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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그러니까 세기가 16세기로 들어서고 한 세대가
흐를 때 영국에 헨리 8세라는 군주가 나타났다.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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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에서 보시다시피 그래 보이지 않는데 장가를
여섯 번이나 간 호색한(好色漢)이었다.
맘에 드는 여자와 결혼을 위해서 아실만한 분은 다 아는 영국식
기독교인 성공회라는 새로운 교파를 연 용감한 바람둥이 인간이다.
이 사람은 여자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옛 가장같이
후사를 이을 아들에게걸스럽게 굶주린 사람이었다.
현대의 의학은성별의 구분이남자의 염색체가 결정한다는
것이지만 알 길이 없었던 1500년대에 헨리 8세는 여자만
바꾸어대면 되는 줄 알고 줄기차게 왕비를 바꾸어 댔다.
그의 여자들은 통상 여덟 번이나 그의 피를 받은
아기들을 유산했다.
의학자들은 그가매독을 앓은 전력이 있었고 그의 병력이
아들 출산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그는 젊어서 장가를 든 스페인 출신인 캐더린 왕비가 있었다.
그런 그가 40대가 되어서부터 카톨릭이라는 이혼 금지의 종교의
굴레가 풀리자 왕비들을 무수히 갈아 치는 늦바람이 나기 시작했다.
그가 눈독을 드린 것은 케더린 왕비의 시녀[여관-女官]였던
앤 볼린[1507년-1536년]이었다.
앤은 토마스 볼린 경이라는 귀족의 딸이었다.
토마스 볼린경은 영국의 명문이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자질이 뛰어나서 중요한 국제관계로 외국에
자주 사신으로 파견 다녔었고 해외 주재도 오래했었다.
헨리 8세와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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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에게는 언니 메리와 동생 조지가 있었다.
그녀는 유년시절 프랑스와 네델란드에서 오래 살았었고
교육도 받았다.
일찌감치 프랑스 왕에게 시집간 헨리 8세의 여동생 메리의
시녀를 했었다.
앤 볼린은 프랑스어에 능했고 프랑스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스무 살에 영국으로 들어와서 그녀의 사촌인 제임스 버틀러라는
사람과 혼담이 진행되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 헤어졌다.
그뒤 앤은 궁중에 들어가 캐더린 왕비의 시녀가 되었다.
그녀의 언니 메리도 궁중에서 시녀로서 근무했었다.
메리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족과 스캔달을 일으켜아버지가
불러들여 윌리암 케리라는 낮은 신분이 귀족 가문과 결혼시켰다.
결혼 후에도 메리는 궁중에서 시녀로 계속 근무했다.
헨리 8세와 염문을 뿌린 것은 언니 메리가 먼저였다.
그러다가 헨리 8세의 관심은 동생 앤에게로 돌려졌다.
그녀는 미인이었지만 그렇다고경국지색의
수준은 아니었다.
입도 좀 큰 편이고 목도 너무 긴 편이지만 풍부한 표정을
담은큰 눈만은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빛내 준 것은 그녀만이 가진 똑똑함과 지성미였던 것 같다.
박학다식하고 시를 사랑했으며 더해서 여러 가지 악기도
잘 다루었고 노래도 잘했다.
그녀는 교양있는 매너와 지성적인 매력으로
일찌감치 궁중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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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낀헨리 8세는대시했다.
허나 앤은 왕의 은밀한 연인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그의 집요한 구애를 피해서 자주 궁에서 나와
그녀 가문 소유였던 헤버 성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렇게 애먹이는 세월이 장장 4년이나 흘렀다.
왕의 구애가 길어지자 그녀는 헨리 8세에게 정식 결혼이 아니면
그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앤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은 먼저 케더린 왕비와 이혼해야 했다.
이혼에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사람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다.
영국 내에서 여론도 캐더린 왕비를 편드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힘없는 민초들도 장희빈에 혹한 숙종이 민중전을
내쫓자 그녀를 열렬히 응원한 것과 다를 바가 없는듯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왕은 앤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계속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혼이 불가능하자
헨리 8세는 영국 천주교를 로마와 단절시켜서 영국 국교의
시발점을 열었다.
헨리의 첫 왕비 케더린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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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교황청이라는 방해물이 없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케더린 왕비와 이혼하고 1533년 5월 28일 이미
사실혼 관계였던 앤 볼린과의 결혼을 정식으로 공포하였다.
헨리 8세가 42살 앤이 26세 때였다.
그녀는 이 때 이미 헨리 8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결혼 후 왕비로 책봉 의식까지 한 앤은 그린위치에서
출산을 준비한 후 그 해 9월에 첫 아이를 낳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그녀는 딸의 이름을 헨리 8세의 어머니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작명하였다.
앤의 왕비 책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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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들의 밀월은 그렇게 길지가 않았다.
그녀의 지나치게 똑똑함은 한 남자의 아내라는 위치에만
만족 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앤은 헨리8세와의 말다툼도 예사로 했고 정치에도 관여해서
왕과 신하를 피곤하게 하고 은근히 안과 밖에 적을 만들었다.
그녀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취향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헨리8세는 점점 너무 튀는 앤으로부터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혼 다음 해인 1534년 크리스마스 무렵, 헨리 8세는 측근들과
은밀하게 앤과의 헤어짐을 논의 했었다.
그러나 다음해도 그냥 지나갔고 1935년 앤은 다시 임신하였다.
그러나 바라던 아기는 아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를 향한 여론도 계속 좋지 않았다.
케더린 왕비를 내 쫓은 악녀의 이미지에 지나치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던 그녀에 대한 여론은 더 나빠졌고
폭정을 일삼는 헨리 8세의 행태도 그녀 때문이라는 세평이
그녀의 인기 추락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나쁜 인기가 그녀가 처형되고 나서
금방 뒤돌아서서 추모 분위기로 바뀐 것은 여론이 얼마나
바람 같은 것인가를 알 수 가 있을 것이다.
1536년1월 첫 왕비 캐더린이 딸 메리를 남겨놓고 사망했다.
앤은 캐더린의 딸 메리를 위로하고 화해의 노력을 했지만 어머니의
죽음 배후에 앤이 있다고 믿던 그녀는 이 화해의 손길을 거부했다.
반면 앤은 다시 임신했지만 삼 개월 반 만에 유산하고 말았다.
아기는 그렇게 바라던 남자 아이였다.
이제 변덕쟁이 헨리 8세의 인내는 한계에 온듯하다.
그는 아들을 낳아줄 여자가 필요했었다.
이미 그에게는귀족의 딸이고 역시 궁중의 시녀,
그것도 앤의 시녀였던 제인 세이머라는 여성이 새로운 연인으로
등장한 뒤였다.
그녀는 미인이었으나 앤과는 반대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고 재기발랄한 것이 아니라 온순하고 가정적이었다.
이름을 겨우 쓸 정도였지만 뜨게질 같은 것을 좋아하는
여성적인성격이 강했다. 지나치게 똑똑한 앤에게
실증이 난 헨리 8세가 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여자를
선택하지 않았나하는 추측이든다.
제인 세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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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536년 4월 앤의 전속 플란더즈[네델란드]음악가였던
마크 스메튼이 체포되어서 호된 고문과 무죄 방면 유혹과 그가
앤과 밀통했다고 자백했다.
그 뒤를 이어 여러 사람이 체포되어 앤과의 간통혐의를 자백했다.
역사가들은 이들이 모두 고문과 강압에 감언이설 의해서
허위 자백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앤의 남동생 조지도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어처구니 없었던 죄목은 조지가 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었다.
1536년 5월 2일 앤은 체포되어 런던 타워로 끌려가서 구속되었다.
런던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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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뒤 앤과 밀통을 했다고 혐의를 받았던네 명의
남자들에게 재판이 있었다.
세 명은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으나 음악가 마크 스메튼만이
혐의를 인정했다.
역시 그 사흘 뒤 앤과 남동생 조지가 취조를 받았다.
앤에게 쓰인 올가미는 간통과 근친상간과 반역죄였다.
반역죄는 그녀가 헨리 8세를 제거하고 밀통하던 헨리 노리스와
재혼하려고 했다는 것이라는 혐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궁중의 시종이었다.
근친상간이니 반역죄니 하는 것은 그녀를 도덕적으로
파괴하여 처형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헨리 8세의 조종에 날뛴 간신들은 앤을 마녀이며 그 표시로
그녀의 손가락이 6개라는 헛소문까지 퍼뜨렸다.
[6손이는 마녀의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헨리 8세 같은 권력자가 마음먹고 죽이겠다고 골고루 죽일 죄목만
뒤집어 씌웠다면 어떠한 결백한 사람도벗어날 수가 없었다.
1536년5월 17일,단 한 번의 억지 재판만 받았던 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헨리 8세는 마녀의 혐의까지 받아서 화형에 처해졌던
앤의 형을 화형에서 참수형으로 ‘경감’시켜 주었다.
참수형은 그때 통상 하던 대로 도끼로 절단하던 방법을 피해서
칼을 사용하도록 하고 처형인[망난이]을 프랑스 카레에 있는
센트 오메르에서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처형 도끼와 목을 놓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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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의 처형자를 요청했던 것은 앤이 요청했다는 전언이 있다.
프랑스 처형자들의 솜씨가 좋아서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바램에서였을 것이다.
앤 볼린이 죽고 한참 뒤인1587년 도끼로
전통 방식으로 처형된 스코트랜드 여왕 메리 스츄어드.
엘리자베스 여왕의정적으로서 20년 가까운
수감생활 끝에 제거 되었다.
조선의 사약을 내리는 처형 방법에 비해서
유럽의 처형 방법은 매우 비인간적이고 잔인했다.
명군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도 메리 여왕 시절
제거될 위험에처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정적에게는 용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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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형 선고를 받고 미리 처형일을 통고 받았다.
그녀는 처형 전날 밤 런던 타워의성주 앤소니 킹스턴 경과
대화를 나누었다.
처형 전날 밤의 앤 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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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에도 처형당하기 전의 많은 사람들을 보았었다.
사형수들은 처형일 전에는 깊은 비탄에 잠겨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죽음을 관조 하듯이 담담해 보였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에서 목에 손을 대면서 슬프게 웃으면서 말했다.
“처형자가 솜씨가 아주 좋은 사람이고 나의 목은 가느니까
고통없이 죽을 거예요.”
앤 볼린은 5월 19일 금요일 아침 처형되었다.
그녀는 두 명의 시녀와 같이 처형 되는 사람이라고는 볼 수없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처형대위로 올라와서 허리를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앤 볼린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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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의 마지막 기도는
“주님께 나의 영혼을 맡기나이다. 저의 영혼을 받아 주소서”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 그녀의 시녀들이 머리장식과 목걸이를
제거하고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녀의 눈을 가릴 때까지 처형대 밑바닥에 깔아둔 짚 밑에
감추어둔 칼을 꺼낸 프랑스 망나니의 칼질은 단 한번이었다.
젖은 수건으로 말뚝을 후려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그 녀의
머리는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피를 분수같이 내뿜던 몸은
앞으로 쓰러졌다.
앤 볼린이 처형되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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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는 그녀의 관을 준비할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처형된 앤의 몸과 머리는 화살을 넣는 박스 안에 넣어져
런던 타워에 바로 인접한 세인트 피터 에 빈큐라 교회에 급히
매장되고 아무 표식도 하지 않았다.
이 교회는 헨리 8세가 세운 새 교회였다.
앤이 매장된 세인트 에 빈큐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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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 350년쯤 흘러 1876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피터 교회를 다시 증축 할 때 그녀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그 자리에는 앤 볼린의 묘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대리석으로 표시가 되어졌다.
발견된 유골은 화장되었다.
헨리 8세는 그녀가 처형당하던 날 사냥을 나갔던 숲에서 그녀의
처형소식을 듣고 별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도 어김없이
새 애인인 제인 세이머와 열정을 나누었다.
앤이 처형되고 나서 불과 열하루 만에 제인 세이머가
왕비가 되었다.
제인 세이머는 헨리 8세에게 그렇게 갈망하던 아들을 선사했지만
아기를 낳고 불과 2주 만에 죽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삼년간 참다가 빈 왕비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주었다.
영국 역사를 여자 문제로 휘젓던 헨리 8세는 1547년
저 세상으로 갔다.
그 자리에 그와 제인 세이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에드와드 4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아직 어린 아홉 살의 어린 아이였다.
에드워드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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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즉위 6년만인 1553년 에드와드 4세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죽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왕위를 이을
사람들을 정해놓았는데 물론 세자 에드와드가 후계 1순위였고
다음이 제일 연장자인 첫 왕비 캐더린과의 사이 소생인 메리,
그리고 앤 블린과 사이에 낳은 엘리자베스가 다음이었다.
메리는 헨리 8세가 죽고 나서 왕위에 올랐다.
메리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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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메리다.
메리 여왕은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이제 영국의 국교로 자리 잡기 시작한 영국 국교를 폐지하고
다시 로마 교황청으로 회귀하고자 시도했는데 이 시도는
이미 영국적 독립 교회의 맛을 본 사회각층의 저항에 직면하였다.
메리는 반대하는 사람들 300여명을 처형해서
피의 메리[블러디 메리]란 불명예스러운 별명만 얻었을 따름이다.
현대 사회에 대형 여객선 이름과 블러디 메리라는
칵테일 이름은 남긴 것은 특기할만하다.
병약하던 그녀는 1558년에 죽고 운명은 돌고 돌아
비명에 간 앤 볼린의 딸이 영국의 여왕이 되었다.
헨리 8세가 자기 아들이 그렇게 일찍 죽고
또 메리도 그렇게 일찍 죽어 자기 손에 죽은 앤 볼린의
딸에게까지 왕위가 흘러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내다보는 조심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앤 볼린을처형하지 않았거나왕위 계승 순위에
엘리자베스를 얹어 놓지를 않았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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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볼린의 딸이 바로 영국 역사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되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44년 치세 아래서 불어온 대 항해시대라는
시운을 탔고 많은 현신(賢臣)을 등용해서 이를 최대로 활용했던
출중한 리더십으로 영국은 부동의 세계 최고 강국이 되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가 그녀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여러 여자를 탐닉한 잔인한 난봉꾼
아버지 헨리 8세를 통해서 남자의 속된 모습을 느끼고
혐오감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것이 후세 사람들의 추측이다.
앤이 가고 나서 후일담은 계속된다.
처형된 그녀의 유령이 목격된다는 속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유령은 그녀가 처형된 런던 타워와 그녀의 가문이 소유했던
헤버성에서 자주 나타났다.
유령이 나온다는 블린 가문의 헤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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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품고 죽은 영혼은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에 떠돈다는
구전설화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꼭 같은듯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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