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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여자는 수학을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을 입증하기 온갖 생리학적, 사회학적 예를 들고는 하는데 사실 이것은 개인적 편차일뿐 모두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여성 수학자 중 가장 찬란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던 그리스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본다.
1900년 매리 앤더슨이 연기한, 히파티야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무세이온(오늘날의 박물관)의 관장이었던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와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오기도 했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특히 남을 가르치는데 소질이 있어 당시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물론 이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한 몫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수 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 끙끙거리던 문제를 단번에 풀어냈다고 하니 단순히 외모 때문에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수학자이기도 하지만 철학에도 능통했던 그녀는 신플라톤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세속적인 욕망이나 물질적인 면을 매우 낮게 취급하기도 한 여성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녀의 철학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던 학생 중 하나가 그녀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월경 때 입었던, 더럽혀진 옷가지를 모아 그 학생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당신이 사랑하는 나의 참모습이다."
이라며 육체적 아름다움에 대해 헛된 것으로 이야기했다. 구혼자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아 마음을 바꾸었다고. 이러한 점 때문에 그녀는 '철학과 결혼했다'고 불리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굳은 신념 때문에 그녀의 생애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알렉산드리아의 교구에 키릴루스라는 인물이 주교로 오며 문제가 발생한다. 그가 오기 이전만 하더라도 비록 종교적 관점은 달랐지만 히파티아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도 호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시기심이 많던 키릴루스는 히파티아가 거리를 지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히파티아의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이나 다름 없었다(하지만 실제 신플라톤주의의 여러 사상적 이론이 훗날 기독교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만이 아닌 키릴루스와 정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지도자 오레스테스와의 대립에 히파티아가 악영향을 주고 있어 제거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프랑스 소설가인 드니 게디는 히파티아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415년 어느날,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이 길을 지나던 그녀의 마차로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가벗긴 채 성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깎은 굴껍데기로 그녀를 고문한 뒤 산 채로 불태워버렸다"
1885년 찰스 윌리엄 미셸이 묘사한 히파티아의 죽음
이러한 그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발가벗겨지고, 조개껍데기와 같은 날카로운 것에 온몸이 난자된 뒤, 불에 태워졌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 그녀의 저서들과 기록들은 대부분 불태워져 현재까지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으며,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정리된 것들이다. 기나긴 암흑시기 동안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졌던 것에는 히파티아의 죽음으로 인한 사회적 풍조도 한몫한게 아니었나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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