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명의 ‘본초강목’ 저자 이시진

중국 고대 왕조를 이끈 전설의 삼황 중 두 번째 황제인 신농(神農)은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 100여 가지 약초를 맛보고 효능을 정리해 병자를 구했다. 신농은 숱한 독초를 먹고 중독되어 쓰러지기도 하고 몸의 형태가 변할 정도였지만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신농이 당시 정리한 약의 성질과 효능은 훗날 한의학의 기초가 되었다. 삼황의 하나인 황제(黃帝)는 신하 기백(岐伯) 등과 함께 의학을 논했고 이를 정리한 황제내경은 한의학의 원전으로 불린다. 고대의 제왕에게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병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훗날 세인의 추앙을 받은 명의들도 명예와 이익보다는 환자의 고통을 다스리고자 했다. 음양의 조화와 심신의 균형, 자연과 합일을 추구하는 한의학의 이론 체계를 다졌던 고대 명의를 찾아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부

약왕(藥王) 손사막의 업적을 포함해 선대에 이뤄진 약재에 관한 연구는 명나라 대의학자 이시진(李時珍, 1518~1593)이 집대성하게 된다.

이시진의 자는 동벽이고 호는 빈호로서 호북 사람이다. 1518년 태어나 1593년까지 살았다.

이시진의 집안은 대대로 의업을 하던 가문이다. 이시진의 조부는 민간 시골의사를 지칭하는 영의(鈴醫)로 활동했다. 영의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적 낮아서 촌락에서 한약방을 꾸리는 정도였다. 조부의 의술은 훌륭했고 인품 또한 후덕해 인술을 펼쳤지만 푸대접을 면치 못해 스스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이씨 집안은 기주(蘄州)에서 대대로 의술을 펼쳤지만 겨우 입에 풀칠을 할 뿐이었다. 당시 의학을 공부하는 것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만 못했다. 쉽게 표현하자면 의사가 공무원보다 푸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조부가 사망하면서 아들 이언문(李言聞)에게 당부하기를, 손자인 이시진이 영특하니 반드시 유학자가 되게 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하고 명성을 떨치게 하라고 했다.

이언문은 현지에서 명의로 이름 높았으며 호는 월지(月池)였다. 하지만 지방 유지와 관리에게 심심찮게 모욕을 당하던 터라 아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이언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과진(果珍)이고 학문에 큰 뜻이 없었고 평생 시험을 보지 않았다. 이시진은 둘째로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비록 몸이 약해서 병에 쉽게 걸렸지만 성격이 강직하고 순수했다.

하루는 그가 부친의 책을 대충 훑어보다가 약왕 손사막의 저작 ‘비급천금요방’을 읽게 됐다. 손사막의 책에는 “무릇 훌륭한 의사, 즉 대의(大醫)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뜻을 평정하게 하여, 바라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 먼저 큰 자비와 측은지심을 가지고 사람들의 고통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만약 병이 있어 치료받고자 하는 환자가 있으면, 그 귀하거나 천함, 가난하거나 부유함, 나이의 많고 적음, 아름답거나 추함, 원한과 친근함, 동족과 이민족, 지혜의 많고 적음을 묻지 말고 모두 한마음으로 똑같이 자기의 부모와 형제처럼 생각해야 한다. 환자를 고쳐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지도 말며 자기에게 어떤 좋은 일이나 언짢은 일이 있어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는 글이 있었다. 이 글은 훗날 이시진이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의학자의 뜻을 놓지 않는 버팀목이 된다.

이시진은 총기가 있어 14세에 수재에 합격했으나 9년간 3번이나 호북의 성도 무창에서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사실 이시진은 유학 공부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출세욕도 없었다.

3번의 낙방 끝에 이시진은 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털어놓는다. 아버지는 이시진이 벼슬에 뜻이 없음을 알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내어 이시진을 가르친다.

의술이 일취월장 발전하던 이시진에게 류교라고 하는 조카가 있었다. 류교는 평소에 주색을 탐해 마침내 병이 생겨 하반신이 붓고 통증이 생기고, 대소변이 통하지 않아 앉거나 누울 수 없었다. 울며 신음한 날이 일주일이 넘어갔다. 류교는 주위의 조언대로 대소변을 통하게 하는 약을 복용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시진은 류교의 대장과 방광에 문제가 없다고 봤으며 독자적으로 진단하고 처방을 구성했다. 부친은 이시진의 진단과 치료법이 일리가 있다고 보고 그의 약 처방에 동의했다. 이시진은 멀구슬나무열매(楝實), 회향풀(茴香), 천산갑(穿山甲) 등 여러 약에 견우(牽牛)를 배로 넣고 달였다. 약을 한번 마시니 병세가 즉시 약해졌고 3번 복용하니 병이 나았다.

가족들은 이시진의 정확한 진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시진은 조부가 남긴 진료기록에 이 병이 기재돼 있으며 자신은 단지 그것을 따라한 것이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부친이 책을 한번 살펴보니 과연 그런 기록이 있었다. 이시진은 할아버지의 업적에 독창적으로 약재를 가미해 효과를 배가시켰던 것이다.

이시진은 이후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의술과 학문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시진은 특히 본초(本草)를 중시했다. 당시 여러 서적에는 약재의 효능과 기원에 대한 서술이 있었지만, 통일되지 않았고 어떤 약재는 정반대의 효능이 실려 있거나, 독성 약재를 안전하다고 표기한 서적도 있었다. 어떤 약재는 이름은 같으나 기원 식물이 달라 지역마다 다른 약재를 같은 약재로 착각하고 쓰는 경우도 있었다. 31세부터 이시진은 몸소 체험하고 실체를 확인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 약재 즉, 본초를 집대성하기 시작한다. 훗날 이시진의 명저 ‘본초강목’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본초강목은 지금까지도 현대 한의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수준 높은 저서다.

요즘 한의계에서도 가치 있는 저작으로 높게 평가하는 이시진의 대표작 ‘본초강목’이 탄생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이시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우호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방씨 성의 어부가 헐레벌떡 이시진을 찾아와 왕진을 부탁했다. 방씨의 집을 찾아가니 방씨의 아내가 중병을 앓는 듯 힘없이 누워 있었다. 이시진은 진맥 후 생명에 위험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방씨를 안심시키며 혹시 최근에 먹은 약이 없는지 물었다. 방씨는 어제 아내가 불편해 근처 의사에게 처방을 받아 복용한 뒤 증상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처방전을 확인해보니 처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시진은 방씨에게 약 찌꺼기를 가져오라 했다. 확인해 보니 처방전에 기록된 약재 ‘호장’이 없고, 처방전에 없는 ‘누남자’라는 약이 대신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실을 안 방씨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이시진은 방씨에게 의사와 한약방 주인은 잘못이 없다고 진정시켰다. 이어서 본초 관련 서적에 ‘누남자를 호장이라고도 한다’라는 문장이 실려 있어서 헛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이시진은 누남자를 해독하는 약을 알고 있어서 방씨의 부인은 곧 회복됐다.

또 한번은 민간에서 ‘만다라’라는 약재를 보기만 해도 미쳐서 춤추게 된다는 말이 돌았다. 이를 전해들은 이시진은 실제로 그러한지 확인하기 위해 만다라를 어렵사리 구해 실험해 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만다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다라에 대한 그릇된 소문을 들으면 곧바로 보여주면서 사실이 아님을 보여줬다. 이후 만다라를 끓여서 복용할 경우 환각 작용과 마취 작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취제 원료로 쓰기 시작했다.

이시진은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올바른 약재 정보를 정리해 집대성하기로 결심한다. 이시진의 부친은 역대 주요 의서가 황실의 명을 받아 여러 집필진이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즉 개인이 다시 정리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이시진을 말렸지만 이시진은 생각을 굽히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이시진은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인근 초나라의 왕자가 갑자기 인사불성이 되어 졸도했고, 일대서 명의로 이름난 이시진이 치료하게 됐다. 그는 진단 후 구토하는 약과 설사하는 약을 배합해 복용하게 했고, 왕자는 정신이 돌아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인연으로 초왕은 이시진을 초빙해 관직을 맡게 하고, 3년 후 북경 태의원으로 갈 수 있도록 천거했다.

이시진은 이 기간 동안 그야말로 독서광이 되었다. 그는 본초강목에 ‘고서 즐기기를 엿을 즐기듯이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고경성(顧景星)은 ‘이시진 전’에서 “10년간 책을 읽음에, 문밖을 나가지 않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이시진은 800여 종 만여 권의 의서를 읽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은 역사, 지리 및 돈황의 저작을 읽었으며, 시를 비롯한 문학 작품도 두로 읽었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으면서 많은 환자를 치료했고, 사례금을 받기 일쑤였지만 매번 거절했다. 태의원은 원래 황실이 운영하는 의원이었지만 당시에는 세인을 현혹하는 돌팔이 의사가 태의원을 장악하면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였다. 이시진은 이 와중에도 인술을 펼쳤지만 일 년이 지나자 사임한 뒤 귀향해 연구를 이어갔다.

이시진은 태의원에 있을 때 읽은 책의 내용과 자신의 경험·연구를 결합해, 27년 후 마침내 ‘본초강목’을 완간했다. 본초강목은 모두 52권 16부, 60류로 나뉘며 27년을 거쳐 1578년에 완성된다. 역대 의가가 다룬 약물 1892종이 수록돼 있으며, 그 중 식물 약재가 1094종, 광물, 동물 및 기타 약재가 798종이었다. 374종은 이시진이 처음 수록한 것이다. 모든 약물은 우선 정식 명칭을 강(綱)으로 하고 부가적 명칭을 목(目)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은 집해, 감별, 정오(正誤)와 산지, 형태에 대해 서술했다. 그 다음은 기미, 주치, 설명, 체험과 응용을 곁들였다. 내용이 방대해 중국 명대 이전 약물학을 결산했으며, 후대에도 중대한 공헌을 했다. 세계 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미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 이시진은 맥진 등 진단에도 능통했으며, 그의 호를 딴 맥학 저서인 ‘빈호맥학’에서 다룬 내용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시진은 1593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시진은 평생 많은 책을 저술했으며 대표작 본초강목 외에도 ‘기경팔맥고(奇經八脈考)’ ‘빈호맥학(瀕湖脈學)’ ‘오장도론(五臟圖論)’ 등 10여 종의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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