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만난 북녘 동포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쇠고깃국에 흰 쌀밥 한번 실컷 먹어 보는 것이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절박하면서도 가슴 아픈 소원인가. 그들이라고 왜 고대광실에 천석꾼으로 살고 싶은 꿈이 없겠는가. 그러나 그런 꿈을 갖기에는 그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 어렵고 처참해서 그런 사치스런 꿈이나 희망은 다 저버린 것이 아닐까 .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도 불과 사십 여년 전만 해도 쌀밥을 온 가족이 배불리 먹어 보는 게 소원인 때도 있었다. 인구는 많고 식량은 절대량이 부족해 심지어 밤나무 같은 유실수 재배를 권장해 그 열매로 주린 배를 채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한 지난 날의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70년대초 아카시아꽃이 산과 들에 흐드러지게 핀 어느해 5월 하순이었다. 경기도 성남에 사는 한 가정주부로부터 청와대 육영수 여사님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그 편지의 사연은 이러했다. 그녀의 남편이 서울역 앞에서 행상을 해서 다섯 식구의 입에 겨우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얼마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굶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어린 자식들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견딜수 있지만 80세가 넘은 시어머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굶고 있으니 도와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었다.
 
그때만 해도 육영수 여사는 이런 편지를 하루에도 수십 통씩 받았었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 주셨다.
 
그 편지를 받은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영부인의 지시로 쌀 한가마와 얼마간의 돈을 들고 그 집을 찾아 나섰다. 성남은 지금은 모든 게 몰라보게 달라진 신도시가 되었지만 그때는 철거민들이 정착해가는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도로는 물론 번짓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집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그집을 찾아갔을 때는 마침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상을 받아 놓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청와대에서 찾아왔노라고 말하고 어두컴컴한 그 집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의 쓰러지다 만 조그만 초막 같은집에는 전기도 없이 희미한 촛불 하나가 조그만 방을 겨우 밝히고 있었다.
 
방 아랫목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누가 찾아 왔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밥만 먹고 있었다. 밥상 위에는 그릇에 수북한 흰 쌀밥 한 그릇과 멀건 국 한 그릇, 그리고 간장 한 종지가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는 갑자기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쌀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다고 하더니 돈이 생겼으면 감자나 잡곡을 사서 식량을 늘려 먹을 생각은 않고 흰 쌀밥이 웬 말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한참 앉아 있으려니까 희미한 방안의 물체가 하나 둘 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그때 내가 받았던 충격과 아팠던 마음을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노파가 열심히 먹고 있던 흰 쌀밥은 쌀밥이 아니라 산자락에서 따 온 흰 아카시아꽃이었다. 그 순간 가슴이 꽉 막혀오고 표현할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이 목이 아프게 밀고 올라왔다. 나에게도 저런 할머니가 계셨는데, 아무 말도 더 못하고 나는 그 집을 나왔다.
 
그 며칠 후 나는 박 대통령 내외분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이야기를 말씀 드렸다. 영부인의 눈가에 눈물이 보였다. 박 대통령께서도 처연한 표정에 아무런 말씀이 없이 천정을 쳐다보시면서 애꿎은 담배만 피우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당시에는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에서 가난만은 반드시..... 이런 매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을 친다.
 
60년대초 서독에 가 있던 우리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을 현지에서 만난 박 대통령…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과 가난한 나라에서 돈벌기 위해 이국만리 타국에 와 있는 광부와 간호원…

서로가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붙들고 울기만 했던 그때, 박 대통령은 귀국하면서 야멸차리 만큼 무서운 결심을 하시지 않았을까.
‘가난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이런 결심을.....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영국 왕실로부터 받은 훈장증서에는 이런 뜻의 글귀가 적혀 있다고 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물질로 도와라. 물질이 없으면 몸으로 도와라.물질과 몸으로도 도울 수 없으면 눈물로 돕고 위로하라.”
 
광부들과 간호원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가난뱅이 나라 대통령이 그들을 눈물아닌 그 무엇으로 위로하고 격려할수 있었을까.
 
나는 매년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되면 어린 시절 동무들과 함께 뛰어 놀다 배가 고프면 간식 삼아서 아카시아꽃을 따먹던 쓸쓸한 추억과 함께 70년대초 성남에서 만났던 그 할머니의 모습이 꽃이 질때까지 내 눈앞에 겹쳐서 아른거리곤 한다.

김 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


20여 년간 알래스카의 自然과 사람들을 담아냈던 世界的인 野生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의 逸話입니다. 호시노에게는 도쿄에서 出版社 편집자로 일하는 親舊가 한 명 있었습니다.

大都市의 바쁜 日常 속에 빠져있던 親舊는 時間을 내어 호시노가 있는 알래스카에 찾아왔습니다. 호시노와 親舊는 작은 배를 타고 남동 알래스카의 여름 바다를 鑑賞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우연히 흑 고래떼와 마주치게 됐답니다. 그들은 고래를 천천히 따라갔습니다. 고래의 숨소리가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답니다. 感激에 젖은 親舊는 이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고래 한 마리가 海面에서 높이 떠올라 춤을 추듯 空中을 가른 뒤 천천히 바다로 떨어지며 엄청난 물보라를 만들어냈습니다. 다시 고래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호시노의 親舊는 고래의 갑작스러운 跳躍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巨大한 고래를 包容하는 바다의 크기, 自然의 크기, 宇宙의 크기에 놀라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親舊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世界의 全部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이 큰 宇宙 속에서 그저 작디작은 하나의 生命일 뿐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습니다.

얼마만 한 時間이 지났을까요? 하늘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별이 이내 반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호시노는 ‘친구가 처음으로 自身이 살아가는 世界 외에 또 다른 世界가 存在한다는 것을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예전에는 무수한 별이 밤하늘을 수놓았고 별똥별도 쉽게 볼 수 있었답니다. 사람들은 더욱 크고 넓은 自然 속에서 自身의 存在를 感覺的으로 느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늘을 보아도 반짝이는 별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巨大한 自然과 宇宙에 대해 생각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世界의 全部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欲心을 부리게 됩니다.

우리 自身은 이 世界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自身보다는 내 周邊에 많은 關心을 쏟아야 하는 理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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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지 않는 아이

작가: 엘리자베드 브로조브스카


한수는 아주 착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꼭 한가지 나쁜 점이 있었어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달걀, 우유, , 심지어는 맛있는 사과를 주어도 난 먹기 싫단 말이야.”했습니다. 밥은 아예 보기도 싫어했지요.

한수야 제발 먹어서 날 기쁘게 해 주렴.”

엄마 아빠가 아무리 타이르고 걱정을 하셔도 한수는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한수가 귀여워하는 개 룸피나 고양이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엄마는 화가 났습니다.

한수야, 너 안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니? 무럭무럭 자라는 대신 점점 조그맣게 줄어든단다.

한수는 엄마 말을 곧이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않던 일이 정말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다음날인 일요일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자리에서 막 일어나 옷을 입자마자 한수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침내 한수는 달걀만큼 조그맣게 도어 버렸습니다.

, 재미있는데......” 한수는 신이 났어요.

엄마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작은아이가 됐어요 !” 하지만 조그마한 한수의 목소리는 삐약거리는 병아리 소리만큼 작아서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고양이 뿐이었어요.

이것 봐라, 새앙쥐가 있네 ! 잡아서 가지고 놀아야지.”

고양이는 한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수는 깜짝 놀라서 의자 밑으로 숨어서 말했습니다.

야옹아, 난 쥐가 아니고 한수야. 조심해. 네 발톱에 할퀴겠다.”


한수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문을 열고 아줌마가 청소하러 들어 왔어요.

야옹아, 밖으로 나가라 ! 방 좀 쓸어야겠다.”

어휴, 살았다 ! 나 좀 꺼내서 엄마한테 데려다 주세요.”

그러나 아줌마는 한수가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아줌마는 쓰레받기에 한수를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수가 너무 조그맣게 되어서 보지 못한 거예요.

한수는 빈 깡통과 헌 종이 틈에 섞여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갈까.” 한수는 쓰레기통 뚜껑을 들어 올려 봤습니다.


마침 그 곳을 지나던 룸피가 쓰레기통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뭘까 ?” 룸피는 호기심이 생겨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먼지투성이의 한수를 본 룸피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수야, 너 거기서 뭐하니 ?”

나중에 얘기할게. 우선 나를 엄마한테 데려다 줘.”

한수는 룸피의 등에 올라타서 목걸이를 꽉 잡았습니다.

룸피야 빨리 달려 !” 룸피는 빨리빨리 달렸습니다.


그러나 너무 빨리 달리느라고 그만 한수를 떨어뜨린 줄도 몰랐습니다.

어쩜 좋아.” 한수는 울고만 싶었습니다.


나무 오리를 가지고 놀던 여자아이가 한수를 들어 올렸습니다.

어머나 ! 예쁜 사내아이 인형이구나.”

한수는 화가 나서 난 인형이 아냐 !”라고 외쳤지만 여자아이는 이 말을 듣지 못하고 한수를 나무오리에 태워 호수에 띄웠습니다.

제발 세워 줘 !”

그러나 한수의 화난 외침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오리 등에 탄 한수는 물결을 따라 한 시간쯤 둥둥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갈대숲에 닿아서 땅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머나, 이번엔 아주 커다란 암소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암소는 처음에는 한수를 보고 놀란 듯 했지만 곧 다정하게 한수를 들여다보고 음매하고 소리쳤습니다.

조그만 한수에게 그 울음 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겠어요.

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멀리 달아났습니다.


달아나던 한수는 그만 무엇엔가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양탄자 같았어요.

여기서 좀 자야겠다.” 하지만 한수는 금방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양탄자처럼 보인 것은 연이었거든요

두 남자 아이들이 올린 연은 한수를 태우고 하늘 높이 떠올랐어요.

한수는 무서워 벌벌 떨면서 연을 꼭 잡고 땅으로 내려가기를 빌었습니다.

연은 드디어 어떤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한수는 얼른 새 둥우리에 내렸어요.

넌 누구냐 ?” 깜짝 놀란 어미 새가 말했어요.

난 한수라고 해요. 길을 잃었어요. 그런데 배가 몹시 고파요.”

한수는 울먹거렸습니다.

머리를 들어 봐, 내가 먹여 줄게.”

새는 한수 입에 지렁이를 넣어 주려고 했습니다.

- -”

그렇지만 한수는 지렁이를 내 뱉으면서도 새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수야, 너의 집에 데려다 주마. 내 등에 올라타서 너의 집이 어딘지 가르쳐 주렴.”

윙윙 날아가는 새 등위에서 한수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빨간 지붕이 우리 집이에요.”

드디어 한수는 집에 오게 되었어요.

한수는 새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마당에 내렸습니다.

룸피야, 여기 있었구나 !”

한수야, 너 여지껏 어디 있었니 ?”

룸피가 반가워서 멍멍하고 짖었습니다.

뭐든지 먹으면 난 다시 커질 거야, 그러니 우선 먹을 것부터 주지 않을래 ?”

나한테는 개밥 박에는 없는데, 아마 네가 먹기 싫어하는 것들일 거야. 고기랑 밥을 섞은 것이거든.”

괜찮아.”


한수는 룸피의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알 하나 안 남기고 싹싹 다 먹었다니까요.

개밥을 다 먹고 난 한수는 전처럼 커졌습니다.

룸피야, 넌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 뼈를 네게 줄게.”

그 날 이후부터 한수는 엄마가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맛있게 먹곤했습니다.

그래서 한수는 아주 무럭무럭 자라고 힘도 아주 세어져서, 글쎄 이 그림에서 보이는 만큼 힘이 세졌지 뭐예요.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 입으신 옷이 유자(儒者)의 복장입니까?”

공자께서 답하기를

내가 어린 시절, 노나라에서 살 때에는 노나라 사람들의 관()을 쓰고 대수포(大袖袍)를 입었고, 어른이 되어서 송()나라에 살 때에는 흑포예모(黑布禮帽)를 썼습니다. 내가 듣기로 덕이 있는 군자가 많이 배우고 학식이 풍부해도, 그 복장은 그가 사는 곳의 풍속에 따르고 의관을 단정히 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여태까지 선비에게 또 무슨 특별한 의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예기·유행(禮記·儒行))

著者: 李毓秀 번역: 素 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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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때 항주(恒州) 녹천사(鹿泉寺)의 승려 정만은 계율을 잘 지키고 품행이 고결했다. 그러나 탐욕 많고 게으른 많은 다른 승려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이렇게 깨끗한 승려가 나오면 우리는 무슨 명예가 있으며 또 무슨 공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설마 온 절의 승려들이 모두 그를 따라 고행을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그들은 원한이 서려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이 화상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래야만 자기들이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 가지 악 중에 음행이 으뜸이다.” 색계(色戒)를 범하는 것은 화상의 가장 큰 오점이었다. 체면을 깎아내리는 데 전문인 악랄한 중들은 이 점을 알고 문제를 크게 만들기로 했다. 그들은 우선 물증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먼저 한 폭의 그림을 몰래 정만스님 방의 상자 속에 숨겨놓고 고의로 단단히 잠갔다. 그림에는 어느 미녀가 높은 누에 올라 다정하게 살피고 있고 정만은 아래에서 색정적으로 활을 당기는 모습으로 분명히 정만이 연애편지를 양가의 부녀에게 보내 유혹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증거를 또 만들었다.

정만의 변변치 못한 제자 한 명을 교사해 조정에 보내 정만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그는 자칭 정만을 가장 잘 안다고 하면서 정만이 고승이란 허울 아래 부녀자와 간음을 했다는 내막을 폭로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정만에게 치명적인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측천무후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즉시 대노하여 정만을 체포하여 하옥하라고 했다. 그리고 어사 배회고(裴懷古)에게 이 사건을 책임지고 정만의 흔적을 조사하여 세상을 속인 음란한 중을 주살하라고 했다.

배회고는 조급하게 일을 끝내지 않았다. 사안의 근본을 탐구해보고 나서 마침내 정만이 모함에 빠진 것을 알았다. 결국 과감하게 그를 석방하고 반대로 정만을 모함한 중들을 징벌했다. 무후는 배회고가 상주한 판결을 듣고 놀라고 또 분노했다. 노한 것은 자신이 직접 감독한 사건을 배회고가 뒤집었기 때문이었다. 무후는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엄한 목소리로 배회고가 법 집행을 불공정하게 했고 범법자를 관대하게 놓아주었다고 하여 위사(衛士)에게 그를 잡아 하옥시키라고 했다.

그러나 배회고는 판결 결과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소덕(李昭德)이 옆에서 중재하며 말했다. “소신이 보기에 배회고는 사건을 심사하는데 일을 경솔하게 했으니 폐하께서는 그에게 다시 심사하게 하십시오.”

그러자 배회고는 격분하여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반포한 법률은 친소에 따른 구별이 없습니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같은 표준을 지켜야 합니다. 폐하께선 어찌하여 소신더러 무고한 사람을 주살해 폐하의 성지를 위배하게 하십니까? 가령 정만이 정말 위법행위가 있었다면 제가 어찌 그렇게 관대하게 놓아주었겠습니까? 소신은 법률에 근거해 공평하게 집행했으며 좋은 사람을 억울하지 않게 하고 형벌을 남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설사 죽임을 당한다 해도 저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후는 그의 충정을 알고는 배회고를 석방했다.

배회고는 나중에 염지미(閻知微)의 부사(副使 사절단 부대표)가 되어 돌궐에 가서 화친을 맺었다. 돌궐은 사신을 겁주며 염지미에게 돌궐의 가한(可汗)을 섬기라고 협박했다. 또 배회고더러 돌궐의 직책을 맡으라고 핍박했다. 배회고는 투항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절조를 훼손하며 살기보다는 충성을 다해 죽겠소, 지금 내 머리를 잘라도 피하지 않을 것이오.”

생사의 관두에서 돌궐은 그를 죽이는 대신 군사감옥에 가뒀다. 돌궐이 남하해 월주, 정주를 침범했을 때 배회고는 기회를 보아 도망쳤다. 하지만 배회고는 원래 쇠약한 체질이라 오랫동안 말을 타고 도망치는 고생을 감당하지 못했다. 뒤따라 온 병사가 거의 도착할 때 쯤 그는 더 이상 말을 탈 수 없었다.

배회고는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했다. 자신이 죽어도 좋으나 당나라 땅에서 죽고 싶다는 염원을 가졌다. 배회고의 정신력이 다 고갈되어 쉴 때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 정만 스님과 유사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 길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이 길로 가시면 됩니다.” 배회고가 깨어난 후 꿈에서 가르쳐 준대로 갔더니 과연 추격병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산속에서 전전하다가 마침내 병주(並州) 경계에 도착했다. 당시 병주장사(並州長史) 지키던 무중규(武重規)는 병사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방치하여 아주 흉악했는데 수하의 병사들을 마음대로 살인하여 전공으로 삼으려고 했다. 순찰병은 배회고가 온 것을 보고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한 병사가 그를 알아보았다. 이리하여 배회고는 안전하게 당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배회고가 큰 난을 피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모두 배회고가 절조를 지키고 고승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기 때문에 신령의 보우를 받은 것이라 여겼다.

어릴 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옛날에 농사를 짓는 형제가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형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동생을 불러놓고 말했다. “아우야, 나는 곧 죽을 것 같구나. 이 집과 밭은 모두 네게 남겨주마. 앞으로 부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네 혼자 힘으로 살아가거라. 또 혹 있을지 모를 불의의 일을 대비해 네게 이 상자를 하나 주마. 이 속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보물이 들어 있단다. 하지만 네가 더는 어쩔 수 없을 때 외에는 팔거나 열어보지도 말아라, 내 말을 명심해야 한다.”

동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형은 말을 마친 직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형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매일 열심히 일했고 조금도 태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비교적 평탄하게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해 큰 가뭄이 들어 수확할 곡식이 거의 없었다. 작년에 비축해놓았던 식량도 이미 다 먹어버린 상태였다. 동생은 자신도 곧 끝장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그는 문득 형이 임종 직전 자신에게 남겨준 보물상자를 떠올렸다. 이에 이튿날 성안에 들어가 보물을 팔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동생이 성안에 들어가 보석상을 찾아가 주인에게 말했다. “보시기에 이 보배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습니까?” 주인이 상자를 받아 열어본 후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런 후 상자를 동생에게 되돌려주며 말했다. “당신의 이 보물은 내가 살 수 없는 것이니 다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내 보기에 당신이 곤경에 처한 것 같으니 은화 20냥을 빌려드립니다. 나중에 당신에게 돈이 생기면 갚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준 것으로 칩시다. 어떻습니까?”

동생은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러자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다만 한 장의 종이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종이 위에는 양심(良心)’이란 두 글자만 씌어 있었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고 형의 고심한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주인이 빌려준 20냥의 은화를 감사하게 받았다.

농작물이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은 돌아가는 대신 성내에 남아 자그마한 장사를 시작했다. 1년 후 동생의 사업은 갈수록 잘 되어 곧 빌린 20냥을 돌려줄 수 있었다. 동생은 또 보석점 주인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 감사의 뜻을 표시하려 했지만 주인은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다.

이 따뜻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아주 선량하다. 이 이야기가 중국의 어느 시대에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화는 과거 중국인들이 양심을 아주 소중히 여겼으며 양심이 일찍이 중국사회에서 널리 퍼진 보편적 가치관이었음을 알려준다. ‘양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환경 속에서 사람이 양심을 팔 때는 형세가 극히 나빠 아주 위험한 때일 것이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양심에서 우러난 도움을 주었고 도움을 받은 사람 역시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은혜를 잊지 않았다. 총명한 형이 종이를 남겼을 때 당시 사회에는 일종의 신뢰와 긍정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양심이 사람의 생명 중에서 생명과 마찬가지로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의 도덕관과 가치관에도 서서히 변화가 발생했다. 사람의 관념은 사람의 행위를 이끌어내는데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모두 양심은 값을 매길 수 없을정도로 귀하다고 여길 때에만 성립될 수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지금의 중국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단지 우스갯소리로 여겼을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문화에 세뇌당한 지금의 중국인들은 이 이야기의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양심이란 두 글자는 이미 이 사회에서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중국사회를 보면 며칠 전 포산(佛山)에서 웨웨(悅悅)라는 두 살 여아가 차에 치어 사망한 사건의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쓰촨(四川)에서 또 5세 아동이 차에 반복해서 치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린 웨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던 행인들이나 아이를 죽이기 위해 여러 번 차로 친 쓰촨의 운전사에 대해 전 세계가 모두 비난하고 있다.

냉담하고 마비되어 인성이 없다는 비난이 중국인들과 중국이란 나라에 씌워졌다. 일찍이 양심을 소중히 여겼던 중국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중국인들은 대체 어쩌다 지금과 같이 이 모양으로 변했단 말인가? 이 사회는 대체 어찌 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이 사회를 비난할 때면 모두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가 비난해서 좋아졌는가? 우리 중국사람들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중국인은 일찍이 양심을 중시하던 민족이었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던 민족이었으며 도덕이 천하에 가득한 그런 민족이었다. 그러나 양심은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보편적 가치관으로 지녔던 중화민족은 지금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제라도 마땅히 깨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작교선-詩 과거회상 2010. 10. 19. 11:01

<소형디카여행 발길닫는대로>

鹊桥仙작교선 - 秦观 진관

옅은 구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데

별똥별, 이별(離別)의 한(限) 전(傳)하러

아득한 은하수 남몰래 건너네.

가을바람 영롱한 이슬 내릴 때 한 번 만남이

인간 세상에서 무수하게 만남보다 나으리.

부드러운 애정은 물과 같고, 아름다운 기약은 꿈만 같은데

어찌 차마 고개 돌려 오작교 밟고 돌아갈까

서로의 사랑 영원하다면, 아침저녁 아니 만난다 한들 또 어떠리?


직녀(織女)는 실구름 곱게곱게 수놓고

견우(牽牛)는 그리운 마음 전하려

기나긴 은하수 조용히 건너나니

가을밤 한 번 만남이 인간세상의 무수한 만남보다 나아라.

부드러운 情은 물과 같이 흐르고, 만남은 꿈과 같아

오작교(烏鵲橋) 돌아갈 길 차마 못 오르겠네.

서로의 情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어찌 朝夕의 만남을 더 구하랴?

<남녀의 사랑을 견우와 직녀의 전설을 가져와 시로 읊은 것으로 북송때의 시인 진관이

도인(道人) 탁인항과 義를 중시하고 허위를 증오하는 여도적(女盜賊) 옥나찰과의 비련(悲戀)을 그린 작품이다 >


동방무례지국 과거회상 2009. 3. 13. 23:38



중국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약 2300년 전에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먼 옛날부터 동쪽에 동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단군이라는 훌륭한 임금이 태어나니 아홉 개 부족이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일찍이 그 나라에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는 도통한 학자가 있었는데 중국의 황제(黃帝·중국의 시조)가 (그에게서) 글을 배우고 내황문(內皇文)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염제(炎帝) 대신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생활방법을 가르쳤다. 그 나라 사람인 순(舜)이 중국에 와서 요(堯)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다.(중략)


그 나라는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純厚)해서 길을 가던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서로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나의 선부자(先府子·할아버지) 공자께서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시면서 “누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가리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일컬은 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백성에게 생활방법과 윤리·도덕을 가르친 사람이 모두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길을 양보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남녀가 유별한, 이른바 깨친 민족이라는 지적에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 같으면 태초에 우리 민족에게 생활과 윤리·도덕의 지혜를 가르친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지적할 수 있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든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지금 그런 ‘예의를 아는 사람들’의 후손인가 하는 점이다.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겪는 상황에 비추어 보면 공빈의 글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황당한 칭찬이거나 사실을 잘못 알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훌륭했던 우리 조상의 덕목이 역사의 세파에 씻기면서 예의가 부족한 ‘다른 민족’을 만들어낸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예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고사하고 무례와 뻔뻔함과 폭력과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경우를 너무도 자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 보면 길을 ‘양보’하기는커녕 서로 먼저 가려고 어깨가 부딪치고 신발이 밟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심시간 좁은 길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서너 명의 직장여성들 때문에 마주 오는 사람은 옆으로 비켜설 수밖에 없다. 단체로 움직이는 학생들과 마주치면 그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다른 행인들은 기다려야 한다. 그들은 다른 행인에 조그만큼도 미안해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무례인지조차 모르는 것 같다.


건물을 드나들 때 문을 열면서 뒷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드물다. 무심코 앞사람을 쫓아가다가는 닫히는 육중한 문에 코를 다치기 십상이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살짝 끼어들어 먼저 새치기하듯 들어서는 젊은이도 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안에 있는 사람이 내리기도 전에 올라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먼저 타려고 엘리베이터 문을 가로막다시피 서있는 것은 예사다. 전철역에서 문이 열릴 때도 마찬가지다. 내린 다음에 타도 늦지 않는데 먼저 타려고 밀고 들어오는 젊은이들, 아줌마들을 매일 보지 않는가.


식당예절은 이제 누구도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지고 있다. 차례를 기다리고 목소리를 낮추는 사람은 병신 되기 일쑤다. 식탁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양말 벗고 앉는 사람들, 의자에 신발 벗고 올라앉는 사람들, 소리소리 지르며 떠드는 사람들, 옆 테이블 사람의 등을 마구 건드리며 나다니는 사람들 등등 다른 손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음식이 늦거나 잘못 조리돼 항의하면 “바쁜 시간이니 이해해달라”는 주인의 대답에 어이가 없다. 누가 식당주인 이해하려고 음식점에 가나?


자동차 예절은 예절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난장판이다. 끼어들기, 마구 추월하기, 좌회전 차선에서 직진하기, 사소한 접촉사고를 놓고 복잡한 출퇴근거리에서 차 세워놓고 언쟁하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치명적인 중앙선 넘기, 신호 무시하기, 건널목 그냥 지나치기, 음주운전 등 남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불법행위도 이제는 경찰조차 별로 개의치 않는 일상사가 되고 있다. (카메라만 설치해서 벌금 벌면 다인가?)


인도에 세워놓은 차들은 ‘예의’를 모른다. 보행자가 간신히라도 피해 다닐 수 있는 대로변 인도는 좀 나은 형편이다. 좁은 골목길에 세워놓는 차들은 ‘예의’의 범주를 떠나 화재, 119 등 ‘비상시’를 가로막고 있다. 그나마 ‘연락처 쪽지’를 붙인 차들은 가뭄에 콩나기다. 결혼청첩장도 심부름시켜 돌리는 세상이다. 공사중의 경고 표지판 내용도 명령형이다. ‘줄서기’라는 것이 언제 우리에게 있기는 있었나? 미국 여행 때 10여분 줄 서서 겨우 표를 샀는데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 뒤돌아섰더니 줄 서 있던 사람들이 맨 뒤로 다시 가라고 해 머쓱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엇보다 예의없음을 통탄해 마지않을 것은 욕설과 폭력이다. 인터넷과 국회가 그 대표적 집결지(?)다. 인터넷 댓글에 들어가보면 “아 그런 욕도 있었나”하고 배울 정도로 온갖 욕설과 상소리가 넘나든다. 욕 중에도 자기가 안 보인다고 해서 지껄이는 욕이 가장 저질이다. 요즘의 우리 국회는 욕설과 폭력이 합동으로, 입체적으로 난무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반예의지소(反禮義之所)다. 그들이 ‘선량(選良)’이라니, 그래서 그들의 무례는 더욱 돋보인다.


이런 사회적 무례의 범람과 공동체로서의 무질서는 우리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산다 해도 우리의 삶의 질을 저질로 만든다.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며 내가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플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고맙다’ ‘미안하다’ 하는 마음가짐을 늘 지니도록 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핵심은 교육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예의를 가르치고 예의를 그르쳤을 때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도록 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이웃들로부터 냉대 당할 것이며 마침내는 소외 당할 것이다. 정치지도자, 사회 각계의 지도층, 교육자, 시민단체가 모두 나서서 ‘예의 되찾기 운동’을 촉구하고 나설 때다. weekly chosun 2038호에 게재된 조선일보고문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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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기도 보기도 힘든 사진들 입니다.
중공군 종군 사진기자가 찍은 것으로 추측 됩니다.




함께 일하는 옛 전쟁터에서 다시 봄날이 왔다.



짚차를 타고 도주하던 미군 병사들(차 양쪽의 손을 든 사람들)을

  사로잡은 중공군 병사들.




중국 인민지원군의 시각으로 기록한 한국전쟁 사진집이 나왔다.

<영광스런 중국 인민지원군>(중국 해방군화보사, 1959년)의
사진과 사진설명을 따서 펴낸 [그들이 본 한국전쟁](눈빛출판사)이 그것.
원저는 중국 인민군이 북한에서 완전히 철수한 뒤,
그들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홍보를 위한 시각이 다분하지만 압록강 도하,
그들에게 잡힌 미군포로, 인해전술때 불어제낀 날라리,
폭격을 피하기 위한 물밑다리 등 우리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전쟁의 나머지 반쪽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 끝 무렵 후방에서 북한의 전후 복구사업에
뛰어들어 활동한 사실은 이채롭다.
전투가 없는 날 중공군 병사들이 민가 아낙네의 
봄 밭갈이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북한 위문단이 지원군 시공부대에 와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전쟁이 끝난 뒤 재건사업에 투입된 중국군 병사들이 
북한 주민들과 함께 포탄 구덩이들을 메우고 있다.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장면.



북한 주민들이 포화를 무릅쓰고

지원군을 위해 밥과 물을 나르고 있다.



1951년초 눈 덮힌 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진군 나팔소리에 맞춰 돌진하는 중국군 병사들.





김일성이 직접 중공군 1차 귀국 부대를 송별하고 있다.





한 노인이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갓을

지원군에게 작별 선물로 주고 있다.





1951년초 서울에 입성한 중공군과 북한군 병사들이 
중앙청 앞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열차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중공군 귀국장병들을 환송하는 

북한 주민들.



북한의 한 노인이 지원군에게 길 안내를 하고 있다.





군대와 함께 출정한 중국 민간인 수송대의 우마차 행렬이 

눈밭 속에서 전쟁물자를 실어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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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이 그린 옛 우리나라 풍물, 인물





고종황제 초상. 이 그림은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그린 그림이다.
보스가 한국을 방문한 기간은 짧았으나,
당시의 정세를 잘 통찰하였고,
그림 속의 고종 황제의 불행한 일생과 한국의 불운,
일본의 횡포 및 한국인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 속에 기록하고 있다.
보스의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본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대단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한국미술의 모든 건축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 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 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황제가 보신 후
저는 황제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픔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


문신 민상호. 휴버트 보스의 작품으로 1898년 작이다. 민상호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민치덕의 아들이다.
보스가 민상호를 특별히 그리게 된 동기는 민상호가 한국인의
가장 순수한 형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의 매력과 높은 지식 수준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초록의 선비복을 입은 근엄하고 세련된 민상호의 모습을 보스는
사실적인 필치로 잘 묘사하고 있다.


서울 풍경. 휴버트 보스의 1898년 작품.
이 작품은 구한말 지금의 정동에 있는 미공사관 쪽 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것으로 멀리 광화문, 경회루, 북한산 등이 보인다.
때는 초봄으로 그림 왼편에 보이는 기와집 마당에는 복사꽃이 한창 피어있다.
보스는 1911년 친구에게 보낸 자서전적 서한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은 가장 흥미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 꿈같은 호숫가에 정말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그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인종 중의 하나로 늘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조용히 걸어 다니지만......



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인들.
지볼트가 그린 그림이다.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의사로 1823년부터 1829년까지
6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연구에 심취했다.
이 과정에서 1823년 3월 조난으로 나가시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였다.
이 삽화는 수용소 내에 모여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검은 갓과 겨울용 난모를 쓴 조선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바둑 두는 조선인들. 윗 그림과 같이 지볼트의 그림이다.
상투 머리에 흰색 한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특징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은 일본 것이다.



한국인을 총살하는 일본군.
러일전쟁 중 러시아 측에 정보를 제공하였다하여 일본군이
한국인을 체포하여 총살형을 집행하고 잇다.
나무에 묶인 한국인을 향해 여섯명의 군인이 총구를 겨누었고
장교가 지휘하고 있다.
뒤 편에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한국인들이 서 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일본인 종군 화가가 스케치한
것을 보고 스튜어트(Allan Stewart)가 그렸다.


국치일 풍경.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군인이 총검을 꽂은
채 궁성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에는 한국의 여인들, 긴 담뱃대와 갓 쓴 남자들, 노동자 등
몽타주 수법으로 그렸다.
우드빌(Canton Woodville) 그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17일자에 실렸다.


자동차를 보고 놀라는 한국인들.
영국 화보지 [그래픽]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이 그림의 제목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인데 '
코리아의 수도에 처음 출현한 자동차의 시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알프레드 맨험이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크롬비에가 익살스럽게 그린 것이다.
알프레드 맨험이 잡지에 기고한 사진 설명을 들어보자.

" 내 사진은 서울 도심에 처음 등장한 자동차를 찍은 것이다.
이 그림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낸 최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자동차가,
서구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세계의
한 구석에 위치한 조선에 어떤 식으로 침투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 줄 것이다.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 들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황제.
이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드 라네지에르가 1902년 그린 것으로
1903년 발간한 [극동의 이미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종의 인상에 대해 "우아하고 선량하며 성격도 쾌활하며
영리하다"고 적고 있다.

소를 약탈하는 청나라 군인들,
이 그림은 영국 [그래픽]지 1895년 3월 9일자에 실린 것으로
잡지의 종군 기자이자 화가였던
후리프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서 목격한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함께 기사를 통해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인들이
조선 백성에게 저지른 각종 만행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힘 없고 불운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을 마치 정복국의 주민을 대하듯 위협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초기에는 무지비한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당시 청군의 병참부는 조직 등 모든 것이 매우 낙후되어 병사들
특히 로 하여금 조선 주민들로부터 식량 등 필요한 물자를
자체 조달토록 하였다.
이를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소유주들은 즉시 총살하는 등 무지
막지하게 다루었다.
삽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약탈에 반항하는 소 주인을 무참히 총으로
쏘는 장면은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일깨워준다......
당시 청군들은 그들의 일상 양식인 쌀, 배추 등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요리하는데 매우 숙달되어 있었다....
청군들은 오합지졸이었고 기강도 해이했으며 전쟁에 대한 관심도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했으나 그들이 전투에서 보여준
전투력을 보잘 것 없었다. "


일본군과 한국인들.
이 화보는 프랑스의 르 몽드 일뤼스트레(1894)에 실린 것으로 평양
전투 후 의주로를 따라 패주하는 청군을 뒤쫓아 북상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주의를 끄는 것은 노변에 앉거나 서서 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처량한 모습이다.
상체를 벗은 채 발을 뻗고 있는 소년,
또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아기의 모습이
일본군의 구둣발과 대조되어 가슴에 와 닿는다.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루스벨트양.
이 그림은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앙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린 것이다.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대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는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 각국을 돌아 다녔다.
그러나 대통령 영애는 그 어느 곳에서 보다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관리들은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무시하고 그녀가 고종을 알현할 수
있게 했으며 황태자와 대신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약혼자 및 경호원을 대동하고 왔는데 당시의 고위 관리들은
이 미국인 말괄량이 아가씨를 상대로 한미
공수동맹(共守同盟)을 맺으려 했다.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서양 기자들.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 8.27일자에 실린 삽화.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온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특파원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있다.
단상 왼쪽이 고종이고 오른쪽은 황태자,
단 아래서 특파원을 대표하여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빌리어스 기자가 명함을 건네주고 있다.
명함을 받는 군복 입은 사람은 시종 무관장인 듯하다.


조랑말을 타고 팔도 여행을 하는 서양인들 (1894년 영국 신문)



궁중내시.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펴낸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궁중 내시를 그린 그림이다.


민씨가 규수.
글: 유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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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전 마을풍경 과거회상 2008. 2. 15. 10:19
그 옛날 남대문 동대문 주변의 모습

조 선말기 또는 일제시대 때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서울 남대문(숭례문) 일원의 모습입니다.
서울을 감싸안은 북한산과 초가 - 기와집 그리고 성벽 또 아이들의 모습이
더 없이 평화로워 보입니다.


첫 번째 사 진을 찍은 자리에서 바짝 줌인해 찍은 듯한 사진입니다.
노인들이 남대문에 올라가 담소 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고 길가는 사람도 보입니다.


남대문 안쪽 의 모습입니다.
장이라도 섰는지 많은 사람들이 배추 같은 채소 지게를 내려 놓고 있 습니다.


이번에는 동대문입니다. 역시 아이들이 성벽위에 올라와 있군요.
전봇대와 전기줄도 보입니 다. 아무래도 일제시대 사진 같습니다.


동대문 성벽에 서 성문 밖을 찍은 듯한 풍경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신기한지 아이들이 카메라를 바라보 며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원본 : 옛날 남대문 동대문 주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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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뱀에 물려서 세상 떠난 인천 선원  (2) 2008.02.02

호랑이는 죽어서도 호랑이


글: 산사람(펀글)

한반도에 휘몰아 친 동족상쟁의 피바람이 남긴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던

1959년 4월의 어느 화창한 아침.


한만 국경 넘어 중국 땅의 백두산 북쪽 한 자락에서 북한군 제대병이었던

최 석도 포수가 그의 동료와 부지런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응참이라는 지역으로 사냥을 나선 길이었다.


그 전해에 북한 평양을 떠나 고향인 중국의 내두산 촌으로 돌아온 최 석도에게
삶의 한 방법으로 선택한 사냥꾼이라는 직업은 아직은 다소 낯선 직업이었다.

지금까지의 사냥 길에는 옆 동네인 수전에 사는 그의 사냥 스승인 김 포수가 항상 동행해
왔었으나 그 날 마침 그에게 볼일이 생겨 며칠 뒤에나 합류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최 포수는
할 수없이 황아바이라는 동네 노인만 데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황 아바이는 포수가 아니라 사냥에 필요한 도구나 사냥한 엽물(獵物)을 나르는 짐꾼으로서
따라온 것이었다.


호랑이 사냥할때 최포수 살던집 - 지금은 헛간


응참은 남쪽만 터진 넓은 분지였다.

전 지역에 햇빛이 잘 들어 분지 곳곳에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는

비옥한 땅이었다.


그 뿐 아니라 주변 숲에는 짐승들이 득시글거리는 훌륭한

엽장(獵場)이기도 했다.

이곳 엽장에 약간 짠맛이 나는 물이 담긴 호수가 있었다.

매년 이 맘 때쯤이면 소금기를 섭취하려는 사슴들이 몰려들었었다.

최 포수네 는 지금 그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름길인 능선을 타고 한참을 가서 목적지인 호수가 거의 보일 따름이었다.

최 포수는 문득 길 앞산에서 수 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숲 위를 소란스럽게 떠도는 것을
발견했다.


깊은 산속에서 까마귀 떼가 소란을 떠는 것은 심상치가 않은 일이었다.

최 포수는 이마에 손을 대고 까마귀 떼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 ?!”

최 포수는 까마귀 떼가 떠도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바짝 긴장했다.


까마귀들이 떼를 지어 숲 위를 나는 것은 그 곳에 동물의 사체(死體)같은

먹이가 있다는 것이고 소란을 떠는 것은 먹이를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면 까마귀들은 나무위에서 땅으로, 또는 땅에서 나무위로 상하수직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들 까마귀들은 이 나무위에서 저 나무위로 좌우 수평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나무 아래 땅에 있는 먹음직한 먹이를 맹수 같은 방해자가 가로채서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봐야했다.


최 포수의 육감이 예민하게 움직였다.

“ 뭐가 있군!”


그러나 잠시 궁리해본 최 포수는 일단 그 곳을 피하기로 하였다.

이번 사냥 길의 목표는 사슴이다.

내일 새벽부터 시작할 사슴 사냥을 위해서 체력을 비축해 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판단이 되어서였다.


두 사람은 까마귀 떼를 멀리 우회하여 길을 계속 걸어 예정 했던 호수

가까운 산 비탈에 자리 잡은 사냥 막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나서 그간 비워 둔 움막을 대강 손 본 뒤 점심을 해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최 포수가 담배를 피며 나른한 피로를 삭이고 있던 중에 숲속 물정 모르는

황아바이가 조르듯이 말을 꺼냈다.

“ 최 포수! 아까 까마귀 울던 곳에 한번 가보오! 재수가 좋으면 횡재를 할지도 모르지 않소?”


최 포수는 일단 거절했지만 황아바이는 끈질겼다.


한참을 졸리자 최 포수는 슬슬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마귀 떼를 본 순간에 자신의 마음 한 구석 속에 강하게 솟구쳤던 호기심이
그간 억눌려 있었다가 황아바이의 부채질에 다시 걷잡을 수가 없이 요동질 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참을 유혹과 싸우다가 최 포수는 마음을 굳혔다.

“ 뭔지 모르지만 내일 하루 쉬더라도 이놈을 잡자.”

그는 황아바이에게 물었다.

"우둥불을 놓을 줄 아오?”

“잘 모르오. 내 농사만 지어왔지 노숙은 처음이오.”


우둥불은 통나무로 피우는 모닥불을 일컫는 함경도 방언이다.

1920년 중국 화룡현 청산리 깊은 골짜기의 우둥불 곁에 둘러 앉아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위시한 여러 지휘관들과 함께 내일의 전투를 위한

비장한 각오를 다지던 20세의 연성대장 이범석은 이 역사적인

현장에서의 우둥불이 주던 분위기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그는 나중에 한국의 국방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는 나이 70이 넘어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 제목을 우둥불이라고 지었었다.


이 책에서 그가 독립운동이나 수렵인 생활을 하면서 즐겼던

우둥불에 관한 낭만적인 회고가 여러 번 나온다.

자신이 단순하게 까마귀 울던 곳에 다녀오기만 해도 늦은 밤 시간이

될 것이다.

4월이라지만 북쪽 고산지대인 그 곳은 아직도 밤이면 살얼음이 얼 정도로 기온이 차가웠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먼저 준비 할 것이 우둥불이었다.

최 포수는 황아바이에게 세 개의 굵은 통나무를 삼각형으로 의지해서 세우고

그 통나무들 끝에 불을 붙여 아래로 타 내려가게 하는 독특한 우둥불 피우는 방법을
나뭇가지로 몇 번씩 실연 해보이며 알기 쉽게 일러주었다.


“ 내 없더라도 실수 없이 하오.”

“ 이젠 알만하오. 내 잘 해 볼 테니 최아바이나 잘 다녀 오기오.”

마음을 강하게 굳힌 최 포수는 내두산 촌 생산 대에서 지급받은 일본 군용

99식 소총을 둘러메고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울어대던 그 곳을 향하여

날렵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마귀 떼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숲 언저리에 도착 한 것은 해가 상당히

기운 늦은 오후였다.



호랑이를 사냥한 응참부근 백엽수 숲



최 포수는 최대한 천천히 노리쇠를 움직여 소리 없이 7.7미리 실탄 한발을 약실에 장전하고
역시 느린 동작으로 안전장치를 풀었다.

야생동물들은 금속성 소리에 극히 민감하다.

최 포수의 장전 행동은 그 소리를 최 포수도 들을 수없는 고요 속에서

이루어 졌다.


장탄된 총을 앞에 총 자새로 든 최 포수는 그 곳에서부터 정숙 보행으로

들어갔다.

밟으면 소리가 나는 잔가지나 가랑잎을 피하고 나무들을 은폐물로 사용해

가며 조심스럽게 전진해 가면서 커지는 궁굼증을 억제치 못했다.

“ 뭘까?”

그것이 작은 동물이라면 표독스러운 담비거나 생긴 것만 험상궂게 생겼고 실제는
겁 많은 멍청이 범(시라소니의 현지명)이거나 굶주릴 대로 굶주린

승냥이 일지도 모르고 그 것이 큰 동물이라면 멧돼지 또는 곰일지도 몰랐다.


어쩐 일인지 그 것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여하튼 아직 초보인 최 포수에게는 어느 것에도 확실한 심증이 가지 않았다.


어느덧 까마귀들이 아우성 소리가 지척에 들리는 지점까지 다가가는데 성공한
최 포수는 자세를 더욱 낮추고 전방을 주시했다.

수색의 시선이 한 지점에 이르자 최 포수는 일순 등골에 시리게 아린 얼음물이 스치는
공포를 느꼈다.


숲의 한 구석에 물동이만큼 커다랗고 누런 물체가 있었다!

“ 범이닷 !”

온몸을 조여 오는 듯한 두려움에 쫓기듯 최 포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커다란
홍송(紅松)뒤에 숨었다.

그 물체는 풀 속에 온몸을 잠그고 느긋하게 먹이를 지키고 있는 호랑이의 머리였다.


호랑이는 어제 밤에 잡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포식하고 감춰둔 남은

고기에 낌새를 채고 달려온 까마귀 떼가 덤비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까마귀 떼의 무서운 식욕은 호랑이의 다음 식사를 거덜 낼 수 있다는 것을 호랑이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호랑이는 쓰러진 통나무를 뒤로하고 비스듬히 엎드린 채 가끔 머리만 움직여 시끄럽게 구는
까마귀 떼와 사방을 경계하듯이 들러 보았다.


최 포수가 생전 처음 보는 호랑이는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그러나 아무리 거구였었다 해도 호랑이가 머리를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주변 잡목 숲에 녹아들 듯 기막히게 배합된 몸체의 얼룩 무늬 때문에

발견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 포수는 터질 것 같은 긴장 속에서도 먼저 호랑이를 발견한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이제는 상황 파악이 끝난 만큼 액션이 남아 있었다.

그는 몸을 숨긴 홍송(紅松) 뒤에 천천히 앉았다.

서서쏴 자세보다 앉아 쏴 자세가 훨씬 사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자세를 잡은 최 포수는 어느새 긴장으로 굳어진 안면에 흐르는 땀을

느껴야 했다.

땀을 닦고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최 포수는 총을 역시 조용히 나무에 의탁하고
총구를 호랑이 쪽으로 향했다.


최 포수는 생사를 건 결행을 앞두자 난데없는 불안감이 가슴속에서 뛰쳐나와 조준에
집중하려 했던 신경을 흩뜨려 버렸다.

그는 사냥의 세계에 입문 한 뒤 호랑이에 대한 겁나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들었었다.


“산속에서 갑자기 만나기만 해도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서리 총이 있어도감히 쏘지 못하오.”

“사슴을 쫓다가 느닷없이 범을 만나서 죽어라고 도망쳤는데 -- 나중에

보니 바지에 된 똥을 다 쌌더군 !”


한 치가 어긋 나는 사격의 실수도 죽음과 연결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최 포수는 자신도 그들처럼 심한 공포감 때문에 심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 떨고 있지나
않을까하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두려움의 심리상태에서 사격을 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초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 포수는 자신의 손과 팔을 확인해 봤다.

아무 떨림이 없었다.


사타구니 밑에도 손을 대봤다.

행여 오금이 저려 있나 를 본 것이다.

이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가슴에 손을 넣어봤다.

심장 박동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최 포수는 북한군 철도 경비대 청진 초소장 근무 시절, 초소 뒤 참호 속에서 천지를
다 뒤집어 놓을 듯이 퍼부어지던 미 해군 함포의 불비를 간을 조리며 견디던 경험을
뒤돌아 보면서 마음을 한층 더 안정시켰다.

“ 그 불벼락에 비하면 이따위 호랑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자신을 회복한 최 포수는 다시 목표로 주의를 돌렸다.


그리고 총신에 눕혀져 있는 99식 소총의 가늠자를 바로 세우고 가늠쇠를

찾아 조준선에 정렬시켰다.

그러나 가늠자를 통해 호랑이를 보던 최 포수는 당황했다.

예상되는 탄도에 비록 성기기는 했지만 잡목과 잡초가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총알이 작은 가지나 작은 풀잎 하나만 스쳐도 탄도가 비틀어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 갈 가능성이 컸다.

일반인들은 고속으로 나는 총탄이 그런 것쯤은 간단히 관통해 버릴 수 있다고
짐작 해버리겠지만 군 생활 이래 사격을 많이 해봐서 그 사실을 잘 아는 최 포수는
곤혹스러울 밖에 없었다.

최 포수는 앉아 쏴 자세에서 상체를 악간 들고 무릎 쏴 자세로 사격 자세를 바꾸었다.

자세가 약간 불안정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최 포수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고 가늠쇠를 호랑이의 앞다리 뒤로 이동했다.

이 가슴 부위에는 맹수들의 주요 급소들이 다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다.


네발짐승을 옆으로 봤다고 했을 때 앞다리 바로 뒤의 맨 윗 부분에

척추가 있다.

맞으면 안 죽어도 움직이지를 못한다.


그 아래 부분은 커다란 허파가 있다.


그리고 더 아래에 즉 다리 뒷 부분 맨 아래에 치명적인 급소인

심장이 있다.

어지간한 맹수는 세 곳 중 어디를 맞아도 목숨을 건질 수 없다.


거리는 100미터 정도.


최 포수 솜씨로 실수가 있을 수 없는 거리였다.

가늠자와 가늠쇠와 호랑이의 가슴을 있는 정렬이 끝난 조준선 사이에 아직도 서 너 줄기의
잡목이 염려스러운 신경이 쓰였지만 어떻게
해 볼 상황이 아니었다.


최 포수는 가늠쇠에 얹힌 호랑이의 가슴에 온 정신력을 집중시키면서 방아쇠에 봄바람이
스치게 하는 기분으로 손가락의 압력을 얹었다.


“ 콰-앙!”

총성은 밀림에 무겁게 드리워진 대기의 장막을 터뜨리고 찢어 놓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여운을 남기며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

거의 동시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호랑이의 비명이 천지를 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어-흥!”

그 포효는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모골이 송연 한만큼 진저리 쳐지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뒤이어서 까마귀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자지러지게 내 지르는 괴성의 합창으로
공포로 얼어붙은 대지위에 퍼부어졌다.


그 소리에 땅에 머리를 거꾸로 박고 숨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르며 반사적으로 노리쇠를 번개처럼 움직여 제 2탄을 장탄했다.


철커덕 소리와 함께 제 2 탄이 약실에 장탄되고 오른 쪽으로 튀어 나간

제 일탄의 탄피가 땅에 부딪혀 달가락 소리가 들려 올 때까지도 최 포수의 시선은
흩어 지지 않고 그대로 조준선 정렬을 유지하고 있었다.

99식처럼 한발 한발을 노리쇠를 움직여서 장전하고 배출하는 수동총인 모신 나간트 소총을
사용했었던 북한군에서는 장전 중에도 조준점을 그대로 고정하는 것은 사격술의
기본 기술로서 반복 훈련 시켰었다.



호랑이를 쏜 일본군용 99식 소총

최 포수는 이 기술을 북한군에 있을 때 훈련 받았었고 근무 중에도 시간만 나면
이 사격술이 본능화 되게 단련했었다.

그런데도 최 포수는 조준선 위에서 호랑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없어졌다!”

맞았다면 그 자리에서 날뛰거나 쓰러져야 했다.

최 포수는 실탄이 호랑이에게 맞아서 퍽하고 난 소리를 분명히 기억해냈다

최 포수는 당황한 시선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호랑이를 찾았다.

숨을 한번 들이 쉴만한 짦은 시간에 최 포수는 시야의 가장자리 잡목 숲에 투영된
누런 광선 같은 것이 스쳐 감을 감지했다.

호랑이가 가격당한 곳에서 십여 미터 떨어진 잡초 사이에 정말 신기루 같은 누런 물체가
슬쩍 지나갔던 것이다


그 것은 정말 동물의 움직이라고 보기에 너무도 가벼웠고 조용했다.

주변 잡목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호랑이 일 수밖에 없는 그 누런 물체에 없었다면 최포수는 그 것이 호랑이가 아닌
흙 먼지였거나 연기로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상에는 숨 막히는 적막이 찾아왔다.

최포수는 새로운 공포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 부상당한 호랑이는 멀리 우회해서 뒤로부터 포수를 공격한다.”

최 포수가 익히 들어왔던 호랑이의 습성이었다.


그는 머리를 시계 바늘처럼 돌리며 전방과 후방 그리고 좌우를 살폈다.

주변은 빽빽한 밀림이었다.

아까 총에 맞은 호랑이가 보여준 기막힌 도주 기술이면 접근 기술 역시

기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 호랑이라면 이런 지형에서 흔적도 없이 밀림 사이로 5-6미터 안에 까지 접근해서
단숨에습격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로 보였다.

5-6미터라면 단 한 번의 번개 같은 도약으로 최 포수를 끝장

낼 수 있는 짧디 짧은 거리이다.


이것은 최 포수가 호랑이의 공격을 발견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 포수에게 아까와는 다른 다급한 공포가 염습 해왔다.

시각만아니라 청각까지 동원한 날카로운 경계 상태가 몇 분간이나

계속 되었으나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혀가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칼끝 같은 긴장 속에서 최 포수는 참을 수가

없이 답답한 고통을 느꼈다.

몸부림치는 고통을 털어 내다가 그는 호랑이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약 일 분 넘게 숨을 참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다.

그제야 그는 나무 뒤에 숨은채 뒤로 물러앉으면서 전방을 보는 편한 자세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

깊이 들이 쉰 숨이 가시기도 전에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아까 누런 광선이 안개처럼 사라진 곳에 다시 한 번 거대한

물체가 거칠 것이 없이 당당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두 번 볼 것도 없이 그 것은 진짜 호랑이였다.


최포수는 재빨리 나무 뒤에 바짝 붙어서 총구를 그 쪽으로 돌렸다.

호랑이는 다소 거칠게 들어오더니 아까 자기가 있던 장소에서 약간

뒤쪽 높은 곳에 서서 거만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총격에 비명을 지르고 도망쳤던 부상 호랑이의 기색 같은 것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정말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호랑이가 금방 일격을 당했던 죽음의 장소로 다시 돌아오다니!

호랑이가 아무리 생각이 없는 동물이라지만 이런 비상식적인 짓은 그 들에게서도
상상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 포수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총 맞은 놈이 도망가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고 그 귀신이 저승으로

가기 전 자기에게 총질을 한 놈에게 복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닌 걸 까?

최 포수는 뒤죽박죽된 머리로 잠시 그런 바보 같은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머리가 정리되었다.

“ 동료가 복수하러 왔구나 ”

동료가 왔다면 그 것은 아까 도망친 호랑이의 이성 친구 일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는 항상 혼자 생활하는 외톨이 짐승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백수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호랑이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사자가 가족 단위의 떼[PRIDE]로 생활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호랑이의 교미 철에만 암수가 같이 생활한다.

최 포수는 앞의 호랑이를 총 맞은 호랑이의 짝으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은 교미 철이 아니지--”

호랑이의 교미 철은 추위가 최고조에 달하는 동지석달부터 정월에 걸쳐있다.

대지를 꽁꽁 얼려놓은 맹추위로 뜨겁디뜨거운 러브 콜로 녹이면서 암수가 어울려
산천초목도 벌벌 떠는 요란한 사랑을 해댄다.

그러나 지금은 4월이 아닌가 ?

느닷없이 죽음의 총구 앞에 나타난 호랑이의 이해 할 수 없는 때문에

그 정체에 대해서 잠시 혼란을 겪었으나 최 포수는 곧 현실 감각을 찾았다.?

다른 가능성은 희박했다.

사라진 놈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 저놈이 누구건 상관없다. 먼저 잡고 보자!”

최 포수는 숲의 약간 높은 곳에 서서 사방을 경계하는 호랑이의 옆구리 급소 부위가 완전히
드러나기를
다리며 조준선 위의 호랑이를

계속 주시했다.


이 호랑이와의 대결이 끝난 뒤 그는 한 선배 포수로부터 알게 되었다.

호랑이는 총격을 당하게 되면 일단 놀라서 도주하지만 금방 죽을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방향을 돌려 다시 불자리[총격을 받은 장소]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많은 최 포수 주변 선배들은 제일 큰 이유로서 호랑이의 맹렬한 성깔과

우둔한 지능을 거론했다.


호랑이의 무서운 성질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총탄에 의한 고통스러운 부상은 호랑이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유발하고

그 증오심은 예외 없이 사나운 복수의 반격으로 연결 된다는 것이 이 이유에 대한 기본적인
추리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죽음의 벼락을 내뱉는 총구가 기다리는 사지로 스스로
걸어 들어 올만큼 바보스러운 호랑이의 지능은 일반인에게 좀체로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가인된 호랑이의 이미지는 용맹무쌍이라는 형용사의 함께 영민
교활이라는 형용사적 수식어가 항상 혼합되어 있다.


이 사냥 뒤 오랜 세월 사냥 경험을 쌓은 최 포수는 스스로 의문에 대한

답을 작성 할 수 있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어 살아온 백수의 왕 호랑이의 유전인자에 꽉 들어 차있는 교만심과
흉포성이 호랑이에게 제이의 피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증오의 복수를 하러 겁 없이 불자리에 돌아 올 만큼의 만용성을 갖게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라고 결론 내렸다.


이 결론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호랑이의 이상한 만용에 의해서도 강하게 뒷받침된다.

그 만용의 정도가 총구가 기다리는 불자리로 돌아오는 만용보다도 더 바보스러워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여기 그 사례가 있다.

한국의 산야를 더럽히는 밀렵꾼들의 올가미를 독자여러분은 잘 알고

있으리라.

노루 멧돼지 같은 대형 동물들은 물론이고 토끼나 너구리같은 작은 짐승들까지도 올가미가
주는 위협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그래서 올가미에 걸렸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맹렬히 몸부림치며 올가미를 벗겨내기 위해서
사력을 다한다.

이런 몸부림으로 비록 다리가 잘리거나 하는 불구가 되기도 하지만

많은 동물들이 올가미에서 벗어 나와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랑이는 올가미에 걸리면 다른 동물처럼 살아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기는커녕
정 반대로 올가미를 걸고 앞으로 그대로 걸어 나가 스스로 올가미를 목이 파여 질만큼
단단히 조이게 만든다.


그 우악스러운 짓은 마치 호랑이가 올가미를 보고 마치 “뭐야? 이 까짓 것이 감히 나에게 !”
하고 무시해 버리고 짓 밟아 버리겠다는 태도 같아 보인다.


숨을 쉴 수가 없이 목이 졸라지면 그때야 당황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만용의 대가로 백수의 왕은 인간에게 그 값 비싼 껍질을 인간에게

선사하게 된다.


백두 산 밑 이도백하[二道白何]에 살아있는 모 포수는 호랑이를

열 댓 마리나 잡은 명포수로 유명했다.

그러나 누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고 그가 잡은 호랑이의 거의 전부가

그가 설치한 교수대의 올가미를 걸고서도 스스로 죽음의 발걸음을 재촉하다가 결국
황천까지 가버린 놈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이야기를 다시 극한적인 긴장이 누르고 있는 아까의 현장으로 가보자.

최 포수는 계속 호랑이를 조준하며 사격의 기회를 노렸다.


호랑이는 아까의 높은 위치에서 아래 쪽으로 두어 걸음 이동하여 피나무로 몸을 가린 채
최 포수 방향을 주시했다.



‘뭔가 눈치를 채고 있구나!’

최 포수는 가슴이 조여 오는 긴박감을 느끼며 계속 미동도 하지 않았으나 급한 마음이 들었다.


호랑이가 피나무 뒤에 숨었지만 나무가 굵지 않아서 상반신 가슴의 급소는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급소가 한 무더기의 억새풀에 가려져 있는 것이 문제였다.

좀 전과 비슷한 사격 상황이 된 것이다.


호랑이가 최 포수의 위치를 눈치 이상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호랑이의 가슴을 가린 억새풀 중간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

“으- 헝! ”

두 소리는 이중창을 하듯 동시에 터져 울렸다.

첫 총성에 멀리 도주해버린 까마귀 소리가 없었던 관계로 두 소리는 더욱 큰소리가 되어
메아리를 달면서 숲속 사이로 멀리 퍼져 나갔다.


두 번째 비명은 확실히 아까와 다른 것이 있음을 최 포수는 감지했다.

두 번째 포효는 그냥 포효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비명이었다.


거기에는 아리디 아린 고통이 흠뻑 배여 있었다.

총성과 비명의 여운이 최 포수의 귀를 스쳐 떠나기도 전에 호랑이는

전과 같이 누런 광선이 되어 숲에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최 포수가 번개같이 장전했던 총을 조준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최 포수는 계속 꼼짝도 안 하고 주변을 살폈다.

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최 포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다시 주변을 살펴봤다.

그래도 조용하기만 했다.


앞에 총 자세로 한참을 경계하던 최 포수는 조심조심 호랑이가 제2탄을

맞은 자리로 찾아갔다.

털이 사방으로 날려 있을 뿐 있어야 할 보여야 할 핏자국은 어디에도

없었다.


낙심한 최 포수는 다시 제 1탄이 날아간 곳을 살폈다.

포수는 호랑이가 등지고 누워있던 쓰러진 나무에서 총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을 발견했다.

구멍 언저리에는 몇 가닥의 누런 털이 묻어있는 발견했다.

‘철[총탄]이 털을 찝었구나.’

호랑이 몸체를 관통한 실탄이 털을 몰고 나가 나무를 명중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멍의 위치는 자신의 조준점보다는 훨씬 높았다.

이래 가지고서야 급소는 맞추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최 포수는

그 원인 규명에 나섰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아까 호랑이가 누워있던 바로 앞 대여섯 걸음 앞에 있는 손가락 굵기의

나무 하나가 칼로 잘린 듯이 꺾어져 있었다.

사격전 조준선을 가린 듬성듬성한 잡목들이 무척 신경을 쓰게 했는데 결국 이것들의 하나에
탄도가 위쪽으로 휘어 버리는 방해를 받아서 호랑이의

급소를 비껴 등을 스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프게 털만 뜯긴 호랑이가 노기등등해서 돌아 왔을 법도 했다.


한발에 즉사시켜야 했을 호랑이에게 경상을 입혀 도주 시켰으니 난감했다.

최 포수는 혀끝을 찼다.

“에이 !”

그러나 단념은 일렀다.

비록 호랑이가 아무런 핏자국도 남기지 않았으나

두 번째 질러댄 고통 찬 비명은 뭔가 타격을 입혔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추적하자!’

두 번이나 불질을 했던 최 포수의 가슴 속에서는 시작할 때의 공포심은

이미 개운하게 사라져버렸다.


겁을 먹고 전장에 투입된 신병들도 일단 전투가 시작되어 총성과 포성이 사방을 진동하면
자신들을 옥죄어 놓은 공포심을 스스로 깨어 부수고 전투에 몰입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전쟁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공포심대신 인간의 극단적인 공격성이 일깨워지고 이 공격성이 병사들의

무아무중의 용감한 전투 행동을 부추긴다고 한다.

이 공격성은 광기라고도 표현 할만도 한데 전쟁을 경험한 최 포수는

이 시점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총격이 불러일으킨 대담함은 최 포수를 숲속으로 몰고 들어가게 했다.


최 포수는 멜빵 안으로 오른 손 팔꿈치를 집어넣어 단단하게 총을 쥐고

호랑이가 사라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00미터를 그야 말로 바늘 끝을 밟는 듯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추적을 했건만
호랑이 발자국 주변에 아무런 핏자국도 보지 못했다.


최 포수는 더 전진했다.

불과 몇 십 미터 가기 전 호랑이의 전진 방향의 오른 쪽 억새풀들에 스치듯 묻어 있는
최초의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이어 서 몇 걸음 앞에서 왼쪽의 억새풀에도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이 왼쪽의 핏방울들도 오른쪽 핏 방울들과 평행을 이루어 가며

앞으로 계속 놓여갔다.

호랑이는 피가 가끔 거품을 품은 것이 궁금스럽게 눈에 띄었다.

‘관통 했구나!’


아직도 사냥 경험이 일천한 최 포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바람부터 냈다.

제까짓 천하 괴물이라도 양구멍에서 이렇게 많은 피를 쏟아냈다면야

얼마 못가서 출혈 과다로 죽어 자빠질 것이 뻔해 보였다.


최 포수는 더욱 조심하면서 발걸음을 디디었다.

최 포수는 대여섯 걸음 걷고 정지해서 주위를 살펴보고 또 전진하는

조심성을 되풀이 했다.

총을 맞은 뒤 수백 미터를 구보로 달리던 호랑이는 숨이 차서인가 조금씩 속도가
늦어지면서 보통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가다가 한곳에 서서 잠시 쉬기도 했는데 그 곳에는 다량의 피가

고여 있었다.

그러나 철로 모양으로 두 줄을 이어져 가며 팥알처럼 점점이 뿌려진 핏자국사이로 난
네발자국은 대조적으로 직선을 긋듯 일 열로 찍혀있었다.


고양이 족은 네발을 한 줄로 놓은 직선보행을 한다.

그러나 만약 심한 상처를 당하고 몸을 지탱 할 수 없으면 마치 취한 사람

의 발걸음처럼 갈짓 자(之)의 발자국이 좌우로 넓게 흩어진다.


최 포수는 거의 500여 미터를 추적하고도 그 발자국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 것을 발겨하고 마음이 어두워 갔다.

‘ 피를 이렇게 쏟았다면 쓰러 질 때도 되었는데---“



그렇지만 이때 최 포수도 모르는 화기학의 전문 지식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발사했던 군용탄의 실탄은 동피로 감싸여져서 관통력은 좋지만

살상력은 약하다.

그리고 관통력은 살상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맹수 실탄은 그 실탄끝에 납이 약간 노출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연두탄이라 부른다.

동물의 신체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버섯모양 연두탄이라 부른다.

동물의 신체에 부딪히는 순간 마치 버섯모양으로 연두탄의 앞이 크게 짜부러지면서
크게 확대된다.


그리고 그 버섯모양으로 변형되어 구경이 거의 두 배로 커진 실탄이

그대로 회전하면서 장기조직으로 부수며 파고들기 때문에 살상력이 무척

크다.

단지 관통력이 떨어지는데 급소를 파괴한 이상 더 이상의 관통력이 필요

없다.

군용탄은 관통은 하나 탄도를 따라 단지 작은 구멍을 낼뿐이다.


게다가 최 포수가 쓴 99식 총의 7.7미리 구경 탄은 호랑이 사냥에

너무 약하고 작은 탄이다.

말했듯이 호랑이는 실탄에 대단히 강하다.

경우에 따라 심장에 명중당하고도 5,60미터는 능히 달려 포수에게

반격하기도 한다.


그래서 적어도 구경은 9.3미리 이상에 총탄의 무게가 두 배는 되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서 앞서 설명한 연두탄은 더 말할 나위 없는 필수품이다.

현대의 전문 맹수 사냥꾼들은 최 포수의 호랑이 사냥을 보고 그 겁 모르는

무모함에 크게 놀랄 것이다.


그러니 호랑이가 출혈을 하면서도 바로 쓰러지지 않고 계속 제 갈길을

간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최 포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기대에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200여 미터를 더 가자 비집고 들어가기조차 힘든 빽빽한 밀림이 나왔다.

호랑이는 뱀처럼 그 사이를 휘 집고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위험한 호랑이가 숨어 들어간 그 속은 두발 가진 인간이 들어 갈 곳이

아니었다.

난감해진 최 포수는 추적을 단념하기로 하였다.

‘김 포수가 오면 다시 돌아오자.’


이미 해가 서쪽 하늘에 깊숙이 저물고 있었다.

어둠이 금방 닥칠 것 같았다.

그 곳 지역 지리에 어두운 최 포수로서 캄캄한 야간에 사냥 막으로

가는 길을 잘 찾아 갈 자신이 없었다.


최 포수는 발길을 바쁘게 움직였다.

정신없이 걸어 돌아 왔건만 사냥막이 보이는 곳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사위가 캄캄했다.


황아바이가 걱정스럽게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았다.

“무어를 잡았소?”

초 포수는 미완성으로 끝난 호랑이 사냥 전말을 간단히 알려주고

밥부터 청했다.

호랑이라는 말에 놀란 황아바이가 연신 던지는 물음을 귓등으로 넘기며

최 포수는 조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나갈 사냥을 위해 일찍 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최 포수는 북한에서 사온 소련제 야광 시계가

새벽 세시를 가리 킬 때 눈을 떴다.

그 전날 사냥으로 피곤 할 법도 했지만 산의 맑은 공기 덕분에

몸이 말짱했다.

최 포수는 옷을 걸쳐 입고 사냥 채비를 하였다.

냉수한잔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나선 최 포수는 아직도 하늘에 금모래처럼

잔뜩 깔린 잔별 빛에 의지하여 호숫가 잠(사슴이 염분을 섭취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곳)을
찾아가 매복했다.


동이 뜰락 말락 할 때 사슴들이 나타났다.

이 사슴들은 북미산 엘크와 비슷한 말 사슴들이다.

그러나 희미한 그림자만 보고 쏜 실탄은 빗나갔고 사슴은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며 도주하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와 다시 부족했던 토끼잠을 자고 잃어나자 해가 하늘 높이 걸려있었고
황아바이가 해놓은 아침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자 말자 어제 그 곳에 한번 가보라고 황아바이가 채근이다.

김 포수가 와서 같이 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호랑이가 가진 금전적 가치 때문에 그가 그토록 재촉했을 것이다.

그는 임금대신 사냥 수확의 일부를 받기로 하고 이번 사냥 길에

따라 왔었다.


최 포수는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포수가 그날 온다는 보장도 없고 거기다 아침에 뿔 달린 아까운 숫사슴까지 놓친
아쉬움은 결국 다시 그를 그 호랑이 사냥터로 다시 가게 만들었다.


그는 다시 점심을 먹고 어제 호랑이의 자취를 잃은 곳으로 되돌아갔다.

호랑이가 스며 들어간 밀림을 감히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곳을

거의 1KM나 멀리 돌면서 호랑이가 빠져 나갔는지를 살펴보았다.


과연 한 곳에서 잡목 더미를 빠져 나온 호랑이의 자취를 발견했다.

핏자국은 계속 이어졌다.

300미터쯤 가던 호랑이는 어느 나무 등걸을 바짝 붙어서 의지하여 한참을 쉰 흔적이
남겨 놓았다.

용맹무쌍한 호랑이도 출혈로 지쳤었던 것 같았다.

그 곳에는 상당량의 마른 피가 풀에 엉겨 붙어 있었다.


호랑이는 그 지점을 지나서 더 가다가 어제와 꼭 같이 우거진

잡목 숲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진입도 출입도 불가능 한 곳이었다.

‘역시 김포수가 있어야겠구나.’

최 포수는 추적을 단념하였다.


최 포수가 마침내 나흘 뒤에 호숫가 잠에서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날 기다리던 김 포수도 사냥 막으로 찾아왔다.


최 포수는 그에게 호랑이를 쐈다가 놓친 이야기를 아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다 들은 김 포수는 프로답게 초심내기 최 포수의 사냥을 강평했다.

“ 호랑이 쏘고 덤불 속까지 안 쫓은 것은 잘 했소. 추격당하는 것을 알아채면 호랑이는
숨어서 기다리거든----. 그나저나
사냥 끝나고 가는 길에 한번 더 찾아봅시다.” 


사흘 뒤 허탕 친 아침 사냥 뒤 짐을 챙긴 그들은 집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둘러서 최 포수가 마지막으로 호랑이 발자국 놓친 곳을

한 시간이나 수색해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 때문에 괜히 시간을 지체 하는 것 같아서 최 포수는 스스로 나서서

수색을 마감했다.

“다 잊고 빨리 가세나!”

최 포수는 아직도 미련을 안 버리는 김포수의 등을 밀며 길을 재촉했다.

호랑이 사냥은 이것으로 마감되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호랑이를 잡으면 동료들 간에 성가가 올라가서

호랑이 포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접을 받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

그 당시의 포수 사회였다.


호랑이를 잡은 명포수의 칭호는 꿈으로 사라지고 오히려 호랑이에게

앞 뒤 생각 없이 총질한 초보라는 비웃음이 은근히 걱정 되는 후유증을

최 포수는 되새김질 하면서 세월은 갔다.


그 해 가을이 되었다.

머릿속에 들락 달락 하던 호랑이 생각에 진하게 끼어있던 아쉬움도 슬슬

희미해지기 시작 할 무렵이었다.

온산의 붉은 잎은 수확의 세월임을 인간들에게 재촉했다.

산과 들에 의지하고 사는 인간들 모두가 다가오는 겨울을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어느 날 최 포수는 들일을 나갔다가 수전에서 온 김포수를 만났다.

“ 이보 ! 최 포수 잘 만났소. 해 줄 얘기가 있소!”

“ 뭐요?”

“ 범 말이요, 그이 발견 됐소!”

최 포수는 눈이 번쩍 뜨이게 놀랐다.

“ 언제?”

“ 며칠 됐소. 최 동무는 이제 범 잡은 명포수야!”


김 포수의 말에 의하면 같은 동네에 사는 약초 꾼들이 최 포수가 범을

놓친 곳에서 호랑이의 사체를 발견 했다는 것이었다.

“ 게 어째 내가 쏜 호랑이라고 할 수 있겠소? 까마귀가 뜯어 먹어도

벌써 다 뜯어 먹고 뼈만 남겼을 텐데! ”


김 포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게 신통하다는 게요.

범은 가죽과 뼈만 남고 살만 곱게 삭았더란 말이오.

약초꾼들이 확실히 말했소.

썩지 않고 곱게 삭았더라 하오.

호랑이가 그대로 흩어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했더란 말이오.

그래서 총알 구멍을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게요."


“ 삭았다고?”

최 포수는 잠시 아리송해졌다.


“거짓말이 아닌가?”


김 포수는 짜증을 냈다.

“범은 죽어도 범이더군! 그 시체는 까마귀는커녕 승냥이나 너구리, 심지어들쥐가 갉아
먹은 자국조차도 전혀 없더라는 게요!
죽어 있지만 감히 범에게 입을 대 볼 짐승이 없었단 말이오.

그래서 썩기 어려운 뼈와 가죽만 그대로 남고 살만 곱게 삭아 없어져서

여섯 달이나 지났는데도 범이 그대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오!”


최 포수는 의아한 생각을 놓을 수가 없었다.

호랑이를 쏜 날 멧돼지 사체에 입을 못 대서 밀림이 떠나가도록

사나운 극성을 부리던 까마귀 떼를 생각하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까마귀만이 아니었다.

지상에는 까마귀보다 더한 약탈자들, 말하자면 작게는 너구리나

들쥐 크게는 승냥이나 곰들이 우글거렸다.

호랑이의 사체가 부패해가면서 군침 도는 냄새가 근처 수키로까지 퍼졌을 것이고
갖가지 이들 탐식자 들이 먹이를 호랑이 사체를 향해

달려 왔을 것이다.


그렇게 굶주린 배를 안고 정신없이 달려온 수많은 놈들이 비록

백수의 왕이라지만 생명이 빠져나간 사체를 보고선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질겁을 하고 뺑소니를 쳤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최 포수는 김 포수에게 다시 물었다.

“이보! 김 포수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할까?”

최 포수의 질문에 김 포수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

“ 범이 한번 으르렁 대면 근처 삼십 리의 동물들이 종적을 감추는 것,

알지 않소? 그리구 범 오줌 냄새만 맡아도 사냥개들이

그냥 주저앉아서 벌벌 떠는 거 모르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밀림 사정에 정통한 사냥 30년 경력의 김 포수가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이쯤 되자 최 포수는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보니 이해하기 힘들었던 호랑이들의 비상식적인 만용들도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올가미에 목이 걸려도 “ 어디 해봐라!” 하고 그대로 밀어 버려 죽음을 스스로 불러
들이는 것이라던가, 총격을 받고 도주했다가도 분기 충천한 모습으로 총구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우둔한 짓이 이제야 이해가 가는 듯했다.


사체만 보고도 이렇게 벌벌 떠는 동물들을 경멸하며 살아온 호랑이가 비상식적인
만용을 부리는 안하무인의 절대자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최 포수의 가슴속에 잔물결 같은 감정의 일렁임이 일어났다.

이 순간의 최 포수에게 호랑이를 잡은 명포수라고 불리건 말건 그 것은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문득 조용한 은퇴 생활을 하고 있는 한 늙은 선배 포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정신이 올바른 포수는 자기와 사투를 벌리다가 죽은 맹수에게 본능적인

미안함과 슬픈 생각을 갖게 된다는 말이었다.


최 포수는 지금 그의 말대로 죽어서도 밀림의 왕자다운 늠름한 위엄을

잃지 않고 사라져간 호랑이를 향한 숙연한 슬픔이 함께한 감동의 물결을

쉽게 가라앉히기가 쉽지가 않았다.


최 포수는 자기 총에 죽은 호랑이를 진혼이라도 하듯 호랑이가 사라진 응참 쪽의 먼 하늘을
보며 김포수에게 대꾸했다.


“그래 맞소 --- 범은 죽어서도 범 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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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라픽 제공 동영상


바다뱀에 물려서

세상 떠난 인천 어부.

바다뱀은 한국의 일반인들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단어이다.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지만 비교적 북쪽에 위치한 바다들이라서

따뜻한 온도를 좋아하는 바다뱀이 살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이십년도 훨씬 전, 그러니까 80년대 초에 인천에서 출항한

안강망 어선의 선원이 바다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세월이 가면서그 일은 까맣게 잊혀서 수산 관련 연구기관에서도 모르고 있는 사건이
됐고 우리나라와 바다뱀은도 별개의 세계에 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지만

실은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의 어부들이 겁없이 바다뱀과 마치 이웃집 강아지 만나듯
자주 대면하는 삶을 살아오던 때가 있었다..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 바다뱀의 전모를 먼저 소개해 본다.


바다뱀은 육상의 사자나 악어처럼 남쪽 아열대 또는 열대에 사는 열대 생물인데
세계의 오대양 중에 단지 태평양과 인도양, 두 곳에만 서식한다.

원래 육지에서 살던 코브라 같은 독사가 먹이를 쫓아 물가로 내려가다가

아예 물속으로 들어가는 진화를 거쳐 물속에 사는 존재가 되었다.


바다뱀의 종류는 약 62 종이나 된다.

종류가 많은 만큼 생김생김과 습성도 다양하다.

크기 변화가 극심하여 작은 것은 50센티 크기의 작은 바다뱀에서

큰 것은 3미터가 넘는 바다뱀도 있다.

대개는 1미터 내외이다.


타이거 상어라는 것이 가끔 바다뱀을 잡아먹을 뿐

이 생김생김도 껄그러워 보이는 바다뱀을 좋아하는 육식 어류는 별로 없다.

바다뱀은 바다에 살지만 파충류라서 아가미가없다.

따라서 자주 수면위로 올라와 호흡을 해야 한다.

수면에 머리를 내놓고 호흡을 하는 시간은 극히 짧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바다뱀 천적이 하나있다.

위의 동영상에서 보듯 물수리다.
동영상은 물수리가 왜 바다뱀의 최대 천적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다뱀은 진화의 정도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누인다.

한 종류는 육지의 독사에 가깝고 한 종류는 바다의 어류에 가깝다.

독사에 가까운 종류는 sea krait라고 불리 우는데 62개종에서
단지
다섯 종류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종류는 뱀과 같이 자주 갯가 근처 땅으로 올라오기도 하고 새끼를
땅에
올라와 낳기도 한다.

이 중에는 강을 따라 멀리 상류로 올라가는 종류도 있다.

바다뱀은 물이 짠 바다에 사는데 필리핀 루손도의 한 민물 호수에 이렇게

바다에서 멀리까지 올라와 사는 민물 바다뱀도 있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어로 sea snake라고 불리 우는 종류다.

땅과는 무관하게 바다속에서만 산다.


한국에서는 sea krait를 바다 독사,sea snake를 진성 바다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어쩐지 그 말이 그 말 같아서 어색한 번역으로 느껴진다.

Olive Sea Snake (Aipysurus laevis) searching for prey. Also known as Golden Sea Snake. Great Barrier Reef, Queensland, Australia
바다뱀은 한 종만 빼고 60여개의 종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육상의 코브라와 같은 맹독을 가지고 있다


최강의 독을 가진 한 바다뱀의 독은 육상 독사 중에역시 최강의 맹독을 가졌다는
아프리카의 맘바나 오스트레리아의 타이판 독사의 그 것들보다 열배에 달하는 맹독이니까
세계 최고의 맹렬 독사는 바다에 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다뱀들이 가장 많이 몰려 사는 호주 북방의 대 산호초 일대에서는

벰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 하기위한 혈청 원료로서 바다뱀만 잡는 어선들이 있다


어획 방법은 그물이 아니라 주낙 낚시를 사용하는 것이다 .
바다뱀잡이 어업이 다른 어업과; 다른 것은 잡은 어획물을 다시 바다에 놔준다는
어로 작업상의 특징이다.

독액만 빼면 다시 바다로 돌려 보내서 다음에 다시 잡을 수 있게 자원을 보존하는 것이다.


바다뱀이 지독한 독사지만 바다뱀에게 물려 죽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다.


바다뱀은 의외로 극히 온순하다.

그래서 먼저사람을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다.

단 거칠게 건드리면 반항한다.


더해서 입이 매우 작다.

사람을 물어서 큰 상처를 줄 만큼 크게 입을 벌리기가 쉽지가 않다.


또 독 이빨이 2-4미리 크기밖에 되지 않아 물려도 치명적인 양의 독액을 주입 할만큼

깊숙한 상처를 만들기가 용이치 않다.


또 다른 이유로 독샘에 가지고 있는 독액의 양이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치사량이 될 만큼 항상 충분하지는 않다.


바다뱀의 기본 소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아까 서두에서 이야기
인천 선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70년대에도 이미 한국 연안에 어족이 상당히 고갈되어 출어한 어선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그 때 불황을 타개하고자 과감히 흑산도 남쪽 먼 동중국해까지 내려가서

새 어장을 개척한 어선 선장이 있었다.


지금 군산 수협의 조합장으로 있던 임성식씨이다.

젊은 시절 자기 배를 직접 운영하던 임 조합장은 빈약한 조업에 고전을

하다가 어느 가을에 작심하고 연료를 다량 적재하고 무작정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 어장을 찾아 남쪽으로 항해했다.


양자강 입구의 위도까지 내려가서 조업한 결과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그가 만선으로 돌아오자 서해안 전 항구에 대박의 소문이 나고 어선들은

너도나도 동중국해로 선수를 향했다.


7,80년대 한국 어선의 동중국해 어장은 중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만들어

냈지만 쇠퇴 일로에 있던 서해안 어업에 활로를 불러준 공신이었다.

선원들이 날씨마저 북쪽과 전혀 다른 남쪽 바다로 내려가서 그물을 내리자

낯선 고기들이 올라왔다:


북쪽 바다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열대 고기인 황새치[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어류]가
그물에 걸리는가 하면 진기한 바다 거북이들이 잡혀서 올라왔다.


그 무렵 동중국해로 출어하던 어선들은 안강망 어선이었다.

신주머니 같은 그물을 묵직한 닻에 묶어서 해저에 설치해 놓고 조류에 의해서 바닷 고기가
그물안에 밀려 들면 그물을 건져내는 그런 어법이다.
그래서 조류가 빠르게 움직이는
사리 때가 이 어선들의 조업시기이다


우리가 잘 아는 갈치나 조기 등이 주로 이 어법으로 잡는다.

고기들이 신주머니 같은 안강망 그물 안으로 빠른 조류에 의해 일단 밀려 들어가면 다시 되돌아
나오기는커녕 계속 밀려 들어오는 다른 고기들의 압력에 의해서 대개 죽기 마련이다.


그 단단한 거북이도 거지반 다 죽어서 건져진다

그러나 그물을 인양하기 직전에 밀려 들어간 고기는 상당수가 살아서 올라오기도 한다.

Sea krait, Laticauda sp.


선원들은 바다 거북이가 올라오면 죽어 있건 살아 있건 재수가 없다고

바다에 다 버렸었다.

서양에서 고급 스프의 원료로 쓰는 바다 거북이가 미신 많은 한국 어부들에게는 단지 손대면
재수 없는 금단의 대상으로 밖에 안보였던 것이었다.


동중국해 출어가 거듭됨에 따라 한 이상한 고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기다란 그 것은 갯장어나어린 갈치인 풀치를 닮았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생긴 것도 어쩐지 이상해고 만져본 감촉도 꺼림직 해서

선원들은 거두지 않고 바다에 다 버렸었다.


그 기다란 고기의 거의 전부는 죽어서 인양되었다.

어쩌다가 산 놈이 잡힐 때도 있었는데 갑판에 내려놓으면 기진맥진해서

흐느적거리다가 죽어버리기 일수였다.

꼬리는 배 젓는 노 같이 넓적한 것이 어쩐지 그 뱀 같은 몸집과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물을 꺼내 보면 상반신은 그물에 있고 하반신만 그물코 밖으로 내밀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호기심으로 살펴보려고 손으로 그 꼬리 쪽을 잡아 당겨보면 탄력이 전혀 없어서
툭하고 끊어져 버렸다.

다른 어류와 달리 파충류였던 바다뱀의 살은 무를 대로 물렀던 것이다.


하여간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그 생물은 여러모로 별로 즐겁게 보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그것이 바다뱀이라는 정보가 돌아서 정체는

확인했지만 맹독을 가진 것이라고는 선원들은 전혀 생각지를 않았었다.


동중국해에 출어하는 수만의 선원들이 바다뱀이 맹독을 가진 독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채 몇 년이 지났다

간간히 TV를 통해서 외국 해양 프로에서 바다뱀을 본 선원들 사이에

그 것이 독사인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지만 그들이 잡는 비실비실한

바다뱀은 그런 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어서
깊이
새겨 듣지를 않았었다.


바다뱀과 뱃사람과의 대면이 이렇듯 아무런 일이 없이 몇 년이 지났다.


그러다가 80년대 초 드디어 일이 터졌다.

인천에서 출항한 안강망 어선 하나가 건진 그물에 그 바다의 독사가

걸려 올라 온 것 이었다

드물게도 그 독사는 살아서 꼼지락거렸다


여기에 선원 하나가 발동한 엉뚱한 장난기에 그 뱀을 들어 올렸다

생각해보면 그는 그 때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 야-! 뱀이라는 것이 왜 이렇게 비실거리냐? 임마! 너도 자존심이 있으면 물어봐!”


그는 상식외의 짓을 했다.

뱀의 작은 입에 새끼 손가락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따끔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어엇! 이게 무네?”


선장은 그 것을 보고 외쳤다

“ 야! 그 것 바다에 처넣고 고기나 추려!”

그래서 바다뱀은 바다로 던져졌고 그는 다시 작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물린 손가락이 아파 오면서 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작업 중에 원체 작은 부상들을 많이 당하는 선원이 직업인지라 그는 그저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어지러움과 구토증을 느끼고 그는 선장에게 말했다

“저 어지러워서 좀 누워 있어야 겠어요."


바쁜 작업중에 쉬겠다는 선원의 청에 선장은 짜증이 났으나 그의 안색을 보니 창백해져
있어 허락을 했다.

그는 힘들어 보이는 발걸음으로 선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에 작업을 마치고 그의 용태를 보러온 선장은 그가 뻣뻣한 시체가
된 것을 보고 경악을 했다


바다뱀의 독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의 사망으로 어선은 조업도 마치지 못하고 시체를 싣고 먼 길을 되돌아서 인천으로
돌아와야 했다.


소문은 빨랐다.

그 뒤부터 동중국해로 출어하는 선원들은 바다뱀을겁을먹고 살모사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단이란 있는 법이어서 그물에 잡혀 올라오면 그대로 바다에 버려지던
바다뱀을 선원 중에 독이 있으면 살모사처럼 정력에 좋은

영양가도 있지 않겠느냐고 그 것을 말려서 가져와 다려 먹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비극이 만든 희극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울프독블로그에서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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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생년월일:1889년 4월 20일
사망:1945년 4월 30일
출생지:오스트리아
약력:
1933년 대통령 힌덴부르크에 의해 수상에 임명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임(약칭 총통)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킴
저서:나의 투쟁 Mein Kampf

아돌프 히틀러


1920(또는 1921)년부터 독일 국가사회주의당인 나치당의 당수를 지냈고,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가 되었으며, 1934년 8월 2일에는 총통 겸 총리로 취임하여 정권을 독점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1837 출생)는 사생아로 태어나 시클그루버라는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다가 1876년 히틀러로 성을 바꾸었다.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를 나왔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오스트리아 재무부의 세관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퇴직한 후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수도인 린츠 근교로 이사하여 아돌프 히틀러는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히틀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알슐레(실업계중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성적이 불량해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1906년 16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동안 린츠에서 방황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이에 찬성했다.

1903, 1908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죽었지만 히틀러는 부모의 유산과 국가의 고아연금이 있었으므로 생활에 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빈에 있는 미술학교에 2차례(1907, 1908)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다. 그 후 몇 년 간 빈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신문, 소책자를 읽었고, 역사·정치·민족 문제에 대해 공부했다. 엽서나 광고의 그림을 그려서 버는 수입은 불안정했으므로 여러 하숙집을 옮겨다녔다. 그러나 1911년 부모의 유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숙모의 유산 대부분을 상속받게 되자 고아연금은 여동생에게 양보했다. 그는 술·담배·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생활은 검소했다.



히틀러가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절대주의 국가로서 당시 민족문제로 고심했다. 독일인 대귀족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치하에서 권력을 독점했고, 관료·군인·대지주·자본가·교원·지식인의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력을 확장한 마자르인·체코슬로바키아인·폴란드인·남슬라브인은 민족자치와 생활향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특히 20세기초에는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 간에 격렬한 민족투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회에서 히틀러는 열렬한 독일민족주의자·반유대주의자가 되었다. 아리아인의 민족적 우월감을 기초로 한 그의 반유대주의는 중소상공업자와 중소농민으로 구성된 독일인 중산계급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된 것이기도 했다. 독일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계급투쟁이론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전활동과 직장조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독신자 합숙소에서는 하층시민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독일민족지상주의자이며 반가톨릭 교회주의자인 쇠네러(1842~1921)파에 동조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이 제국 내에 있는 독일인 거주지역의 독일합병을 지지했다.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이미 히틀러는 자신의 성격적 특성, 즉 원만한 대인관계의 실패, 기존 부르주아 사회와 비게르만인(특히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감, 성급하며 위협적인 격정, 가난과 실패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등을 보였다.



1913년 5월 26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입대하지 않기 위해 독일의 뮌헨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1914년 2월에 오스트리아로 소환되어 징집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부적격자 판정을 받았다. 그해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바이에른 보병 제16예비연대에 배치되었고, 플랑드르 지방에서 주로 영국군과 싸웠다. 전령병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1914, 1918년에 각각 2급과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는데, 히틀러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만년에까지 가슴에 달고 다녔다. 1918년 11월 독일이 패배했을 때 히틀러는 대단히 낙담했다. 군대생활은 그에게 전우애를 가르쳤고, '참호의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공동생활을 체험하게 했으며,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해주었다. 그는 단순하고 행동본위인 군대를 좋아했고, 황량하고 처연한 전선생활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패전에 따른 독일 군대의 해체, 유럽에서 독일 패권의 실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슬라브 민족들의 독립과 강화, 중유럽으로부터 독일의 후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금지 등은 히틀러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독일의 11월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가장 격렬한 반대자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4월 20일 저녁 6시 30분경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린츠 근교의 브라우나우 암 인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1837년 - 1903년)와 알로이스의 조카뻘되는 친척이었던 어머니 클라라 필츠 사이의 여섯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알로이스에게는 알로이스 2세라는 장남과 안젤라라는 딸이 둘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둘과 딸 한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 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아돌프는 어릴적 '아디'라고 불리워 졌으며 1895년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 피슐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우들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매우 우수한 학생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점차 아버지 알로이스와 마찰이 잦아졌으며 그 중 특히 진학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04년, 린츠에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위 사진>

13세 때 오스트리아 에서 구두닦이로 시작해 세관 공무원 과장직까지 오른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역시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돌프는 당시 웅장한 건물을 스케치를 하는데 매료되어 있었으며 인문계 학교로 진학해 미대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게 관대했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달리 엄한 꾸중과 화가나면 손찌검도 마다않는 그의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그는 오스트리아 린츠의 실업계 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꿈을 짓밟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반항으로 학업에 매우 불성실해졌다. 끝내 화가의 꿈을 접지 못한 그가 좋아하는 일이라곤 그저 린츠의 건물을 스케치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독일어:Mein Kampf마인 캄프])'에서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 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푓슈라는 역사 선생님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마치 역사에 관해서 만큼은 조예가 깊은 것처럼 잘못 알려진 경우가 종종 있으나, 나의 투쟁(Mein Kampf)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선전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견해가 통설이며 실제로 역사 시험에서도 낙제를 면치 못할 수준의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의 독일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부풀려진 점이 없지않은 것으로 보인다.1903년 1월에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13세였던 아돌프는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식 내내 펑펑 울 정도로 누구보다도 가장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더욱 학업에 대한 의욕을 잃었으며 성적은 바닥을 기게 되었다. 그는 자취나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녔으며 주말에는 어머니가 계신 집에 돌아왔다. 후에 그는 린츠의 학교에서 쫓겨나게되고 스테이르라는 곳에 있는 작은 학교로 전학한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16세 되던 해 병으로 1년간 학교를 쉬게 된 것을 계기로 그 학교를 자퇴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기념하여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길옆에서 누워자던 아돌프 히틀러는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깨워 겨우 일어나게 되고 이에 크게 느낀바가 있어 이후 죽을때까지 금주하였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클라라는 유방암으로 고통받다가 1907년 사망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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