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정권이 끝날 때까지 군복을 벗지 않겠다는 이들이 있다. 바로 북한군 출신 탈북자 300여명으로 구성된 북한인민해방전선(이하 북민전) 회원들이다. 북민전은 지난 9월 9일 서울에서 결성식을 가졌다. 9월 14일 서울 가양동 북민전 사무실에서 만난 회원들은 우리나라 특전사와 비슷한 군복을 입고 있었다.

▲ 9월 9일 서울 신길역 앞 북한인민해방전선 결성식 모습. (사진=전경림 기자)

북민전의 가장 큰 목표는 김정일 정권을 지탱하는 핵심세력인 북한군을 스스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북한 현역군인들과 연락하며 한국소식을 전하고 있다. 북민전 장세율 사무총장(42)은 한국군과 비슷한 군복을 채택한 이유에 대해 “북한이 도발을 하면 우리는 이 군복에다 총을 메고 나가자는 입장인데 북한 군복을 그대로 하면 적아가 구분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알려줬다.

2008년 2월 부인, 어린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는 장 사무총장은 군 전역 후 평안남도 한 대학에서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었다. 하지만 한국드라마 한 편을 봤다는 이유로 함경북도에서 노동일을 해야 했다. 함경북도에서 상사와 그 가족이 정치범으로 몰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사건을 보며 탈북을 결심했다. 다음은 장 사무총장과 일문일답이다.

▲ 북한에 어머니와 형제를 두고 온 장세율 북민전 사무총장은 하루라도 빨리 가족을 만나기 위해 군복을 입었다고 밝혔다.
(사진=이인숙 기자)



-북민전 설립 취지를 말해 달라.
"탈북자 2만 명 시대가 왔습니다. 그 중 3천여 명이 군 병역자고요. 이들이 단합하면 자신이 근무하던 북한군에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북한군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다 우리 후배들이라 할 수 있어요. 우리는 이들에게 많은 한국정보를 주어, 이들이 북한 체제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길 바라고 있어요. 또 (남한 내) 탈북자들이 북한 주민들에게 거는 통화량이 하루에 몇 천 건이 되요. 우리도 신의주ㆍ혜산ㆍ무산ㆍ해령ㆍ온성 등 국경지대의 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고요. 이런 연락망을 보다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운영하자는 취지도 있습니다."

-북한도 한국처럼 징병제인 것으로 안다.
"북한도 남한과 같죠. 그런데 10년 근무합니다. 저격 등 특수병종은 13년, 여군은 5년이고요. 하지만 면제를 받는 경우도 많아요. 특히 여성의 경우 군복무 경력자가 10분의 1정도에요. 북민전 회원 중 20%는 직업군인이고 나머지는 의무병(義務兵) 출신입니다."

-북한에 어떻게 연락하나.
"중국 휴대폰이 북한 국경에서 터지기 때문에 (한국에서 중국으로) 국제전화를 하면 되요. 국경에서부터 10km까지는 전화가 가능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통화를 했어요. A시는 몇 시에 한다는 식으로 구역마다 약속시간이 정해져 있어요. 중국 사람을 통해 전화비를 내주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전화를 해줍니다. 전화상으로 하루에 한 번이나 주에 두 번씩 만나기로 약속하고요. 한국 생활에 대해 북한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는 사항을 문항으로 만들어서 계획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어요."

-북한도 최근 전역에서 휴대폰이 개통됐는데.
"최근 신의주 주민이 북한 휴대폰 번호를 주면서 전화를 걸어봐 달라고 했는데 안 됐어요. 차단을 한 거죠."

-최근 변화로는 어떤 것이 있나.
"북한 내부가 균열되기 시작했어요. 화폐개혁으로 중산층이 몰락하고 후계구도에 대한 불만이 많죠. 화폐개혁으로 종자돈을 빼앗긴 사람들의 불만이 상당해요. 전에는 북한 지인들에게 전화를 해서 ‘요즘 어떠냐’하고 안부를 물으면 ‘최근 장군님께서 인근에 현지지도 오셨다’며 꼭 장군님이란 명칭을 붙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장군님이란 명칭을 붙이는 사람이 없어요. 말투가 달라졌어요. 전에도 ‘김정일이 요즘 많이 앓는다면서?’하고 물으면 ‘형님 그런 소리하지 마요. 도청돼 큰일납니다’라고 했는데 이제는 거꾸로 욕을 하거든요."

-군대는 어떤가.
"군대에서는 화폐개혁으로 실제 타격을 입은 사람들이 사회보다 적어요. ‘잘 살아보자고 화폐개혁 했는데 안됐다’며 대부분 부정적이지만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는 아니죠. 군인의 경우 저희가 국경경비대나 방사포 여단에 근무하는 현역 군인들과 많이 통화하는데 3대 세습에 대한 불만을 많이 얘기하죠."

-군인들이 3대 세습에 불만은 갖는 이유는.
"생활고 때문이죠. 김정일이 물려받은 때는 그래도 살만할 때라 ‘누가 세습을 하든지 잘 살면 되지 않느냐’는 인식이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장기간 경제난이 계속되고 회복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아들한테 넘겨준다니깐 ‘그럼 뭐가 달라지나’하고 불만은 갖는 것이죠."

-군인은 그래도 일반 주민보다 형편이 낫지 않나.
"군부는 아직도 사회주의 식량공급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집단이죠. 북한은 국가공급체계와 시장으로 나눠져 있어요. 일반 주민들은 배급체계가 마비됐으니깐 순전히 자기 노력으로 살고 있어요. 군인들은 일반 서민층보다는 낫지만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죠. 시장을 운영하는 중산층에 비해서는 열악하고요. 군인 부인들은 시장에 다니면 비판대상이 되고 장사를 못합니다. 또 병영에 묶여 있어서 대외활동도 못하고요. 국가에서 주는 것만 먹고 사니깐 중산층에 비하면 정말 한심한 상태죠."

화폐개혁 후 ‘장군님’ 존칭 사라져
경제난에 현역군인들 3대세습 불만

북한국경 10km 안에서 휴대폰으로 연락

-한국이 쌀 5천 톤을 지원하기로 했는데.
"부모 형제들이 다 북한에 있기 때문에 식량지원은 대단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쌀이 북한으로 넘어간 다음에는 북한주민에게 안 가는 것이 문제죠. 그 사이 겪어보지 않았습니까.


제가 평안남도에 있을 때 이웃이 양정사업소에 근무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식량을 양정(糧政)이라고 합니다. 식랑공급체계 자체가 정치거든요. 한국에서 식량이 들어오면 양정사업소로 갑니다. 거기서 군부, 군수공업부 등으로 다 분배합니다. 군대가 배고파서 탈영하고 훈련도 제대로 못하는데 쌀을 주민들에게 돌려요? 안 돌립니다. 군부에 다 들어가지. 정권강화에 이용되기 때문에 저희들이 반대하는 것이죠.

양정사업소에는 ‘대한적십자사’라고 써진 마대를 전부 풀어서 다시 포장을 해 군부대로 들여 보냅니다. 군에서는 유엔에서 지원했다고 해서 저희는 유엔쌀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양정사업소에서는 마대를 몽땅 소각해야 하는데 마대 질이 정말 좋아요. 북한에서는 쌀 마대가 생활용품이거든요. 옥수수ㆍ콩ㆍ쌀을 자루에 담아서 궤짝에 넣었다가 덜어서 쓰니깐 절실히 필요하죠. 양정사업소 사람들이 마대가 너무 좋으니깐 빼돌려 유통시킨 거예요. 그래서 한국쌀이 들어왔다는 것을 암암리에 알았죠."


(다른 탈북자는 나중에 ‘대한민국’과 ‘USA’가 찍힌 마대 그대로 공급이 된 경우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초기에는 원산과 남포항에서 마대를 바꿨으나 작업이 번거롭고 무엇보다 몇 천 톤하는 쌀을 담을 포장용기를 구하지 못해 마대 교체 작업을 못했다고 한다. 대신 ‘김정일 장군님의 영도로 인해서 미국과 한국이 갖다 바친 것이라’라는 선전을 했다고 한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북한군은 어떻게 생각하나.
"북한에는 이분법적 사고가 있어요. 김책제철 용광로 폭발사건이나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 등 큰 사고가 나면 덮어놓고 남한에서 했다고 생각해요. 정부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죠. 반대로 남한에서 터진 사건은 북한이 했다고 인식하죠. 아웅산 폭탄테러, KAL기 폭파사건도 북한에서 웬만한 사람은 다 우리가 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저희도 지난 3월 26일 천안함 사건 발생 이후 본격적으로 모니터링을 했는데 4월 초 북한 군인들은 ‘우리 밖에 할 놈이 없지’하는 식으로 자인하는 발언을 했죠.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사람(한상렬 목사)이 와서 ‘이명박 정부가 선거용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하자 혼란에 빠졌어요. 과거에는 대부분 자인을 했는데 지금은 ‘이제 보니 거기서 조작질을 했구만’하는 식으로 뒤집어진 겁니다. 저희는 한상렬 목사가 북한 사람들의 기존 사고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쳤다고 봅니다.

그리고 북한은 이번 천안함 사건으로 얻은 것이 많아요. 남한이나 미국이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확산시키면서 전시동원체계에 들어갔어요. 화폐개혁에 대한 불만으로 발생한 사회 동향을 잡을 수 있었죠. 북한에서 동원체계라고 하는 것은 한국처럼 하루 이틀 참가하고 끝나는 것과는 전혀 틀립니다. 분위기를 고조한다고 하면서 완전히 전면적인 사상 캠페인에 들어가고 각 직장ㆍ조직ㆍ행정단위 별로 사람들을 하나의 병영에 묶어 넣는 역할을 하죠. 위기를 위기로 극복하는 방식이 결국 먹힌 겁니다."

-천안함이 좋은 구실이 됐다.
"(북한 내부의) 위기일발 상황에서 대북 쌀지원이 이뤄지면 바로 김정은의 업적이 되는 겁니다. 남북간에 화해 조짐이 있으면 김정은의 위대성으로 각인되는 것이죠."

-이번 쌀지원도 김정은 추대를 위한 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인가.
"그렇죠. 저는 북한에서 제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뻔한 수법이라고 생각했죠. 남한에서 가뜩이나 남북 관계가 얼어붙어 있어서 언론, 여야 할 것 없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고, 게다가 수해가 든 상태에서 북이 제안을 하면 남한에서는 안주고 못 배기는 상황이 되죠. 그럼 바로 북한에서는 영도자의 업적이 되는 것이고요. 정치를 이렇게 하는 거죠."

-왜 탈북을 결심하게 됐나.
"제가 대학교수를 했습니다. 군대 전역 후 평안남도에서 수학 교수로 있었지요. 2004년에 ‘남자의 향기’라는 남한 드라마 한 편을 봤어요. 기계학부 동료 한 분이 저와 친했는데 ‘아랫동네 드라마가 하나 있다’고 했어요. 당시 사람들이 남한 드라마를 본다는 얘기를 들어서 상당히 궁금했어요.


그래서 외국어, 수학 강좌 등을 담당하는 친한 동료들을 보아서 외딴 동료 집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치고 음량을 정말 작게 해서 밤새 봤어요. CD가 한 스무 장 됐는데 다음날 전부 돌려줘야 했거든요. 저희는 그때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남자가 조폭인데 결국 사랑하는 여자를 대신해 사형까지 당한다는 이야기였죠.


다음 날 첫 수업을 하고 휴식시간인데 보위부 위원이 불렀어요. 속이 뜨끔했죠. 6명이 쪼르르 다 잡혀왔어요. 우리 6명 중에 보위부 스파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이 보위부 스파이는 다른 사람과 꼭 같이 처벌받고 정치범 수용소, 경제범 관리소, 교화소에도 같이 갑니다. 한국분들은 이해가 안 될 겁니다. 북한이 몇 백만이 죽고 탈북자가 몇 십만이 되어도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철저한 감시망이죠. 이 스파이들은 일생 정치범으로 살아도 직분은 보위부 위원이죠. 대신 가족들이 대우를 받죠. 저도 아직까지도 누가 스파이였는지 모릅니다. 결국 함경북도 현장으로 좌천이 됐는데 아마 그 때 ‘태극기 휘날리며’처럼 남북 관련된 그런 드라마를 봤으면 우리는 죽었지요. 생활적인 것이니깐 그나마 좌천으로 끝났어요."

북한군 ‘경제난 지속되는데 아들한테 넘겨주면 뭐가 달라지나’

천안함 사건, 주민 불만 통제하는 구실로 작용
“대북 쌀지원 결국 김정은 업적으로 이용될 것”

-좌천이라면.
"노동자로 내려가서 자동화기기 센서 점검을 하는 기사로 1년 일했어요. 1년 후 4명이 복귀가 됐는데 아마 그 4명 중에 보위부 위원이 있겠지요. 당 조직에서는 제가 주모자라며 복귀가 힘들 것이라고 했어요. 그 때 반발심이 일었죠. ‘동포다’ ‘제 민족이다’ 하면서 한국 드라마 한편 봤다고 사람을 이렇게 만드느냐고. 복귀도 안 되는데 보고 싶은 거나 실컷 보자며 한국드라마를 많이 봤어요. CD는 흔해서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한국 드라마 보면서 거기는 가고 싶은 나라도 갈 수 있으니깐 진짜 선택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아들이 생각났어요. 내가 정치동향이 나쁘다고 꼬리표가 붙었으니깐 아들도 정치일꾼이나 당일꾼으로 뽑히기에는 틀렸고, 차라리 아들을 위해서 남한으로 가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는데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죠. 마지막에 함께 일하던 기술과장이 감쪽같이 사라져 정치범 관리소로 들어간 사건이 있었죠. 현재 함경북도 도당 책임비서가 홍석현인데 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 선생의 둘째 아들이죠. 그런데 기술과장과 앙숙이었어요. 기술과장이 1994년 김일성이 죽었을 때 100일 애도기간에 손녀 돌잔치를 한 것이 순찰에 걸렸어요. 그 때 기술과장이 홍석현한테 가서 빌었지만 홍석현도 충성경쟁을 하는 사람이라 봐줄 수가 없었죠. 기술과장은 지배인까지 할 수 있는 능력자였지만 이 사건으로 길이 막혔고요.

2007년 홍석현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는 선거가 있었는데 기술과장이 투표장에 들어가기만 하고 투표를 하지 않았어요. 다음날 기술과장 책상을 정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죠. 그날 오후에 댁에 찾아갔더니 부인이 울고 있었어요. 그리고 보름 되니깐 가족까지 없어졌죠. 그때 제가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어머니한테 출장 간다고 인사하고 당시 12살이던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건넜어요. 국경에 근무하는 제자의 도움을 받았죠. 제자에게 부탁해 아내를 국경 근처까지 데리고 오라고 하고 중국 휴대폰으로 통화를 했어요. 아내는 ‘가문을 민족 반역자로 만들일 있나? 나와라’하며 반발했지만 결국 10일 만에 따라 나왔어요. 중국 브로커가 한국 정부에 알렸고 베이징을 통해 2008년 2월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 오니 어떤가.
"아내가 그렇게 안 오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당신이 한 잘못 중에 가장 큰 잘못이 내가 젊었을 때 이 땅에 못 데리고 온 것’이라고 합니다. 저보다 아내와 아들이 더 좋아해요. 저는 사회적 지위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어요. 공무원도 할 수 없고요. 탈북자 중에 지성인이 많아요. 여기 참모들도 다 대학졸업생입니다. 통일이 되면 저희가 할 일이 많다고 봐요. 제 꿈은 교단이에요. 다시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남북한 사회적 통합을 위해 지식을 제공하고 싶어요. 그래서 빨리 통일이 왔으면 좋겠어요."

-통일을 빨리 이루기 위해 총을 든 것 같다.
"그래서 군복을 입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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