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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베르사체에서 마르니, 매킨토시에서 골드문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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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주택의 규모, 옷깃의 길이, 갓의 크기와 담뱃대의 길이까지 제한이 있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아흔아홉 칸 이상의 저택은 지을 수 없었고, 중인이 양반과 같은 크기의 갓을 쓸 수 없었으며, 경복궁의 규모를 중국의 자금성보다 크게 할 수 없었다.
막스 베버의 표현을 빌리면 ‘닫힌 지위’를 차지한 귀족들이 신분이나 혈통을 기준으로 소비영역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배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전통 귀족과 구별되는 ‘유한계급(有閑階級)’의 등장을 졸부의 특성으로 설명한 것은 베블렌(Veblen)이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사치성 소비를 위해 가격이 비쌀수록 잘 팔리는 물건을 ‘베블렌 재화’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90년대 중반 루이뷔통·샤넬 수입
‘베블렌 재화’가 한국에 들어오는 통로는 공항과 항만이다. 세관 직원들은 이 통로의 감시자이며 한국 부자들을 매료시키는 고가 수입 명품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소위 30억 부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의 단면을 가장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들이다.
취재에 응한 한 관세청 직원의 입장은 그러나 조심스럽다. 엄청나게 비싼 사치성 물건들이 매일 세관을 통과하지만 그 물건들이 ‘30억 부자들의 애호품’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근의 트렌드를 이렇게 설명했다.
“88서울올림픽 이전에는 소위 명품이라고 하는 물건을 보기 힘들었다. 외환 사용도 엄격히 규제했고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 이후 베르사체, 발렌티노, 미소니 등의 상품이 세관을 통과했다. 당시 서울의 큰 백화점에 매장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루이뷔통과 샤넬이 정식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지금 새로 뜨는 브랜드는 나도 잘 모른다. 마르니, 비비안웨스트우드 등 셀 수도 없는 군소 명품이 들어오고 있다.”
1997년 말 외환위기는 명품시장의 판세를 바꿔놓았다. 일부 수입업체들이 부도를 내며 쓰러졌다. 이는 명품업체들이 한국에 직접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소비의 양극화가 가속화한 것도 이때다. 꽈배기처럼 생긴 ‘페이즐리’ 무늬의 에트로 핸드백과 말발굽 모양의 ‘간치니’ 장식이 붙은 페라가모 구두는 일명 ‘청담동 며느리 패션’으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다.
“요즘엔 면세점을 악용한 명품 구입족이 늘고 있다. 해외여행 비용에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정도의 여유는 있는 사람들이다. 명품을 광적으로 좋아한다는 게 이들의 특성이고, 명품을 싸게 구입할 수만 있다면 불법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30억 부자 같지는 않다.”
최근에는 부산-일본간 뱃길이 면세품 국내 반입과 유통통로로 악용되고 있다. 부산경남본부세관의 면세품 유치실적 자료가 그 현상을 입증한다. 부산~일본 항로 이용객 가운데 한도를 넘는 면세품을 반입하다 적발된 사람이 2004년 1만7847명, 2005년 1만9537명, 2006년 2만1287명으로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유치 물품은 명품 옷과 손가방, 향수, 양주 등 사치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여성용 손가방은 2005년 97개에서 지난해에는 2288개로 늘었다.
적발되는 면세품은 일본 현지 면세점에서 구입한 것보다 일본에 다녀오는 여행객이 국내 면세점에서 구입해 일본으로 가져갔다 되가져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부산-일본 항로는 10만 원대 경비에 당일치기로 왕복할 수 있어 최근에는 면세품 구입을 위해 부산과 일본을 일삼아 오가는 사람도 있는 것으로 세관은 보고 있다.
“작년엔 가구 수입이 굉장했다. 쌍춘년 혼수 특수 때문이었을 것이다. WTO 가입국가에서 가구를 수입할 때 관세는 붙지 않는다. 생활필수품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수입 가구가 고가의 제품에 팔릴 때 그것은 관세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30억 부자들은 알고 있을까?”
에트로 핸드백·페라가모 구두 인기
서울시내 한 백화점에 있는 수입가구업체의 패브릭 소파(3+1)와 식탁(6인용)은 각각 2200만 원, 1050만 원이며, ‘이튼알렌’ 화장대는 400만 원이 넘는다. 갤러리아백화점은 작년 3월 수원점과 대전 타임월드점에 이탈리아 명품 소파 브랜드인 ‘라뚜찌’를 입점시켰다. 백화점 측은 최근 지방 고객의 수입가구에 대한 관심과 구매욕구가 높아져 이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신세계백화점도 작년 봄 본점과 강남점에 미국 브랜드인 ‘이튼알렌’과 유럽 브랜드인 ‘까무소’ ‘앤슬리’ 등을 들여왔다. 지난 1년 간 매출 신장은 두자리 수를 기록했다. 서울 강남과 지방에 새롭게 형성된 30억 부자들이 그 수요층이다.
“고급 오디오에 대한 취향도 많은 변화가 있다. 과거 전통적 부자들은 마란츠와 매킨토시를 최고로 생각했다. 지금은 마크레빈슨이 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스위스의 골드문트가 돈 많은 한국 하이엔드 오디오 광들의 애장품으로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이 제품들은 보통 앰프로는 재생할 수 없어 묻혀 있었던 미세한 소리까지 모두 잡아낸다고 평가하고 있다. 음악으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감동을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제품의 가격은 최하 1000만 원대, 최고 1억 원에 가까워 과거 10억대 부자의 자산으로는 즐기기 버거운 제품들이다.
시계에 대한 부자들의 ‘욕망 패턴’도 변화하고 있다. 한국시계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국내 시계시장 총 규모는 1조120억 원대. 그중 수입품이 40%를 차지하는데, 고가 시계시장 총 규모는 3000억 원 정도에 달한다. 일반적인 소비자들은 샤넬이나 루이뷔통, 에르메스, 카르티에,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패션 브랜드에서 나온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꽤 높은 편이다. 그러나 최근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선 전통의 전문 브랜드들이 인기다.
그들이 말하는 고급품으로는 파텍 필립(Patek Philippe), 브레게(Breget), 바셰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 블랑팽(Blancpain), IWC, 예거 르 쿠튀르(Jaeger Le Couture), 아 랑게 운트 죄네(A Lange & Sohne) 등 스위스를 중심으로 독일 등지에서 만든 제품이다. 제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1000여만 원대가 기본. 상한선은 어디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30억 부자들의 취향을 명품 위주로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상당수 자수성가형 부자들은 아직도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다. 카시오 전자시계를 차고 금강제화 구두를 신는 30억 부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한기홍 기획위원 glutton4@naver.com>-뉴스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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