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초등학교 입학식. 
코흘리게가 아니면 아이도 아니었던 그 때,
가슴의 손수건은 '학년표시'이기도 했다.
2학년들은 코를 흘려도 가슴에 손수건을 달지 않았다.
한참 쌈박질로 크던 그 때
이 손수건은 종종 코피도 닦아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일반 소비자들은 지정된 판매소에서 
한정된 양만을 구입 할 수 있었다.
재고가 바닥이 난 설탕 진열장 위에
품절 표지판을 올려 놓았다.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한남동에서 강남 신사동을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나룻배였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제1, 제2, 제3 한강교는
각하의 영도력의 상징입니다."고 나오듯이
한강다리는 새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다.




명절이면 객지 나간 청년들도 마을 어르신들도 
'콩쿨대회'에 나가 '폼' 한번 잡는 소박한 꿈들이 있었다.
"땡-" 소쿠리(참가상) 갖고 가세요.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천막 학교에도 간만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끌하다.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애국가(교가였나?)를 부르며 새학기를 시작한다.




얼어붙은 한강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썰매는 재산목록 1호였다.



불을 떼서 밥도 하고 난방도 하다 보면 
굴뚝이 막힐 때가 있었다.
꽹가리를 청소도구와 함께 메고 다니며 '나 왔소'를 알리던
아저씨들의 "뚫어~" 소리는 '똥퍼'와 '찹쌀떡'보다
훨씬 오래 전에 우리 동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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