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중공업敎를 믿고, 아침마다 부인과 맞절을 하는 사람,
제안 2만 4천 6백12건, 국제 발명특허 62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 심청가를 완창하는 사람 대우중공업 김규환 명장의 이야기입니다.
 
삼성전자 천안공장에서 강의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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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국민학교도 다녀보지 못했고 5대 독자 외아들에 일가 친척 하나없이 15살에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기술 하나 없이 25년 전 대우 중공업에 사환으로 들어가
마당쓸고 물나르며 회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가 훈장 2개, 대통령 표창 4번, 발명특허대상, 장영실 상을 5번 받았고, 1992년 초정밀 가공분야 名匠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어떻게 제가 상을 제일 많이 받고 명장이 되었는지 말씀드릴까요?
 
사람들은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잃으면 다 잃는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배고픔에 대해서 아십니까?
사람들은 한끼 밥 못먹으면 무슨 난리난듯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틀 정도 굶으면 무더운 한여름 땡볕에서도 땀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흘을 굶으면 그때부터 토하기 시작합니다.
나흘 정도가 되면 똥오줌도 구분하지 못하고 끝도 없이 먹어 치웁니다.
너무나 춥고 배가 고파서 죽을까도 하다가 어린 여동생 때문에 삶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여동생을 안고 구걸행위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구걸하다가 쫒겨나 논두렁에 곤두박질치면서 이마가 찢어져 끝도 없이 피를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우연히 할머니 한분이 우리 남매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아주 잠시의 인연이었지만 그날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서 그 할머니 돌아가시는 날에 자식처럼 장지로 향했으며 누구보다 통곡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나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글도 읽을지 몰랐습니다.
우연히 신문에 난 글이 궁금해서 이게 무슨 글인가 물어봤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가 그것은 '대우가족 모신다’라는 글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대우'라는 사람도 나만큼 외로워서 '가족'을 모집하는 구나.
세상에 별의별 광고도 다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사람을 채용한다는 뜻을 알고,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회사를 찾아갔습니다.
 
회사 앞에 당도하자 수위는 냄새난다고 나를 쫒아냈고
그래도 들어가야 한다고 하니까 나를 거지취급해서 심하게 때렸습니다.
거의 한시간을 얻어맞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한 임원이 수위 보고 '무슨 행패냐 거둬줘'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사람에게 '거둬줘'라는 말은 '도와주되, 밥 한끼 정도 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경상도 말로는 ‘도와주되, 우리 식구로 받아줘'라는 말입니다.

그때 나를 패던 수위가 경상도 사람이라 '채용해서 써라'는 말로 알고, 당시 서두칠 부장에게 그 임원이 쓰라고 했다고 전했고, 입사자격이 미달이어서 면접에 떨어졌지만 잡부로(사환) 채용이 되었습니다.
 
■ 부지런한 사람은 절대 굶지 않는다.
사환으로 입사하여 매일 아침 5시에 출근하였습니다.
하루는 당시 사장님이 왜 일찍 오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선배들 위해 미리 나와 기계 워밍업을 한다고 대답했더니
다음날 정식기능공으로 승진시켜 주시더군요.
 
2년이 지난 후에도 계속 5시에 출근하였고, 또 사장님이 질문하시기에 똑같이 대답했더니 다음날 반장으로 승진시켜 주시더군요.
 
■ 내가 만든 제품에 혼을 싣지 않고 품질을 얘기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정밀기계 분야의 세계 최고가 됐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공 시 1℃ 변할 때 쇠가 얼마나 변하는지 아는 사람은 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걸 모를 경우 일을 모릅니다.
제가 이것을 알려고 국내 모든 자료실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자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장 바닥에 모포 깔고 2년 6개월간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재질, 모형, 종류, 기종별로 X-bar값을 구해 1℃변할 때 얼마 변하는지 온도치수 가공조견표를 만들었습니다.
기술공유를 위해 산업인력관리공단의 '기술시대'란 책에 기고했습니다.
그러나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3명의 공무원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 회사에서는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출한 자료가 기계가공의 대혁명 자료인 걸 알고
논문집에 실을 경우 일본에서 알게 될까 봐, 노동부장관이 직접 모셔오라고 했다는 군요.
장관 曰 '이것은 일본에서도 모르는 것이오. 발간되면 일본에서 가지고 갈 지 모르는 엄청난 것입니다.'

■ 저희 집 가훈은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입니다. 
저는 국가기술자격 학과에 9번 낙방, 1급 국가기술자격에 6번 낙방,  2종보통운전 5번 낙방하고 창피해서 1종으로 바꾸어 5번만에 합격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새대가리라고 비웃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서 1급 자격증 최다보유자는 접니다.
제가 이렇게 된 비결을 아십니까?
그것은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것 없다는 것이 저의 생활신조 때문입니다.
 
■ 일은 어떻게 배웠냐?
어느 날 무서운 선배가 하이타이로 기계를 다 닦으라고 시키더라구요.
그래서 모든 기계를 다 뜯고 하이타이로 닦았습니다.
기계 2612개를 다 뜯었습니다.
6개월 지나니까 호칭이 '야 이 새끼야'에서 '김군'으로 바뀌었습니다.
서로 기계 좀 봐 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실력이 좋아 대접 받고 함부로 하지 못하더군요. 
그런데 어느 날 난생 처음 보는 컴퓨터도 뜯고 물로 닦았습니다.
사고를 친 거죠.
그때 알기 위해서는 책을 봐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기회는 없다. 단지 준비된 자는 반드시 성공한다.
저는 현재 5개 국어를 합니다.
저는 학원에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외국어를 배운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과욕없이 천천히 하루에 1문장씩 외었습니다.
집 천장, 벽, 식탁, 화장실문, 사무실 책상 가는 곳마다 붙이고 봤습니다.
이렇게 꾸준히 하니 나중엔 회사에 외국인이 올 때 설명도 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 5개 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기회가 저에게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 자신을 위해 준비하고 노력했기에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진급, 돈 버는 것은 자기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을 불평하기 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그러면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배 아파 하지 말고 노력하십시오.
의사, 박사, 변호사 다 노력했습니다.
남 모르게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하루 종일 쳐다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해답이 나옵니다.
저는 제안 2만 4천 6백 12건, 국제발명특허 62개를 받았습니다.
저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건 무엇이라도 개선합니다.
하루 종일 쳐다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해답이 나옵니다.
가공기계 개선을 위해 3달간 고민하다 꿈에서 해결하기도 했지요
 
■ 제가 얼마 전에는 새로운 자동차 윈도 브러시도 발명하였습니다.
유수의 자동차 회사에서도 이런 거 발명 못했습니다.
제가 발명하게 된 배경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회사에서 상품으로 받은 자동차가 윈도 브러시 작동으로 사고가 났습니다.
교통사고 후 자나 깨나 개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물을 가르는 것을 보고 생각해 냈습니다.
대우자동차 김태구 사장에게 말씀 드렸더니 1개당 100원씩 로열티 주겠다고 하더라구요.
약속하고 오는 길에 고속도로와 길가의 차를 보니 모두 돈으로 보입디다.
돈은 천지에 있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돈은 들어옵니다.

■ 회사에 대한 나의 생각
저의 종교는 대우중공업敎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종교를 가지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종교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나 절에 다니지 않습니다.
제 종교는 대우중공업교입니다.
우리 집에는 대우 깃발이 있고 식구들 모두 아침 밥 먹고 그 깃발에 서서 기도합니다.
저는 하루에 두 번 기도합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정문 앞에서 또 한번 기도합니다.
'나사못 하나를 만들어도 최소한 일본보다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회사 여사원 받는 월급이 1년에 쌀 100가마 살 돈을 받습니다.
어디서 이런 수입을 얻겠습니까?
농부의 힘든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게다가 학자금까지 주니
이런 마음 있으면 회사를 업고 다녀야 합니다.
여러분이 삼성 다니면 삼성제품 써야 합니다.
회사를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 저는 심청가를 1000번 이상 듣고 완창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청가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한번 밖에 없는 인생 돈에 노예가 되지 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의 인생이다!
지금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는 영화를 얻는다.

힘들고 어려운 길은 반드시 행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예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요.

■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것 없습니다.
목숨을 거십시오.
내가 하는 분야에서 아무도 다가올 수 없을 정도로 정상에 오르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정상에 가면 길가에 핀 꽃도 다 돈입니다.
 
■ 나의 성공원칙은 아래 3가지다.

1. 부지런하면 굶어죽지 않는다.

2. 준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온다.

3.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

 1. 성실 :
어렵게 잡부로 채용된 저는 늘 새벽 5시에 출근에서 일을 했습니다.
당시 사장은 5시 20분경에 출근했는데 청소하는 나를 보고 '누구냐'로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는 누구세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대답은 안 하시고
'지금 청소하는 것은 누가 지시한 일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전 '시키긴 누가 시킵니까? 그냥 제가 좋아서 하는거죠.'라고 했더니, '음, 훌륭하군'그러더군요.

그래서 얼마 후에 기능보조원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2. 준비
저는 그렇게 늘 새벽 일찍 제일 먼저 출근해서 공장을 쓸고 닦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쪽 구석에 도라지를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장님이 지나가면서 또 무슨 일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전 '그냥 도라지 심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냥 심어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습니다.
미국에서 중요한 바이어가 우리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공장견학이 끝나고 곳곳에 심어져 있는 도라지꽃을 보고 이 꽃이 무슨 꽃이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도라지'가 영어로는 무엇인지 몰라서 우물쭈물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미국 바이어가 ‘American star flower'라고 하더군요.
도라지꽃의 별 모양이 꼭 미국 국기와 똑같다면서 아주 좋아하더군요.
그리고 그날 수백만 달러의 계약을 흔쾌히 응하고 가셨죠.
그러자 사장님은 내가 아주 훌륭한 일을 해냈다고 더욱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셨죠.
제가 학력은 없지만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5개 국어까지 마스터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목숨을 다하라.
이 부분을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원하시는 일이 있으면 미적찌근하게 일하지 마십시오.
일하는 둥 마는 둥, 빈둥빈둥 인생을 허비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목숨을 걸고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루에 3시간 정도 잠을 잡니다.
보통 9시경에 잠들어서 새벽 12시나 1시경에 일어나서 새벽 6시까지 책을 보다가 그렇게 출근을 합니다.
이제까지 700여 가지의 제품과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걸고 내 인생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인정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신을 인정하시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마지막 당부의 말

한 번밖에 없는 인생 돈에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지금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는 영화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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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이 이조참판이 되고 그 아내는 정부인이 되는 아름다운 역사이야기.
● 조선 숙종때의 일입니다.
아직 나이가 스물이 되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의 젊은 청년이 경상도 밀양땅에 나타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高裕(고유)!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 물리친 고경명의 현손이었지만 부모를 어린 나이에  잃고서  친족들의 도움도 받지못하고 외롭게 떠도는 입장이었지요.
밀양땅에 이르러서는 생계를 위해서 남의 집 머슴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머슴살이를 살고있고 학문이 짧아서 무식하여도 사람됨이 신실(信實)하였고 언변에 신중하고 인격이 고매하였으므로 그를 대하는 사람마다 그를 존중해 주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고도령"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박좌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박좌수는 관청을 돕는 아전들의 우두머리였지만 박봉이었으며 중년에 상처를 하고 가세가 매우 구차하였는데  효성스런 딸 하나가 있어 정성껏 그 아버님을 모셨으므로 가난한 가운데도 따뜻한 밥을 먹으며 살고있었습니다. 
高裕(고유)는 그 마을에서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내는 가운데 어느덧 그 처녀의 효성과 현숙한 소문을 듣게되었고 먼 빛으로 보고 그 처녀를 바라보면서
그 아름다운 처녀에게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답니다.
내 처지가 이러하거늘
그 처녀가 나를 생각해줄까?
     그 처녀와 일생을 함께 한다면 참 행복할 텐데!
     벌써 많은 혼사가 오간다고 하는데~
     한 번 뜻이나 전해보자
   그래!  부딪혀 보자고~!
그러던 노을이 곱게 밀려드는 어느날!
   고유는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박좌수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본래 박좌수는 장기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우선 장기판부터 벌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실없는 말처럼 그러나 젊은 가슴을 긴장시키면서 품었던 말을 꺼내 보았지요.
   "좌수어른, 장기를 그냥 두는 것보다 무슨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떠리까?"
   "자네가 그 웬 말인가, 듣던중 반갑구먼.
그래 무엇을 내기하려나?"
좌수는 웃어넘겼다. 이웃집에서 빚어 파는 막걸리나 파전을 내기라도 하자는 건가 생각하면서 ~
   "이왕 할 바에는 좀 큼직한 내기를 합시다.
이러면 어떨까요.?
제가 지거든 좌수댁 머슴살이를 삼년 살기로 하고 좌수님이 지거든 내가 좌수님 사위가 되기로요!"
박좌수는 그제야 고유의 말이 뼈있는 말임을 알았다.
  "에끼 사람아!
"내 금옥 같은 딸을 자네 같은 머슴꾼에게 주겠다던가?.
"어찌 자네따위나 주려고 빗발치는 청혼을 물리치고 스무해를 키웠다던가?"
고유는 박좌수에게  무안을 당하고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고유가 돌아간 뒤에  박좌수와 고유가  말다툼하는 것을 방안에서 듣게된 딸이 물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무엇때문에 고도령을 나무라셨습니까?"
 
   "그 군정이 글쎄 나더러 저를 사위 삼으라는 구나~
그래서 내가 무안을 주었지..."
     박좌수는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하면서 딸의 고운 얼굴을 바라보았답니다.
그런데!
     "아버님, 그이가 어때서 그러셨어요. 지금은 비록 빈천하지만 본래는 명문 사족(士族)이었고 또 사람이
듬직하고 그렇게 성실한 걸요."
오히려 박좌수의 딸은
     처녀의 수줍음 탓에 얼굴은 불그레해졌지만
얼굴 두 눈에는 가득히 좌수를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얻어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좌수에게 혼인을 지내도록 하라고 권해 마지 않았습니다.
아니?따님도 싫어하지 않는데~
마치 자신들 집안의 일인양 여럿이 우겨대자 좌수도 끝내 반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
물 한사발 떠 놓고 두 젊은 청년과 처녀의 혼례가 이뤄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모은 돈으로 술 한동이를 받아 놓고 고기와 과일을 먹고 마시면서 그들 한 쌍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화촉동방의 밤은 깊어지고 고유와 신부는 촛불 아래서
부부의 연으로 초야를 치뤘습니다.
고유는 가난하였으나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색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꿈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서방님!  글을 아시나요.?
     "부끄러우나 배우지 못했오.!"
     "글을 모르시면 어떻하시나요?. 대장부가 글을 알지 못하면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도 공명을 얻을 길이 없는 법입니다.
색시는 고유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럼 이렇게 합시다!  앞으로 십년 작정을 해서 서로 이별하여 당신은 글을 배워 과거에 오르기로 하고 첩은 길삼을 하여 세간을 모으도록 해요.
  그렇게 한 뒤에도 우리들의 나이가 삼십이 되지 않으므로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닙니다.
이제, 사랑하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는 것은 쓰라리지만 훗날을 위해서 고생하기로 해요."
색시는 고유의 품에 안기어 눈물을 쉼없이 흘렸습니다.
고유의 두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색시의 두손을 꼭 잡았습니다.
긴세월 접어두었던 학문의 길을 깨우쳐준 색시가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지요!
아직도 동이트지 않은 새벽녁~
고유는 짧은 첫날밤이 새자 아내가 싸준 다섯필 베(布)를 짊어지고 입지출관향(立志出關鄕)하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떠나서 어느 시장에서 베를 팔아 돈으로 바꾸고 스승을 찾았습니다. 돈을 아끼려고 남의 집 처마 밑에서도 자고,빈 사당 아래서도 밤을 새워가면서 좋은 스승을 찾아 발길은  합천땅에 이르렀습니다.
    고유는 인품과 학문이 높아보이는 스승님인듯한 사람에게 예를 올리고 글을 가르쳐 줍시사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학동들과 함께 천자문(千字文)을 처음 배웠습니다.
    처음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시작했으나
오륙년이 지난 후에는 놀라움 속에서 고유의 글은 실로 대성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스승도 탄복하면서
     "네 뜻이 강철처럼 굳더니 학문이 일취월장(日就月長)하였구나!
     "너의 글이 그만 하면 족히 과장에서 독보할만 하다. 이제 나로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올라가 과거나 보도록 하라."
     고유는 그동안의 신세를 깊이 감사하면서 그곳을 물러나서는 다시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방 한칸을 빌리고 사정을 말하여 밥을 얻어 먹으면서 상투를 매어 달고 다리를 찌르며 글을 익혔답니다.
    어느해!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숙종대왕이 정시(庭試)를보이는 영을 내렸지요.
뜻은 헛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고유는 처음 치루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금방에 그 이름이 휘날렸습니다.
     그리하여 고유는 곧 가주서(假注書)로 시립(侍立)하여  왕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왕을 가까이 모시던 어느날!
마침 소나기가 쏟아져 처마에 그 소리가 요란했으므로 왕은 대신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숙종은 "신료들 소리가 빗방울 소리에 방해되어 알아 들을수 없구나!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을 고유는 초지에 받아 쓰기를,
'처마에서 나는 빗 방울소리가 귓가에 어지러우니 의당 상감께 아뢰는 말은 크게 높여라' 하니 주서들이 모두 글 잘 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왕은 그 쓴 글을 가져오라하여 본 다음에 크게 기뻐하여
     "너는 누구의 자손이냐" 고 물었습니다.
"신은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의 현손(孫)이옵니다."
   "허~! 충성된 제봉이 손자도 잘 두었군. 그래 고향부모께서는 강령 하시더냐?"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그럼 처자가 있겠구나."
     "예, 있아옵니다."
그날밤!
숙종대왕은 고유를 따로 불러서 그의 사연을 사적으로 듣고싶어했습니다
고유는 감히 기망할 수가 없어 그가 떠돌아 다니다가 밀양 어느 마을에서 머슴을 살게 된 이야기며, 거기서 장가들어 첫날밤에 아내와 약속하고 집을 떠나 십년동안 공부를 한 그의 이력을 모두 아?었습니다.
     "허허~! 그러면 십년 한정이 다 되었으니 너의 아내도 알겠구나."
     "모를 줄 믿사옵니다. 과거에 오른지가 며칠이 못되와 아직 통지를 못했습니다."
     "음 그래?"
   왕은 그 자리에서 이조판서를 불러들여 현 밀양부사
(密陽府使)를 다른 고을로 옮기고 고유로 밀양부사를 임명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고유를 바라보면서,
    "이제 내 너를 밀양 땅으로 보내니 옛 살던 마을에 가서 아내를 보되 과객처럼 차리고 가서 아내의 마음을 떠 보아라."
     "과연 수절하며 기다리고 있는지~
변심했는지 그 뒷 이야기가 나도 궁금하구나!
대왕이 웃는다.
      "하하하!"
고유는 부복사은하고 물러나왔습니다.
그는 왕이 명한대로 신연하인(新延下人)들은 도중에서 떼어놓고 홀몸으로 허술하게 차린 다음 옛 마을 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집터에는 잡초만 무성할 뿐이었고 사람의 그림자도 없이 버려진지 수년의 세월이 지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고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요.
    "못 믿을 건 여심이라던가?
첫날 밤에 맺은 굳은 언약이 가슴속에 사무치건만~"
     마침 가까이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고 박좌수집 형편을 물으니 그가 고유인 줄은 못 알아보고는 동네의
그 늙은 이는 그가 아는 대로 일러 주었습니다.
      "박좌수 어른이요?
그러니까, 그게 3년 전이었군요. 병으로 죽었지요.  그에겐 딸이 하나 있지요. 벌써 10년 전에 이 마을 머슴을 살던  고도령에게 시집을 갔는데 웬일인지 첫날밤에 신랑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혼자 되었지만~
"허허~
신기하게도 첫날 초야에 유복자(遺腹子)가 하나 생겼어요 참 ! 똑똑하지요.
그 여자는 현숙하고도 어찌나 부지런한지~
남편이 없는데도 크게 가산을 일으키더니
땅과 살림이 무수하고 저 건너 산 밑에 백여호가 넘는 대촌을 이뤄놓았어요
모두 그 낭속(廊屬)이요."
    고유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가산을 크게 이뤄놓은 사실이 아니라~
사랑의 언약을 지키면서 자신을 기다려줬다는 사실때문에 !
   고유는 노인에게 사례하고 자신을 따르는 군속들에게는 곧 주막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습니다.
어슥 어슥 어둠이 마을을 감싸올 무렵~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제일 큰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구걸하는 소리를 질렀다.
     '얻어 먹는 인생이 한 그릇 밥을 바라고 왔오이다."
사랑방에서 늙은 스승한테 글을 배우고 있던 소년이 그 소리를 듣고 나왔다.
     "들어 오세오. 손님" 
고유는 그가 아들인줄 알면서도 짐짓
     "아니 처마밑에서라도 좋네."  라고 하였다.
     "아니 올라오세오. 우리집에서는 과객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굳이 올라 오라 하므로 못이기는 체 올라가 웃목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 그런데 손님의 성씨는 무었인지요"
     "허 비렁뱅이에게 무슨 성이 있나. 남들은 고가라 하지만."
그러자 소년의 눈이 더욱 빛났다.
     "저 그럼 손님 처가의 성씨는요.?
     "10년 전에 장가들어 그도 첫날 밤을 지내고는 헤어졌으니, 무슨 처가랄 게 있을까? 그댁호야 박좌수댁이었지만..."
      그때 박씨부인이 사랑에 웬 과객이 들었는데 성이 고씨라 하는 바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아들이 나왔다.
아들의 두눈은 기쁨과 설렘으로 어머니의 눈빛을 확인한다.
박씨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들 손을 잡고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비록 10년을 떠나 살았지만 한 눈에 알 수 잇는 남편이라 기쁜 나머지 반가운 눈물을 흘렸다.
오래 그리던 회포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 놓으며 열살 먹은 아들을 인사 시켰다.
고유는 그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전히 힘없는 소리로 그의 그간 지난 일을 꾸며댔다.
     "그렇게 집을 떠나서는 뜻을 이루어 보려 하였으나, 운수가 사나워 베를 판 돈은 도적을 만나 빼았겨 버리고 이리저리 유랑 걸식하여 다니자니 글을 배울 힘도 나지 않았거니와, 혹 서당이 있어 글을 배우자하여도 돈이 없으니 가르쳐 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 세월만 허비하고는 글은 한 자도 배우지 못하고 이렇게 비렁뱅이가 되었지요."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원망하거나 민망해 하는 빛이 없이 사람의 궁달(窮達)은 운수에 있다고 하면서 그가 벼로도 수천석 추수를 장만해 놓았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좋은 옷과 음식을 들여 놓으며 도리어 남편을 위로하여 주었다. 
고유는 음식상을 앞에 두고 부인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눈길에 남편의 겉옷이 걸렁뱅이 옷차림이지만 속옷은  새하얗고  께끗한 것에 놀랐습니다.
더구나 허리춤에는 관리들이 차는 명패가 흔들거리고 있었으니!
부인이
   "서방님! 사실대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고유는
    "나와 동행하던 사람이 있으니, 그들도 불러 들여 함께 먹어야 겠오."  했다.
      그래 부인이 하인을 시켜 그 사람을 사랑방으로 모셔 들이라 하였다.
   하인이 나가서 문 밖에 서 있는 과객을 보고 들어 가시자고 하자, 그는 들은 척도 않고 대로에 나가더니 품에서 호적(胡笛)을 꺼내어 높이 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듯이 수십명의 관속들이 달려와 안으로 들어가서는 도열하였다.
그리고,박씨부인을 향해 문안인사를 아뢰고 야단이었다.  문밖에 서있던 과객은 먼저 고유의 지시를 받은 군관이었다.
     고유는 그제서야
"우리부부의  사연을 들으신 상감마마께서 지시한 것이라오. 당신의 마음을 떠보려 한것이 결코 고의가 아니었오!"
군속이 관복을 가져오니  갈아입고,박씨 부인앞에 당당하게 서게되니 부인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그 이튿날부터 3일간 크게 잔치를 베풀어 동리의 남녀노소를 청하여 실컷 먹였습니다.
박씨 부인은 그동안 모아놓은 전답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글을 깨우쳐 주신 서당의 스승과 해인사 중들에게도 많은 보은의 폐백(幣帛)을 보냈음은 물론입니다.
      고유는 얼마 안 있어 다시 벼슬이 경상감사에 올랐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니,
숙종과 영조, 정조대왕등 3대를 모시면서 그 영화로움이 말할 것도 없고, 부인도 나라에서 지정하는 정부인(貞夫人)이 되어 늦도록 복록을 누렸다고 합니다.
--------------------------------------
●고경명(高敬命)은
1533년 전라도 광주에서 출생으로
1552년(명종 8)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 때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점령하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潭陽)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큰아들에겐 전주성을 사수하게하고 금산(錦山)에서 관군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우다가 작은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의정부좌찬성에 추존하였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특이한 점은 고경명의 후손들은
고경명과 함께 임진왜란때 전사한 2명의 노비들 제사도 함께
모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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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삼국지에서 제갈량과 아내가 처음 만나는 장면(카츠마타 토모하루, 유튜브 캡처)

중국 삼국 시대의 유명한 참모 제갈량은 풍채도 당당하고 씩씩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내의 추함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였다.

제갈량 아내 황씨는 제갈량의 은사 황승언(黃承彦)의 딸로서 이 둘의 결혼은 당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심지어 제갈량의 고향에서는 “제갈량처럼 신부를 고르지 마라, 아승(阿承-황승언)의 못난 딸을 얻을 것이니”라는 속담이 유행했다.

황씨는 피부가 검고 머리칼은 붉은 보기 드문 흉한 여자였지만 기인 제갈량과는 궁합은 좋았다. 제갈량이 처음 황씨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천재성이 드러났다.

어느날 제갈량은 인사차 황승언의 집을 방문했다. 문을 연 순간 사나운 개 두 마리가 정면에서 달려들어 제갈량은 깜짝 놀랐다. 곧 여종이 달려나와 개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 두 마리 개들은 즉시 온순해졌다. 제갈량이 자세히 보니 이 개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무인형이었다.

나무 인형에 놀란 제갈량(epochtimes.com)

제갈량은 꼭두각시 개를 만들어낸 황승언을 크게 칭찬했다. 그러자 황승언은 말했다. “이것은 우리 딸이 한가할 때 만든 놀잇감에 지나지 않네.”

황씨는 제갈량에게 시집간 후 집안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했으며 제갈량은 그후부터 아무 걱정없이 국사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각종 일을 적절히 처리했으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다. 제갈량의 친구들도 황씨의 따뜻한 접대를 받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세월이 지나자 그녀의 ‘추녀’ 이미지는 점차 존경심으로 바뀌었으며 모두 제갈량의 탁월한 안목에 감탄했다.

송나라의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계해려형지(桂海虞衡志)’에 의하면, 황씨는 갑자기 많은 손님이 들이닥쳐도 기다리게 한 적이 없고 식사를 매우 빨리 준비할 수 있었다. 손님들이 그 빠른 몸놀림에 놀라 가끔 부엌을 들여다 보면 나무인형 몇개가 황씨를 돕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의견을 참조해 만든 제갈량의 목우유마(趙成偉)

이후 그녀의 이 발명품은 제갈량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발명품에 근거해 발명된 ‘목우유마(木牛流馬)’라는 새로운 수송 수단은 십수 만 대군의 식량을 옮기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북벌’을 펼칠 당시에도 이 발명에 근거해 ‘연노(連弩)’라는 살상력 높은 신무기를 발명했으며, 위나라 장수 장합도 이 무기로 죽음을 맞았다.

황씨는 남편의 건강도 무척 배려했다. 제갈량이 여름에 남방으로 출정할 당시 전염병에 걸릴 것을 우려해 ‘제갈행군산(諸葛行軍散)’과 ‘와룡단(臥龍丹)’이라는 약도 조제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아내처럼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관이 아닌 내면에 있는 것은 아닐까.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내 황씨, 지금까지 제갈량과 가장 잘 어울리는 여성은 그녀 밖에 없는 것 같다.

글/ 수핑(淑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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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문 좋은 글 2017.06.02 14:42

★ 노력의 문 ★

일생동안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도 문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다가

죽을무렵이나 되서야 문지기에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는 반가워서 말했습니다.

"이 문은 당신의 문입니다.
당신이 말하면 문을 열어드리려고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습니다.

문지기에게 열어달라고 부탁을
했거나 열어보려고 노력을 했더라면
벌써 그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절로 문이 열리기만을 바랐기
때문에 그 문을 들어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 삶을 사는데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내가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나이를 먹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린 세상을 살면서 늘 이렇게 시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결코 시도하지 않아서 후회되는
삶이 아니었음 좋겠습니다.

어제는 꿈에 불과하고
내일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잘 살아간다면
모든 과거를 행복한 꿈으로
미래를 희망적인 환상의 세계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노래 mariah carey -
Witho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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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父女 이야기



오랜만에 버스를 탔다.
빈자리가 있어
기분 좋게 앉았는데..
잠시 뒤 스물 한 두살로 보이는
에쁘장한 여학생이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내가 앉은
좌석의 손잡이를 잡고 섰다.
뽀얀 피부에
단아한 옷차림 한눈에 봐도
귀하게 자란
분위가가 느껴졌다.

흘끔흘끔
그 학생을 보고 있는데...
버스가 횡단보도
신호 때문에 멈췄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니 남루한
옷 차림의 아저씨가
상자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절룩거리며
힘겹게 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뒷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참 불쌍하기도 하지. 쯧쯧."
"그러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날도 추운데 고생이 많네."

그 순간 내 옆에 서 있던
그 예쁜 여학생이 창문을 열고
"아빠" 하고 큰소리로
부르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부녀 이야기

사람들은 설마하는
눈초리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손수레를 끌던 아저씨는
걸음을 멈추고 버스를 바라보며
"이제 집에 가니?"

"네,
아빠. 그런데 옷을 왜 그렇게
얇게 입고 나오셨어요?
감기 들면 어쩌려고요."
딸을 보며 아저씨가 웃음 짓는다.
딸도 아빠를 보며 웃는다.
그 웃음에서 빛이 난다.



아저씨는
많은 사람 앞에서도
당신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딸이
고맙고 흐믓하신 모양이다.

그렇기에 추운 날에도
사랑스런 딸 자식을 이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오신 거겠지.
버스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이 아이
얼굴 만큼이나
마음도 곱다' 라고...

어느새
내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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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쪽쪽한 아침입니다

 

. 그리움속에서 살아가는 삶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통은

그리움이라 하지요

어려서는 어른이 그립고,

나이가 드니 젊은 날이 그립다.

 

여름이면 흰 눈이 그립고,

겨울이면 푸른 바다가 그립다.

헤어지면 만나고 싶어서 그립고,

만나면 같이 있고 싶어서 그립다.

 

돈도 그립고, 사랑도 그립다.

동심도 그립고, 부모님도 그립고,

내 사랑하는 모두가 자주 그립다.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어떤 사람은 따뜻했고,

어떤 사람은 차가웠다.

 

어떤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어떤 사람은 헤어지기가 싫었다.

어떤 사람은 그리웠고,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다른 사람을그리워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더 그리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 나를 그리워 해주고,

나도 누군가가 그리운 따뜻한 하루가

되었으면 바라면서

♡♡♡ p-n-kìm ♡♡♡

찻집의 추억 좋은 글 2016.05.18 21:02
참으로 모처럼만에 산기슭의 분위기 있는 찻집을 들렀습니다.
낮이라 더욱 고요하고 적막했습니다.

 

 

 

1 - 주나라 태공망(太公望) / 강태공(姜太公),

운(運)도 지지리도 없는 놈이라고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 말라!

내가 수십년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糟糠之妻) 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文王) 서백을 만나 은(銀)나라 주왕(紂王) 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怨望)하거나 포기않았고 그 인내(忍耐)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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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한(漢)나라 회음후 / 한신(韓信),

용모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때 보잘것 없는 외모때문에 불량배의 사타구니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項羽)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증의 천거를

번번히 거부하며 십년간이나 말단 벼슬아치 집극랑 자리를 맴돌게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劉邦)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없는 몰골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전체 中國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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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사기(史記)의 작가 / 사마천(司馬遷),

한 때 자존심과 명예를 짖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자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史記> 를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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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중국유일 여황제 / 측천무후(則天武后),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딸로 태어나 갓 14살때

최말단후궁 재인이 되어 당태종 이세민후궁으로 들어가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비구니로 물러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으로 돌아와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가 된 후 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의를 처형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고나서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여황제(女帝)  성신황제가 되어 15년간 천하를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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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明나라 태조 홍무제 / 주원장(朱元璋),

집안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元代말기 안휘성(安徽省)의 가난한 농부(貧農)의  한족(漢族)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뭄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功으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어 元나라 몽골군을 中原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사대부집안의 멸시(蔑視)와 견제(牽制)속에서 시달려야했다.

나는 송곳하나 꼿을 땅이 없었던 가난한 농부(貧農)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孤兒)가 되었을때 조차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 천하를 회복한 明나라의 초대(初代)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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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청나라 제4대 황제 / 강희제(康熙帝),

나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때 황제가 되었고 13살때 결혼을 했으며 14살때부터

스스로 친정(親政) 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의 삼번의 난(三藩亂)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채 군주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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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청대말 거상 / 호설암(胡雪巖),

돈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도 못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마루를 닦으며

잔심부름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다시 빈털털이가 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푼도 가진게 없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주는 인재를 대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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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저우언라이 / 周恩來(주은래),

만년 2인자라고 보스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 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초기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옆에 꿇어 앉아야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싶어도

택동의 허락이 떨어지지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속에서도 美日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속에 놓인 국가경제 재건, 등소평을 재 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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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덩샤오핑 / 鄧小平(등소평) ,

잘 나가다 넘어지고 재기했다 다시 쓰러진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나는 문화대혁명때 반모주자파로 몰려 홍위병으로 부터 공개비판을 당했고,

잠시 일어났지만 하방당하여 강서성의 한 공장에서

4년간을 육체노동자로 버텨야했다. 주은래 총리의 도움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로 재기했다가 4인방의 농간에 또 다시 실각하고

가택연금까지 당해야했지만 모택동사후 정국수습용으로 재기용된 후

화국봉과의 5년 권력투쟁끝에 최고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세번 쓰러지고 네번 일어난 역전 !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부도웅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상1등소평.jpg

<위 글은 모두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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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차관사절단

 

백영훈씨 증언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박정희 통역관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서독 상업차관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백영훈 원장

 

19615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없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

 

 

백영훈 씨(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12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독일 최고훈장인

 

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

 

 

한국 정부도 서독 대통령 내외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9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1222일 오전 5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

간호사는 1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

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

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라인강 기적 설계자

 

고속깔고 -제철-정유 육성

 

조언

서독 방문길에 베를린 장벽에 서서

동베를린을 바라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옆 키 큰 이가 백영훈 통역관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수고한 자유 베를린시의 공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

 

 

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12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

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

(‘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

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1964125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

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하고 눈치 채고는

안심하고 원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통곡했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

유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

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11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

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

 

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퍼온글

http://cafe.daum.net/woosung.apt/DQUR/37?listURI=%2Fwoosung.apt%2FDQUR%3FboardType%3D

 

인류의 대 도태는 존재하는가? ‘성경의 계시록에서 말한 종말의 대 심판은 정말 있을까? 구세주가 강림해 인류를 구할 것인가? 누가 구세주인가? 혹시 이 동영상이 당신에게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하기를, 인류의 최후 시각에 이스라엘이 재건 된 후 구세주 메시아가 인간 세상에 강림할 것이라고 했다. 동방의 불경에서도 이르기를, 우담바라가 필 때 미래미륵불이 하세하여 중생을 구도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 예언한 모든 일이 잇따라 나타나고 있다. 동방의 구세주가 이미 우리의 곁에 오지 않았을까?

 

불경과 성경에서 모두 인류의 말법시기에 구세주가 하세하여 중생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불경에서는 말법시기에 미래미륵불이 하세하여 중생을 구도할 것이라고 했고, ‘성경에서는 말법시기에 메시아가 하세하여 중생을 구도할 것이라고 했다. 만약 불경과 성경을 모두 믿을 수 있다면, 인류사회에는 두 구세주 중, 불경에서 말하는 미륵불이 아니면 성경중의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다.

 

미륵불과 메시아는 한 사람인가?

 

고 저명한 국학대사, 불학자, 번역가였던 지셴린(季羡林 계헌림)선생과 그의 제자 첸원중(钱文忠 전문충)교수의 중요한 공헌은 바로 불가의 미래불 미륵과 기독교의 구세주 메시아가 같은 한 사람이라는 불교와 기독교사이의 관계를 발견한 것이다.

 

상하이 복단대학 첸원중 교수의 고증에 따르면, 약 기원전 1천 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넓은 지역에 미래 구세주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예수종교에서 메시아가 바로 가장 대표적인 구세주신앙이다. 이 신앙은 성경 구약에 이미 있다. 그리고 인도의 미륵 신앙은 전 세계범위의 구세주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서로 영향을 미치며, 인도의 미륵신앙은 바로 구세주신앙의 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학계에서 이미 확인했다. 간단하게 말하여 미륵불을 미래불, 미래의 구세주라고 하는 이유는 인도에 근원이 있고, 또 더 넓은 범위에서의 전 세계 혹은 고대 세계에 근원이 있는 당시 널리 유행된 메시아 신앙의 한 부분이었다는데 있다.

 

중국어에서 미륵이란 단어의 유래는 무엇일까? 사실 여기에는 인류문명세계의 큰 비밀이 담겨있다.

 

지셴린문집12권에 수록된 메이다예와 미륵이란 문장의 고증에 따르면 초기 불경의 원본은 대부분 호번(胡本)’으로서 중아시아와 고대 신장(新疆)의 언어문자로 썼고, 규범적인 인도 범어(梵文)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미륵이란 가능하게 신장 토화라어(吐火罗语,Tocharian)’Metrak혹은 Maitrak로부터 직접 음역해 온 것으로 범어의 maitri(자비, 자애-慈悲,慈爱)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미륵자씨(慈氏)’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중국 후한과 3국시기의 많은 불교경전 한역자료에는 미륵자씨’(보살)가 동시에 나타났다.

 

확실히 미륵은 시기적으로나 폭에 있어서 모두 불교의 범위를 초월했다. 중국에서 제일 먼저 민중의 신앙으로 된 것은 관세음보살, 아미타 부처도 아니고, 바로 미륵보살이었다. 미륵 신앙은 처음부터 인류 문명세계에서 우수한 문화의 응집체였으며, 이처럼 깊고 넓은 국제문화배경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보살이나 부처가 없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발견했다.

 

미륵을 범어에서는 maitreya, 발리문에서는 metteya라고 부른다.

서방에서 기다리는 신은 메시아라 하고 영문으로 Messiah라하며, 히브리어 Masiah(때로는 mashiach라 쓴다)를 번역한 것이다. 희랍어로 christos라 번역하며, 이에 따라 그리스도’(Christ)라 부르게 된다. ‘메시아그리스도는 같은 의미이며, ‘신약 성경저자는 이를 유대인의 메시아와 동일시했다.

 

MaitreyaMasiah는 발음이 비슷하다. 사실 토화라어(吐火罗语,Tocharian)’의 미륵은 곧 히브리어의 메시아이며 같은 명사이다. 다만 서방에서는 메시아라 하고 우리는 미륵이라 할 뿐이다. 이런 정황은 인류문명사에서 흔히 보게 된다.

 

감숙성 라부랑 사원(拉卜楞寺)은 티베트불교 종주사원에 속한다. 라부랑사원에 있는 금으로 도금한 미래불 미륵부처는 일어나려는 자세로 조각되었는데 이것은 미륵부처가 법륜을 갖고 인간 세상에 와서 세인을 구도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라부랑 사찰의 미륵상의 조형에는 현기가 숨겨져 있다

미륵은 만왕의 왕이며, 말세에 제일 높은 곳에서 내려 올 때 사용한 불호이며, 법륜성왕은 만왕의 왕이며 법계에 내려 올 때 사용한 법호(인간에서는 전륜성왕이라 부른다)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부처는 그의 제자들에게 법륜성왕을 또 미륵이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자비, 광명, 희망은 미래불 미륵부처의 정신내포이다. 감숙성강남 티베트족(장족) 자치주 하하현에 위치해 있는 라부랑 사원의 몇 개 조각상은 미륵부처가 하세하여 사람을 구도한다는 현기가 숨겨져 있다.

 

라부랑 사원은 청나라 황제 강희 년(1709)에 세워진 티베트불교(장전불교) 그루파(格鲁派, 황교)6개 큰 종주사원의 하나에 속한다. 라부랑 사원의 본명은 아주 긴데 간략해서 자시치 사원이라 부르며 그 중국어의 뜻은 길상선사吉祥旋寺 상서로움이 감도는 절이다

 

이 사원을 세운 1, 2세 주지는 모두 천기를 꿰뚫은 산부처(활불)라 라부랑 사원의 부처 조각상은 깊은 현기를 숨기고 있다. 특히 사원에 있는 두 미륵불의 조각상은 의미가 깊다.

 

사원 안 큰 경당 근처에 있는 서쪽대전에 일어서는 모습으로 두 손을 가슴 앞에서 자세를 취한 미륵불의 금박 동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을 참배하는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라마의 소개에 따르면 미륵불의 손 자세는 세간을 향해 법륜을 돌리는 것이다! 미륵불의 일어서는 자세는 미륵부처가 법륜을 갖고 인간 세상에 와서 세인을 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라부랑 사원의 본명은 吉祥旋寺라 불렀는데 그 함의는 법륜을 돌려 경사스러움을 이룬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전(大金瓦殿)중앙에 모셔있는 미륵대불상은 본 사원 2세 주지가 2백여 년 전에 특별히 네팔 장인을 불로 주조한 금박 동상인데 높이가 10미터 된다. 바로 미륵부처상의 바로 앞 아래쪽에 석가모니부처의 작은 동상이 놓여 있다. 이렇게 두 불상을 하나는 앞에 하나는 뒤에,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고,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고 동시에 한 개의 단에 함께 모신 조형 배열은 극히 보기 드문 것이다.

 

가이드를 담당한 라마승은 여행객들에게 앞에 놓인 불상은 석가모니부처와 그의 제자들이며, 뒤에 놓인 미륵불은 손에 법륜을 들고 있는데 이 미륵불은 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신통력과 능력을 가진 여래이다. 미륵부처는 법륜으로 우주중생을 구도하며 역시 우주중생의 유일한 구원자이다.” 분명히 미륵불(전륜성왕) 조각은 미륵불이 차원이 높고 법력이 큼을 부각했다. 또 모든 인류를 구도하는 미륵불의 큰 자비를 그 조각상의 대소 비교로 충분히 표현했다. 이 사원에서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전당을 소금와전(小金瓦殿), 미륵부처를 모신 전당을 대금와전이라 부른다

 

신은 사람 중에 있다

 

신약 성경이나 구약 성경이나 모두 인류 최후 시각에 구세주 메시아가 강립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들 종교전설에서 구세주 메시아가 인간 세상에 올 때 나타나는 징후의 하나가 이스라엘 재건이며, 또 이스라엘 재건 후 그 세대사람들은 구세주 메시아를 보게 된다고 했다.

 

이스라엘인은 수 천 년의 유랑 끝에 2차 세계대전이 결속된 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진짜로 국가를 재건했다. 1948513,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대회선언을 발표하고, ‘이스라엘 재건을 선포했다. 비록 서방 주류사회는 기독교와 천주교 등이고 이스라엘은 유대교이지만, 신이 다시 돌아오는 조건 중 하나인 예루살렘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은 그처럼 중요했다. 때문에 반세기 넘게 서방의 주류사회는 매우 확고하게 계속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그런 점에서 종교 분쟁의 역사를 완전히 포기했다.

 

동방에서도 역시 미래불(전륜성왕)이 하세하는 다른 하나의 중요한 신호를 기재했다. 불경 혜림음의(慧琳音义)’ 8권에 우담바라는 인간 세상에는 없는 천상의 꽃으로 상서롭고 기이한 느낌이 있다. 만약 여래가 하생하고, 금륜왕이 세간에 나타날 때에는 복덕을 힘으로 하기에 그 큰 복덕에 감복하여 이 꽃이 인간 세상에 나타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경 무량수경无量寿经에도 기재하기를 우담바라는 상서로운 징조이다라고 했다. ‘법화문구’4에는 우담 꽃이라 함은 신통하다는 것이다. 3천년에 한 번 나타나면 곧 金輪왕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했다.

 

1992년부터 한국·일본·홍콩·대만·태국·말레이시아·싱가포르·호주·캐나다·미국 각 주, 유럽, 중국 대륙 각 지방에서 모두 성결한 우담바라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인터넷상에서 이미지를 통해 그 고귀하고 성결한 기품을 보게 되었다. 우담바라는 뿌리와 잎이 없고, 물과 흙이 필요 없다. 유리, 철강, 불상, 나뭇잎, 종이박스, 플라스틱등 어디에나 모두 필수 있으며 1년이 넘게 피어 있기도 하고 생기가 넘쳐흐른다. 자고로 본 사람이 없으며, 오늘의 식물학자들도 할 말을 찾지 못한다. 금년(2011)은 불기로 3038년이다. 우담바라가 이미 세계 각지에서 활짝 피고 있으니 정말로 하늘이 진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민간의 조각상과 예언의 명시

 

중국민간에는 하하 웃고 있는 미륵불 조각상을 보존하고 있다. 그 몸 주위에 18명의 각양각태 어린이들이 놀고 있는데 십팔자미륵불이라 부른다. 그런데 십팔자(十八子)를 합치면 ”()로 된다. 이것은 미륵불이 말세에 인간세상에서 법을 전하고 사람을 구도할 때 인간 성씨는 리라는 것을 예시했다. 이 전설은 미륵불 십팔자 조각상과 함께 줄곧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국 격암유록

 

한국 격암유록에는 성인은 목()() 성씨(), 토끼띠, 4월에 북위38도선 이북, 삼신산(장백산;백두산줄기 공주령)아래에서 태어난다.……聖人은 천상의 중에서도 인 법륜성왕이며, 이번에 하세하면 인간세상에서는 미륵불(彌勒佛)이라 부를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유백온(刘伯温)추비도 推碑图에서도 예언하기를 而时弥勒佛透虚到南阖浮提世界中天中国金鸡目奉玉清时年劫尽龙华会虎兔之年到中天以木子姓라고 했다. 미래불미륵부처는 토끼띠의 해에 중국에서 전생하며, 중국의 금계(金鷄)’모양의 지도에서 눈 부위에 해당하는 길림성에 강림하며, ‘목자(木子)’로서 ()’씨 성이다.

 

1951513일 음력 48, 파룬궁창시인 리훙쯔 선생은 중국 길림성 공주령 시에 태어났으며 토끼띠다. 이날은 마침 불교중의 부처탄신일이다. 동시에 이날은 1951년 부활절에 시작하여 50일째이다. 거의 기독교의 성령강림절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마음으로 깨닫는 사람은 서구종교의 주요한 명절인 부활절(Easter)’을 무엇 때문에 동방에서 온 사람이라 부르며, 무엇 때문에 부활절에 토끼(토끼띠 聖人)와 부활절 계란으로 기념활동을 하는 오랜 습관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탄절에 집집마다 놓는 한 그루 나무가 사람들에게 주는 암시는 더욱 신의가 현묘하다.

 

프랑스인 노스트라다무스는 諸世紀예언집 중에서 정확하게 과거 몇 백 년 동안 세계각지에서 발생한 중대한 사건과 인물을 예언했다. 그중 제2기 제29수인 제세기에서 인류미래세계에서 인류를 구도할 구세주에 대해 명확하게 예언했다.

 

한 동방인이 그의 고향을 떠나

아평령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 왔다.

그는 하늘과 바다, 빙설을 넘어 설 것이며

사람마다 모두 그의 신의 지팡이에 움직일 것이다.

 

이 한 수의 시는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李洪志:3년간 노벨평화상후보에 오른적있다)선생이 중국대륙에서의 설법을 끝내고 서양으로 갔으며, 서양의 많은 나라에서 법을 전하셔 파룬따파가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짐을 예언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제10기 제70수 제3구절에서 위대한 헤르메스로 인류를 위해 대법을 널리 전하고, 우주의 신불의 도리를 널리 전하는 파룬궁 창시인을 형용했다. 바로 헤르메스는 신의 지팡이를 갖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세인을 깨웠다. 본 예언시의 제4구절에서 사람마다 그의 신장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했다. 바로 파룬따파(파룬궁;법륜대법)가 널리 전해져 사람마다 그에 따라 움직이며, 그들이 대법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예언했다.

 

불경의 기재에 따르면 전륜성왕은 부처와 같은 32, 7를 갖고 있으며, 武力이 아니라 正義로 정법의 바퀴를 돌려 이로써 세계를 지배하는 이상적인 왕이다. 불교, 기독교, 유교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轉輪聖王을 만날 인연이 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은 법이라 신이 정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주저한다.

 

세상사람은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하다

 

세간에서는 중국의 승려 포대화상이 미륵의 속세의 化身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그는 후량 정명2(기원916) 33, 봉화 악림사 동쪽 행랑 돌 의자에서 원적하면서 세상을 작별하는 시를 남겼다. “미륵 진짜 미륵, 수많은 분신으로, 항상 그 시대 사람으로 나타나건만, 그 시대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네.”

 

포대화상의 하직게송은 사람들에게 미래에 미륵불이 인간세상에서 사람을 구도할 때 진실을 계속 보여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는다고 알려주고 있다

 

성경’‘요한복음1:10-11에서 그는 세상 속에 있고 세상도 그의 덕분에 만들어졌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지방으로 갔지만 자신의 곳에서 오히려 그를 접대하지 않고 있다고 쓰여 있다. ‘성경에서는 또 구세주가 강림하여 사람을 구할 때 그의 밝은 빛은 순식간에 세상을 환하게 비추며, 마치 번개와 같이 하늘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구세주로 인식하지 않고, 그는 수많은 고난을 겪을 것이며 진상을 알지 못하는 세인들의 훼방을 받을 것이다고 했다.

 

제세기예언도 유일하게 이 중대한 사건의 년 월을 똑똑히 밝혔다. “ 19997월 앙골모아(Angolmois) 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공포의 대왕이 하늘에서 내려오리라……

 

19997월은 확실히 특수한 날이다. ‘제세기에서 반() 그리스도로 표방된 장쩌민은 파룬따파 수련자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발동했다. 일순간에 피바람과 비방요언이 중원을 덮쳤다.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고, 사악에 영합했다. ‘성경,계시록에서는 양과 짐승의 정사간의 최후의 영적 싸움아마겟돈으로 기록된 이 한차례 싸움은 오늘까지(2011) 이미 12년이 되었다. 무수한 대법제자들은 이름 모를 고난을 감당하면서도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공은 공공연히 진선인(真善忍)’ 우주의 佛法에 대항하면서 이번 정사의 싸움에서 이미 수렁에 깊이 빠졌다. 당대 추배도(推背图)’에서 “99년에 큰 잘못을 저지른다.”라는 한 마디로 예언했다.

 

결국 에게 돌아가야 한다

 

장아함경(长阿含经)18권에는 전륜성왕이 세상에 나타날 때 ……동방의 여러 작은 왕들은 대왕에게 보물을 올리면서 귀순의사를 표시할 것이다. , , 3방 모두 이러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 ‘계시록7:9-10)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하고 외쳤습니다.”라고 기록했다.

 

각방, 각국, 각 민족은 비록 많은 시련을 겪지만 마지막에는 모두 신을 향해 돌아오게 된다고 불경과 성경에서는 모두 이렇게 썼다.

 

신세계와 신인류

구세주가 세상에 와서 중생을 구도한 후 인간은 신세계와 신인류를 맞을 것이다.

 

미륵상생경에는 국토가 기름지고, 백성이 번성하고, 사람들은 질병이 없고, 재난이 없으며, 서로 사랑할 것이다. 남녀가 평등하고 모두 선()업으로 생활할 것이다. 땅에는 가시나무가 없고 잔디만 자랄 것이니 마음 놓고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벼 향기가 풍기고, 맛있는 음식이 풍족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8만세를 살 것이고, 질병과 번뇌가 없이 항상 안락할 것이다.”라고 기재되었다.

 

성경’ ‘이사야6519-20)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사야6523-25)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시다.”라고 기록했다.

성경’ ‘계시록22:2)에는 새로운 세계를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만민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이 한 차례 정사대전을 치른 후 불법의 도의(道義)을 수호하였기에 남은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안락장수하고, 벌을 받지 않고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꽃과 과일이 충실하고, 맛있는 음식이 충족할 것이다. 싸움이 없고, 평화롭게 지낼 것 이니 이로부터 인류는 새로운 기원으로 들어 갈 것이다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2015/06/11/145974.录象片:凭籍神的启示,寻找救世主.html.html

박정희 대통령 통역관서독차관사절단

백영훈씨 증언
50년전 경제부흥의 초심’에서 배운다 -
 

한국 경제개발의 종잣돈이 된 서독 상업차관을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백영훈 원장
.
1961년 5월 16일 군대를 앞세워 집권한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의지만 확고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제’는 의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집권하며 내걸었던 공약대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은 강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이 없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미국의 원조를 기대하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문전 박대당한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준비해 들고 간 사업계획서들이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시 케네디 정부는 5·16군사정변 자체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고 있었다.
거기다 한국에 돈을 빌려 주면 쿠데타를 인정하는 꼴이 되고
이로 인해 아시아 전체로 쿠데타가 파급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에서 연이어 쿠데타 조짐이 일고 있었다.

미국 금융기관들도 야박하게 퇴짜를 놓기는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무상 원조를 주고 있는 나라에 차관까지 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불신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미국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었지만
‘국교도 없는 나라에 어떻게 돈을 빌려 주느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나라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바로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며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서독이었다.
서독 경제는 1950년부터
매년 연평균 8%대의 실질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서독의 모습을 보며
박정희는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 보자’라는
각오를 갖게 되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 사절단’을 구성해 서독으로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독(駐獨) 대사관에도, 사절단에도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알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비 유학생으로
서독(뉘른베르크 에를랑겐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독일 경제학 박사 1호
백영훈 씨(83·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가
안테나에 걸렸다.
그는 중앙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 원장은 사절단의 공식 통역관으로 합류한다.

사절단은
서독에 도착하긴 했지만
관료들 중
누구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 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 최빈국 같은 나라였다.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 교섭 사절단이라고
갑자기 찾아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누가 만나 주겠는가?”

당시 서독의 경제장관은
2년 뒤 총리가 되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에르하르트 장관과 같은 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 은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장관을 만나게 도와 달라고 사정했지만
은사 역시
도와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했다.
나중엔 집에 오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결국
매일 아침 6시 교수 댁 앞으로 가서
사모님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
마주치면 눈물로 호소했다.
‘사모님, 저를 살려 주세요. 장관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은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차관과의 약속을 잡았다”는 것이다.

1961년 12월 11일 한국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 베스트리크 차관과 만난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장관까지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은 마침내
1억5000만 마르크(당시 3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사절단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상업차관이었다.

사절단은 귀국하고 백 원장은
뒷마무리를 위해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은행의 지급 보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한국의 재무부를 중심으로 해외 은행들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없었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 주겠다는 나라는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협상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다시 백 원장의 말이다.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독일 최고훈장인
특등십자대공로훈장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
한국 정부도 서독 대통령 내외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했다.

 

“못사는 나라 국민의 심정이 얼마나 가슴 찢어지는 일인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는 매일 울면서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돈 꾸러 왔는데
지급보증 서 주는 데가 없어 돈을 가져 가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나는 독일에서 그냥 죽어버릴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었는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왔다.
그는 당시 서독 정부에서 노동부 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슈미트 과장은 대뜸 백 원장에게
“너희 나라 길거리에 실업자가 많지 않으냐?”고 물었다.
백 원장은 “그런데?”라고 되물었다.
슈미트 과장은 다음 날
두꺼운 서류 뭉치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지금 서독은 탄광에서 일할 광부가 모자란다.
웬만한 데는 다 파내 지하 1000m를 파고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 뜨거워 다들 나자빠져 있다.
파키스탄, 터키 노동자들도 다 도망갔다.
혹시 한국에서 한 5000명 정도를 보내 줄 수 있겠느냐.
간호조무사도 2000명가량 필요하다.
시체 닦는 험한 일도 해야 하는데
독일인은 서로 안 하려고 한다.
만약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 줄 수만 있다면
이 사람들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

백 원장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 대사는 백 원장의 말을 듣더니
“5000명이 아니라 5만 명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했다.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신 대사는 본국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 공고가 난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비행기 자체를 타기도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6 대 1의 경쟁률이었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도 무조건 신청했다.
탄광 갱도조차 구경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 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다들 관심이 높았던 사안이었던지라 노동부는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을 정도였다.

드디어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 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 조건은 ‘3년간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 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
우여곡절 끝에 차관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백 원장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국한 뒤 다시 중앙대 교수로 복직한다.

3년이 흐른 1964년 말,
백 원장은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호출을 받는다.
박 대통령은
그 전해인 1963년 10월 군정(軍政)을 끝내고 민간인 자격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된 터였다.

박 대통령은 백 원장을 현관까지 나와 기다려 맞았다.
그러면서 그에게 “한번만 더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서독 하인리히 뤼브케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국빈 자격으로 초청했는데
통역관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라인강 기적 설계자
“고속道 깔고 車-제철-정유 육성”
조언 ▼
서독 방문길에 베를린 장벽에 서서
동베를린을 바라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옆 키 큰 이가 백영훈 통역관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수고한 자유 베를린시의 공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도서출판 기파랑 제공
서독으로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청와대 회의가 있다고 해서 가 보니 다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서독으로 갈 비행기가 없다는 거였다.

“당초 5만 달러를 주고 20일 동안 미국의 노스웨스트 에어라인에서
비행기를 빌렸는데

미 의회가 쿠데타로 집권한 한국 군인이
미국 비행기를 이용하면 다른 나라를 자극한다고
갑자기 취소해 버리고 만 거였다. 독일 방문 열흘 전이었다.”

백 원장은
그 자리에서 대통령 특사로 임명됐다.
당장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정부에 비행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백 원장은 궁리 끝에 일제강점기 때 독일에서 유학했으며
제3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내고 물러난 최두선 전 동아일보 사장에게
부탁하여 함께 서독으로 날아갔다.
최 전 사장은 독일에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었다.

백 원장 일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訪獨) 일정을 상의하겠다며
뤼브케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노동부 차관을 함께 만났다.
이 자리에서 비행기 이야기를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용기를 내 운을 뗐다.
“비행기가 없다. 서독이 잘사는 나라이니 비행기 좀 제공해 주면 안 되겠느냐?”
다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독일 관료들이 한동안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더니
일단 돌아가라고 했다.
우리는 안 되는 줄 알았다.
떠나기 사흘 전까지 연락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떠나기 직전
비행기를 제공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1964년 12월 3일 홍콩을 경유해 서독으로 들어가는 루프트한자
여객기(보잉 707)가 경로를 변경해 서울에 착륙했다.
박 대통령이 그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갔다.”

대통령 전용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타는 상용 노선에 취항 중이던
비행기에 급히 타게 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로마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쾰른 공항까지 무려
28시간이나
걸려 독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하고 해외 경험이 없었는지는
비행기에 동행했던 조선일보 정치부 이자헌 기자의 회고
(‘파독 광부 45년사’)에 잘 나와 있다.

“대통령과 장관들은 1등석에 타고 다른 일행은 이코노미석에 탔다.
화장실에 가 보니 이상하게 생긴 물건이 거울 앞에 있었다.
이게 무슨 용도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때 여기자로 유일하게 수행기자로 포함됐던 한국일보 정광모 기자가
‘물비누’라고 설명해 줘 실소를 금치 못했다.
기자들도 국제적 촌놈이었고
대통령 일행도 참 초라한 행차였다.
기내의 박 대통령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서독에 국빈 자격으로 초청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전해 말부터 파견되기 시작한 서독의 광부들 때문이었다.
백 원장의 설명이다.
“연일 서독 신문과 방송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는 한국 광부들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다.
지하 갱도 1000m에서도 시간외 근무를 마다않고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이
TV에 방영되자
서독인들이 크게 감명을 받았다. 마침내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한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을 초청해 우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28시간의 긴 비행 끝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은
1964년 12월 5일
대통령과 총리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백 원장은 그날
에르하르트 총리가 열어 준 만찬 자리에서 보여 준
박 대통령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서 온, 당시 마흔일곱이던 박 대통령은
서독 총리를 앞에 놓고
‘우리 국민 절반이 굶어 죽고 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인들은 거짓말 안 한다. 빌린 돈은 반드시 갚는다.
도와 달라.
우리 국민 전부가 실업자다.
라인 강의 기적을 우리도 만들겠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박 대통령 말을 통역하며 나도 같이 울었다.”

“왜 쿠데타를 했느냐?”라고 묻는 총리의 질문에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한국도 서독과 마찬가지로
공산국가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공산국가들을 이기려면 우선 잘살아야 한다.
내가 혁명을 한 이유는 정권을 탐해서가 아니다.
정치가 어지럽고 경제가 피폐해져 이대로는 대한민국이 소생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
돈을 빌려 주면 반드시 국가 재건을 위해 쓰겠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열정과 사명감에 감화된 듯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눈을 반짝이는 박 대통령을 바라보며 총리의 말이 이어졌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그렇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다음 날은 박 대통령이 독일의 한 공과대에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

“독일 사람은 교수가 강의하러 들어오면 박수 대신
주먹으로 책상을 수차례 가볍게 두드리는데
사전에
이 이야기를 미처 대통령께 전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박 대통령이 단상에 올라가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책상을 두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통령은 이 모습을 보고 야유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통역관이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 양반 얼굴이 빨개졌다.
당황했는지 미리 준비해 간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학생들이
또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겼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아. 무시가 아니라
경청의 의미구나’ 하고 눈치 채고는
안심하고 원고를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웃음).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박 대통령이 내게
‘이 사람아, 왜 그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나?
창피당할 뻔했다’고 농담조로 핀잔??주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가는 곳마다
“한국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날 학생들에게 했던 연설도
“우리도 여러분이 이룬 라인 강의 기적처럼 한강의 기적을 만들겠다.
도와 달라”는 거였다.

박 대통령은
뤼브케 대통령의 안내를 받아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루르 탄광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대통령을 기다리며
선 광부들의 얼굴엔 온통 석탄이
묻어 있었고 작업복 역시 흙투성이였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단상에 올랐다.
현지 광부들로 구성된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도 애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를 덮어 버린 거였다.
500여 명의 광부 등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먹였다. 연주가 끝나자
박 대통령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코를 풀더니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만리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대통령의 준비된 연설은 여기서 몇 구절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나오던 흐느낌이 통곡으로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아예 원고를 옆으로 밀친 뒤 이렇게 말했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납니다.
광부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생각에 괴로움이 많을 줄 알지만…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들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결국 대통령은 말을 맺지 못하고 소리 내어 울어 버렸다.
그 자리에 함께한 서독 대통령도 눈시울을 적셨다.
광부들은
대통령이 탄 차 창문을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통곡했다.

서독에서 머문 일주일(7∼14일) 동안
박 대통령은
자동차 전용도로 아우토반을 달렸고
제철소를 견학했다.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이 ‘아우토반’이었다.
나치 정권하에서 총연장 1만4000km를 목표로 건설하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3860km를 완성시켰던 ‘아우토반’은
박 대통령이 방독할 무렵 ‘세계에서 자동차가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도로’로
유명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서독 측 관계자에게 아우토반의 건설과 관리 방법, 소요 비용과
건설 기간, 건설 장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결국 3년 뒤인 1967년 11월 7일 청와대 회의에서 건설부 장관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하며 직접 진두지휘까지 하기에 이른다.

백 원장은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젊은 박정희’를
바로 옆에서 보았던 경험이
나의 평생 삶을 이끌어 준 나침반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을 보며 그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걸었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아우토반에 갔을 때
박 대통령이 중간쯤 자동차를 전부 세우더니
차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다들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육 여사도 서독 방문 내내 눈물을 훔쳤다.
남편 때문에 울고 광부와 간호사 때문에 울고.”

백 원장은
마치 어제 일처럼 그때 일이 기억나는지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박 대통령 혼자가 아니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언어도 통하지 않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목숨 내놓고 일한 광부와 간호사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돈도 빌릴 수 없었고 경제 발전도 없었다.
나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한국인들이 정말 자랑스럽다.”

http://cafe.daum.net/woosung.apt    /DQUR/377?listURI=%2Fwoosung.apt%2FDQUR%3FboardType%3D 에서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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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 맥스의 비용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와
당시 전기 분야의 전문가였던 '스타인 맥스'가 있었던 일입니다.

스타인 맥스는
미시간주에 있는 헨리 포드의 첫 번째 공장에
큰 발전기를 설치했습니다.

어느 날 이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공장 전체의 가동이 중단됐습니다.
수많은 수리공과 전기공들을 불렀지만 고칠 수가 없었죠.

결국 포드는 스타인 맥스를 불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 여기저기를 살핍니다.
힘들여 일한 것도 아닌데
마침내 공장은 재가동이 되었습니다.

며칠 뒤, 포드는 스타인 맥스로부터
만 달러의 입금 청구서를 받습니다.
당시로써는 상당한 거금이었죠.

'대충 몇 군데 두드려 보고 고친 비용이 너무 비싸군...'

포드는 청구서에 이런 메모를 붙여서 돌려보냅니다.
"이 청구서의 금액은
당신이 몇 시간 모터를 두드리면서 고친 것에 비해
너무 비싼 것이 아닙니까?"

스타인 맥스로부터의 답장은 이랬습니다.
"모터를 두드리며 일한 임금이 10달러,
어디를 두드려야 할지를 알아낸 것이 9,990달러,
합계 일 만 달러."


물론 포드는 그 금액을 다 지불했습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했느냐 라기보다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표와 방향성입니다.


# 오늘의 명언
전문가란 더욱 작은 것에 관해서 더욱 많이 아는 사람이다.
-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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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한 작전' 한국어판 출간

 


▲ 인권변호사 가오즈성

[SOH] 중국의 저명한 인권변호사, 가오즈성에 관한 도서, ‘신과 함께한 작전’이 도서출판 '글그림늘다섯'에서 22일 출간됐습니다.


2006년 대만에서의 첫 출간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2007년 미국에서 영문판으로 번역된 이 책은 중국의 10대 변호사이자 양심으로 불린 가오즈성의 힘들고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1998년 개업초기, 의료사고를 당한 장애아동들에 대한 변호를 시작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의 억울한 사건을 각종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도운 이야기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또 이 책에서는 가오즈성이 2004년 중공 최고지도부에 여러 차례 청원서를 제출해 파룬궁 탄압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탄압중단을 청원한 과정과 내용이 자세히 수록돼 ‘진정한 중국의 양심’으로서 중국 공산당 정부의 불의와 강압, 협박에 굴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한 과정을 자세히 엿볼 수 있습니다.


가오즈성은 2006년 말 ‘국가 정권 전복 선동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고, 2011년 형기가 연장(3년)된 후 지난 달 7일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사야(沙雅) 감옥에서 형기만료로 출소했습니다.


2008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그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토지를 뺏긴 농민과 지하교회 신도, 노동운동가 등의 인권보호에 앞장선 중국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전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장기적출 문제 실태를 조사한 데이비드 킬고어 전 캐나다 아태담당 국무장관은 가오즈성 변호사를 ‘이 지구상에서 가장 용감한 변호사 중 한 사람’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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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에 응보가 따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다
 
 
글/숭즈펑(宋紫鳳)
 
[밍후이왕] 중국본토에서 발원한 도가 문화에는 ‘천일합일’(天人合一), ‘천인감응’(天人感應)이란 말이 있다.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 온 불교도 마찬가지로 무슨 일이든지 틀림없이 보응이 따른다고 여길 뿐만 아니라 윤회의 개념을 갖고 있는데, 이런 감응현상이 시간적으로는 3생과보(三生延伸)에 뻗히고, 공간적으로는 육도윤회에까지 확장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유, 석, 도(儒釋道)의 문화를 주체로 한 중화전통문화에서는 인과응보의 행적(事跡)을 불경과 도가의 경전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역대 패관야사(稗官野史)나 방간잡기(坊間雜記) 등 고전문언소설(筆記小說)에서도 주로 나이 많은 서생들의 인과응보와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현대인은 문화의 어긋남으로 인하여 ‘천인감응(天人感應)’, ‘인과응보’ 이런 고유한 개념에 대해 신비주의 정도로 취급하거나, 심지어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 이 세계는, 바로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로서 이른바 사소한 것이 대세에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어떤 하나의 국부적 변화라고 해도 모두 고립적이고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의 존재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잔물결이라고 해도 한 파도가 가라앉기 전에 또 새로운 파도가 일어서 생기듯이, 유감(有感)이 있으면 틀림없이 유응(有應)이 있는 것이고,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평범한 인과의 현상이다. 작용력과 반작용력, 이는 하나의 가장 신속한 인과인 것이다. 도미노현상의 붕괴가 보여주는 것도 일련의 인과다. 작은 나비의 날개 짓이 큰 폭풍우의 변화를 유발시킬 수 있다는 일명 ‘나비효과’라는 것이 바로 물체간의 인과로 나타나는 추상적인 현상을 말함인데, 이제 이런 현상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반적 인식인 것이다. 이것으로 비추어볼 때, 인과와 감응은 그 무슨 현묘하고 기품이 있는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대천세계(大千世界) 어디나 다 있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을 중심으로 한다면 사람과 사람 간에 인과가 있고, 사람과 물건 간에 인과가 있으며, 사람과 사회 간에 인과가 있고, 사람과 자연 간에도 인과가 있는 것이다. 천백 년래 중국의 옛 사람이 탐구한 정(正)은 최고층 면의 사람과 천리지간의 인과와 감응인 것이다.
 
이른바 하늘의 이치를 아는 자(天理者), 다시 말해서 천도윤리를 말함인데, 이 천도윤리는 절대로 허무한 가설이 아니다. 그것에는 아주 구체적인 내포가 있는 것으로 도가에서는 도라고 부르고, 불가에서는 법이라고 하며, 유가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라고 한다. 동시에 또 실제적이고도 실제적인 체현이 있는데, 사람의 언행, 생각이 그와 부합되어 도와 일치한다면 하늘의 뜻을 따른 자로서 자연스럽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흥할 것이다. 그와 반대라면 틀림없이 도에 맞지 않으므로 이는 하늘의 뜻을 거역한 자이니, 도와주는 사람이 적고, 필히 망할 것이다.
 
그런데 인과응보의 법칙은, 옛말에서나 역사상에서만 존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과 사물은 신구(新舊)의 교체(代謝)가 있는 법이라 모두 오고 간다고 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언제나 선악에는 응보가 따른다는 것으로 이것은 시종일관 관통된 천리다. 그럼 오늘의 중국을 보라. 스촨에서 지진이 빈번한 것은 싼샤 유역에 함부로 저수지를 건설한 인과응보이고, 티베트초원이 황폐화된 것은 동충하초를 파내어 생물의 연계를 파괴해서 얻은 인과응보이며, 하천이 오염되고 스모그가 하늘을 가린 것은 자연계를 오염시키는 것들을 마구잡이로 건설하고 운영한 인과응보이고, 사회에 폭력이 횡행하고 색정이 범람하는 것은 도덕이 패괴되고 사회기풍이 나날이 나빠진 인과응보 의 결과다. 이 일체를 어찌, 중공이 무신론을 선전하고 하늘땅과 싸운 죄악의 인과응보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선악에는 언제나 응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단지 일찍 오는가 늦게 오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오늘의 중공(중국공산당)은 바른 믿음에 대해 전례가 없는 잔혹한 박해를 가한 결과로 전면적인 해체의 현세현보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중공은 박해 중에서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파룬궁(法輪功) 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마귀의 죄악을 저질렀다. 생체장기적출 만행을 첫 번째로 시작한 보시라이는 이미 중공이 무너지는 첫 장의 도미노골패로 되었다. 또 (파룬궁) 박해정책을 직접 집행한 정법계통의 두목이었던 저우융캉은 중공의 최고위급인 상위급(常委級)으로는 처음으로 낙마한 호랑이 꼴이 됐으며,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는 불법적인 조직의 총책인 ‘610사무실‘ 두목 리둥성도 권력투쟁에서 낙마했고, 중공의 생체장기적출 죄악을 저지른 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지난날의 군부 거두인 쉬차이허우는 방광암말기에 이른 상황에서 친청감옥에 투옥됐다. 쉬차이허우가 중공의 벼슬을 시작한 곳은 선양군구로, 생체장기적출 죄악에 제일먼저 참가한 군구다. 각급의 정법위원회에서 작년 이후 ‘쌍규(雙規 -기율검사위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비리 고위관리에 대해 두 가지 규정 즉, 규정한 시간, 규정한 지점에 출두하라는 명령)로 체포된 인원수만 450여명이고, 각지 ’610사무실‘ 요원들이 폭사당하거나 교통사고, 중독사고로 죽는 등 놀라운 소식이 연달아 전해졌다. 그러므로 ’610사무실‘, 이 사무실 말만 들어도 누구나 안색이 변하는 ’사망직책‘으로 변해버렸다.
 
화(禍)와 복은 정해진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불러 온 것이다. 도덕의 척도는 매 사람을 가늠한다. 알면서도 고의로 법을 위반한 덕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현세현보하거나 혹은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진실과 거짓은 다만 판별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렸으므로, 허허실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를 볼 뿐이다. 그러나 높은 하늘이 위에 있고, 바르고 순순함이 창창하여 시시각각 우리를 깨우쳐 주는 것 같으니 - 마음에 새긴 일념을 천지가 다 알거늘, 선악에 응보가 없다면 건곤에는 틀림없이 사적인 것이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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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좋은 글 2014.03.08 11:43

세월은 참 안타까운 것이건만

나 몰라라는 듯 언제나 흘려보낸다.

아무리 붙잡아도 흘러가버릴 세월인데

저마다 하는 일이 다 어렵기 때문에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이 일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시간을 붙들어 동여 맬 수도 없고

한 것도 없이 기다려야 좋은 날이 올수도 없을 것을

늘 감홍시 입에 떨어지길 기다리는 게 사람같다

남을 배려하며 생활하고

아는 것이 바로 힘이라

지식과 교양을 익혀서 실수를 줄이고

순간의 시간은 아까운 건데

언제나 시간이 아깝다고 금방 생각해놓고도

또 잡념으로 잊어버린다

사람은 언제나 이루지 못할 꿈을 꾸고는

그게 허황한 줄 알면서도

그 꿈이 이루어지길 기다린다

시간은 나이를 절로 먹게하고

주름이 절로 늘게하고

머리칼이 절로 희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나이 먹은걸 주변에 알린다.

모든 기능이 오래 쓰다보니

신경이 무디어지고 기억도 희미해진다

누구나 다 어제를 살아 오늘에 이르렀건만

눈이 주먹만큼 커진 재미있던 적은 잘 없다.

젊음은 길지를 않다

하루가고 이틀가고 세월이 훌쩍 흐르면

열 살이 스물되고 스물이 잠시 서른되지만

잊지못할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늘 이런 날들이었는데

서른을 두 번 살아 60이 되어도

아름다운 추억은 잘 모르게 된다

지난 날들은 아직 잊지도 못했는데 또 하루가 가고

내일이 오늘되고 오늘이 또 어제로 되어 반복되지만

모든 것은 다 마음에 따라 좋기도 나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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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잡는 글

일하기 싫어하며 편히 살려고만 하면, 점점 선한 마음이 없어져

나중에는 배터리 빠진 시계같은 사람이 됩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후진하기 쉽지않고,

오토바이를 소리나지 않게 타기 쉽지않습니다.

 

받는 기쁨은 짧고 주는 기쁨은 깁니다.

줄수있는 마음은 늘 기쁘게 사는 사람입니다.

 

재물의 갈망은 마음에 그림자를 만들고

애정에 몰두하면 마음에 상처를 안을 수 있습니다.

 

먹이가 있는 곳엔 반드시 적이 있으며

영광이 있는 곳엔 한편에 깊은 상처가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클수록 아내의 바램은 작아지고

아내의 사랑이 클수록 남편의 고민은 작아집니다.

 

남자는 여자의 생일을 기억하되 나이는 잊어버리고

여자는 남자의 좋은점만 기억하되 실수는 눈감아주며 살아야 합니다.

 

최고는 하나라야 하는데 최고가 너무 많은 것은 허영 때문이고

최고가에 매입하고 최저가로 판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길거리에서 소음을 내며 미친 듯이 질주하는 차는

그 안에서 운전하는 사람이 불만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잘못도 늘 하게 되면 잘못인지 모르게 되며

남의 것이 더 좋아보이는 것은 맘속에 버려야 할 욕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늘 하던 일을 그만두기 쉽지않고, 잘 가는 시계가 멈추기 어려우며

새 것이 헌 것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행복한 모습은 불행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죽음의 모습은 병든 사람의 눈에만 보입니다.

 

웃음소리는 행복을 불러오고

불평많은 사람에겐 불행이 온다고 합니다.

 

동물은 늘 놀아도 배고프면 바로 자연에서 먹이를 찾으면 되지만

사람만은 매일같이 돈벌지 않으면 먹는것조차도 어렵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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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지폐 좋은 글 2012.07.17 17:21


장난감 지폐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가능하면 자기 아들을 가장 완전하게 키우고 싶었다.

평소 시간이 있으면 사람이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종교적으로 많은 말을 해주었다.

어느날 두 부자(父子)는 함께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원짜리 지폐한장과 장난감 지폐를 같이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교회에 가면 헌금을 내야한다. 네가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헌금함에 넣거라.“

어린 아들은 진짜 지폐와 장난감 지폐 둘 가운데 아무 것이나

골라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아들이 진짜 지폐를 넣으리라고 마음속으로

믿었고 또 바랬다. 왜냐하면 자신이 평소에 심혈을 기울여

완벽하게 교육시켰기 때문에 이젠 아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궁금증이 난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다.

“헌금함에 무었을 넣었느냐?”

“예~ 아버지!, 장난감 지폐를 넣었어요.”

아들은 장난감 지폐를 헌금함에 넣고 진짜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저히 아버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오! 왜, 왜 그랬느냐? 아빠는 늘 네가 옳은 일만 하라고

시켰었는데?“

“아빠, 왜 그렇게 물으세요? 이유를 말씀드리죠. 아까

교회에서 목사가 하느님은 기쁜마음으로 헌금하는 사람을

늘 사랑한다고 설교하셨잖아요. 난 장난감 지폐를 헌금하는 것이

더 기쁘거든요. 진짜 돈보다도 장난감 내는 게 더 좋아요. 그렇지만

진짜 돈을 넣으면 기쁘지 않거든요!“

기뻐하는 마음으로 선물하는 사람을 신은 사랑하신다.

무엇을 행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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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有名한 飮食店 이야기입니다.


이 가게의 주 메뉴는 일본식 덮밥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덮밥보다 主人이 직접 만든 양파 절임을 더 좋아했답니다. 어떤 손님들은 양파 절임을 먹기 위해 飮食店을 찾아 올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이 시골에 계신 父母님께 양파 절임 맛을 보여드리고 싶어서 主人에게 付託해왔습니다.
“양파 절임을 좀 살 수 있을까요? 원하시는 만큼 돈을 드릴께요.”


“아닙니다. 돈은 필요 없어요. 양파 절임은 파는 것이 아니니 그냥 드리겠습니다.”


主人은 돈을 받지 않고 精誠껏 양파 절임을 包裝해 건넸습니다.


이 消息이 전해지자 이 후로 양파 절임을 付託하는 손님들이 많아졌습니다. 나중에는 양파 절임을 택배로 보내주기도 했답니다. 主人은 양파 절임 값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主人은 오히려 돈을 보내오는 손님이 있으면 다시 돈을 돌려보냈습니다.


主人의 慾心 없는 마음에 감탄한 손님들은 더 자주 飮食店을 찾았습니다. 이제 有名 飮食店이 된 덮밥 집은 후에 飮食을 冷凍시켜 택배로 보내주는 事業을 始作했습니다. 主人은 자연스럽게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다시 그 돈을 좋은 일에 썼다고 합니다.


孔子는 ‘君子는 德을 생각하고 小人은 땅을 생각하며, 君子는 형벌을 마땅한가를 생각하고, 小人은 利益이 충분한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君子는 自己 人格과 수양에 힘쓰고 小人은 편하게 살 수 있는 곳만을 찾으며, 君子는 혹시라도 法에 저촉되지 않을까 操心을 하는데, 小人은 누가 내게 특별한 好意를 주지 않나 하고 期待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늘 自身의 利益을 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남을 위해 德을 베푸는 것은 損害 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진정한 부자는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작은 利益을 쫓지 않고 넓은 德으로 많은 사람을 품어주면 幸福은 저절로 따라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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