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늘에 떠있는 지구별이라는 곳에 산다. 지구 아래쪽에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무슨  시설물도 없이 공중에 떠있다. 조물주가 지구를 만들었어도 태양과 산소가 없으면 사람이 살 수도 없을테니, 태양을 먼저 만들고 지구행성을 만들 때 산소를 내뿜는 식물도 같이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식물이 너무 범람하지 않도록 풀을 먹는 동물도 같이 만들었을 것이다. 태양이 있다고 하더라도 열과 빛을 언제나 발산해 지구행성까지 도달되도록 해야하고, 또 지구표면 온도가 살기에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식물도 있고 동물도 있어서, 아름다움도 알게되고, 동물의 먹이사슬을 배워가며 무난히 살수가 있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만족하니 또 문제가 생겼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으로 그믐때인 밤이 되면 어두워서 다니기가 아주 불편했다. (밤이 어둡다고 하늘에 떠있어야할 달을 정지상태로 고정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지되어 있는 위성이나 행성은 하늘에서 자전,공전을 할 수 없어서 하늘에서 존재하는 자체가 불가능 하기 때문, 그냥두면 제멋대로 굴러다녀서 위험하다)

그래서 조물주님에게 밤이 되면 너무 캄캄해서 밤길이 위험하니 밤에도 좀 다니게 해주세요 !” 하니 조물주왈 “그렇거든 너희들이 직접 달을 만들거라!” 할 수 없이 달은 지구의 과학자가 만들었다고 한다. 지구에서 만들다보니 달은 보이는 면만 늘 지구를 향해 비추고 있어 음력 그믐이 되면 어두워 달이 보이지 않다가, 보름이 되면 온전히 빛나는 달이 나타난다. 달은 만들 때 지구에서 보이는 태양의 크기와 비슷해야 사람마음이 안심이 되므로 (해보다도 훨씬 큰달을 하늘에 띄워놓으면 놀라서 쳐다 보기도 힘들고 너무 밝으므로) 달의 크기를 계산하여 완성해 하늘에 쏘아 올렸다고 한다.(낮에는 태양이 있고 밤에는 태양크기만한 달이있는 세상이 되었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무엇이나 다 진리이다. 말세가 되면 예수님은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하였고, 부처님은 메테아(미륵)부처님이 나타나신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때가 되면 어떤 징조가 나타나는데 바로 우담바라 꽃이 필거라고 하였다. 1980년대쯤 우담바라가 처음 나타났으니 이미 메시아는 재림하였을 것이고 세상 어디엔가 분명 존재하고 계실 것이다. 진리를 펼치는 분이시니 분명히 인류와 평화를 위해 좋은일을 하실 것이고 사람들 앞에 이미 나타나 자신이 메시아임을 은근히 밝히셨을 법도하다.

종교와 정치를 화제로 꺼내지 말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모이는 명절에는 이 화두를 꺼내지 말아야 한다.

우주(宇宙)공간은 본래 선량하고, 바로 진、선、인, 이런 특성을 가진 것으로, 사람이 태어나서는 宇宙와 같은 성질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주특성(  眞、善、忍, )에 동화되어 살아가야 복을 받을 수있고,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란 진실한 것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 ()이란 양심에 따라 살며 착한 마음으로 양보하는 것이고, ()이란 참는 것인데, 손해보아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실천하고 살면 복을 받아 편하게 산다고 한다.

거짓말(眞의 반대되는 행동)하여 남을 속이면서 돈을 벌면 나중 비참한 꼴이 된다.  살면서 나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나쁜짓(善의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나쁜 에너지가 쌓이고 그것이 병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또 살면서 남을 위해 헌신하고 베푸는 사람은, 복이 쌓여 악한 질병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사람은 윤회한다고 했으므로 사람은 윤회할 것일테고,  이생에서 착하게 살고 있더라도  전생에 지은 업()이 많으면, 중병(악질)에 걸릴 수가 있어, 종종 사람들은 착한 사람도 병에 걸리는데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진선인을 수련하는 단체가 있다면 그거야 말로 분명 신의 길을 가는 사람일 것이다.

중국 대법제자 화간소인(花間素人)
【정견망】

1.

나는 1950년대 말에 중국에서 태어났는데 당시로서는 행운아라고 말할 수 있다. 행운을 말하자면 나는 가정에서 득을 얻어 일부 고전명작들과 중국 및 외국 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때 학교에서는 정상적인 수업이 없어서 독서할 시간이 많았다. 전통문학 작품은 모두 당시 비판대상이었는데, 책을 많이 읽자 사회에서 선양하는 것과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전통문화와는 모두 배치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독서는 나로 하여금 이 시기를 충실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학작품 외에도 나는 또 일부 과학책들을 읽었는데 가령 《10만 가지 왜 그럴까?》 등이다. 또 《우주의 신비》라는 책에도 심취했다. 이 안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신기한 숫자와 신기한 현상들로 가득한데 이 세상은 정말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책을 읽으니 자연히 사상이 넓어졌고 매사에 늘 자신의 주관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 연대에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는데, 소위 군자는 위험한 담벼락에는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시사를 알아야 준걸이었다. 그러나 그 황당했던 시대에 일부 일을 알고 경험한 것이 내게 인생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게 했다.

나는 부모님과 인연이 좋았다. 특히 어머니는 늘 아무런 대가 없이 이웃이나 동료 친구들에게 옷을 만들어주셨고, 자투리 재료들을 모아 방석을 만들어 나눠주곤 하셨다.

문화혁명 시기 우리 집을 수색할 때 수색한 것이 큰 차로 하나가 나왔는데 이튿날 일부를 다시 돌려주었다. 외가는 원래 대자본가 집안이라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많은 혼수품들을 가져오셨다. 되돌아온 것은 옷과 일부 정교한 생활용품들이었고 갖다주지 않은 것은 다 돈이 되는 금은이나 보석 등이었다. 어머니는 금은 재화는 모두 몸 밖의 물건이니 먹거나 마실 수도 없고 이런 것들은 살아가는데 살 수도 있고 옷은 고쳐서 너희들이 입을 수 있다고 하셨다. 또 그들이 이렇게나마 사정을 봐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셨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입었던 옷은 전부 어머니가 혼수품으로 해온 옷들을 수선한 거였다.

한편 부친은 중의사(中醫)이자 독실한 도교(道敎)신자셨다. 일찍이 현지의 독실한 동료들과 함께 도덕회(道德會)를 만들고 사숙(私塾 사설 학교)을 만드셨으며 학생이 돈이 있든 없든 모두 받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자 수입이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고 도덕회가 무너지게 되었다.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서 또 아버지 형제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아버지는 끊임없이 재산을 파셨다.

어떤 사람은 우리 아버지더러 집안을 망쳤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반드시 복을 받을 거라고 했다. 1949년 공산화가 되자 집에 그나마 남은 거라곤 우리가 살던 집과 약간의 토지뿐이었다. 그래서 출신성분을 분류할 때 우리는 빈농(貧農)으로 분류되었다. 아버지는 늘 덕을 쌓고 선을 행하며 고생을 겪는 것은 복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아버지가 남기신 재산이었다.

부모님은 우리들에게 늘 "재물은 몸 밖의 물건이지만 머릿속에 담은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수 있으니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시대에 비록 사는 게 어렵긴 했지만 가정 교육은 또 내게 아무런 증오도 남기지 않게 했으며 나더러 세상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알게 했다.

《서유기》에 당승(唐僧)은 구구 81난을 거치며 진경(真經)을 얻고 정과를 얻어 부처가 된다. 나는 늘 이것이 진짜라고 여겼고 수련해서 부처가 되면 장생불사(長生不死;오래살고 죽지않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1970년대 말~80년대 초 대륙에서는 기공열풍이 일었다. 나는 1982년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서 조교로 있었다. 대학은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는 곳이었는데 중의학, 기공, 특이공능 등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확실히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공과 특이공능을 연구했고 모두들 깊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당시 나도 기공에 대한 흥미가 있었고 심지어 내 전공보다 더 관심이 있었다. 나는 거의 늘 학교 도서관에서 기공 관련 책을 보았는데 이런 종류의 서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흐릿하게나마 이것은 부처를 수련하고 도(道)를 닦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알았다. 한동안 나는 특히 티베트불교를 알아보고 싶다는 관심이 생겼고 또 티베트에 가서 일을 하려는 생각도 했다. 때문에 나는 몇 달간 도서관에서 티베트발전사를 공부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티베트 문화의 연원과 발전 및 형성, 종교는 완전히 티베트인들 스스로 체계를 이룬 것이라 언어를 모르면 깊이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는 이에 이런 생각을 포기했다.

1980년대에 나는 줄곧 비교적 영향력이 큰 몇몇 기공문파(門派)에 관심을 가졌고 기공잡지를 수집했다. 하지만 기공계의 일부 현상에 나는 또 아주 미혹되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했던 어떤 기공사는 연속으로 몇 차례 기공보고회를 가졌고 사람들에게 기를 내보내 병을 치료해주었는데 그 후 피를 토하고 머리가 빠졌다. 또는 한바탕 크게 앓거나 심지어 1년에 4명의 가족을 잃기도 했다. 나중에 이 기공사는 곧 소리 없이 사라졌다.

당시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공법(功法)이 있었기에 나는 시종 어떤 것이 적합한지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 연구실에 몇몇 교수들은 무슨 공을 연마하는지 모르겠지만 자발공(自發功) 동작이 나타나 학교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나는 이런 연마법은 그리 고상해보이지 않았고 모양이 말이 아니라고 여겼다.

나중에 한 중의사가 쓴 문장을 보니 일종의 참장공(站樁功)을 소개했다. 저녁에 나는 곧 연구실에서 어떤 사람에게 이 공을 배웠는데 참장을 한 후 몸이 아주 가볍고 편해졌다. 하지만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연마하는지 전혀 몰랐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중순까지 10여 년간 나는 수많은 공법을 접촉했지만 대개는 사이비였다. 내가 보기에 오직 이 가장 간단한 참장만이 그래도 괜찮았다.

1989년 졸업생들을 데리고 실습하면서 나는 직접 북경에서 89년6.4 천안문항쟁을 겪었고 마음이 몹시 답답했다. 당시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어떻게 하다 보니 포기했다. 그러나 6.4를 겪은 후 대학은 온통 잿빛이었고 걸핏하면 정치학습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했다. 게다가 감정도 뜻대로 되지 않자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그러다 1990년대 초 나는 대학을 떠나 어느 국가직속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업무환경은 변했지만 기공에 대한 나의 관심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1980년대 전학삼(錢學森)이 인체과학연구회를 주관하면서 인천(人天)과학에 대한 개념을 제출했다. 나는 기공은 특이공능을 포함하며 이 안에는 분명 사람들이 모르는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고 여겼다. 때문에 그것을 연구하려는 생각을 줄곧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직장에도 기공 애호가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모두에게 연공을 가르쳐주었다. 그가 연마한 것은 바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족제비가 달에 비는 것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연마하면서 또 말을 했다. 나는 진작에 이 공을 알았지만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많은 동료들이 모두 그를 따라 연마했고 모두들 나를 끌어들였다. 체면 때문에 나도 두어 번 그들을 따라 배웠다. 의외로 불과 두 번 따라했을 뿐이었지만 내게는 막대한 고통을 초래했다.

내 신체에 이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아주 특별했는데 본래 점잖았던 내가 밤만 되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독방으로 쫓겨났다. 직장 숙소에서도 나는 독방에 살았다. 청소부가 이른 아침 거실을 청소할 때 내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이렇게 오래 지나자 늘 온몸이 무기력하고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매달 나는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약(藥)을 샀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동료들도 내가 날마다 말라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날마다 억지로 버텨가면서 일을 했지만 내 몸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잘 몰랐다. 동료와 친구들도 모두 나 때문에 큰 타격을 받았다.

한 대학 친구는 주역을 연구했는데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마(魔)에게 포위된 것이라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번은 한 학교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저녁에 나를 데리고 옥상에 가서 바람을 쐬었다. 나는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사실 죽는 게 낫겠다 싶었고 뛰어내리면 모든 번뇌가 끝날 거라고 했다. 그가 놀라서 나를 바라보자 나는 안심하라고 하면서 쉽게 죽진 않으며 다만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또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2.

1996년 5월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건물에서 내려와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갔다. 슈퍼에 가는 길에 작은 서가가 있었는데 낡은 책들이 있었다. 책 중에 남색표지의 한 책이 아주 특별해서 내가 가서 한 권을 꺼내보니 제목이 《전법륜》이었고 또 음양어(陰陽魚 :태극을 의미)가 있었다?

나는 신속히 목록을 한번 훑어보았고 또 목차 앞부분에 있는〈논어〉를 빨리 읽어보았다.

“불법은 가장 정심한 것으로…….”

나는 곧 머릿속이 쾅 울렸다. “불법(佛法)!!!” 나는 곧 책을 들고 12위안을 주고 한 권을 샀다.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밤을 새워가면서 단번에 읽었다.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전혀 피로하지 않았다.

낮에 근무하다가 시간이 나면 나는 또 이어서 《전법륜》을 읽었다. 책을 볼 때는 매 구절마다 다 아는 것 같았지만 책을 덮기만 하면 머릿속이 온통 공백이었다. 책에서 말한 것은 다 전에 내가 접촉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연속으로 3번을 보고 나서 일부 개념이 서서히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기공은 수련이고 파룬궁은 불법(佛家의 法)이며 고층차로 사람을 이끄는 것으로 “고층차로 공(功)을 전함은 무슨 문제인가? 그것은 곧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 아닌가?”(《전법륜》)

오직 부처님만이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 그럼 이분은 진짜 부처님이 세상에 내려오셨단 말인가! 사람이 된 목적은 반본귀진(返本歸真)이며 또 어떤 사람은 연공해도 병이 낫지 않는가? 후과는 무엇인가? 이때 나는 마치 큰 꿈에서 막 깨어난 것 같았는데 다년간 품었던 의혹과 바람이 모두 이 책 속에 답이 있었다.

나는 곧장 슈퍼로 다시 가서 가족들을 위해 몇 권을 사려고 했다. 그러자 슈퍼 직원은 이 한 권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디서 책을 가져왔는지 물으며 몇 권 더 주문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직원은 우리 슈퍼에서는 책을 팔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일순간 멍해졌다. 이 《전법륜》은 그럼 바로 나를 위해 준비된 거란 말인가? 나는 평소 직장에 출근하는 것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다. 만약 아래층 슈퍼에 이 책이 없었다면 내가 어디에 가서 책을 구한단 말인가? 몇 년이 지난 후 매번 내가 법을 얻은 경력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곤 한다.

바로 사부님[이 책을 지은 저자를 사부(스승)로 칭함]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에게 문 앞까지 가져다주었다.”(《전법륜》)

《전법륜》이란 이 천서(天書)를 얻은 후부터 나는 날마다 책을 보았다. 대략 20여 일을 본 후 어느 날 낮의 일이다. 내가 여전히 《전법륜》을 펼쳐 읽는데 막 몇 페이지를 보던 중 온몸이 마치 무언가에 묶인 것 같았다. 이때 나는 아주 분명하게 고양이 크기의 2개의 검은 그림자가 내 몸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머리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또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역시 한낮이었는데 나는 전처럼 《전법륜》을 펼쳤다. 몸이 또 뭔가에 묶인 것 같은 상황이 나타났는데 이때 내 몸에서 또 돼지보다는 크고 소보다는 작은 한 검은 그림자가 나갔고 나는 또 머리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일을 하고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거의 전부 잠에 취했다. 낮에는 《전법륜》을 봐도 졸리지 않았지만 퇴근해서 다시 《전법륜》을 보기만 하면 졸렸고 마치 신생아처럼 잠이 들었다.

약 석 달간 자고 나서 나는 비로소 정상적인 휴식시간을 회복했다. 동료들도 내가 풍만해진 것을 보았고 모두들 다 신수가 좋아졌고 기력이 넘쳐 보인다고 했다.

《전법륜》이란 이 천서를 읽고 나는 상사람(보통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아주 많은 이치를 알게 되었으며 아주 많은 천기(天機)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전법륜을 만나기전 나는 고생스레 십여 년간 도를 구하다 도리어 부체(附體)를 초래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 부체는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만약 그것이 당신 몸에서 일찍 떠난다면 당신은 곧 사지가 무력해질 것이다.”(《전법륜》)

“만약 그것이 당신 몸에서 늦게 떠난다면 당신은 곧 식물인간으로서 후반생에 당신은 오직 숨만 남아 침대에 누워있을 것이다.”(《전법륜》)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이 관념이 옳지 않고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번거로움을 불러온다.”(《전법륜》)

이 한 층의 이치를 알고 나서 나는 다년간 지니고 있었던 주변의 기공서적과 기공잡지를 전부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전에 먹던 약과 보조제 2서랍도 모두 버렸고 이후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천년에 정법을 얻지 못할지언정 하루라도 야호선(野狐禪)은 닦지 않는다.”(《전법륜》)

그러나 사람의 두 눈(육안)으로 어디 가서 진짜와 가짜를 알겠는가! 오직 수련하려는 바램만 있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다. 금생금세(今生今世)에 정법수련을 얻을 수 있는 이것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운이다.

3.

1996년 11월 즉 《전법륜》이란 천서를 얻은 지 반년이 지난 후 나는 연공장을 찾아갔고 처음으로 단체연공에 참여했다. 첫날 동작을 배우는데 익숙하지 못해 나중에 나 혼자 연습했다. 3장 관통양극법(貫通兩極法)을 연마할 때 아랫배부위에 뭔가 휙휙 돌아가는 것을 느꼈고 나는 사부님께서 내게 파룬(法輪)을 넣어주셨음을 알았다. 나도 사부님이 계신다, 나를 인생이란 늪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이끌어주시는 대도(大道) 사부님이 계신다. 이후 법공부와 연공은 나의 일상이 되었다.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인생과 물질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완전히 변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는 인류가 줄곧 탐색해왔지만 아직 답을 얻지 못한 궁극적인 문제지만 《전법륜》을 배우자 쉽사리 해결되었다.

《전법륜》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라고 했고 심성(心性)수련이 생명의 층차를 제고하는 관건이라고 했다.

《전법륜》은 또 나로 하여금 진정한 수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수련하는지 명백히 알려주었다.

“당신에게 한 가지 진리를 알려주겠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수련중의 매 걸음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어떤 문제를 만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책속에선 조금의 모호함도 없이 똑똑히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는 가장 쉽고 평범한 언어로 사람이 어떻게 성불(成佛)하는지 고심한 도리와 천기를 남김없이 말씀하셨다.

도가는 무위(無爲)를 중시하고 《도덕경(道德經)》에서는 무위로 다스림을 말한다. 그러나 무위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는 나로 하여금 물질세계 속의 일체는 다 정해진 운명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크게는 우주・천체 및 세계의 변화에서부터 작게는 세간에서 조대(朝代)의 교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사람의 일생에 무엇을 겪는지 등 이 일체의 일체는 다 사람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인연관계에 의해 촉성된 것이다.

만약 우주 진선인(真善忍) 특성에 동화해 개인의 사욕(私慾)이 없고 개인의 바람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무위다. 반대로 인위적인 것이 많아지면 곧 고급생명의 배치를 교란해 업(業)을 짓게 된다. 업을 지으면 곧 갚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고난이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므로 수련에서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르라고 거듭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이치다. 왜냐하면 당신이 노력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당신의 생명 중에 이것이 없는데 사회 중에서 본래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당신이 얻는다면, 당신은 남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남의 것을 빚졌으면 업을 지은 것으로 업을 지었으면 곧 갚아야 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업무에서든 개인감정에서든 도처에서 나는 어떠어떠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이다 라고 하는데 이는 완전히 욕망에 이끌리고 명리(名利)에 납치된 것이다. 바로 늪에 발이 빠진 것처럼 빠질수록 더 깊어진다. 파룬따파 수련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명백히 살게 했고 또 사는 것이 가뿐하게 해주었다.

수련 후 나의 가장 큰 변화라면 더는 소위 시사에 관심이 없어졌다. 우리 직장의 일인자는 퇴직한 대학총장인데 많은 직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석사나 박사 경력자가 비교적 많았고 대학교수도 몇 명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문화혁명을 거쳤고 젊은 사람들은 6.4를 거쳤다. 모두들 함께 잡담하며 마음속 불만과 시국에 대한 견해를 발설하곤 했다.

수련 후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나는 그저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닦고 내가 맡은 업무를 잘하면 그만이었다. 동료들이 나를 보면 늘 한 권의 책을 들고 있으니 모두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업무 중에서 나는 힘껏 대법의 요구에 따라 했고 늘 자신을 수련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직장 직원들은 거의 모두 외지에서 왔기 때문에 기숙사에 산다. 때문에 장거리 전화를 걸지 않을 수 없다. 직장에서는 매년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한해 사적인 통화도 회사에서 비용을 부담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평소 사적인 전화는 자신이 요금을 부담해야 한다. 자기 부담이라곤 하지만 따로 영수증을 끊지도 않고 또 돈을 받는 사람도 없었다. 수련 후 나는 매번 개인통화를 하면 기록을 남기고 영수증을 끊고 경리에게 돈을 내곤 했다. 또 대법자료 복사가 필요하면 밖에 나가 내 돈을 주고 출력했고 회사 장비를 이용하지 않았다.

수련 후 나의 업무태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나는 직장에서 비교적 중요한 부서를 주관했는데 일찍이 직장 법률고문과 협조해 두 차례 소송을 진행한 적이 있다. 일반적인 이치에 따르자면 직장을 대신해서 하는 소송이라면 완전히 회사 이익의 입장에서 다퉈야 한다. 하지만 수련 후 나는 자발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 실사구시(實事求是)했다. 성의를 갖고 상대방과 소통했고 매사에 적정한 선에서 멈추며 지나치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두 소송은 모두 쌍방이 화해해서 종결되었고, 나는 소송 상대방 및 그 변호사와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직장 상사도 만족했다.

비록 일 자체가 수련은 아니지만 수련인의 경지는 업무 속에서 표현되어 나온다. 내게는 명확한 인생목표가 있으니 업무 중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마찰이나 쟁투하며 다투는 일들이 자연히 아주 줄어들었다. 동시에 또 남을 위해 생각하는 즐거움을 체험했고 선(善)과 인(忍)의 힘을 체험했다.

우리 직장 총재 비서는 줄곧 내 자리를 노려왔다.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자 동료들 사이에 나에 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는 내가 늘 미국과 편지를 주고받는 걸 봤다면서 거짓말을 했고 내가 원래 사생아로 친부가 미국에 있다는 등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니 동료들이 나를 보는 눈빛에 일종 기이한 미소가 있었다. 어떤 동료가 내게 그가 나를 웃음거리로 삼았다고 알려주었지만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며칠 후 우리 직장에서 일하던 그의 처제에게 갑자기 위급한 증상이 생겨 바르톨린선 수술을 받아 병원에 한달 정도 입원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입원한 지 처음 3일 사이에 직장의 여자 동료들이 모두 병원으로 그녀를 보러 갔다. 4일째 되는 날 남은 것은 나와 사무실 주임 둘 뿐이었다. 주임은 내게 이 일은 하루나 반나절의 일이 아니니 그녀의 가족에게 연락해 사람을 불러오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집에서 사람이 오려면 휴가를 내야하고 또 왕복 비행기 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우리가 가까이서 그녀를 돌보면 큰 번거로움이 없다고 했다. 하루 두 끼 정도는 회사 식당에서 제공하면 되고 빨래는 직장 세탁기를 쓰면 되니 그리 힘들지 않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매일 두 차례 병원을 오가며 그녀를 도와주었고 그녀가 식당 밥에 질려하면 좋아하는 음식을 사다주곤 했다. 그녀가 퇴원할 때까지 이렇게 했다. 나중에 그녀의 언니(총재 비서의 아내)가 따로 내게 전화를 걸어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 일을 거친 후 총재 비서는 내게 사과했고 이후 업무에서도 나와 협력해 도와주기 시작했다. 직장 동료들도 모두 나의 자질이 좋고 도량이 크다고 했다.

나는 또 수련을 통해 대법의 신기(神奇)를 체험했다. 파룬따파는 기점(基點)이 높아서 올라오자마자 대주천(大周天)이 통한다. 나는 연공한 지 얼마 후 건곤주천(乾坤周天)과 묘유주천(卯酉周天)이 모두 통해 정공(靜功)을 연마할 때 머리가 흔들렸다.

한번은 퇴근 후 숙소에 가니 10여분 정도 시간이 남아 관통양극법을 연마했다. 연공을 끝낸 후 몸이 곧 공중에 떴는데 무게감이 없었고 마치 신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입구로 걸어가자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밖으로 나왔고 그 후 돌아올 때도 문을 열고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나가려고 생각만 하면 나갔는데 사실 오직 일념(一念)이 나오기면 하면 돌아왔고 아울러 걷는 느낌도 없었다. 전체 과정에 신체의 존재가 없었지만 나는 자신의 신체가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은 모두 이런 신체가 존재하지 않고, 그는 떠오를 수 있으며, 그는 또 크게 변하거나 작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사람에게 이런 신체, 우리 이 육신이 있게 했다. 이 신체가 있은 후, 추워도 안 되고, 더워도 안 되며, 힘들어도 안 되고, 배고파도 안 되는데, 어쨌든 고생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신체가 없으면 이렇게 아름답고 오묘한 것으로 나는 한 차례 아주 착실하게 신기한 느낌을 체험했다. 사람이 부처로 성취됨은 이렇게 아름다운 일인데 내가 이를 만났으니 버리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4.

1999년 이후 나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한 중학교 동창이 내 상황을 알고는 내게 이렇게 나무라듯이 말했다.

“과거에 우리 중학교에서 대학에 들어가고 또 교수가 된 사람은 너뿐이라서 동창들이 모두 너를 부러워했어. 그런데 무슨 파룬궁을 연마하다가 직장마저 잃었니. 네가 보기에 네가 함부로 사는 게 아니니?”

하지만 나는 속으로 ‘네가 어떻게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알겠니!’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흔히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고층차에서 보면 모두 속인 중에서 이미 얻은 조그마한 이익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종교 중에서는 말한다. ‘당신이 돈이 아무리 많고 벼슬이 아무리 높다 해도 몇 십 년이라, 태어날 때 가지고 오지 못하며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한다.’ 이 공은 왜 이렇게 진귀한가? 바로 그것이 직접 당신의 元神(왠선) 몸에서 자라 태어날 때 가지고 오고, 죽을 때 가지고 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직접 당신의 과위(果位)를 결정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수련하기가 쉽지 않다. 즉 말해서, 당신이 버리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인데, 이래야만 비로소 당신으로 하여금 반본귀진(返本歸真)하게 할 수 있다. 얻는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층차를 제고하고, 최후에 정과를 얻어 공성원만(功成圓滿)에 이르는 것으로서, 해결되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다.”(《전법륜》)

“인류가 세간에서의 대법의 표현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경건(虔誠)과 존중을 체현할 수 있으면, 사람과 민족 혹은 국가에 행복 또는 영예(榮耀)를 가져다줄 것이다. 천체ㆍ우주ㆍ생명ㆍ만사만물은 우주 대법이 개창(開創)한 것인바, 생명이 그에 어긋나면 곧 진정한 패괴(敗壞)이고, 세인이 그에 부합할 수 있으면 진정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선보(善報)와 수복(福壽)이 따를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그에 동화하면 당신은 바로 득도자(得道者) ⎯⎯ 신(神)이다.”(《전법륜》)

박해가 발생한 후 나는 매년 인연 있는 사람을 이끌어 대법수련에 들어오게 하거나 또는 진상을 명백히 알고 복을 얻게 했다.

한번은 97년에 태어난 고등학생을 수련으로 이끈 적이 있다. 당시 그녀는 겨우 16살이었다.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으며 철이 일찍 들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부친이 장애가 있는데다 도박을 좋아했고 엄마는 시내에 나가서 삼륜차를 몰았는데 친척의 도움을 받아서야 겨우 그녀와 동생의 학비를 댈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안색이 아주 나쁜 것을 보고 어디 불편한 데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눈물을 흘리며 원래 생리가 끊어진 지 이미 석 달이 지났지만 어머니가 걱정할까봐 말조차 꺼내지 못했고 설령 말을 꺼내도 치료할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에 파룬궁을 한번 수련해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세대 학생들은 파룬궁에 대한 왜곡된 사설(邪說)을 많이 주입당해 직접적으로 말하면 놀라자빠질 게 뻔했다.

이에 주말마다 우리 집으로 불러 먹을 것을 해주곤 했다. 동시에 일부 공부방법을 좀 알려주었고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중국 근대사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원래 교과서에서 말한 것들이 거의 다 진실이 아님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이어서 나는 파룬궁 진상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진상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녀는 시내 중점고교에서 다녔는데 성적이 거의 꼴찌로 반에서 50위권이라고 울면서 말했다. 집에 돈은 없고 몸까지 아프니 졸업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설령 대학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되었다. 나는 네가 나를 따라 파룬궁을 배우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고 하자 그녀는 몹시 배우고 싶어 했다. 이에 나는 그녀와 함께 연공하고 법을 공부하는 시간을 배치했다.

우선 저녁에 자습을 끝내고 모두들 잠 들면 그녀는 몰래 욕실에 들어가서 동공을 연마했고 이어서 침대 위에서 이어폰을 꽂고 한 시간 설법을 듣는다. 이렇게 약 12시 30분쯤에 잠이 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정공을 연마한다. 6시 정각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어나 아침 체조를 한다. 그녀는 이 일정을 아주 잘 버텨냈다.

일주일 후 우리 집에 온 모습을 보니 완전히 선녀처럼 변해 있었다. 마치 12~3세 아가씨처럼 피부도 희고 고와졌고 전에 뚱뚱한 몸매에 누렇게 뜬 피부를 지녔다고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안경을 끼고 내게 말하길 콧 위의 붉은 점이 지워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붉은 점은 체내의 독소가 나오는 것으로 소업(消業)이라고 했다. 꾸준히 견지하면 갈수록 좋아질 거라고 하자 아주 기뻐하면서 미래에 대한 신심으로 가득했다.

한 달 후 월경이 돌아왔다. 몸이 건강해지자 정력도 충만해졌으며 대법을 수련해 지혜가 열리자 성적도 단번에 올라갔다. 수학은 늘 반에서 1등이었고 종합성적도 10등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에서는 또 그녀만 유일하게 특별히 생활이 어려운 학생이란 명목으로 1년에 2천위안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나는 그녀에게 혼자 법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진상을 알리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이 네 변화가 아주 큰 것을 보면 진실을 알려주라고 했다. 뜻밖에도 부친은 그녀가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며 무슨 분신자살이요 자살을 언급하면서 파룬궁을 연마하지 말라면서 만약 계속 연마하면 부녀관계를 끊겠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했다. 나는 우리는 진선인(真善忍)을 수련하니 너의 선(善)과 인(忍)으로 부친에게 진상을 알리고 네가 아는 진실한 파룬궁과 텔레비전에서 말하는 것이 같지 않다고 말해주라고 했다. 부모님이 닭과 오리를 키우느라 힘들었는데 그녀는 매일 부모님의 일을 도와주었고 인내심을 갖고 《전법륜》이란 책에서는 원래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얘기했다고 말해 주었다. 엄마는 서서히 TV에서 한 말이 전부 가짜임을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친은 아무리 말해도 깨닫지 못했다. TV에서 한 말이 어떻게 가짜일 수 있겠느냐면서 좋은 거라면 왜 연공하지 못하게 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꾸준히 견지하자 나중에 부친도 서서히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또 어머니가 매일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자 집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 이후 매년 약 10만 위안의 수입이 생겼고 이전의 궁핍했던 생활과는 천양지차가 되었다.

그녀는 졸업성적이 반에서 2등이었다. 내가 전공 선택을 도와 성(省)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지금은 이미 대학을 졸업해서 순조롭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또 70대 한 기독교 여자 신자가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 힘들어 계단을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젊은 사람들보다 동작이 가벼운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했다. 내가 파룬궁을 연마한다고 소개하자 그녀는 자신은 TV에서 하는 말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 파룬궁이 그렇게 나쁘다면 왜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가 그들이 다 바보란 말인가? 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얼마나 오래 배워야 효과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건 당신의 성의를 보아야 하며 만약 마음을 들여 배우고 날마다 책을 본다면 동작은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데 《전법륜》을 다 배우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장 나를 따라 배우겠다고 했다. 그녀의 퇴직한 남편도 같이 배웠다.

나는 저녁에 두 부부와 함께 법을 공부하고 또 연공동작을 가르쳐주었다. 2강을 읽고 나서 제1장 공법을 가르쳤는데 그녀에게 곧장 소업반응이 나타났다. 밤에 두 차례 화장실에 가서 물 설사를 했다. 이튿날 나를 만나서는 기뻐하면서 설사를 하고 나서 몸에 힘이 나서 아침에 미음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영문을 몰라 하며 설사하면 당연히 힘이 빠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녀는 힘이 빠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정신이 났다. 나는 파룬궁은 불가(佛家)의 대법으로 진정한 불법(佛法)은 사람을 제도하며 속인의 이치에 따라 볼 수 없다고 했다. 《전법륜》을 여러 번 보면 그 안에 모든 답안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오성이 좋았다. 그녀는 어제 읽은 책에서 스승님께서 신체를 청리해준다고 하셨다고 했다. 남편도 기뻐하면서 그럼 이 설사는 일반적인 식중독과는 다른 일이며 이것이 신체를 청리한 거라고 했다. 또 TV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병이 있어도 약을 먹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걸 보면 그들이 파룬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뻐서 큰 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왜 당신들이 이 공을 연마하는지 알 것 같아요. 내 나이에 병도 없고 자식들을 연루시키지도 않고 향을 올리면 되잖아요. 나는 배워야겠어요.”

나는 많은 수련생들이 설사 감옥에 들어가거나 생명을 잃을지언정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렇게 7일 만에 《전법륜》을 다 읽었고 연공은 겨우 3장까지 배웠는데 그녀 혼자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파룬따파가 세상에 전해진 지 이미 30년이 되었다. 사실 대법 진수제자(真修弟子)마다 모두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무릇 사람 몸을 얻기 어렵고 중토에 태어나기 어려우며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 이 세 가지를 겸비한다면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서유기》)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오직 석가모니부처만이 세상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불법(佛法)을 전했을 뿐이다. 지금 말법(末法)시기의 말겁(末劫)시기에 사존께서는 다시 한 번 사람의 형상으로 세간에서 우주대법(宇宙大法)을 전파해 세인을 구도하시니 이는 신불(神佛)의 무량한 자비이다!

이 자리에서 제자는 다시 한번 사존의 자비하신 고도(苦度)에 감사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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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예부터 전해지는 ‘붉은 실의 전설’이 있다. 결혼하는 남녀 사이에는 태어났을 때부터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중국 당(唐)나라 시기에 전해진 이야기를 소개한다.

중국 당나라 두릉(杜陵)에 위고(韋固)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아로 자라서 가능한 빨리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열심히 결혼 상대를 찾았지만,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다.

당나라 원화(元和) 2년, 그는 송성(宋城)시 남쪽 청하(淸河)지역을 방문해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 있던 손님은 위고에게 마을 번(藩) 씨 집안의 아름다운 처녀에게 구혼하길 권했다. 위고는 기뻐서 그녀를 아는 친구와 용흥사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위고는 결혼에 대한 성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날이 새기도 전에 용흥사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 노인이 사원 계단에 앉아 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루가 하나 있었다. 위고는 책 제목을 보았으나 글자를 알 수 없었다.

월하노인도(hmdjr.com)

위고는 노인에게 물었다. “지금 보시는 책이 무엇입니까? 저는 어렸을 적부터 학업에 전념해 모르는 글자가 거의 없지만 당신 손에 있는 책의 글자는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책입니까?”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것은, 저승의 책이네. 이 세상에는 없는 것이므로 물론 자네는 본 일이 없겠지. 나는 여기에 저승 일을 하러 왔네. 세상은 음과 양으로 나눠져 나는 자네를 만나서는 안 됐지만, 새벽 전에 이곳에 왔으므로 만나게 된 것이지.”

위고가 노인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자 그는 “나는 이 세상의 혼사를 담당하고 있네”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위고는 재빨리 노인에게 물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고아로 자라서 빨리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늘, 나는 송성의 번 씨 집안 처녀를 만나기 위해 친구와 여기서 약속했습니다. 이 처녀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할 수 없네. 만약 그 처녀가 자네와 결혼할 운명이 아니라면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네. 자네 아내는 지금 막 3살이 되었지. 그녀가 17세가 되면 자네와 결혼할 것이야.”

위고는 노인이 갖고 있는 자루에 대해 물었다. 노인은 “붉은 끈이 들어 있네. 나는 이 세상에서 부부가 될 사람들의 다리를 이 실로 묶고 있지. 사람은 태어났을 때 이미 결혼 상대가 정해져 있네. 둘 사이가 적이든, 빈부 차이가 심하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든 전혀 상관이 없지. 만약 이 붉은 실이 두 명을 연결했다면 그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며 만약 운명을 거역하려 하면 화를 초래하게 된다네. 자네 다리는 이미 그 아이와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으니 아무리 빨리 결혼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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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고는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은 어디에 있으며 그 가족은 무엇을 하는지 궁금했다. “당신 아내가 될 사람의 모친 성은 ‘진(陳)’이네. 송성시 북쪽에 있는 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있지. 진은 자주 시장에 딸을 데리고 오니 자네에게 그녀를 만나게 해주지.”

위고의 친구는 그날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위고는 할 수 없이 노인과 함께 시장에 가기로 했다. 시장에 도착하자 한쪽 눈이 먼 노파가 3살 소녀를 데리고 이쪽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의 옷은 너덜너덜하고 얼굴도 말라서 보기 흉했다. 위고는 순간 분노가 울컥 치밀었다. “저는 그녀와 결혼하기 싫습니다!” 노인은 “그 소녀에게는 자네와 유복하게 사는 미래가 있네”하고 자취를 감췄다.

위고는 분노했다. “이 노인네가 날 놀리는 건가. 나는 훌륭한 가정에서 잘 교육 받고 자랐는데 내가 왜 눈먼 노파의 못생긴 딸과 결혼해야 하는가.” 위고는 칼을 하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만약 자네가 소녀를 죽일 수 있다면 많은 사례를 하도록 하지.” 다음날, 위고의 하인은 소매에 칼을 숨기고 소녀를 죽이기 위해 시장에 갔다.

하인은 칼로 소녀의 가슴을 찌르려 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자 당황해 미간을 찔러 버린 후 도망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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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위고는 곧 그 도시를 떠나 서쪽으로 갔다. 그리고 3년 후 명문가 담 씨 집안 미모의 딸과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결혼준비가 진행되던 어느 날 딸이 돌연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년 후 위고는 스물여덟이 됐다. 어느 날, 그가 향촌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곳 지주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들은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는데 약혼녀가 갑자기 중풍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결혼을 단념하고 위고가 빨리 다른 여자와 결혼하길 간청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위고는 아주 훌륭한 여성을 만나게 됐다. 재색을 겸비하고 미술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실로 그녀에게 비길 만한 여성은 흔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위고와의 결혼식 3일 전에 길을 가다가 넘어져 돌에 부딪혀 죽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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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연인들의 죽음으로 위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결국 결혼을 포기하고 향주 관청에 취직해 향주 자사인 왕태(王泰)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고 맡은 일만 성실하게 하는 위고의 모습이 마음에 든 왕태는 그에게 자신의 17세 딸과 결혼할 것을 권했다.

왕태의 딸은 지적이며 아름다웠지만 언제나 미간에 꽃을 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목욕할 때도, 혼자서 있을 때도 항상 그 꽃을 붙이고 있었다.

위고는 마음이 불안하긴 했지만 결국 결혼을 수락했다. 그는 결혼 후 갑자기 이전에 시장에서 노파의 딸을 암살하려던 일이 생각나 미간의 꽃에 대해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울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갓난아기 무렵 송성의 판관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오빠도 잠시 후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유모 진(陳)이 시장에서 채소를 팔면서 나를 돌봐주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3살 무렵 갑자기 괴한에게 습격당해 미간을 칼날에 찔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상처 자국이 남아 있으므로 저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꽃을 언제나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7년 전, 왕 자사께서 저를 양녀로 맞아주셨습니다.”

위고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암살을 명한 것은 자신이었으며 왜 그렇게 됐는지 모두 고백하며 크게 뉘우쳤다. 모든 운명을 이해한 두 부부는 더욱 서로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 후 이들에게 아들이 태어났으며 이름을 훈(訓)이라고 불렀고 훈은 성장해 안문(雁門)현 현장이 되었다. 위고의 아내는 태원(太原)의 귀부인으로 존경받았으며 위고 부부의 이야기를 알게 된 송성 태수는 위고가 머무른 숙소를 ‘정혼점(定婚店-혼인을 정해주는 장소)’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그날 밤 나타난 노인을 ‘월하노인(月下老人-달빛 아래 노인)’으로 불렀으며 지금도 혼사를 주관하는 중매자를 ‘월하노인’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 여러 출판물에서 소개된 ‘경화사진관’의 돼지 사진(중화권 온라인 커뮤티니)

중국 민국시기, 강북(江北) 태흥(泰興) 지방에 시경종(施慶鐘)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는데 성격이 매우 흉악해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다.1923년 그가 큰 병에 걸려 임종하기 직전 어느 스님이 찾아와 말했다.

“당신이 지은 악업이 너무 많아 사후에 돼지 몸으로 떨어질 것이오. 하지만 빨리 참회하면 죄가 감면될 수도 있소이다.”

시경종은 이 말을 듣고 순간 매우 두려워져 왼손으로 반쯤 합장하는 모습을 하며 스님에게 예를 올렸다.

스님은 탄식했다. “이 손이 불법승 앞에서 존경을 표했으니 장래 이 손은 돼지 모양을 면할 수 있겠군요. 또 비록 돼지가 되어도 임종할 때 참회했으니 도살당하는 고통은 면할 수 있겠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당시 스님의 말을 그다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이후 시경종이 병으로 사망한 후 이웃집에 한 돼지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 돼지의 왼쪽 앞다리는 사람 손 같이 생겼고 길을 걸을 때 이 앞다리는 땅을 딛지 않았다. 또 사람을 보면 늘 합장하는 시늉을 했다.

시경종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듣고 크게 놀랐고 차마 그 돼지를 잡아 먹을 수 없어 상하이 ‘보화사(寶華寺)’로 보내 방생해 절에 살게 했다.

1934년, 이 돼지는 여전히 그 절에서 살고 있었다. 당시 상하이 ‘경화(鏡華)사진관’에서 이 돼지를 찍어 널리 전해졌고, 중국 근대 유명화가 적평자(狄平子) 화백은 돼지 그림을 그린 후 ‘공덕림(功德林)’, ‘각림(覺林)’ 등 상하이 여러 음식점에 걸어놓아 여러 사람들에게 경계로 삼도록 했다.

동공을 통해 들어가보니 점점 마이크로 공간이 다가온다. 가고 또 가고 멀리 가다 보니 나타난 것은 지구였다!

‘무한의 줌:내부의 우주(infinite zoom:the inner universe)’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YouTube에 업로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눈의 내부를 살펴보면 혈관과 혈관 세포가 있다. 그보다 더 미시적인 공간에는 세포를 구성하는 분자,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 그리고 기본 입자 표면의 공간(우주)이 보인다.

더욱 미시적인 세계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천체를 빼닮은 세계가 있다. 마치 무수한 행성이나 은하가 흩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총체적인 물질의 일부이며 단지 이 유한한 시공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각각 자신의 경력, 사상, 감정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마치 서로 간에 격리된 것 같지만 사실은 의식 속의 환각에 불과하다. 이 환각은 감옥과 비슷해 사람 자신을 개인의 욕망과 주변 가까이에 있는 몇 사람에 대한 애정으로 속박시킨다. 우리의 할 일은 자비심의 고리를 넓히고 다양한 생명과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을 찾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간의 발자국이 아니다.

 
교과서에는 인류의 조상이 약 300만 년~1000만 년 전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지질학계에서는 5억 년 전 지층에서 인류의 발자국과 매우 유사한 것이 발견됐다고 한다. 많은 이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한 주장은 많은 증거를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하지만 이 발자국은 인류가 최초로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연대나 유인원 등 포유동물이 나타난 시기와 매우 차이가 큰데, 왜 그런 것일까?




▲ 삼엽충 화석의 캄브리아기 지층 안에서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1978년 미국의 지질 연구원 저만슨 박사는 유타주의 한 마을에서 화석을 조사하던 중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삼엽충 화석이 있는 캄브라아기 지층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있었다. 이 발자국은 약 25센티미터 길이에 발가락의 넓이는 8센티미터, 발꿈치는 약 7센티미터, 발꿈치의 패인 부분은 15센티미터 되어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발자국은 삼엽충이 밟혀 생긴 부분에 있었다는 점이다.




▲ 이 발자국은 약 2억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1984년 영국의 도우미아 호수의 근처에서 지금으로부터 54억 년 전 오르도비스기 지층과 1987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지금으로부터 23억 년 전의 지층에서 사람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됐다. 약 45센티미터의 이 흔적은 다섯 개의 발가락과 발허리 형태를 또렷이 갖고 있었다.


그 밖에 발견된 발자국 중에는 오늘날 인류의 것이 아닌 것도 있었다. 미국의 네바다 주의 한 광산에서 발견된 발자국은 길이가 약 3.8센티미터로 신생아의 발보다도 작았다. 반면 미국의 캔자스주의 바쿠스타 광산의 사암석에서는 90센터미터의 거대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다. 앞에서 소개한 발의 흔적들은 모두 과학자들의 검증과 14개의 탄소 실험(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을 받았다. 그 결과 이 같은 흔적들은 약 2억년 전의 산물임이 입증됐다.
 

현재까지 인류가 수집한 지식에 의하면 이 같이 발견된 발자국은 사람의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까지 학계를 통해 알려진 인류의 조상이 출현한 시기는 불과 백 만 년 전이라는 점이다. 수 억 년 전에는 인류가 아직 나타나기 전이며, 인류와 발모양이 비슷한 대형 동물이 발견된 적이 없다.


현재까지 이미 수십 개의 지층에서 발견된 발자국이 각종 유명 과학잡지를 통해 알려졌다. 일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이 발자국들은 모두 삼엽충이 존재했던 시기의 흔적임을 거의 확실하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면 어떻게 이런 흔적들을 만들어 세계 곳곳의 지층의 깊은 곳에 묻어두는 것이 가능할까?


결국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그것은 약 몇 억 년 전에 지구상에 이미 인류의 발 모양을 가지 직립보행을 하는 생물이 살았고, 신발을 신은 것으로 보아 문화까지 갖추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위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발자국들은 대체 누구의 것일까? 혹시 인류가 최초로 출현한 연대가 잘못 조사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외부 세계에서 온 생명체가 남기고 간 흔적은 아닐까? .

화병12-1

현대 과학은 매우 발달했다지만 지구 곳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숱한 증거들이 있다. 이번 인류 역사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문명의 유적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가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와 같은 고도의 문명생활을 했음을 말한다.

10만 년 전 금속 꽃병(위 사진)

1851년 Scientific American 6월호(7권 298~299쪽)에는 암석 파편에서 발견된 꽃병 이야기가 나온다. 매사추세츠주의 도체스트에서 암석폭파 작업에서 나온 파편 속에는 높이 11.43㎝, 아래 폭 16.51㎝, 입구폭 6.35㎝의 꽃병이 두 동강난 채 있었다. 아연과 은 합금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꽃병은 예술성이 매우 높았는데 무려 1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 그러나 꽃병은 박물관을 전전하다가 현재 사라져버렸다.

50만 년 전 점화플러그
점화플러그

1961년 2월 13일, 돌 수집가 마이크셀, 레인, 맥시는 캘리포니아주 올란차(Olancha) 해발 1300m 산 정상의 오웬스(Owens) 호수 바닥에서 조개화석이 든 돌을 발견했다. 그 돌은 부드러워 잘 깨지는 형석이었는데 안에서 원통의 기계 모양과 못 같은 형태의 물체가 나왔다.

발견된 물체는 희귀한 사물을 조사하는 찰스포트 협회에 넘겨졌다. 찰스포트 협회는 정교한 도자기, 금속축, 구리선 등으로 구성된 물체가 전자기기용 측정기 일부일 것이라고 분석했고 과학자들은 ‘점화플러그’와 가장 유사하다고 결론 내렸다. 물체가 나온 돌의 지질연대는 50만 년 전이다.

100만 년 전 네모난 못
1851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 한 신문은 드윗(Hiram De Witt)이란 상인이 캘리포니아주에서 구한 수정에 대해 다뤘다. 손바닥 크기의 수정은 도금됐지만 드윗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 깨졌고 안에서 네모난 못이 나왔다. 못은 살짝 부식됐어도 곧고 완전한 상태였다. 이 수정석은 100만 년 전 것으로 조사됐다.

2200만 년 전 나사못
1865년 네바다주 트레져시 애비광산에서 5㎝ 길이의 나사못이 발견됐다. 길쭉한 돌 안에서 발견된 이 못은 부식되긴 했으나 나사못 형태를 그대로였다. 나사못이 나온 돌은 2200만 년 전 생성된 것이었다.

4000만 년 전 못
빛의 입사각이 편광각(브루스터 각)과 같을 때 반사된 빛과 굴절된 빛은 서로 수직임을 밝혀낸 영국 브루스터 박사는 1844년 과학발전협회에 한 논문을 발표해 세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브루스터 박사는 영국 인치라의 킹구디 채석장에서 발견한 한 사암에서 못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 못은 부식되었지만 판별이 가능할 만큼 형태가 보존돼 있었는데 못이 나온 사암의 연대는 무려 4000만 년이었다.

3억 년 전 금목걸이


1891년 6월 9일, 미국 일리노이주 모리슨빌시의 컬프(S.W.Culp) 부인은 부엌에서 석탄을 나르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다. 그런데 떨어진 석탄덩어리에서 길이 25㎝, 무게 12.4㎏이고 정교한 그림으로 세공된 금목걸이가 나왔다. 당시 진실 공방이 있었지만 진짜로 밝혀졌다. 해당 석탄은 펜실베니아의 3억년 이상 된 지층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3억 년 전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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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오클라호마주 토마스시의 한 전기공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두명의 인부가 석탄을 벽난로에 넣다가 떨어뜨렸는데 깨진 석탄 속에서 조그마한 가마솥이 나왔다. 알고보니 가마솥이 나온 석탄 덩어리는 가마솥의 거푸집이었다. 여러 전문가들은 가마솥을 검사한 결과 3억 2500만년 전의 것이라고 평가했다.

28억년 전 쇠구슬
구슬1

이보다 훨씬 더 먼 것도 있다. 남아프리카 클럭스도르프(Klerksdorp) 광산에서 수백개의 정교한 쇠구슬이 발견됐었다. 제철전문가들은 구슬이 매우 단단해 흠집이 나지 않고 굴리면 저절로 균형을 잡을 만큼 그 정확도와 정교함은 현재 인류의 기술로도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록히드마틴에서 일했던 한 선임과학자는 올 여름 그가 죽기 전 외계인과 외계인 우주선 사진을 보여주며 관련 정보를 말한 인터뷰 영상을 전격 공개했다.

영상 속 록히드마틴 전 과학자는 올 여름 8월 7일 사망한 보이드 부시맨(Boyd Bushman)이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미국 정부 협력업체인 우주항공 및 방위 관련업체, 록히드마틴에서 맡았던 자신의 업무에 대해 거론했다. 그는 자신이 록히드마틴의 전 직원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 몇 가지를 소개했다. 그는 우주선, 로켓 배기플룸 시스템, 금속탐지 체계, 방사선 감지 장치를 설계했다.

인터뷰 영상은 마크 Q. 패터슨이 처음 유튜브에 업로드했다. 뉴욕 데일리뉴스는 패터슨이 독립적으로 일하는 항공우주공학자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유튜브에 올린 원본 동영상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대신 대기원은 원본 영상을 소개한 TheLip.tv 동영상을 올렸다.

록히드마틴의 전 선임과학자 부시맨은 인터뷰 영상에서 자신이 일급 기밀문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계인을 찍은 사진 여러 장을 보여주며, 외계인의 특징을 묘사했다. 부시맨은 이 외계인들이 지구에서 68광년 떨어진 퀸토니아(Quintonia- 영상 발음 그대로 적음)에서 왔다고 말했다. 부시맨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우주선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지 않는 이상 지구에서 퀸토니아까지 가는데 최소 6만 8000년이 걸린다. 하지만 부시맨은 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오는데 4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시맨이 만난 일부 외계인들은 나이가 200살이 넘었다. 부시맨은 자신이 소속한 과학자 팀이 외계인 18명과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계인의 신체구조에 대해 외계인들은 손과 발 각각에 손가락 5개와 발가락 5개, 눈 2개와 척추 3개가 있었다고 말했다. 외계인의 척추는 실제로 뼈가 아닌 연골이었다.

외계인들은 텔레파시로 대화했다. 만약 한 사람이 마음에 의문이 있다면, “한 외계인과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 갑자기 마음에 담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신의 목소리로 듣는다”고 부시맨이 말했다. 외계인들은 의문을 품은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해 텔레파시로 응답해준다.

부시맨이 영상에서 소개한 외계인 사진은 뚜렷하고 선명하다. 외계인 우주선 사진은 그 만큼 선명하진 않다.

부시맨은 우주선의 직경이 38ft (11.58m)였다고 말했다. 외계인들이 부시맨의 카메라를 자신들의 우주선에 가지고가서 태양계 행성을 찍었다. 그는 이 사진을 영상에서 보여줬다.

부시맨은 외계인들에게 우주선 안의 쇼핑센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이후  외계인들은 거미줄 구조처럼 보이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건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200년을 살았던 노자의 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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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에서는 어린이에게 한자를 가르칠 때 삼자경(三字經)을 교재로 사용했다. 세(三) 글자(字)씩 한 구절로 되어 있어 읽고 이해하기가 쉽고 편하다. 무엇보다 덕(德)을 중시 여겨 인륜과 도덕을 강조했는데 오늘날 인심이 흉흉하고 잔혹한 범죄가 횡행하는 시대에 더욱 간절히 요구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외에도 천문, 지리, 역사, 문학 등 인류 전반에 걸쳐 방대한 내용을 담았기에 중국에서는 “소매 속 백과사전”이라고도 불렸다. 송(宋)나라의 왕응린(王應麟)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삼자경은 맨 오른쪽부터 아래로 내려와 왼쪽으로 읽는다.

삼자경 22단원

중국 고대에 아주 유명한 다섯권의 책이 있는데 순자‧양자‧문중자‧노자와 장자, 이 다섯 사람의 책이다. 경서와 다섯 권의 책을 알아야 사서 연구를 할 수 있고 각 조대의 역사와 성쇠의 도리를 알게 된다.

 

노자 이야기

 

 

 

 

 

최근, 중국 각지에서 기상이변이 다발하고 있습니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의 최근 며칠 기온은 거의 30였지만 지난 2일에는 갑자기 눈보라가 발생해 기온이 10까지 내려갔습니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찬 공기의 영향을 받은 하얼빈은 2일 오후 비가 내렸으며 저녁 무렵에는 기온이 더욱 내려가 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날 하얼빈 북부는 저녁 7시쯤 0까지 기온이 내려갔습니다.

 

 

보도에 의하면 며칠 전까지 하얼빈의 기온은 급상승해 거의 30에 가까웠지만, 헤이룽장성 기상청은 2일 찬 기류와 폭풍을 경고했고, 이후 헤이룽장성의 대부분의 기온은 8~10로 떨어졌습니다.

 

 

중국 대륙에는 최근 많은 기상이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 1일 오후 베이징 옌칭현(延慶縣)에서는 갑자기 20분간 우박이 내렸으며, 그 우박의 가장 큰 직경은 2cm였습니다.

 

 

지난달 23일 신장 우루무치 지역에는 폭설이 내렸습니다. 하루 전 우루무치의 최고 기온은 24로 따뜻했지만, 23일에는 갑자기 큰 눈이 내렸고 기온은 영하 2까지 떨어졌습니다. 또한 올해 4월은 우루무치에서 최근 6년래 최저기온을 기록했습니다.

 

 

이날 간쑤성(甘肅省)에는 모래폭풍이 강타해 순식간에 온 도시가 황사로 뒤덮였고, 하늘이 검게 변했습니다.

 

[SOH] 양자역학은 20세기 초 독일학자 막스 플랑크(Max Planck)등의 물리학자들이 창립했으며 미시적 물질세계의 관찰을 통해 직접 눈으로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을 해석한다. 각 우주는 독립적인 시공(時空, time-space)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양자역학은 다중우주의 존재 등에 대한 우리들의 관찰을 돕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다중우주의 원인을 직접 볼 수 없었다. 즉, 우리들은 이 시공을 뛰어넘어 다른 시공 또는 다른 지구로 갈 수 없다.


초끈이론 (super string theory)이 제안한 물리세계의 초(超) 시공구조는 바로 다차원 시공이 보존입자와 페르미입자를 통일하기 위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입자가 실험조건의 제한으로 초끈이론을 증명할 수 있는 입자를 찾기 어렵다고 예언했다. 초끈이론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중 하나로 이 연구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몰입했다.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 후보중 하나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체 작용력을 사용해 우주를 해석하는데 이를 수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 포레스트 의대 로버트 란자(Robert Lanza) 교수는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의 각도에서 출발한다면 사람이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없어지지 않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며, 사망은 단지 인류의식이 조성한 환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란자는 양자역학이론에서 사람은 사망하지만 없어지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그는 생물중심주의(biocentrism)를 제기해 자신의 논점을 지지했다. 바로 생명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을 겨냥한 것이며, 개인의 의식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실질상의 생명과 생물이 진실한 세계의 중심이며, 그 뒤에야 비로소 우주가 있고 우주자체는 생명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의식은 세계를 변하게 할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은 단지 인류 의식의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란자 교수의 연구는, 사람은 심장정지, 혈액의 흐름이 정지할 때, 즉, 물질원소가 정지상태에 있을 때, 사람의 의식정보, 다시 말해 육체활동을 제외하고 육체를 초월한 양자정보가 있으며, 혹자는 이를 속칭 영혼이라 부르는데, 이 양자정보는 여전히 운동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생물중심주의가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s)이론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즉, 즉각 발생한 각각의 사건은 대등한 다중우주(Mutiple Universes)중에서 동시에 진행되며, 우리들이 시간과 의식에 관한 문제를 질의하고 다시 사고를 시작할 때, 역시 동시에 다른 한 쪽의 대등한 우리들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란자 교수는 생명이 막바지로 향했을 때, 즉, 신체기능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 다른 세계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버뮤다 삼각지는 신비한 사건이 모인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미국과 프랑스 등의 과학자들이 손잡고 그곳 해역에서 수정 피라미드를 발견했는데 이 해저 피라미드는 반투명 상태를 나타내고 있어 이 해저 피라미드의 구조는 유리나 심지어 수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은 신비한 버뮤다 해협에서 인류가 여태까지 발견한 적이 없는 해저 피라미드를 발견했는데 둘레가 300미터 높이는 200미터 해면에 노출되어 있는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100미터인데 규모만 놓고 보면 이집트의 어떤 피라미드보다도 더 크다.
 
 
더 특수한 것은 이 피라미드의 표면이 비할 바 없이 매끈하며 반투명한 형태라는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아마 유리이거나 에너지를 가진 수정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뿐만 아니라 이 피라미드 위에 두 개의 매우 큰 구멍이 있는데 바닷물이 빨리 구멍을 통과 지나가며 거대한 와류를 형성하며 해면에 거대한 파도와 안개를 만든다. 이것이 어쩌면 이곳에 발생한 여러 신비한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해저 피라미드 아틀란티스와 관계가 있을까?
 
과학자들은 지금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피라미드가 애초 육지에 건설되었으나 나중에 심한 지진으로 인해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다른 설에 따르면 수백 년 전 버뮤다 삼각지의 해수가 아틀란티스 시기의 지각 운동으로 인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또 지하에 있던 피라미드가 어쩌면 당시 사람들이 물품 저장 장소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 피라미드가 있는 버뮤다 해협은 전설 중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성지이며 사람이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믿는 이도 있다.
 
 
하지만 미국 플로리다 주립 사학자원부(史學資源部)의 한 전문가는 과학자들의 이런 추론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유리 피라미드 구조, 특히 유리지질은 10마일 이상의 깊은 수중에만 존재하며 그 확률도 백만분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중국 북송(北宋)때 청백하고 공정한 명판관 포청천이 재상으로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어떤 마을에 구걸해서 먹고 살아가는 다리가 불구인 10여세의 고아가 있었습니다.


이 마을 앞에는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다리가 없어 사람들은 물속으로 강을 건너야 했으며, 노인과 아이는 혼자서는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큰 비라도 내려 강물이 불어나면, 마을은 고립되어 생활하기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고아인 그 불구소년이 다리를 질질 끌며 강가에 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동네 어른이 의아해 물었습니다.


“넌 뭐 때문에 힘들게 거기다 돌을 쌓고 있는 거냐?”


“저는 여기다 다리를 놓아, 할아버지나 아이들도 마음 놓고 강을 건널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은 기특하다만, 내가 보기엔 사서 고생하는 것 같으니 그만 두거라. 먹는 것도 시원찮을 텐데 공연히 힘 빼지 말고...”


어른이 혀를 차며 돌아간 후에도, 아이는 마음을 접지 않고 꾸준히 돌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흐르자 돌무더기는 작은 산만큼 쌓였습니다. 그제 서야 그것을 지켜보던 어른들은 아이의 정성에 감동해 모두 협력해 그 돌로 다리를 놓기 시작했습니다. 다리가 거의 완성되어갈 무렵 돌을 다듬던 아이는 그만 사고로 두 눈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손으로 돌을 더듬어 큰 돌과 작은 돌을 따로따로 분리하여 가져다 쓰기 좋게 배열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다리가 완공되던 날 기뻐하는 동네 사람들 속에서 눈을 잃은 소년은 일생 중 가장 기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의 그 순정한 표정에 감동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리가 완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에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 돌다리는 마치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에도 끄떡없는 위엄을 보여주려는 듯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비 갠 하늘은 유리처럼 맑고 푸르렀으며, 흙먼지가 깨끗이 씻긴 돌다리는 찬란한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습니다. 그러나 그 다리를 건너던 첫 행인은 시력을 잃은 소년이 밤사이 벼락을 맞고, 다리 위에 숨져 있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팔자가 사납다고 탄식하며, 무정한 하늘을 원망했습니다.


그날 마침 포청천이 공무처리를 위해 이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동네사람은 포청천이 탄 가마를 막아서서 소년에 대한 내력을 이야기 하며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데 그 하늘의 도리는 어디에 있는 거냐”며 따졌습니다.


포청천도 속세의 화식(불로 익힌 음식; 생식에 대응하는 말)을 먹는지라 사람들의 정서에 이끌려 분노하며 붓을 휘둘러 '녕행악물행선 (寧行惡勿行善)', 즉, ‘악을 행할지언정 선행하지 말라’는 여섯 글자를 써놓고는 떠났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포청천으로 하여금 눈 먼 소년의 일을 까마득히 잊게 할 무렵의 어느 날 황제는 황실로 포청천을 불러들여 말했습니다.

“며칠 전 태어난 태자가 태어나면서 부터 지금껏 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네. 별의 별 방법을 다 써 봤지만, 듣지 않으니, 자네가 한 번 봐주게나.”


포청천이 태자에게 가 보니 피부가 눈처럼 흰 아기가 오른 손 주먹을 꼭 쥐고는 악을 써대며 울고 있었습니다. 포청천이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펴 보니 거기엔 ‘녕행악물행선’이라는 여섯 글자가 적혀있었습니다. 포청천은 얼굴이 화끈거려 그 글자를 얼른 지웠습니다. 그러자 그 글자가 지워지면서 아이의 울음도 그쳤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황제는 “아이가 울음을 그친 것은 다행이나 복점일지도 모르는 붉은 점을 그렇게 함부로 없애버려도 되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황제에게는 그 여섯 글자가 붉은 점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포청천은 그 여섯 글자에 얽힌 이야기를 황제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태자의 앞날이 걱정스럽구려, 대인께서 음양침(陰陽枕)을 이용해 저승에 가서 그 내막을 알아 옴이 어떠하겠소?”


황제의 부탁으로 포청천은 음양침을 베고 저승으로 갔습니다.
염라대왕은 포청천에게 눈 먼 그 소년의 전생을 보여주었습니다.


소년은 원래 전생에 죄업이 너무 커서 그 죄업을 갚으려면 한세에 다갚지 못하고 삼세(三世; 인간의 몸으로 세번 다시 태어남)동안 응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배치로 첫 번 생에는 불구의 몸으로 외롭고 힘들게 살다 죽게 하고, 두 번째 생에는 두 눈이 멀어 역시 고생스럽게 생을 살다 마치게 하며, 세 번째 생에는 벼락을 맞고 죽어 시체가 황량한 벌판에 버려져 세 번에 걸쳐서 업을 갚도록 배치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소년이 제 1세에 불구의 몸으로 구걸을 하고 살면서도, 자신보다도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돌다리를 만드는 것을 보고는, 한 세에 두 세의 업을 갚도록 하기 위해 소년의 두 눈을 잃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소년은 남을 원망하거나 하늘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다리 만드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신은 소년의 행동에 감동하여, 마지막 남은 한 세에 갚아야 할 악업까지 이 한 세에서 다 갚도록 벼락을 맞아 죽게 한 것입니다.(사람의 생각대로라면 그처럼 갸륵하니 눈도 멀지 않게하고, 벼락도 맞지 않게 할 만한데, 신의 자비는 삼세에 갚을 걸 한세에 갚도록 한 자비를 베풀 뿐 사람처럼 인정에 이끌려 감면해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선행의 덕으로 천자의 복을 누리도록 태자로 환생시킨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흔히 지금 일어나는 일만으로 그 잘잘못을 따지고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죄는 자신이 갚아야 한다.’는 하늘의 이치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소년처럼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는 끝없는 정성에 하늘도 감동시켜 신의 자비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실은 지금의 실증과학도 종교다. 인류의 전통문화와 외계인의 문화는 완전히 다르다. 전통문화와 종교는 정신의 발전을 중시해 낮은 정신차원에서 높은 물질차원에 도달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한편 외계인의 현대 실증과학은 정확히 반대로 물질차원을 중시해 낮은 물질차원에서 높은 정신차원에 도달하는 것을 중시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 형식은 사람들에게 쉽게 감지될 수 없다.

신을 믿었던 고대 사람들은 전통적인 방법을 통해서 인체나 우주의 수수께끼를 깊게 연구할 수 있었지만, 신을 믿지 않는 현대인에게 있어 이러한 방법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신을 믿지 않으면 인체 주위에 한 장소가 생겨 마치 막처럼 인체를 우주특성과 격리한다. 그러면 인류는 고차원의 우주현상을 감지할 수 없게 된다. 신을 믿지않는 사람에 있어 외계인의 문화는 정확히 물질세계를 탐색하는 적절한 방법인 것이다.

유럽의 산업혁명시대부터 외계인은 전면적으로 인류에게 그들의 과학기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학기술이란 현재의 이 실증과학의 체계다. 지금 인류가 배우고 있는 것은, 실은, 외계인의 문화다.

어떠한 물질도 다른 공간에서는 존재 형식이 있고, 그것도 물질적인 존재이다. 신호와 같은 물질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장기간에 걸쳐 외계인의 문화를 공부하고 외계인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으며 인류의 몸도 외계인의 몸으로 형성된다. 이 외계인의 몸에는 의식이 있어 살아있는 것이어서 사람의 사유를 조종할 수 있다. 많은 발명가들은 영감을 얻어 새로운 발명을 하지만, 이 영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실은 그것은 외계인의 몸이 발명자에게 가르친 것이며, 우주인의 과학정보를 인류에게 쏟아 붓는 것이다. 외계인들은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계인의 세계를 지구상에서 재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외계인의 세계가 지구상에서 완벽하게 재현됐을 때는 외계인이 완전하게 인류를 통치하는 시기가 된다. 만약 그들이 지구를 점령해 인류에게 그러한 과학기술을 쏟아 붓는다면 신에 의해 소멸되게 되지만, 인류가 자발적으로 외계인의 문화를 신봉한다면, 신은 상관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인류가 외계인의 과학기술을 신봉하게 되면, 신은 인류를 포기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외계인의 마를 믿고 신을 믿지 않는다면 신은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을 지켜보겠는가? 

외계인은 인류의 몸에 한층 더 우주인의 몸을 만들어 어느 정도 인류를 통제할 수 있지만, 완벽하게 인체를 점유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물건처럼 몸에 붙어 있다. 일단 그 사람이 새롭게 신을 믿게 되고 정법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신은 그 몸에 붙어 있는 외계인의 이물질을 제거해준다. 이것은 신에게는 쉬운 일이다. 그렇게 되면 외계인은 인간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그러한 음모도 물거품이 된다. 외계인은 물건처럼 붙어 인류를 통제하는 것이 완전한 방책이 아님을 눈치채고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인류는 탄소를 기본으로 하는 생명체이고, 외계인은 규소(실리콘)을 기본으로 하는 생명체다. 규소를 기본으로 하는 생명체는 어떤 모습일까? 컴퓨터나 로봇과 같은 것이다. 컴퓨터 부품의 주요 성분은 규소다. 사고 능력이 있는 로봇은 생명체가 아닐까? 그것은 바로 규소를 기본으로 하는 생명체이다.

80년대 이후, 컴퓨터 기술은 전세계에서 신속히 발전, 보급돼 왔다. IC칩은 끊임없이 발전해 컴퓨터가 전면적으로 보급됐고, 정법을 수련하는 수련자 이외의 모든 컴퓨터를 조작하는 사람은 외계인의 몸이 매달려 있다. 컴퓨터를 발달시키는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자주적인 사고능력이 있는 컴퓨터와 기계의 결합체인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류는 외계인의 통제를 받아 급속히 지능 로봇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현재 트랜스포머나 로봇, 외계인과 관련된 애니메이션이 많이 제작되고 있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러한 문화를 노출되고 있다. 이것도 외계인의 의도한 일부이며, 부지불식간에 인류를 외계인의 과학기술에 동화시키고 있다. 그 목적은 최종적으로 지능 로봇으로 전체 인류를 대신하기 위해서다.

물론 외계인의 음모는 신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신은 항상 인류에게 외계인의 음모를 눈치채게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영화 ‘터미네이터’는 인류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현재 사람들은 외계인의 음모에 대해 이미 충분한 인식을 갖고 있고, 인공지능 개발도 신중하게 되어 로봇 기술의 발전은 이전만큼 진행되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외계인이 로봇을 이용해 인류를 대체하려는 음모는 실패했다. 물론 외계인이 포기한 것은 아니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방법을 알아냈다.

정상적인 인간은 육체와 함께 반드시 원신(元神,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혼과는 다르다), 천성, 성격을 가져야 한다. 즉, 인간에게 사람의 본성이 없으면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인류의 탄생은 남녀의 유성 생식세포의 결합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러한 생명체는 신으로부터 원신 등의 요소가 주어지고 나면 정상적인 생명으로서 살 수 있다. 다른 유성번식 동물도 같다.

무성 생식의 복제인간 혹은 다른 동물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우 신은 원신을 주지 않는다. 그러자면 이 복제인간의 육체는 외계인에게 점령돼 지배되게 된다. 인류 원신의 구조는 외계인의 구조와는 다르다. 복제인간의 외관은 인간처럼 보여도 신에게는 마귀로 보인다. 그것들에게는 인간의 본성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인정되지 않는다.

무신론은 왜 인간에게 영혼이 없고 사람이 죽으면 사상도 없어져 모두 없어진다고 하는 것일까? 즉, 정상적인 인간에게는 원신이 있다는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다, 사람의 의식은 육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신에게서 유래한다. 사람이 죽으면 분자로 구성된 육체세포가 죽은 것만으로 더욱 작은 미립자 예를 들면 원자 등으로 구성된 원신은 죽지 않고 단지 한층 더 껍질을 벗은 것일 뿐이다. 다음에 다시 태어날 때에는 또 분자로 구성된 껍질을 씌워 인간, 동물, 식물 혹은 돌이 된다.

만약 이러한 복제인간이 허용되면 반드시 전통적인 생식방식을 대신해 많은 복제인간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복제인간이 일정한 양에 이르면 그것들은 입법을 통해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고 마지막에는 완전하게 전통적인 생식방법을 금지하고 인류를 멸종시켜 외계인과 같은 마귀가 인류를 대체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물론 이 음모도 신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최근 복제기술은 신속히 발전했고, 복제인간에 대한 합법화 요구는 적지 않았지만, 수천년의 전통문화와 종교관념의 압력으로 세계 모든 국가가 복제인간 실험을 법으로 금지했다. 이것은 모두 신이 안배한 것이다.

외계인은 고층공간의 신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대담하게 인류침략을 계획해 왔다. 그러나 우주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해 어떤 일을 해도 모두에게 보답이 있다. 선에는 선의 보답이 있고, 악에는 악의 보답이 있다. 외계인의 음모로 인류에 대한 신의 안배가 방해를 받아 신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음모에 참여한 외계인과 그들의 별은 모두 소멸되게 되었다. 소멸될 단계에서 피한 일부 외계인들은 지구로 도망쳐 와 지구인이 되었고 끝내 인류의 도덕과 전통문화를 파괴하고 있다. 그 수는 꽤 많지만 보통 사람은 그것을 구별할 수 없다. 신은 최종 심판시 그것들을 소멸하게 된다. 소멸되는 운명의 외계인은 이미 그 결말을 알고 있지만 단념하지 못하고 인간을 끌어 내려 함께 멸망하려 하는 것이다.

외계인은 존재할까? 이 글의 집필자는 중국인으로, 그는 우주의 실체에 대해 그들이 지구의 인류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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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비탄에 잠긴 선지자

우주인은 고대부터 지구인과 접촉해 왔다. 많은 고문서에도 그러한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고대 도가(道家)의 문서에는 요, 마, 귀, 괴(妖, 魔, 鬼, 怪) 등에 관해 기재가 있다. 그 마, 괴란 외계인을 가리키고 있다. 불가(佛家)의 문서에도 육도윤회에 대해 기재되어 있으며, 그 육도의 하나가 수라도(修羅道), 즉, 외계인은 수라도에 속한다.

외계인은 마(魔)의 생명에 속하지만, 이러한 우주 생명도 다양하고 모든 것이 인류에게 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지구인에게 접촉해 오는 외계인 가운데에는 선의를 갖는 것도 있고, 악의를 갖는 것도 있다.

외계인은 현재의 인류보다 훨씬 더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생명의 차원에서 보자면 그들은 인류와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생명이다. 기술 수준을 보자면 그들은 자유자재로 인류를 조종할 수 있지만, 그들도 고차원 생명의 통제를 받고 있어 제멋대로의 행동은 허용되지 않고, 마치 늑대가 자유롭게 양을 먹을 수 없는 것처럼 감시되고 있다.

한편 지구에는 고대부터 불도(佛道) 수행에 힘쓰는 수련자가 있어 수련을 통해서 신통력을 얻을 수 있다. 이 신통력은 고차원 생명이 갖는 능력이며, 외계인의 과학기술 수준을 훨씬 넘는다. 비유하자면, ‘서유기’안의 요마가 얼마나 강해도 역시 손오공을 이길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주인은 역시 인류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매우 신중한 계획이 있는 것 같다.

수천년간, 인류와 신의 연결은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 이뤄졌다. 인류가 신을 신앙하지 않게 되면, 신은 인류를 지켜볼 수 없게 된다. 외계인은 이 틈을 노려 인류가 신에 대한 신앙을 버리도록 다양한 공작을 해 왔다.

종교에 대한 믿음은 인류사회에서 수천년 이어왔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인심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도덕은 점차 타락해 사람들의 신에 대한 신앙심은 점점 엷어졌다. 외계인에게 틈을 주어 무신론의 대표격인 ‘태양 중심설’과 ‘진화론’ 등이 탄생했다. 이러한 이론은 원래 가설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들은 스스로를 거만하게 생각해 자연을 정복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심리에 부합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진리로 받아들여 신봉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아주 간단하게 수천년간의 신에 대한 신앙을 버렸던 것이다.

종교의 이론은 ‘지구 중심설’을 주창하고 있다. 즉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우주가 지구를 둘러싸고 회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태양 중심설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고 주창하고 있다. 근대에 얻을 수 있던 기술로 관찰한 결과 ‘태양 중심설’이 실증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설을 받아 들여 ‘지구 중심설’을 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지구 중심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신이 인류에게 가르친 것이다. ‘지구 중심설’은 우주 범위에 입각해 주창한 이론이며, ‘태양 중심설’은 태양계 범위에 입각해 주창한 이론이다.양자는 모두 올바르고, 모순되지 않았다. 단지 사람들은 지금의 과학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현상이 보이지 않는다. 작은 지식을 가지고 ‘지구 중심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의 표현이다.

중세 무렵, 서방의 인류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것은 기독교이며, 사용된 통치 방법은 정교일체였다. ‘태양 중심설’은 종교의 이론과 대립했고, 종교 통치의 기초를 흔들 수 있었다. 기독교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태양 중심설’을 주장했던 브루노를 구워죽였다. 이는 종교 역사의 오점이며 민중의 마음을 잃은 것이기도 하다. 당시, 정교일체의 통치가 많은 비참한 사건을 초래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를 의심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종교를 버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버렸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이 인류에게 우주의 진리를 전해 사람들에게 어떻게 수련하면 천국세계로 갈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가르쳤을 뿐이다. 신은 종교의 형식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정교일체를 승인한 것도 아니다. 종교의 몰락은 신의 몰락이 아니며, 종교 성직자의 부패는 신의 부패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의 신앙심은 다양한 요소에 관련돼 개인의 행위에 대한 불신은 곧 그 사람이 대표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결국 종교가 대표하고 있는 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신에 대한 신앙을 버렸고 신이 인류에게 전했던 전통문화를 버리는 대신 눈에 보이는 현재의 실증과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실은 이 실증과학이야말로 외계인의 과학이다.

지난 2002년 6월, 중국 구이저우(貴州) 지역에서 2억 700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중국공산당이 망한다는 의미의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이란 글자가 새겨진 장자석(藏字石: 글자가 새겨진 암석)이 발견됐다. 또 올해에는 흉조로 여겨지는 ‘칭하이 운석우’ 사건, ‘금성이 해를 가린 일’ 등이 발생해 역사적인 천문 예언과 맞아 떨어지는데 이는 장차 중국에 큰 변화가 발생할 것을 알리는 징조다.


2002년 6월 14일, 중국 서남 구이저우성과 광서성 접경지의 산골짜기에 위치한 핑탕(平塘)현 장부(掌布)향에 글자가 뚜렷이 새겨진 암석이 발견됐다. 암석 표면에는 2억 7000만 년 이전의 고생물 화석으로 구성된 글자가 돌출돼 있었고, 6개의 큰 글자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그 중 '망(亡)'자가 가장 컸다. 글자 높이는 1.52~1.8m 사이며 글자의 크기는 비슷하고 균등하게 배치됐다. 필획은 곧게 표면에 돌출돼 있어 인공적인 부조와 같아보였다. 이는 지질학적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기이한 현상인 ‘장자석’이다.


‘장자석’은 지질학과 인문학 전문가의 감정과 고찰을 거쳐 중국 여러 매체의 관심을 받았다. 관영매체는 ‘중국공산당’ 5글자만 보도했고 마지막 큰 글자인 ‘망(亡)’자는 생략했다.


현지 정부 관원은 이 암석을 ‘별을 구하는 돌(救星石)’이라는 명칭으로 브랜드를 만들어 관광 상품으로 돈을 벌려 했다. 그러나 지방관원이 관광지를 만들려고 결정하던 당일 저녁, 멀쩡한 날씨에 이 암석으로 가는 길에 있던 500년 된 큰 단풍나무가 갑자기 쓰러졌다.

지방관원이 관광지를 만들려고 결정하던 당일 저녁, 장자석으로 가는 길에 있던 500년 된 단풍나무가 갑자기 쓰러졌다. (인터넷사진)

신이 전한 문화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화샤(華夏) 민족은 예로부터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우주관이 있어 인류 사회의 변화와 흥망성쇠는 천상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천상의 변화는 인간 세상의 전쟁, 왕조의 교체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역사상 큰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한 각종 예언은 이미 제시돼 있으며 최후에는 모든 내용이 지금의 중국을 향하고 있다. 또한 지속적으로 나타난 ‘운석우’ 사건과 ‘금성이 태양을 가리는 사건’ 등 천상의 변화는 이미 나타났으며, 확률이 1경(1만 조)분의 1 밖에 안 되는 '중국공산당망' 장자석 역시 발견돼 천기가 누설됐다. 현대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선택뿐이며, 인류가 신기원에 들어갈지 아니면 멸망을 앞둔 중공의 순장품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현재 공산당 해체를 막으려는 시도는 어떠한 노력도 소용없으며 순장품이 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장자석'의 발견


핑탕(平塘)현은 중국 서남 구이저우성과 광시성의 접경지의 산골짜기에 위치하며, 핑탕현 장부(掌布)향 타오포(桃坡)촌 장부 하곡 관광지는 전체 길이 6km로 기이한 산, 물, 돌, 동굴, 나무, 물고기 등의 경관으로 이름난 지역이었으나, 교통이 발달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 6월, 국제 촬영박람회가 이 관광지를 촬영 장소로 추천하면서 당시 이곳을 청소하던 주민 왕궈푸(王國富) 씨에 의해 우연히 ‘장자석’이 발견됐다.

'장자석'에 관한 감정결과는 놀라웠다. 인공적으로 글자를 만들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연적으로 글자가 새겨질 확률은 1000억 분의 1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했다. (인터넷사진)

‘장자석’은 전문가들의 3차 시찰과 감정을 통해 중국 여러 매체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중국국토자원보' '중국광업보' 미국 '화교신문'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톈진일보' '광저우일보' '첸장만보' '구이저우일보' '구이저우도시보' 등 10여 개의 신문, CCTV의 1, 7, 10세트 프로그램, 여행 위성방송, 구이저우 TV방송국, 구이양 TV방송국 등 여러 방송국 및 '중화넷' '인민넷' '시나넷' 등 약 100개 매체가 연이어 ‘장자석’ 관련 보도를 하면서 핑탕의 희귀석은 유명해져 관광객을 유치하게 될 정도였다.


'장자석'은 첸난(黔南) 주민들에게 하룻밤에 많은 부를 가져다 줬고, 현지 경제에 계속 재원을 가져다주고 있다. 2005년 취안저우(全州)현은 관광객 289만 명을 유치했고 관광 총수입은 19억 위안에 달했다. 2006년 '5.1 노동절' 황금연휴 기간에 취안저우의 관광객은 79만 명에 이르렀고, 관광수입 1억 5600만 위안을 거둬들여 2005년 황금연휴 기간에 비해 관광객 수는 68% 증가, 수입은 72% 증가해 장자석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증명했다.


현지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약 500년 전 란마(攔馬) 하곡의 절벽에서 큰 바위가 땅에 떨어진 후 두 덩이로 갈라진 면에 ‘중국공산당망’ 글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암석은 구이저우(貴州)성 첸난(黔南)주 핑탕(平塘)현 장부(掌布)향 타오포(桃坡)촌에 있었다. 큰 바위 아랫부분에는 물살이 급한 하류가 있는데 현지 주민에 따르면 1970년대에 큰 바위 밑의 강바닥 틈새에 정수리 부위가 붉은색 벼슬모양을 한 무게 18kg가량의 독사가 살고 있었는데 현지인에 의해 잡혔다고 한다.

약 500년 전, 란마 하곡의 절벽에서 큰 바위가 땅에 떨어진 후 두 덩이로 갈라진 면에 ‘중국공산당망’ 글자가 나타났다. 오른쪽의 큰 바위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이 7.34m, 평균 폭 3.24m, 높이 2.68m, 무게 170t이며, 왼쪽의 큰 바위는 삼각형 모양으로 무게가 대략 100t이다. (인터넷사진)

이 두 덩이의 바위는 50여m 위 절벽에서 떨어졌고 떨어진 후 양쪽으로 갈라졌다. 두 바위의 거리는 1.46m다. 오른쪽 큰 바위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길이 7.34m, 평균 폭 3.24m, 높이 2.68m, 무게 170t이며, 왼쪽의 큰 바위는 삼각형 모양으로 무게가 대략 100t이다. 오른쪽 직사각형의 큰 바위의 안쪽에 형성된 석면에는 1줄의 글자가 돌출돼 있고 ‘중국공산당망’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보이며 후면에는 희미한 제목과 연월일, 20##가 1줄로 있는데 이것은 명확히 보이진 않는다.


핑탕현 정부는 2003년 8~12월 기간에 3개 팀의 지질 전문가에게 장자석의 진위에 대한 감정을 요청했다. 8월에는 구이저우 공업대학 자원환경대학 교수와 연구원, 9월에는 구이저우성 지질광물국 전문 기술자, 12월에는 중국 저명한 지질학자 10명과 인문학자 5명에게 특별히 요청해 장자석을 감정하도록 했다. 감정단들은 중국 지질과학 최고 권위자들로서 전문적인 계측기와 시약, 도구, 컴퓨터 등으로 좁은 공간에 수차례 들어가 세밀한 감정과 고찰을 했다.


'장자석'의 감정결과는 놀라웠다. 인공적으로 글자를 만들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연적으로 글자가 새겨질 확률은 1000억 분의 1이라고 전문가들은 보고했다. 이것은 각 글자의 크기, 방향, 간격, 자형이 일치한다는 제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아마 6번째 글자가 나타날 확률은 1경 분의 1이라고 한다.


'장자석' 나타난 후 신기한 일 발생


가난했던 첸난(黔南)주는 장자석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 짜내어 관광지로 개발할 방안을 생각했다. 큰 바위의 뒷면에 당 깃발을 새겨 관광객이 정면으로 당 깃발을 보고, 장자석의 오른쪽 30미터 떨어진 곳에 계단을 만들어 이곳에 ‘붉은색 비석’을 설치, 중공의 ‘1대(제 1차 전국대표대회)’부터 ‘16대’까지의 정황과 간단한 소개를 비문에 새기는 것이다. 그 옆 공간에는 중공 ‘1대’ 대표와 중공의 유명 지도자, 중공 첸난 출신 유명인 등 각종 석조 조각상을 설치하려고 계획했다. 이 구역을 공산당 선전 지역으로 형성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그 방안이 제기된 그날 저녁 비바람도 없었는데 장자석으로 통하는 길에 500년 된 거대한 단풍나무가 갑자기 부러져 쓰러졌고, 옆에 있던 은행나무 역시 반으로 쪼개져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근 주민들은 매우 놀랐으며 각종 추측과 괴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관광지 개발자가 단풍나무가 쓰러진 소식을 듣고 가서 살펴봤다. 그는 단풍나무가 쓰러진 것을 보고 흥분해 밤에 한숨도 잘 수 없었으며, 이른 아침까지 ‘단풍나무 비문’을 적어 나무가 쓰러진 자리에 비석을 세워 오래된 단풍나무 이야기를 소개해 후세에 남기기로 했다.

  
그래서 장자석을 보려면 반드시 이 10여m 높이의 거목이 쓰러진 곳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는 관광객들이 더욱더 장자석을 보는데 집중하게 만든다.


'중국공산당망'이 쓰인 장자석이 나타난 뒤로 그 해 중공의 상무위원 9명은 구이저우로 가서 직접 이 돌을 봤다.


2002년 11월 24일 16대가 막 끝나고 지질학 전문가 출신 원자바오는 구이저우 시찰
2003년 4월 10~14일, 쩡칭훙은 구이저우에 방문해 조사 연구
2003년 10월 21~27일, 자칭린 구이저우 시찰
2004년 1월 1~4일, 황쥐 구이저우 시찰
2004년 5월 2~6일, 우관정 구이저우 시찰
2004년 6월 30일~7월 5일, 우방궈가 구이저우, 윈난 시찰
2005년 2월 7~11일 설 연휴 기간, 후진타오가 구이저우 시찰
2005년 12월 12~15일, 리창춘 구이저우 시찰
2006년 11월 21~24일,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도널드 창은 현지 정부 관원과 상업계 지도자로 구성된 대표단을 인솔하여 구이저우성을 3일간 시찰한다. 목적은 현지 관광자원 발굴이었다.
2007년 1월 26~30일, 쩡칭훙은 다시 구이저우의 지도 작업을 시찰


장자석을 보고 돌아온 후 이들 중 누구도 이에 대해 공개 논평한 사람이 없었고, 누구도 장자석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다만 ‘중공을 망하게 할 돌’이라는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되지 않도록 최대한 통제하는 것 외에 고위 관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르는 척하면서 후일을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장자석’은 하늘이 특수한 시기에 중국인에게 전달해주는 큰 의미일 수 있다.


각종 예언은 현재의 상황에 초점


5000년의 중화 문명은 멀고 오래됐으며 축적된 것만 해도 매우 방대하고 깊이가 깊다. 그 중 ‘천인합일(天人合一)’ 관은 그 정수에 해당한다. ‘천인합일’관은 중국의 고대 문화와 과학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인류 사회의 변화, 흥망성쇠와 천상의 변화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천상의 변화는 인간 세상의 전쟁, 왕조의 교체를 암시하고 있다.


근대 중국인이 중공의 ‘무신론’ 사상의 독해에 영향을 깊게 받아 중공은 여러 번 정치 운동과 계통적인 사상 개조를 통해 신이 전해준 중화문화가 화샤 민족에 끼치는 영향을 철저히 제거하려고 시도했지만, ‘천인합일’과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는 관념은 이미 중국인의 영혼과 피 속에 깊이 자리해 있다. 역사에서 ‘천인합일’과 관련된 각종 신기한 일과 각종 예언은 줄곧 세간에 널리 퍼지고 있다. 여기서 고대와 현대의 일부 실례를 증거로 들어 보겠다.


진시황의 임종을 앞둔 시기, 하늘에서 대운석이 떨어졌고, 이 운석에는 몇 개의 글자 ‘시황이 죽으면 땅이 나눠진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진시황은 누가 이글을 썼는지 밝혀내지 못해 운석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전부 죽였다. 진시황이 죽자마자 그가 멸망시켰던 6국은 잇따라 나라를 세워 자신들의 땅에 할거했다. 이 일은 ‘사기(史記)’ 제 6편 ‘진시황본기’에 기재돼 있다.


원나라 때 황하가 범람하자 승상은 백성들을 소집해 황하를 정비하게 했다. 정비하기 전 황하 남북부에 동요가 유행했는데, 그 내용은 ‘석상은 눈 하나가 있고, 황하를 뒤집으면 천하가 뒤집힌다’는 것이었다. 결과, 강줄기를 수리할 때, 눈이 1개인 석상이 발견됐고 등 쪽에는 ‘석상은 눈 하나가 있고, 황하를 뒤집으면 천하가 뒤집힌다’는 글이 쓰여 있었다. 곧 이어 농민봉기가 잇따라 폭발했다. 이것 또한 역사서에 기재돼 있다.


지난 1976년 3월 8일 15시 01분, 지린 지역 500km² 범위 내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운석우가 떨어졌다. 현지 상공에 큰 불덩어리가 나타났고, 순식간에 3개로 갈라져 큰 불덩이와 작은 불덩이가 연달아 서쪽으로 날아갔다. 이 지역의 100만여 명은 불덩어리가 고속으로 날아갈 때 충격파로부터 나온 거대한 굉음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고 굉음과 진동파는 수많은 주택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그 해 중공의 지도자 저우언라이, 주더, 마오쩌둥이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7월 28일 탕산(唐山) 대지진은 지금까지 400여 년간 세계 지진 역사상에 가장 비참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며, 히로시마 원자탄 400개에 해당하는 위력이 도시의 반경 16km를 순식간에 폐허로 변하게 해 인구 100만 중 24만 명이 사망하고 16만 명이 부상당했다.


1997년 2월 15일, 산둥 쥐안청(鄄城)현에 다시 운석우가 발생했다. 이번 운석우는 1000여 덩이로 총무게가 100kg을 초과했다. 운석우가 내린 후 10일이 안 돼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났다. 덩샤오핑이 세상을 떠난 사실은 운석우가 큰 변화를 예고하는 정확성을 거듭 입증한 것이다.


올해, 2012년 2월 11일 낮 1시 40분, 칭하이성 시닝시 황중현에 다시 대형 운석우가 떨어졌다. 수백 덩이의 운석이 쏟아졌으며, 가장 큰 것은 12.5kg에 달했다. 이번 운석우는 1997년 2월 15일의 산둥 쥐안청현 이후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운석우로 그 운석의 크기와 수량은 1997년을 넘어섰으며 1976년 3월 8일 지린에서 나타난 운석우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올해 초, 한 중국인이 칭하이의 운석우에 대해 중국의 무장충돌과 천재인화, 유리걸식하고 있는 국민들을 귀인이 도와 도탄 중에서 구할 것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왕리쥔이 밤에 미국 영사관으로 도망간 충칭 사건, 그리고 연이어 보시라이의 실각, 저우융캉의 불안한 처지, 중공 최고위층 내부에 발생한 권력다툼 등등 일련의 사건들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역사상 중대 역사 사건을 예측한 각종 예언도 모두 틀림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세계무대의 핵심인 중국대륙에 곧 발생할 역사 변화는 삼국시기 제갈량(諸葛亮)의 마전과(馬前課), 송대 소옹(邵雍)의 매화시(梅花詩), 명대 류보원(劉伯溫)의 전병가(燒餅歌), 한국의 ‘격암유록(格庵遺錄)’ 및 세계를 뒤흔든 마야 예언에도 나와 있다.


그 중, 마야 예언은 더욱 명확히 1992년에서 2012년까지 지구는 20년 정화를 거친 후에, 2012년 12월 21일 지구와 인류는 새로운 기원에 진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공의 해체 임박, 형세를 되돌릴 힘 없다


장자석이 발견된 후 세인은 두려움 때문에 단지 5글자만 공개했고 길조로 생각하며 공산당 찬양 관광지로 개발한 것은 장자석을 통해 하늘의 뜻을 전해주는 사명을 거역한 것으로 이는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람 마음이 말세에 변하는 것 역시 하늘이 예상했던 일이기에 500년 된 단풍나무를 쓰러뜨려 강력히 세인을 각성시키려 했다.


민간에서는 1000년의 오래된 나무는 신령의 감응이 있는 것으로 보며 500년 고령 단풍나무도 단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라 마을의 상서로움으로 삼는다. 그러나 고목이 바람과 비도 없는데 관광지로 추진하기 전날 밤 갑자기 쓰러진 것은 세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2012년 6월 6일 금세기 최후의 ‘금성 일식’이 발생했다. 금성은 고대인이 천상을 관측해 온 이후로 태양과 달 다음으로 가장 밝은 별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태백’ 또는 ‘태백금성’이라고 불렀다. 고대인의 점성술에서 금성은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역대 점성가들도 금성을 극히 중시해 ‘금성 일식’은 대흉의 조짐으로 여겨진다.


역사상 매번 나타난 ‘금성 일식’ 사건은 모두 중국 정국에 큰 영향을 줬으며 천인상응(天人相應) 이론에 근거하면 서로 영향을 주는 인과 관계성이 있다. ‘황제점’에서는 ‘도가 있는 나라는 오성이 지나감에 그 행함을 잃지 않게 돼 군주는 왕성하고 만민은 평온하다’고 말한다. 역사에서 볼 때 만약 군주가 현명하면 정치가 맑게 되고, 이 천상을 맞아 사회의 위아래가 동심으로 덕이 있고 일체처럼 모이게 되며 부족함이 있어도 재난은 최소한으로 적어지며 심지어 고난 후 좋은 결과가 있게 되는 일로 바뀔 수 있어 수백 년간 당나라가 흥성한 것같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군주가 어리석어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도덕이 무너지고 제후는 정치를 제멋대로 하고 부패가 횡행하고 선과 악을 가리기 어렵게 된다. 죄가 있어도 벌하지 않고 모든 관원이 부패하고 정치일은 느슨해진다. 백성이 원망하고 신하는 윗사람을 막고 위아래가 마음이 갈라지게 된다.


역사상 일찍이 중대 사건을 정확히 예측한 각종 예언은 이미 모두 갖춰져 있으며 마지막으로 지금 중국을 가리키고 있다. 여러 번 증명된 '운석우' 사건과 '금성 일식' 현상은 이미 나타났으며 1경 분의 1 확률이 있는 '중국공산당망' 장자석이 나타난 것은 천기가 이미 전부 누설된 것을 의미한다.


현대인으로 말하자면, 남아있는 것은 다만 선택뿐이다. 인류가 신기원에 진입할지 아니면 망하는 중공의 순장품이 될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반드시 생생세세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할 것이다. 공산당 해체를 지연하고 막으려는 시도는 어떠한 노력도 소용없는 일이며 그렇게 한다면 공산당의 순장품이 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시기 신비한 이야기 2012. 6. 28. 11:36

공산당정권은 ‘무신론’과 ‘유물론’을 바탕으로 하는데 신이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파가 있기 때문에 라디오나 TV를 볼 수 있는데 전파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전파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탁상시계 하나도 배터리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데 신이 없다면 이 넓고도 끝없는 바다, 땅덩이 대륙과 그위의 사람을 태운 지구가 어떻게 공중에 뜰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자전과 공전을 할 수 있겠는가.

비는 어떻게 그렇게 가늘게 또는 굵게 골고루 지상에 내릴 수 있겠는가. 바늘끝 점처럼 그렇게 가는비는 사람의 기술로는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겨울에 내리는 눈은 어떻게 그렇게도 골고루 눈송이를 날릴 수 있겠는가. 눈송이 하나하나가 어떻게 육각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인공으로 만든 눈은 육각형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능력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물론은 영혼·정신·마음·사고·의식 등 보다는 물질적인 것이 근원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잘못된 인식이다. 인간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사명을 띄고 온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있는가 하면 예술을 말살하러 온 피카소, 고흐등과 같은 화가들이 있었고 또 다윈과 같은 엉터리 생물학자가 나타났다.

바로 공산당이 인권을 말살하고 당을 유지하기 위하여 민중을 박해하고 있는데 근대에 중국공산당이 나타날 걸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2002년6월 중국 귀주성 평당현 장포하곡에서 2억7천만년전에 진귀한 돌(많은 지질학자들이 고찰)이 글자가 새겨진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다. 중국공산당망“中国共产党亡”이라고. 중국공산당이 망한다는 것이다.

신은 중국이 한자를 사용하고 공산당이 나타나 온갖 나쁜짓만 할 것임을 미리 알고 그렇게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시기에 이 바윗덩이 돌이 나타난 것은 중국인민들에게 깨우치라고 나타난 것일 것이다.



인권박해문제를 말하면 중국에서는 진(眞진실)․선(善선량)․인(忍인내)을 수련하는 심신수련법(파 룬궁,법륜공,파룬따파,법륜대법등으로도 불림)이 20년전에 나타났는데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서양에서는 파룬궁으로 알려져 현재 세계114개국에서 수련하고 있다고 한다)수련으로 건강이 좋아져 인민들의 의료비가 절감되고 사회에 좋은 점이 있다고 보고 당차원에서 장려하였다. (진선인은 인류사회에 좋은점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이 도덕을 지키고 인의예지신에 입각하여 행동한다면 사회는 안정될 것이다.)

그러다가 수련자수가 몇 년만에 1억명이상으로 공산당원숫자 6500만명 보다 많게되자 당시주석 강택민은 질투심과 두려움에 이 기공수련법을 금지하기위해 중앙상무위원 회의를 부쳤으나 모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법령근거도 없이 구두지시사항만으로 단속하게 되었다.

610이라는 파룬궁수련을 단속하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국가예산의 1/3을 투입하여 단속하기 시작했다. 이 수련법은 돈을 취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건물내에서 연공동작을 하지않고 주로 공원이나 학교운동장등에서 동작수련을 하는 데 동작하다 적발되면 체포하여 구타하고 갖은 학대를 하며 수련포기를 강요하다가 죽으면 자살했다고 말하며 수련포기각서를 써주면 집으로 되돌려보내 주었는데 겁에 떨며 일부 포기각서를 쓴 수련생도 있었지만, 끝까지 각서를 쓰지않고 구타를 당해 죽거나 장기적출당해 화장한채 버려지는 수련생이 수십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포기각서를 쓰면 돌려 보내주는데 왜 끝까지 버티다가 죽기도 했는가. 이 수련법이 건강에 아주 탁월하다고 한다. 수많은 환자들이 병을 앓다 수련하여 완쾌되었는데 이들이 수련을 포기하겠는가.

인권박해문제는 이쯤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사후 오오백년후에는 말겁시기가 온다고 하셨는데(大方等大集經제55권 月藏分 分布閻浮提品) 석가모니는 기원전 5백년경에 태어나셨으니 지금이 2500년쯤이 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을 1992년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오오백년은 오백년을 다섯 번 한 것으로 석가모니는 이때가 되면 "나의 법 중에 서로 말로써 투쟁하고 모든 깨끗한 법은 깊이 숨어버린 채 굳어 가리라" 하였다.

『장아함전륜성왕경』에 어느 날 석가모니께서 많은 제자들 앞에서 說했다.

“너희들도 이곳에서 전해오는 한 가지 오랜 전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장래 인간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 ‘전륜성왕’의 능력은 대단히 크다. 이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모두 萬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大法’을 얻을 것이며, 이 법(진리)을 얻은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때에는 하늘에서도 많은 神들이 法을 들으러 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으로 환생하는데, 뭇 신들도 이 날이 도래하기를 기다린다.”

얼마 후 산 위의 매우 넓은 곳에서 법회가 열렸는데,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들이 모두 있었다. 이때 문득 女제자 연화색이 말했다.

“세존(世尊)이시어, 장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세상에 내려와 法을 전한다고 하셨는데,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를 텐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이르시기를

“그때가 되면 ‘우담바라(優曇婆羅)’라는 꽃이 광범위하게 필 것인데, 이는 聖王의 도래와 法을 얻을 시기를 알려 주는 것이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 꽃은 인간세상의 꽃이 아니다. 전륜성왕의 일종 상서로운 상(瑞相)과 같은 것이다. 서로 다른 부처는 모두 서로 다른 표상(表象)이 있다. 이 표상은 일종의 상서로운 상이며 이 부처님이 어느 곳에 와서 법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하실지 예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꽃은 인간 세상에 삼천년마다 한 번씩 피는데 다른 공간에서는 더 긴 시간에 한 번씩 핀다. 설사 다른 공간에 있을지라도 전륜성왕을 만나는 것은 모두 몹시몹시 수승한 일이다.”

<풀줄기에 핀 우담바라>

< 도시 창문틀에 핀 우담바라>

“너희들의 선근(善根;선량한 마음가짐의 바탕)을 잘 쌓아라. 전생하여 너희들이 聖王을 만날 때까지 나도 너희들을 보호할 것이다.”

이 때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저희는 금생에 성불하고 싶습니다!”

석가모니 말씀하시기를

“성불한 사람도 있다.”

이 때 하늘에서 가는 비가 내렸다. 석가모니는 그 우담바라 꽃의 줄기는 가느다란 빗줄기와 같으며 꽃이 피어도 매우 작다고 했다. 비록 보기에는 매우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그 꽃은 근본적으로 어떤 곳에서나 피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다.

목건련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큰 자비심을 베푸시어 우리에게 미리 이 우담바라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석가모니께서 “좋다! 내가 불력(佛力)으로 이 꽃을 가져올 수 있는지 보겠다.”

< 장미꽃잎에 핀 우담바라>

잠시 후 석가모니께서 손을 내밀자 그의 손에는 작고 줄기가 긴 흰 꽃이 들려있었다.

“이것이 우담바라 꽃이다. 같지 않은 도(道)에서 천상의 뭇 신들은 일찍이 모두 이 꽃을 보고 싶어 했고 일찍이 전륜성왕의 교화(敎化)를 얻고 싶어 했다. 너희들이 얻을 때가 되면 나도 너희들을 위해 기뻐할 것이다!”

이 때 하늘에서 투명한 무지개색 옷을 입은 많은 天女들이 내려와 꽃을 뿌리기 시작했으며 가는 비는 점점 그쳤다.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으며 또한 많은 五色구름이 나타나 미풍을 따라 춤을 추었다. 그리고 용(龍)과 봉(鳳)이 나타났는데 이는 상서로움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있다.

『미륵(彌勒)』의 어원은 범어로는 「마이트레야(Maitreya)」이며,팔리(pa-li)어로는 「메테야(Mette-yya)」다.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Maitreya)」라는 말은 본래 「미트라(Mitra) 」라는 신으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미트라는 이란 , 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의 태양신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구세주는 「메시아(Messiah)」로 바로 이 미트라(Mitra) 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메테야는 인도에서 미래의 구원불을 부르던 칭호인데, 이를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가득 충만하다는 뜻의 ‘미(彌)’자와 새롭게 진리의 테두리를 짜서 씌운다는 뜻의 굴레‘륵(勒)’자로 기록한 것이다.

미륵의 어원을 추적하면 『불교의 메테야(미륵)부처와 기독교의 메시아가 동일인』이라하기도 한다.


중국명의 ‘본초강목’ 저자 이시진

중국 고대 왕조를 이끈 전설의 삼황 중 두 번째 황제인 신농(神農)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 100여 가지 약초를 맛보고 효능을 정리해 병자를 구했다. 신농은 숱한 독초를 먹고 중독되어 쓰러지기도 하고 몸의 형태가 변할 정도였지만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신농이 당시 정리한 약의 성질과 효능은 훗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삼황의 하나인 황제(黃帝)는 신하 기백(岐伯) 등과 함께 의학을 논했고 이를 정리한 황제내경은 한의학의 원전으로 불린다. 고대의 제왕에게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병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훗날 세인의 추앙을 받은 명의들도 명예와 이익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다스리고자 했다. 음양의 조화와 심신의 균형,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한의학의 이론 체계를 다졌던 고대 명의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부

약왕(藥王) 손사막의 업적을 포함해 선대에 이뤄진 약재에 관한 연구는 명나라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집대성하게 된다.

이시진의 자는 동벽이고 호는 빈호로서 호북 사람이다. 1518년 태어나 1593년까지 살았다.

이시진의 집안은 대대로 의업을 하던 가문이다. 이시진의 조부는 민간 시골의사를 지칭하는 영의(鈴醫)로 활동했다. 영의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낮아서 촌락에서 한약방을 꾸리는 정도였다. 조부의 의술은 훌륭했고 인품 또한 후덕해 인술을 펼쳤지만 푸대접을 면치 못해 스스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씨 집안은 기주(蘄州)에서 대대로 의술을 펼쳤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당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쉽게 표현하자면 의사가 공무원보다 푸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조부가 사망하면서 아들 이언문(李言聞)에게 당부하기를, 손자인 이시진이 영특하니 반드시 유학자가 되게 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고 명성을 떨치게 하라고 했다.

이언문은 현지에서 명의로 이름 높았으며 호는 월지(月池)였다. 하지만 지방 유지와 관리에게 심심찮게 모욕을 당하던 터라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이언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과진(果珍)이고 학문에 큰 뜻이 없었고 평생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시진은 둘째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비록 몸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렸지만 성격이 강직하고 순수했다.

하루는 그가 부친의 책을 대충 훑어보다가 약왕 손사막의 저작 ‘비급천금요방’을 읽게 됐다. 손사막의 책에는 “무릇 훌륭한 의사, 즉 대의(大醫)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뜻을 평정하게 하여, 바라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먼저 큰 자비와 측은지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고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만약 병이 있어 치료받고자 하는 환자가 있으면, 그 귀하거나 천함, 가난하거나 부유함, 나이의 많고 적음, 아름답거나 추함, 원한과 친근함, 동족과 이민족, 지혜의 많고 적음을 묻지 말고 모두 한마음으로 똑같이 자기의 부모와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 환자를 고쳐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말며 자기에게 어떤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 있어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은 훗날 이시진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의학자의 뜻을 놓지 않는 버팀목이 된다.

이시진은 총기가 있어 14세에 수재에 합격했으나 9년간 3번이나 호북의 성도 무창에서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사실 이시진은 유학 공부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출세욕도 없었다.

3번의 낙방 끝에 이시진은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이시진이 벼슬에 뜻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어 이시진을 가르친다.

의술이 일취월장 발전하던 이시진에게 류교라고 하는 조카가 있었다. 류교는 평소에 주색을 탐해 마침내 병이 생겨 하반신이 붓고 통증이 생기고, 대소변이 통하지 않아 앉거나 누울 수 없었다. 울며 신음한 날이 일주일이 넘어갔다. 류교는 주위의 조언대로 대소변을 통하게 하는 약을 복용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시진은 류교의 대장과 방광에 문제가 없다고 봤으며 독자적으로 진단하고 처방을 구성했다. 부친은 이시진의 진단과 치료법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그의 약 처방에 동의했다. 이시진은 멀구슬나무열매(楝實), 회향풀(茴香), 천산갑(穿山甲) 등 여러 약에 견우(牽牛)를 배로 넣고 달였다. 약을 한번 마시니 병세가 즉시 약해졌고 3번 복용하니 병이 나았다.

가족들은 이시진의 정확한 진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시진은 조부가 남긴 진료기록에 이 병이 기재돼 있으며 자신은 단지 그것을 따라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부친이 책을 한번 살펴보니 과연 그런 기록이 있었다. 이시진은 할아버지의 업적에 독창적으로 약재를 가미해 효과를 배가시켰던 것이다.

이시진은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의술과 학문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시진은 특히 본초(本草)를 중시했다. 당시 여러 서적에는 약재의 효능과 기원에 대한 서술이 있었지만, 통일되지 않았고 어떤 약재는 정반대의 효능이 실려 있거나, 독성 약재를 안전하다고 표기한 서적도 있었다. 어떤 약재는 이름은 같으나 기원 식물이 달라 지역마다 다른 약재를 같은 약재로 착각하고 쓰는 경우도 있었다. 31세부터 이시진은 몸소 체험하고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약재 즉, 본초를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훗날 이시진의 명저 ‘본초강목’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본초강목은 지금까지도 현대 한의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저서다.

요즘 한의계에서도 가치 있는 저작으로 높게 평가하는 이시진의 대표작 ‘본초강목’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시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호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방씨 성의 어부가 헐레벌떡 이시진을 찾아와 왕진을 부탁했다. 방씨의 집을 찾아가니 방씨의 아내가 중병을 앓는 듯 힘없이 누워 있었다. 이시진은 진맥 후 생명에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방씨를 안심시키며 혹시 최근에 먹은 약이 없는지 물었다. 방씨는 어제 아내가 불편해 근처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복용한 뒤 증상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처방전을 확인해보니 처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시진은 방씨에게 약 찌꺼기를 가져오라 했다. 확인해 보니 처방전에 기록된 약재 ‘호장’이 없고, 처방전에 없는 ‘누남자’라는 약이 대신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안 방씨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시진은 방씨에게 의사와 한약방 주인은 잘못이 없다고 진정시켰다. 이어서 본초 관련 서적에 ‘누남자를 호장이라고도 한다’라는 문장이 실려 있어서 헛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시진은 누남자를 해독하는 약을 알고 있어서 방씨의 부인은 곧 회복됐다.

또 한번은 민간에서 ‘만다라’라는 약재를 보기만 해도 미쳐서 춤추게 된다는 말이 돌았다. 이를 전해들은 이시진은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하기 위해 만다라를 어렵사리 구해 실험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만다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다라에 대한 그릇된 소문을 들으면 곧바로 보여주면서 사실이 아님을 보여줬다. 이후 만다라를 끓여서 복용할 경우 환각 작용과 마취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취제 원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시진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올바른 약재 정보를 정리해 집대성하기로 결심한다. 이시진의 부친은 역대 주요 의서가 황실의 명을 받아 여러 집필진이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즉 개인이 다시 정리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이시진을 말렸지만 이시진은 생각을 굽히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이시진은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근 초나라의 왕자가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졸도했고, 일대서 명의로 이름난 이시진이 치료하게 됐다. 그는 진단 후 구토하는 약과 설사하는 약을 배합해 복용하게 했고, 왕자는 정신이 돌아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인연으로 초왕은 이시진을 초빙해 관직을 맡게 하고, 3년 후 북경 태의원으로 갈 수 있도록 천거했다.

이시진은 이 기간 동안 그야말로 독서광이 되었다. 그는 본초강목에 ‘고서 즐기기를 엿을 즐기듯이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경성(顧景星)은 ‘이시진 전’에서 “10년간 책을 읽음에, 문밖을 나가지 않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시진은 800여 종 만여 권의 의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역사, 지리 및 돈황의 저작을 읽었으며,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도 두로 읽었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으면서 많은 환자를 치료했고, 사례금을 받기 일쑤였지만 매번 거절했다. 태의원은 원래 황실이 운영하는 의원이었지만 당시에는 세인을 현혹하는 돌팔이 의사가 태의원을 장악하면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였다. 이시진은 이 와중에도 인술을 펼쳤지만 일 년이 지나자 사임한 뒤 귀향해 연구를 이어갔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을 때 읽은 책의 내용과 자신의 경험·연구를 결합해, 27년 후 마침내 ‘본초강목’을 완간했다. 본초강목은 모두 52권 16부, 60류로 나뉘며 27년을 거쳐 1578년에 완성된다. 역대 의가가 다룬 약물 1892종이 수록돼 있으며, 그 중 식물 약재가 1094종, 광물, 동물 및 기타 약재가 798종이었다. 374종은 이시진이 처음 수록한 것이다. 모든 약물은 우선 정식 명칭을 강(綱)으로 하고 부가적 명칭을 목(目)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은 집해, 감별, 정오(正誤)와 산지, 형태에 대해 서술했다. 그 다음은 기미, 주치, 설명, 체험과 응용을 곁들였다. 내용이 방대해 중국 명대 이전 약물학을 결산했으며, 후대에도 중대한 공헌을 했다.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이시진은 맥진 등 진단에도 능통했으며, 그의 호를 딴 맥학 저서인 ‘빈호맥학’에서 다룬 내용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시진은 159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진은 평생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대표작 본초강목 외에도 ‘기경팔맥고(奇經八脈考)’ ‘빈호맥학(瀕湖脈學)’ ‘오장도론(五臟圖論)’ 등 10여 종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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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명의 ‘본초강목’ 저자 이시진


중국 고대 왕조를 이끈 전설의 삼황 중 두 번째 황제인 신농(神農)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 100여 가지 약초를 맛보고 효능을 정리해 병자를 구했다. 신농은 숱한 독초를 먹고 중독되어 쓰러지기도 하고 몸의 형태가 변할 정도였지만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신농이 당시 정리한 약의 성질과 효능은 훗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삼황의 하나인 황제(黃帝)는 신하 기백(岐伯) 등과 함께 의학을 논했고 이를 정리한 황제내경은 한의학의 원전으로 불린다. 고대의 제왕에게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병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훗날 세인의 추앙을 받은 명의들도 명예와 이익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다스리고자 했다. 음양의 조화와 심신의 균형,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한의학의 이론 체계를 다졌던 고대 명의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부

약왕(藥王) 손사막의 업적을 포함해 선대에 이뤄진 약재에 관한 연구는 명나라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집대성하게 된다.

이시진의 자는 동벽이고 호는 빈호로서 호북 사람이다. 1518년 태어나 1593년까지 살았다.

이시진의 집안은 대대로 의업을 하던 가문이다. 이시진의 조부는 민간 시골의사를 지칭하는 영의(鈴醫)로 활동했다. 영의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낮아서 촌락에서 한약방을 꾸리는 정도였다. 조부의 의술은 훌륭했고 인품 또한 후덕해 인술을 펼쳤지만 푸대접을 면치 못해 스스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씨 집안은 기주(蘄州)에서 대대로 의술을 펼쳤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당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쉽게 표현하자면 의사가 공무원보다 푸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조부가 사망하면서 아들 이언문(李言聞)에게 당부하기를, 손자인 이시진이 영특하니 반드시 유학자가 되게 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고 명성을 떨치게 하라고 했다.

이언문은 현지에서 명의로 이름 높았으며 호는 월지(月池)였다. 하지만 지방 유지와 관리에게 심심찮게 모욕을 당하던 터라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이언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과진(果珍)이고 학문에 큰 뜻이 없었고 평생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시진은 둘째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비록 몸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렸지만 성격이 강직하고 순수했다.

하루는 그가 부친의 책을 대충 훑어보다가 약왕 손사막의 저작 ‘비급천금요방’을 읽게 됐다. 손사막의 책에는 “무릇 훌륭한 의사, 즉 대의(大醫)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뜻을 평정하게 하여, 바라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먼저 큰 자비와 측은지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고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만약 병이 있어 치료받고자 하는 환자가 있으면, 그 귀하거나 천함, 가난하거나 부유함, 나이의 많고 적음, 아름답거나 추함, 원한과 친근함, 동족과 이민족, 지혜의 많고 적음을 묻지 말고 모두 한마음으로 똑같이 자기의 부모와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 환자를 고쳐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말며 자기에게 어떤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 있어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은 훗날 이시진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의학자의 뜻을 놓지 않는 버팀목이 된다.

이시진은 총기가 있어 14세에 수재에 합격했으나 9년간 3번이나 호북의 성도 무창에서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사실 이시진은 유학 공부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출세욕도 없었다.

3번의 낙방 끝에 이시진은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이시진이 벼슬에 뜻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어 이시진을 가르친다.

의술이 일취월장 발전하던 이시진에게 류교라고 하는 조카가 있었다. 류교는 평소에 주색을 탐해 마침내 병이 생겨 하반신이 붓고 통증이 생기고, 대소변이 통하지 않아 앉거나 누울 수 없었다. 울며 신음한 날이 일주일이 넘어갔다. 류교는 주위의 조언대로 대소변을 통하게 하는 약을 복용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시진은 류교의 대장과 방광에 문제가 없다고 봤으며 독자적으로 진단하고 처방을 구성했다. 부친은 이시진의 진단과 치료법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그의 약 처방에 동의했다. 이시진은 멀구슬나무열매(楝實), 회향풀(茴香), 천산갑(穿山甲) 등 여러 약에 견우(牽牛)를 배로 넣고 달였다. 약을 한번 마시니 병세가 즉시 약해졌고 3번 복용하니 병이 나았다.

가족들은 이시진의 정확한 진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시진은 조부가 남긴 진료기록에 이 병이 기재돼 있으며 자신은 단지 그것을 따라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부친이 책을 한번 살펴보니 과연 그런 기록이 있었다. 이시진은 할아버지의 업적에 독창적으로 약재를 가미해 효과를 배가시켰던 것이다.

이시진은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의술과 학문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시진은 특히 본초(本草)를 중시했다. 당시 여러 서적에는 약재의 효능과 기원에 대한 서술이 있었지만, 통일되지 않았고 어떤 약재는 정반대의 효능이 실려 있거나, 독성 약재를 안전하다고 표기한 서적도 있었다. 어떤 약재는 이름은 같으나 기원 식물이 달라 지역마다 다른 약재를 같은 약재로 착각하고 쓰는 경우도 있었다. 31세부터 이시진은 몸소 체험하고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약재 즉, 본초를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훗날 이시진의 명저 ‘본초강목’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본초강목은 지금까지도 현대 한의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저서다.

요즘 한의계에서도 가치 있는 저작으로 높게 평가하는 이시진의 대표작 ‘본초강목’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시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호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방씨 성의 어부가 헐레벌떡 이시진을 찾아와 왕진을 부탁했다. 방씨의 집을 찾아가니 방씨의 아내가 중병을 앓는 듯 힘없이 누워 있었다. 이시진은 진맥 후 생명에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방씨를 안심시키며 혹시 최근에 먹은 약이 없는지 물었다. 방씨는 어제 아내가 불편해 근처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복용한 뒤 증상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처방전을 확인해보니 처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시진은 방씨에게 약 찌꺼기를 가져오라 했다. 확인해 보니 처방전에 기록된 약재 ‘호장’이 없고, 처방전에 없는 ‘누남자’라는 약이 대신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안 방씨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시진은 방씨에게 의사와 한약방 주인은 잘못이 없다고 진정시켰다. 이어서 본초 관련 서적에 ‘누남자를 호장이라고도 한다’라는 문장이 실려 있어서 헛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시진은 누남자를 해독하는 약을 알고 있어서 방씨의 부인은 곧 회복됐다.

또 한번은 민간에서 ‘만다라’라는 약재를 보기만 해도 미쳐서 춤추게 된다는 말이 돌았다. 이를 전해들은 이시진은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하기 위해 만다라를 어렵사리 구해 실험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만다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다라에 대한 그릇된 소문을 들으면 곧바로 보여주면서 사실이 아님을 보여줬다. 이후 만다라를 끓여서 복용할 경우 환각 작용과 마취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취제 원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시진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올바른 약재 정보를 정리해 집대성하기로 결심한다. 이시진의 부친은 역대 주요 의서가 황실의 명을 받아 여러 집필진이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즉 개인이 다시 정리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이시진을 말렸지만 이시진은 생각을 굽히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이시진은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근 초나라의 왕자가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졸도했고, 일대서 명의로 이름난 이시진이 치료하게 됐다. 그는 진단 후 구토하는 약과 설사하는 약을 배합해 복용하게 했고, 왕자는 정신이 돌아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인연으로 초왕은 이시진을 초빙해 관직을 맡게 하고, 3년 후 북경 태의원으로 갈 수 있도록 천거했다.

이시진은 이 기간 동안 그야말로 독서광이 되었다. 그는 본초강목에 ‘고서 즐기기를 엿을 즐기듯이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경성(顧景星)은 ‘이시진 전’에서 “10년간 책을 읽음에, 문밖을 나가지 않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시진은 800여 종 만여 권의 의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역사, 지리 및 돈황의 저작을 읽었으며,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도 두로 읽었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으면서 많은 환자를 치료했고, 사례금을 받기 일쑤였지만 매번 거절했다. 태의원은 원래 황실이 운영하는 의원이었지만 당시에는 세인을 현혹하는 돌팔이 의사가 태의원을 장악하면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였다. 이시진은 이 와중에도 인술을 펼쳤지만 일 년이 지나자 사임한 뒤 귀향해 연구를 이어갔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을 때 읽은 책의 내용과 자신의 경험·연구를 결합해, 27년 후 마침내 ‘본초강목’을 완간했다. 본초강목은 모두 52권 16부, 60류로 나뉘며 27년을 거쳐 1578년에 완성된다. 역대 의가가 다룬 약물 1892종이 수록돼 있으며, 그 중 식물 약재가 1094종, 광물, 동물 및 기타 약재가 798종이었다. 374종은 이시진이 처음 수록한 것이다. 모든 약물은 우선 정식 명칭을 강(綱)으로 하고 부가적 명칭을 목(目)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은 집해, 감별, 정오(正誤)와 산지, 형태에 대해 서술했다. 그 다음은 기미, 주치, 설명, 체험과 응용을 곁들였다. 내용이 방대해 중국 명대 이전 약물학을 결산했으며, 후대에도 중대한 공헌을 했다.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이시진은 맥진 등 진단에도 능통했으며, 그의 호를 딴 맥학 저서인 ‘빈호맥학’에서 다룬 내용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시진은 159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진은 평생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대표작 본초강목 외에도 ‘기경팔맥고(奇經八脈考)’ ‘빈호맥학(瀕湖脈學)’ ‘오장도론(五臟圖論)’ 등 10여 종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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