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부자 나라에서 석유 없어 ‘쩔쩔’ 주유소마다 빈통 든 시민들로 장사진


바그다드의 일상은 앞서 언급한 대로 죽음과 공포를 수반하는 테러행위의 연속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인프라가 너무나 열악하고 처참하다.

인간의 기초생활에 필요한 전기, 식수, 석유 문제로 들어가면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다. 석유 생산국인 이라크에서 석유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기초생필품 부족 현상이 민심을 이반시키고 결국 테러리스트 활동에 동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경제활동 연령층의 대규모 실업은 테러리스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리한 환경을 제공해 준다. 따라서 낮에는 정부군에, 밤에는 테러단체나 저항세력에 협조하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 일자리 창출은 테러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테러공포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이라크인처럼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바그다드에서 살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전기 부족이었다. 정부가 공급하는 전기량이 하루에 2~3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자주 전기가 나간다. 그래서 대사관에선 비상발전기를 하루 20여시간씩 계속 돌려야 한다. 이러다 보니 발전기가 자주 고장이 난다. 기온이 40도가 넘는 뜨거운 여름이나 날씨가 쌀쌀한 겨울철에 발전기가 고장 나면 직원의 건강이나 안전에 큰 문제가 생긴다.

한번은 발전기가 3일간 고장 나는 바람에 직원의 식사를 만들 수가 없어 군의 비상식량으로 대신한 적이 있었다. 마침 그때가 쌀쌀한 12월이었다. 잠을 잘 때 히터가 작동하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현재 이라크 정부가 공급할 수 있는 전기량은 이라크 전쟁 전의 2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송전탑을 비롯한 전기관련 시설을 파괴시켜 민생을 어렵게 하여 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많이 쓰는 여름철에는 대사관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건이 생긴다. 대사관에서는 용량이 큰 발전기를 쓰는데 대사관 주변에 사는 이라크인이 전기를 몰래 끌어다 쓰다가 적발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의 전기 사정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번은 주위에 사는 대부분 집은 물론 작은 상점까지 대사관 전기를 몰래 이용하다가 발각되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나중에 알고 이를 근절하기 위해 내부 대책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또 한번은 이웃에 사는 시아파 국회의원이 대사관 전기를 몰래 사용하다 발각되었다. 이 국회의원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오히려 대사관에 압력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사관은 예외를 허용하지 않았다. 잘못해서 이라크 현지 주민 사이에 이라크 국회의원이 한국 대사관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오히려 테러를 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석유 부족이다. 석유 매장량이 세계 두 번째라는 나라에서 석유제품의 부족으로 시민이 고통을 받고 있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원인은 테러리스트들이 송유관 같은 석유시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많지만 공급할 방법이 원활치 않으니 휘발유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공급되는 양도 부족하여 주유소가 있는 길가에는 사람들이 기름을 사려고 장사진을 이루곤 한다. 이것은 종종 자살차량폭탄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또 석유를 몰래 빼돌려 팔면 엄청난 이득을 보니 석유 관련 부정이 판을 친다. 대사관에선 석유값이 아무리 비싸도 발전기를 돌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양을 비축해 놓아야 했다.

다음은 식수 문제다. 가정에 공급되는 물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물론 대사관에서는 생수를 대량으로 사다 먹고 있지만 세면과 샤워를 할 때 수도꼭지를 틀면 붉은색 수돗물이 콸콸 쏟아져 나올 때가 많았다. 냄새도 역해서 여간 불쾌하지 않았다. 이럴 때면 먹는 생수로 간략히 세면을 해야 한다.

육로 교통은 테러로 인해 그 불안정성에 대해선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항공기를 이용하면 그런 위험성이 줄어들까? 부득불 항공기를 이용할 때 다른 나라에서 받는 관련 서비스는 거의 없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외국인이 공항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행정서비스가 가동되어야 한다. 바그다드 국제공항은 2004년 3월 이라크 전쟁 이후로 정지되어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마 도착시간이 밤 9시경인 것 같았다. 두바이와 암만을 거쳐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처음 발을 내디뎠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후 유심히 주위를 살폈다. 그 넓은 공항에는 내가 타고 온 것 외에 항공기가 불과 한 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항 경찰은 상의만 경찰 복장을 하고 바지는 각양각색이었다. 전혀 경찰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화장실 문은 고장 나 있었고 변기도 불결하기 짝이 없었으며 휴지도 없었다. 이런 모습은 800일 뒤 내가 바그다드를 떠날 때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항공기 출발·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도 2003년 4월 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에서 정지되어 있었다. 출발·도착 전광판은 2007년 2월에도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그다드 공항은 이라크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바그다드 공항은 내가 800일의 바그다드 생활 동안 싫으나 좋으나 계속 사용해온 공항이었다.

쿠르드 지역아르빌은 비행기로 1시간 거리다. 바그다드 공항에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아무런 안내방송도 없이 장장 12시간이나 기다린 적도 있었다. 또한 공항에서도 엄청난 폭발음에 놀라곤 한다. 한번은 공항 귀빈실에서 아르빌에 가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갑작스런 폭음에 몸이 흔들리는 듯했다. 3~4 차례 폭음이 계속되고 그럴 때마다 귀빈실 천장의 유리창이 흔들려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허둥댔지만 나를 제외한 이라크인은 태연하였다. 이라크 관계자가 “이것은 최근 들어 테러리스트나 시민들로부터 몰수한 총기와 탄약을 공항 근처의 공터에 모아놓고 폭발시키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이런 폭음을 들으면서 비행기 출발을 기다려야만 하는 곳이 바그다드 공항이다. 바그다드 공항에서 민간 항공기는 일정한 출발시간이 없다. 떠나야만 그때가 출발시간인 것이다. 안내방송도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몇 시간씩 기다리는 것은 다반사이다.

내가 아르빌로 가기 위해 헬리콥터 대신 민간항공기를 이용하게 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라크는 다른 중동국가와 마찬가지로 4~5월부터 더워지기 시작해 7~8월에는 더위가 절정에 이른다. 이때 헬기를 타면 유리창이 없기 때문에 그 뜨거운 사막 바람을 다 받아야 한다.

자이툰 사단장 교체식에 초청을 받아 당일로 아르빌을 다녀올 때였다. 그날 기온은 4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였다. 오전 8시쯤 아르빌로 갈 때는 아침이라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그러나 아르빌에서 돌아올 때는 오후 2시쯤으로, 하루 중 가장 더운 때였다. 무거운 방탄복을 껴입고 그 위에 양복을 입은 채 헬기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 다음 헬멧과 헤드폰을 착용했다. 뜨거운 바람이 그대로 얼굴에 닿았다. 마치 뜨겁게 불에 달구어진 용광로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헬기가 이륙하자 얼굴에 뜨거운 바람이 계속 몰아쳐 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구릉과 끝 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하늘 속은 온통 한증막 그 자체였다. 나는 계속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내가 왜 이라크에 와 있나? 반기문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 생각났다. 반기문 장관은 대학 선배이며 또 워싱턴 주재 대사관에서도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다.

2004년 8월, 서울 양재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혁신 심포지엄이 열릴 때였다. 반 장관이 나를 보더니 잠깐 얘기하자고 했다. 반 장관은 군대 3600 명이 이제 막 배치되었고 김선일 사건도 있어서 경륜이 있는 대사가 필요하다며 내게 이라크 대사직을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다. 만약 내가 간다면 1년 후 다른 자리로 전보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나이가 있어 관심이 없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한번 생각해보라는 권유였기에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물론 가족은 반대했다. 나는 1년이라면, 그리고 누군가가 거기에 가야만 하고 아무도 갈 사람이 없다면 국가를 위해 또 우리 외교부 조직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가치가 있고 또 후배들 앞에서 좀더 떳떳한 선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은 왜 위험한 지역에 가야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결국 가족은 나의 결심을 지지했다. 그 후 반기문 장관에게 전화를 해 내 결심을 알렸다. 나는 1년이라는 조건에 대해서는 외교통상부 차원만이 아니고 청와대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다. 반기문 장관은 이라크 근무는 외교통상부 예규에 따라 1년 근무라고 규정되어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런 총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오른편의 기관총사가 헬기의 아래쪽으로 계속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총알이 나가는 빨간 불빛이 보였다. 곧이어 왼쪽의 기관총사도 아래를 향해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우리가 탄 헬기가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총소리가 멈추었다. 내 옆에 있는 무관이 위협사격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미 내 몸은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헬기가 비행 도중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움막 같아 보이는 작은 집을 발견하고 미리 위협사격을 한 것이다.

사막 바람이 입에 닿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바그다드로 돌아오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후 이라크 항공이 아르빌을 취항했고, 나는 아르빌로 출장갈 때마다 바그다드공항에서 민간항공기를 타야만 했다. 한번은 두바이에서 바그다드로 돌아올 때 이라크 항공기를 탔다. 비행기 내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는데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그다드가 아닌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었다. 이렇게 나는 예정에도 없던 바스라에 내렸다. 바스라에서 약 20여명의 새로운 승객이 탔다. 비행 도중 기장이 이라크 고위층의 연락을 받고 일정에도 없는 바스라에 기착한 것이다. 옛날 시골 버스가 마음대로 행선지를 바꾸어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이라크에서 공항 가는 날은 위험하고 인내심을 시험 받게 되는 매우 고된 날임을 각오해야 한다.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긴장과 공포 속에서 소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다. 바그다드 공항은 이라크가 당면하고 있는 혼란과 비능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


/ 글 =장기호 전 이라크 대사
기획 =조성관 차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