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유럽 음악계를 주름잡았던 양대 산맥이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같은 거장들이 배출되었고
20세기에 들어서는 음악의 혁명인 무조와 12음기법을 창시한'신 빈 악파' 3인방-쇤베르크, 베르크, 베베른-을 배출하기도 했다. 또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세계 최정상급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라는 유명한 여름 음악제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요한 슈트라우스 일족만큼 특별한 음악가도 없다.
그들은 19세기를 왈츠와 폴카 등의 춤곡으로 꽃단장해놓았고, 이를 덴마크, 러시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에까지 널리 퍼뜨린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특히 빈은 완전히 왈츠 부대에게 점령당해, 이당시 댄스홀은 24시간 개장이었고주지육림의 낙원으로 수많은 사생아를 배출(?)하는 불명예까지 지니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얼마나 오스트리아에서 소중한 작곡가임을 알 수 있는 증거는 꽤 많은데,빈의 국제 공항이름이 '요한 슈트라우스 공항' 이며 매년 12월 31일 밤에는빈 국립오페라극장이 오페레타 '박쥐' 를 늘 공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1월 1일 0시에 슈테판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오스트리아 방송 협회가 방송하는 곡도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이다.
한마디로 오스트리아, 특히 빈은 슈트라우스로 시작해 슈트라우스로 끝내는 한해를 보내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유행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오스트리아의 보수적인 음악가들은슈트라우스의 춤곡들을 예술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죽기 불과 12일 전에야 빈 궁정 오페라 무대에서 그의 오페레타'박쥐' 서곡을 지휘할수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계속된 이 벨 에포크(좋았던 시대)는 1차대전이 터지면서 끝나고, 왈츠의 인기는 점차 하락했다.
이미 슈트라우스 형제중 막내 에두아르트는 1901년 음악 활동을 중단했고, 에두아르트의 아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1905년 빚 문제로 궁정무도회 음악감독직을 사임했다.
최후의 왈츠 작곡가였던 칼 미하엘 치러도 1922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1920년대 들어 슈트라우스 가문의 왈츠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1년 빈 시립 공원에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는데,이 자리에 이례적으로 빈 필이 출연해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를 연주했다.
1925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빈 필이 빈과 잘츠부르크에서기념 콘서트를 가져 화제가 되었다.
본격적인 빈 신년음악회의 시작은 1939년 12월 31일로,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가 빈 필과 '제 1회 요한 슈트라우스 음악제' 를개최한 것을 신년음악회의 시초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것이 매년 계속되고 1941년부터는 1월 1일에도 연주회가 열려오늘날의 송년/신년음악회의 관례가 확립되었다.
사실 신년음악회의 개최 동기는 조금 불순해, 나치스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침체된오스트리아의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의도 외에 히틀러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제 왈츠' 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황제 왈츠' 를 히틀러 자신의 이미지에 대입시켜 오스트리아 국민들을 세뇌시키려 했다는 의도라고).
그러나 1945년에 신년음악회는 갑자기 중단되었다.
전황의 악화 탓도 있었지만 나치스가 슈트라우스 가문이 유태인 혈통을 가졌다는 사실을뒤늦게 알아차려 부랴부랴 음악회를 취소시킨 것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가 유태인의 피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전쟁이 끝난 1946년에 요제프 크립스(Josef Krips)의 지휘로 신년음악회는 속개되고, 1947년부터는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다시 음악회를 이끌게 되었다.
1954년을 마지막으로 크라우스의 신년음악회 지휘는 끝났다.
그해 크라우스는 빈 필과 미주 투어중에 멕시코에서 급사했고, 빈 필은 신년음악회를 이끌 새 지휘자로 악장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를 추대했다.
보스코프스키는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만큼, 슈트라우스 일가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지휘하는 모습을 재현해 신년음악회의 인기를 되살렸다.
1955년부터 1979년까지 25년이나 신년음악회를 이끈 보스코프스키는현재 빈 신년음악회 최다 지휘자로 기록되고 있다.
빈 신년음악회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의 보급으로 더욱 대중적인 이벤트가 되었고,영국의 데카가 이를 이용해 빈 필/보스코프스키 콤비의 수많은 왈츠 음반들을 녹음하게 되었다.
이 녹음들은 라이브가 아닌 스튜디오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신년음악회' 라는 딱지가 붙어 세계 각지에서 팔려나갔다.
1974년에는 빈 국립오페라극장 남성합창단이 특별 출연하기도 했고,1975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탄생 150주년 신년음악회는 데카에서 라이브로 녹음되어최초의 공식적인 신년음악회 실황녹음이 발매되기도 했다.
1979년 보스코프스키 최후의 신년음악회도 실황녹음으로 발매되었는데,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디지털 기술로 녹음된 음반이기도 했다.
보스코프스키 은퇴후 신년음악회의 지휘는 미국 출신의 지휘자로린 마젤(Lorin Maazel)이 맡게 되었다.
마젤도 바이올린에 능해 보스코프스키와 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을 켜며 지휘하기도 했다.
1980년 마젤 최초의 신년음악회에서는 자크 오펜바흐 사후 100주년 기념으로'천국과 지옥(지옥의 오르페오)' 서곡이 연주되었다.
이후 1983년까지 실황녹음이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되었고,1980, 1983년 실황은 CD로도 재발매되었다.
마젤이 1986년 신년음악회를 끝으로 사임하자 빈 필은
신년음악회 음악감독직을 폐지하고 매년 다른 지휘자를 초빙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1987년 신년음악회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했고, 이후 클라우디오 아바도(1988, 1991), 카를로스 클라이버(1989, 1992), 주빈 메타(1990, 1995, 1998), 리카르도 무티(1993, 1997, 2000), 로린 마젤(1994, 1996, 1999)이 신년음악회의 지휘를 맡았다.
2001년에는 고음악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휘자로 뽑혀 화제가 되었는데,역시 그답게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을 원전판으로 지휘하는등 철저한 역사 고증과 독특한 해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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