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대기원]김가기(金可記)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 당나라 경종(敬宗) 보력(寶歷)연간(825-826년)에 중국에 들어가 20여년 이상, 중원의 문물과 황노지학(黃老之學 : 도가와 신선지학)인 도가공부를 하였다.
김가기의 성격은 부드러우면서 조용하였고, 평소 도가학설에 심취하였으며 화려하거나 사치를 일체 구하지 않았다. 늘 조식하면서 양기를 길렀으며 심신 수련을 취미로 삼았다.
김가기는 널리 학문을 닦았으며 기억력 또한 비상했다. 그가 지은 문장은 내용이 맑고 고원하여 빼어났다. 외모도 당당하였고 행동거지, 언동 등 모든 것이 중국 사람을 뛰어넘는 풍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젊어서 당나라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종남산 자오곡(子午谷)에 풀로 엮어 집을 만들어서 거주하면서 세상과 왕래를 끊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몸소 많은 기화요초를 심어서 가꾸기도 하고 늘 향을 사르고 고요히 가부좌하곤 하였다. 때때로 도덕경과 기타 신선에 관한 경전(仙經)을 낭송하였다.
이렇게 3년이 지나, 문득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자 바로 배를 타고 귀국했다고 한다.
당나라 선종에게 승천을 알리다
신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생활이 여의치 않았던지 김가기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김가기는 유가(儒家)복장에서 도가복장(道士)으로 완전히 바꾸어 입었으며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김가기는 사람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줄곧 좋은 일을 하여 음덕을 쌓았다. 무릇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도와주었다.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857) 12월, 김가기는 갑자기 선종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 김가기는 옥황상제의 조칙을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시랑(侍朗)으로 부임하는데, 내년 2월 15일 하늘나라로 승천하고자 합니다.”
당나라 선종은 이 사실을 이상히 여겨 사신을 파견하여 김가기를 궁중으로 불렀으나 결연히 사양하였다. 사신이 다시 김가기에게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하였으나 그 조서는 다른 신선의 손에 있으며 이곳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선종황제는 김가기를 높이어 궁녀 4명과 많은 예물을 하사하고, 또한 신변의 잡다한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도록 관리 두 명을 별도로 파견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약속한 날짜에 승천하다
김가기는 이때 내실에 혼자 거주하여 파견된 궁녀나 관리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매일 밤마다 그 내실 안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느 날 몰래 다가가 훔쳐보았다. 방안에는 많은 남, 여 신선들이 앉아있는데, 각각 용이나 봉황을 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신선들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관리들은 그저 깜짝 놀랄 뿐이었다.
승천하겠다는 2월 25일이 되자, 봄빛이 화창하고 봄꽃이 만발했다. 공중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한데 구름사이에서 선학소리가 들리고 봉황이 비상하였다. 화려하게 꾸민 정묘한 수레와 깃발이 출몰하였다. 그 순간 사방에서 음악소리가 울리고 아쟁과 퉁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신선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김가기는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천천히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 기이한 일대 장관을 본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는 바,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구경꾼들은 이 희유한 광경에 몹시 놀랍고도 의아하였으나 다시없는 일생일대의 눈요기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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