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대원 일상 공개

▲ 1944년 7월 22일 아우슈비츠 나치스친위대의 별장에서 여성대원들과 칼 회커(중앙의 남성)가 장난스런 웃음을 짓고 있다.
ⓒ http://www.ushmm.org
[대기원] 마치 젊은 시절 즐거웠던 추억을 담은 한 장의 사진 같다. 사진의 주인 칼 회커는 1944년 7월 22일이란 날짜와 함께 “여기 블루베리 있어요(Hier gibt es Blaubeeren)”란 명랑한 제목까지 달아놨다. 하지만 이 사진은 지난달 19일부터 ‘미국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이 온라인 상에 공개한 아우슈비츠 사진 116장 중 하나다.

지난해 12월, 박물관측은 한 퇴역미국정보군 장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는 194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나치스 전범재판을 위한 증거를 수집하던 중 버려진 아파트에서 사진첩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이미 90세를 넘긴 그는 60년간 보관하던 그 사진첩을 익명으로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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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의 원주인은 아우슈비츠 사령관의 부관이던 칼 회커. 기간은 나치스가 당시 유럽에서 마지막 남은 대규모 유태인 집단인 헝가리 유태인을 한창 학살하던 1944년 5월부터 12월까지였다. 그 해 여름, 아우슈비츠 시체 소각로는 과부화로 인해 고장이 났고, 나치스는 야외에 구덩이를 파 시체를 태워야 했다.

회커의 사진첩엔 노란색 별을 낙인처럼 달고 가스실을 기다리는 죽음의 행렬은 없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가해자들, 즉, 나치스친위대(SS) 장교와 병사, 여성대원들이었다. 이들은 손님을 환대하고, 애견을 돌보고,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붙였다. 아우슈비츠에서 30Km 떨어진 나치스친위대 별장에서 가족들과 따스한 햇볕을 즐기기도 했다.

여기엔 생체실험을 진행한 요세프 멘겔레, 아우슈비츠 사령관 리차드 베어, 전 사령관 루돌프 회스, 가스실 감독관 오토 몰 등 홀로코스트의 주범들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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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측은 사진이 전하는 일상의 평온함을 홀로코스트의 맥락 속에서 파악하도록 배려를 잊지 않았다. SS여성대원들이 장난기 섞인 표정을 지어가며 블루베리를 즐기던 7월 22일 사진 밑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넣었다.

“바로 그 날 단지 수 마일 떨어진 아우슈비츠에 수감자 150명(유태인과 비유태인)이 도착했다. 나치스친위대는 남자 21명과 여자 12명을 노역을 위해 선별했고, 나머지는 가스실에서 살해했다.”

회커 사진첩의 온라인 작업을 담당했던 레베카 어벨딩 씨는 “사람들이 사진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맥락을 빼 버리면 마치 그(회커)의 휴가 앨범처럼 보이기 때문이죠”라고 BBC와 인터뷰에서 밝히며, 맥락을 설명하기 위해 매우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해방되기 전까지 아우슈비츠를 담은 사진은 ‘아우슈비츠 앨범’에 있는 약 320점의 사진이 전부였다. 1944년 5월 나치스친위대 사진사가 찍은 이 사진들은 가스실과 수용소로 수감자를 선별하는 작업을 기다리거나, 이미 선별이 끝난 헝가리 유태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앨범의 사진이 찍힌 지 불과 며칠 후 회커의 사진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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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소재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센터 도서관의 로버트 로제트 소장은 사진이 “그 살인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하고 또 그들이 자신을 보통 인간으로 본다는 점을 알도록 한다”며 “하지만 그들은 증오의 이데올로기를 가졌고, 집단학살에 참여했다”고 BBC와 인터뷰에서 평가했다.


반면, 미 미네소타 대학 홀로코스트 센터(CHGS)의 스티븐 파인스타인 소장은 같은 인터뷰에서 “이 사진이 말하는 의미는 누구나 특정 상황에서는 집단학살을 저지를 수 있으며, 우리는 이것(집단학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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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의 주인 칼 회커는 소련군 도착을 앞두고 아우슈비츠를 도망쳤다. 은행원으로 생활하던 그는 1963년 프랑크푸르트 아우슈비츠 재판에 회부된다. 아우슈비츠에서 불과 몇 킬로 떨어진 비르켄나우에서 학살을 저질렀다는 증인들의 주장에도 직접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었던 법정은 7년 형을 선고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지난 200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회커의 사진첩을 기증한 익명의 퇴역장교도 지난 여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