좀 꺼내서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
그러나 아줌마는 한수가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아줌마는 쓰레받기에 한수를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수가 너무 조그맣게 되어서 보지 못한 거예요.
한수는 빈 깡통과 헌 종이 틈에 섞여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까.” 한수는 쓰레기통 뚜껑을 들어 올려 봤습니다.
④ 마침 그 곳을 지나던 룸피가 쓰레기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뭘까 ?” 룸피는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먼지투성이의 한수를 본 룸피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수야, 너 거기서 뭐하니 ?”
“나중에 얘기할게. 우선 나를 엄마한테 데려다 줘.”
한수는 룸피의 등에 올라타서 목걸이를 꽉 잡았습니다.
“룸피야 빨리 달려 !” 룸피는 빨리빨리 달렸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달리느라고 그만 한수를 떨어뜨린 줄도 몰랐습니다.
“어쩜 좋아.” 한수는 울고만 싶었습니다.
⑤ 나무 오리를 가지고 놀던 여자아이가 한수를 들어 올렸습니다.
“어머나 ! 예쁜 사내아이 인형이구나.”
한수는 화가 나서 “난 인형이 아냐 !”라고 외쳤지만 여자아이는 이 말을 듣지 못하고 한수를 나무오리에 태워 호수에 띄웠습니다.
“제발 세워 줘 !”
그러나 한수의 화난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⑥ 오리 등에 탄 한수는 물결을 따라 한 시간쯤 둥둥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갈대숲에 닿아서 땅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머나, 이번엔 아주 커다란 암소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암소는 처음에는 한수를 보고 놀란 듯 했지만 곧 다정하게 한수를 들여다보고 ‘음매’ 하고 소리쳤습니다.
조그만 한수에게 그 울음 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겠어요.
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멀리 달아났습니다.
⑦ 달아나던 한수는 그만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양탄자 같았어요.
“여기서 좀 자야겠다.” 하지만 한수는 금방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양탄자처럼 보인 것은 연이었거든요
두 남자 아이들이 올린 연은 한수를 태우고 하늘 높이 떠올랐어요.
한수는 무서워 벌벌 떨면서 연을 꼭 잡고 땅으로 내려가기를 빌었습니다.
⑧ 연은 드디어 어떤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한수는 얼른 새 둥우리에 내렸어요.
“넌 누구냐 ?” 깜짝 놀란 어미 새가 말했어요.
“난 한수라고 해요. 길을 잃었어요. 그런데 배가 몹시 고파요.”
한수는 울먹거렸습니다.
“머리를 들어 봐, 내가 먹여 줄게.”
새는 한수 입에 지렁이를 넣어 주려고 했습니다.
“툇- 툇-”
그렇지만 한수는 지렁이를 내 뱉으면서도 새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⑨ “한수야, 너의 집에 데려다 주마. 내 등에 올라타서 너의 집이 어딘지 가르쳐 주렴.”
윙윙 날아가는 새 등위에서 한수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빨간 지붕이 우리 집이에요.”
드디어 한수는 집에 오게 되었어요.
한수는 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당에 내렸습니다.
“룸피야, 여기 있었구나 !”
“한수야, 너 여지껏 어디 있었니 ?”
룸피가 반가워서 멍멍하고 짖었습니다.
“뭐든지 먹으면 난 다시 커질 거야, 그러니 우선 먹을 것부터 주지 않을래 ?”
“나한테는 개밥 박에는 없는데, 아마 네가 먹기 싫어하는 것들일 거야. 고기랑 밥을 섞은 것이거든.”
“괜찮아.”
⑩ 한수는 룸피의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알 하나 안 남기고 싹싹 다 먹었다니까요.
개밥을 다 먹고 난 한수는 전처럼 커졌습니다.
“룸피야,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 뼈를 네게 줄게.”
그 날 이후부터 한수는 엄마가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맛있게 먹곤했습니다.
그래서 한수는 아주 무럭무럭 자라고 힘도 아주 세어져서, 글쎄 이 그림에서 보이는 만큼 힘이 세졌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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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 입으신 옷이 유자(儒者)의 복장입니까?”
공자께서 답하기를
“내가 어린 시절, 노나라에서 살 때에는 노나라 사람들의 관(寬)을 쓰고 대수포(大袖袍)를 입었고, 어른이 되어서 송(宋)나라에 살 때에는 흑포예모(黑布禮帽)를 썼습니다. 내가 듣기로 덕이 있는 군자가 많이 배우고 학식이 풍부해도, 그 복장은 그가 사는 곳의 풍속에 따르고 의관을 단정히 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여태까지 선비에게 또 무슨 특별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기·유행(禮記·儒行)》)
著者: 李毓秀 번역: 素 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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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때 항주(恒州) 녹천사(鹿泉寺)의 승려 정만은 계율을 잘 지키고 품행이 고결했다. 그러나 탐욕 많고 게으른 많은 다른 승려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이렇게 깨끗한 승려가 나오면 우리는 무슨 명예가 있으며 또 무슨 공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설마 온 절의 승려들이 모두 그를 따라 고행을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그들은 원한이 서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이 화상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자기들이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 가지 악 중에 음행이 으뜸이다.” 색계(色戒)를 범하는 것은 화상의 가장 큰 오점이었다. 체면을 깎아내리는 데 전문인 악랄한 중들은 이 점을 알고 문제를 크게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물증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먼저 한 폭의 그림을 몰래 정만스님 방의 상자 속에 숨겨놓고 고의로 단단히 잠갔다. 그림에는 어느 미녀가 높은 누에 올라 다정하게 살피고 있고 정만은 아래에서 색정적으로 활을 당기는 모습으로 분명히 정만이 연애편지를 양가의 부녀에게 보내 유혹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증거를 또 만들었다.
정만의 변변치 못한 제자 한 명을 교사해 조정에 보내 정만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그는 자칭 정만을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 정만이 “고승이란 허울 아래 부녀자와 간음을 했다”는 내막을 폭로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정만에게 치명적인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측천무후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즉시 대노하여 정만을 체포하여 하옥하라고 했다. 그리고 어사 배회고(裴懷古)에게 이 사건을 책임지고 정만의 흔적을 조사하여 세상을 속인 음란한 중을 주살하라고 했다.
배회고는 조급하게 일을 끝내지 않았다. 사안의 근본을 탐구해보고 나서 마침내 정만이 모함에 빠진 것을 알았다. 결국 과감하게 그를 석방하고 반대로 정만을 모함한 중들을 징벌했다. 무후는 배회고가 상주한 판결을 듣고 놀라고 또 분노했다. 노한 것은 자신이 직접 감독한 사건을 배회고가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무후는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엄한 목소리로 배회고가 법 집행을 불공정하게 했고 범법자를 관대하게 놓아주었다고 하여 위사(衛士)에게 그를 잡아 하옥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배회고는 판결 결과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소덕(李昭德)이 옆에서 중재하며 말했다. “소신이 보기에 배회고는 사건을 심사하는데 일을 경솔하게 했으니 폐하께서는 그에게 다시 심사하게 하십시오.”
그러자 배회고는 격분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반포한 법률은 친소에 따른 구별이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같은 표준을 지켜야 합니다. 폐하께선 어찌하여 소신더러 무고한 사람을 주살해 폐하의 성지를 위배하게 하십니까? 가령 정만이 정말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제가 어찌 그렇게 관대하게 놓아주었겠습니까? 소신은 법률에 근거해 공평하게 집행했으며 좋은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하고 형벌을 남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설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후는 그의 충정을 알고는 배회고를 석방했다.
배회고는 나중에 염지미(閻知微)의 부사(副使 사절단 부대표)가 되어 돌궐에 가서 화친을 맺었다. 돌궐은 사신을 겁주며 염지미에게 돌궐의 가한(可汗)을 섬기라고 협박했다. 또 배회고더러 돌궐의 직책을 맡으라고 핍박했다. 배회고는 투항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절조를 훼손하며 살기보다는 충성을 다해 죽겠소, 지금 내 머리를 잘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오.”
생사의 관두에서 돌궐은 그를 죽이는 대신 군사감옥에 가뒀다. 돌궐이 남하해 월주, 정주를 침범했을 때 배회고는 기회를 보아 도망쳤다. 하지만 배회고는 원래 쇠약한 체질이라 오랫동안 말을 타고 도망치는 고생을 감당하지 못했다. 뒤따라 온 병사가 거의 도착할 때 쯤 그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었다.
배회고는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했다. 자신이 죽어도 좋으나 당나라 땅에서 죽고 싶다는 염원을 가졌다. 배회고의 정신력이 다 고갈되어 쉴 때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 정만 스님과 유사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 길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이 길로 가시면 됩니다.” 배회고가 깨어난 후 꿈에서 가르쳐 준대로 갔더니 과연 추격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산속에서 전전하다가 마침내 병주(並州) 경계에 도착했다. 당시 병주장사(並州長史) 지키던 무중규(武重規)는 병사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방치하여 아주 흉악했는데 수하의 병사들을 마음대로 살인하여 전공으로 삼으려고 했다. 순찰병은 배회고가 온 것을 보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이리하여 배회고는 안전하게 당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배회고가 큰 난을 피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배회고가 절조를 지키고 고승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신령의 보우를 받은 것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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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농사를 짓는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동생을 불러놓고 말했다. “아우야, 나는 곧 죽을 것 같구나. 이 집과 밭은 모두 네게 남겨주마. 앞으로 부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네 혼자 힘으로 살아가거라. 또 혹 있을지 모를 불의의 일을 대비해 네게 이 상자를 하나 주마. 이 속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보물이 들어 있단다. 하지만 네가 더는 어쩔 수 없을 때 외에는 팔거나 열어보지도 말아라,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말을 마친 직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형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매일 열심히 일했고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비교적 평탄하게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 수확할 곡식이 거의 없었다. 작년에 비축해놓았던 식량도 이미 다 먹어버린 상태였다. 동생은 자신도 곧 끝장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그는 문득 형이 임종 직전 자신에게 남겨준 보물상자를 떠올렸다. 이에 이튿날 성안에 들어가 보물을 팔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동생이 성안에 들어가 보석상을 찾아가 주인에게 말했다. “보시기에 이 보배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주인이 상자를 받아 열어본 후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후 상자를 동생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당신의 이 보물은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니 다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내 보기에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 같으니 은화 20냥을 빌려드립니다. 나중에 당신에게 돈이 생기면 갚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준 것으로 칩시다. 어떻습니까?”
동생은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한 장의 종이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종이 위에는 ‘양심(良心)’이란 두 글자만 씌어 있었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고 형의 고심한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주인이 빌려준 20냥의 은화를 감사하게 받았다.
농작물이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은 돌아가는 대신 성내에 남아 자그마한 장사를 시작했다. 1년 후 동생의 사업은 갈수록 잘 되어 곧 빌린 20냥을 돌려줄 수 있었다. 동생은 또 보석점 주인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시하려 했지만 주인은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다.
이 따뜻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아주 선량하다. 이 이야기가 중국의 어느 시대에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화는 과거 중국인들이 ‘양심’을 아주 소중히 여겼으며 ‘양심’이 일찍이 중국사회에서 널리 퍼진 보편적 가치관이었음을 알려준다.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환경 속에서 사람이 양심을 팔 때는 형세가 극히 나빠 아주 위험한 때일 것이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양심에서 우러난 도움을 주었고 도움을 받은 사람 역시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은혜를 잊지 않았다. 총명한 형이 종이를 남겼을 때 당시 사회에는 일종의 신뢰와 긍정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양심이 사람의 생명 중에서 생명과 마찬가지로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의 도덕관과 가치관에도 서서히 변화가 발생했다. 사람의 관념은 사람의 행위를 이끌어내는데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두 ‘양심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고 여길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지금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단지 우스갯소리로 여겼을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문화에 세뇌당한 지금의 중국인들은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양심’이란 두 글자는 이미 이 사회에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국사회를 보면 며칠 전 포산(佛山)에서 웨웨(悅悅)라는 두 살 여아가 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의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쓰촨(四川)에서 또 5세 아동이 차에 반복해서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린 웨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던 행인들이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여러 번 차로 친 쓰촨의 운전사에 대해 전 세계가 모두 비난하고 있다.
냉담하고 마비되어 인성이 없다는 비난이 중국인들과 중국이란 나라에 씌워졌다. 일찍이 양심을 소중히 여겼던 중국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중국인들은 대체 어쩌다 지금과 같이 이 모양으로 변했단 말인가? 이 사회는 대체 어찌 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이 사회를 비난할 때면 모두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가 비난해서 좋아졌는가? 우리 중국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인은 일찍이 양심을 중시하던 민족이었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던 민족이었으며 도덕이 천하에 가득한 그런 민족이었다. 그러나 ‘양심은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보편적 가치관으로 지녔던 중화민족은 지금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제라도 마땅히 깨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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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디카여행 발길닫는대로>
鹊桥仙작교선 - 秦观 진관
옅은 구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데
별똥별, 이별(離別)의 한(限) 전(傳)하러
아득한 은하수 남몰래 건너네.
가을바람 영롱한 이슬 내릴 때 한 번 만남이
인간 세상에서 무수하게 만남보다 나으리.
부드러운 애정은 물과 같고, 아름다운 기약은 꿈만 같은데
어찌 차마 고개 돌려 오작교 밟고 돌아갈까
서로의 사랑 영원하다면, 아침저녁 아니 만난다 한들 또 어떠리?
직녀(織女)는 실구름 곱게곱게 수놓고
견우(牽牛)는 그리운 마음 전하려
기나긴 은하수 조용히 건너나니
가을밤 한 번 만남이 인간세상의 무수한 만남보다 나아라.
부드러운 情은 물과 같이 흐르고, 만남은 꿈과 같아
오작교(烏鵲橋) 돌아갈 길 차마 못 오르겠네.
서로의 情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어찌 朝夕의 만남을 더 구하랴?
<남녀의 사랑을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가져와 시로 읊은 것으로 북송때의 시인 진관이
도인(道人) 탁인항과 義를 중시하고 허위를 증오하는 여도적(女盜賊) 옥나찰과의 비련(悲戀)을 그린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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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약 2300년 전에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먼 옛날부터 동쪽에 동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단군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태어나니 아홉 개 부족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일찍이 그 나라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통한 학자가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黃帝·중국의 시조)가 (그에게서) 글을 배우고 내황문(內皇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염제(炎帝) 대신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 그 나라 사람인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다.(중략)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純厚)해서 길을 가던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선부자(先府子·할아버지) 공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은 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백성에게 생활방법과 윤리·도덕을 가르친 사람이 모두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길을 양보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남녀가 유별한, 이른바 깨친 민족이라는 지적에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같으면 태초에 우리 민족에게 생활과 윤리·도덕의 지혜를 가르친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지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금 그런 ‘예의를 아는 사람들’의 후손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겪는 상황에 비추어 보면 공빈의 글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황당한 칭찬이거나 사실을 잘못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훌륭했던 우리 조상의 덕목이 역사의 세파에 씻기면서 예의가 부족한 ‘다른 민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예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고사하고 무례와 뻔뻔함과 폭력과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경우를 너무도 자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보면 길을 ‘양보’하기는커녕 서로 먼저 가려고 어깨가 부딪치고 신발이 밟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심시간 좁은 길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서너 명의 직장여성들 때문에 마주 오는 사람은 옆으로 비켜설 수밖에 없다. 단체로 움직이는 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다른 행인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다른 행인에 조그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무례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건물을 드나들 때 문을 열면서 뒷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다. 무심코 앞사람을 쫓아가다가는 닫히는 육중한 문에 코를 다치기 십상이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살짝 끼어들어 먼저 새치기하듯 들어서는 젊은이도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올라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먼저 타려고 엘리베이터 문을 가로막다시피 서있는 것은 예사다. 전철역에서 문이 열릴 때도 마찬가지다. 내린 다음에 타도 늦지 않는데 먼저 타려고 밀고 들어오는 젊은이들, 아줌마들을 매일 보지 않는가.
식당예절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지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고 목소리를 낮추는 사람은 병신 되기 일쑤다. 식탁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양말 벗고 앉는 사람들, 의자에 신발 벗고 올라앉는 사람들, 소리소리 지르며 떠드는 사람들, 옆 테이블 사람의 등을 마구 건드리며 나다니는 사람들 등등 다른 손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음식이 늦거나 잘못 조리돼 항의하면 “바쁜 시간이니 이해해달라”는 주인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 누가 식당주인 이해하려고 음식점에 가나?
자동차 예절은 예절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난장판이다. 끼어들기, 마구 추월하기, 좌회전 차선에서 직진하기, 사소한 접촉사고를 놓고 복잡한 출퇴근거리에서 차 세워놓고 언쟁하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치명적인 중앙선 넘기, 신호 무시하기, 건널목 그냥 지나치기, 음주운전 등 남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불법행위도 이제는 경찰조차 별로 개의치 않는 일상사가 되고 있다. (카메라만 설치해서 벌금 벌면 다인가?)
인도에 세워놓은 차들은 ‘예의’를 모른다. 보행자가 간신히라도 피해 다닐 수 있는 대로변 인도는 좀 나은 형편이다. 좁은 골목길에 세워놓는 차들은 ‘예의’의 범주를 떠나 화재, 119 등 ‘비상시’를 가로막고 있다. 그나마 ‘연락처 쪽지’를 붙인 차들은 가뭄에 콩나기다. 결혼청첩장도 심부름시켜 돌리는 세상이다. 공사중의 경고 표지판 내용도 명령형이다. ‘줄서기’라는 것이 언제 우리에게 있기는 있었나? 미국 여행 때 10여분 줄 서서 겨우 표를 샀는데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 뒤돌아섰더니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맨 뒤로 다시 가라고 해 머쓱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예의없음을 통탄해 마지않을 것은 욕설과 폭력이다. 인터넷과 국회가 그 대표적 집결지(?)다. 인터넷 댓글에 들어가보면 “아 그런 욕도 있었나”하고 배울 정도로 온갖 욕설과 상소리가 넘나든다. 욕 중에도 자기가 안 보인다고 해서 지껄이는 욕이 가장 저질이다. 요즘의 우리 국회는 욕설과 폭력이 합동으로, 입체적으로 난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반예의지소(反禮義之所)다. 그들이 ‘선량(選良)’이라니, 그래서 그들의 무례는 더욱 돋보인다.
이런 사회적 무례의 범람과 공동체로서의 무질서는 우리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우리의 삶의 질을 저질로 만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플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고맙다’ ‘미안하다’ 하는 마음가짐을 늘 지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핵심은 교육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를 그르쳤을 때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도록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이웃들로부터 냉대 당할 것이며 마침내는 소외 당할 것이다. 정치지도자, 사회 각계의 지도층, 교육자, 시민단체가 모두 나서서 ‘예의 되찾기 운동’을 촉구하고 나설 때다. weekly chosun 2038호에 게재된 조선일보고문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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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는 옛 전쟁터에서 다시 봄날이 왔다.
짚차를 타고 도주하던 미군 병사들(차 양쪽의 손을 든 사람들)을
사로잡은 중공군 병사들.
중국 인민지원군의 시각으로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집이 나왔다.
<영광스런 중국 인민지원군>(중국 해방군화보사, 1959년)의
사진과 사진설명을 따서 펴낸 [그들이 본 한국전쟁](눈빛출판사)이 그것.
원저는 중국 인민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그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홍보를 위한 시각이 다분하지만 압록강 도하,
그들에게 잡힌 미군포로, 인해전술때 불어제낀 날라리,
폭격을 피하기 위한 물밑다리 등 우리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의 나머지 반쪽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 끝 무렵 후방에서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뛰어들어 활동한 사실은 이채롭다.
전투가 없는 날 중공군 병사들이 민가 아낙네의
봄 밭갈이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북한 위문단이 지원군 시공부대에 와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사업에 투입된 중국군 병사들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북한 주민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지원군을 위해 밥과 물을 나르고 있다.
1951년초 눈 덮힌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맞춰 돌진하는 중국군 병사들.
김일성이 직접 중공군 1차 귀국 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갓을
지원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열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중공군 귀국장병들을 환송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의 한 노인이 지원군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출정한 중국 민간인 수송대의 우마차 행렬이
눈밭 속에서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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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초상. 이 그림은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인들.
한국인을 총살하는 일본군.
일본군과 한국인들.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루스벨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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