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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0대 등신불 | |
불교에서는 최고 경지로 수행하면 원적한 후 육신이 썩지 않는다고 말한다. 불교용어로 이런 육신을 ‘전신사리(全身舍利)’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원적한 후 몇년이 지나도 육신이 썩지 않고 살아있는 것처럼 그대로라는 것이다. 이런 경지는 물론 일반적인 수행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육신을 가진 고승들을 중국에서는 ‘육신보살’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등신불(等身佛), 혹은 즉신불(卽身佛)로도 알려져 있다. 당송 이후, 많은 ‘육신보살’이 나타났다. 유감스럽게도 혜능선사 이후 천년 동안 전란이 빈발해 무수한 명산대찰들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흩어져 대부분의 육신보살이 보존되지 못했다. 더구나 근대에 이르러 문화혁명이란 사상 최대의 문화재 파괴로 인해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육신보살의 수량은 더욱 적어졌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중국의 10대 육신보살을 소개해 본다.(이하 인터넷이미지) | |
이후에 남양(南洋)을 방문해 항일국책을 선전했다. 만년에 대만에 거주했으며 ‘대만불학원’을 창립해 대만승려교육을 시작했으며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청년 승려들을 수용했다. 1949년 간첩으로 오인받아 감옥살이를 하다 1954년 감옥에서 원적했다. 원적한 후 그를 항아리에 넣었는데 얼굴이 생전과 같았다. 5년 후 항아리를 열고 검사한 결과 얼굴이 자색을 띌뿐 전신이 그대로 보존됐다. 현재 자항보살의 전신은 대만 미륵내원에 보관돼 있다. | |
“보리(菩提)라는 나무는 본래 없고, 명경(明鏡)도 대(臺)가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는 곳에 티끌이 끼랴”는 게송은 바로 혜능선사의 걸작이다. 혜능에 대한 전설은 아주 많은데 대부분 선종의 이치와 관계 있다. | |
개원 16년 원적했는데 당시 99세. 시신은 함속에 앉은 상태였다. 3년 후 열어보자 얼굴이 생전과 같았다고 관절을 움직이자 결과 금사슬을 흔드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김교각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구화산에서는 석탑 하나를 만들어 김교각의 육신을 보존하고 ‘김지장(金地藏)’이라고 존칭하고 그 전각을 ‘육신전(肉身殿)’이라고 명명했다. | |
126세 되던 해의 9월14일 오전 그는 자신의 백년역사를 적어놓은 편지를 옆에 놓아두고 원적했다. | |
그 후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다 황태후가 하사한 <대장경> 및 금을 받아 해인사(海印寺)를 건립하고 주지로 됐다. | |
1989년 백마사에서 보살계를 받았으며 1991년 원적. 79년 생애 중 61년 간 승려생활을 했다. 승려들은 그의 시신을 항아리에 넣어 매장했다. 1997년 가을 유골을 고향의 불탑으로 옮겼다. | |
3년5개월 후, 관을 열어본 결과 얼굴모습이 생전과 다름 없었고 피부가 탄력 있었으며 사지가 부드러운 육신보살이 되어 있었다. | |
1985년 2월17일0시5분 ‘아미타불’을 몇번 왼 후 상서롭게 웃으면서 원적. 당시 91세. 원적 7일 후, 항아리에 넣어서 원형 탑에 보존. | |
1999년 제자 석법광(釋法光)의 요청으로 장주 용문구(龍文區) 향광념(香光念佛堂) 불당에 장기 거주하다 2003년 116세 나이로 원적. 3년후 시신이 담겼던 단지를 열자 모습이 생전과 다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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