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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여행기] (12) 자비가 부처다- 인터넷경향 | ||
단하선사(739-842)가 낙양(洛陽) 혜림사에 있을 때였다. 몹시도 추운 겨울 어느 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법당에 있는 불상을 가져다 불을 지폈다. 절의 원주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찌하여 불상을 태우십니까?” “사리를 얻으려고 하네”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단 말씀입니까?” “사리가 없다면 무슨 부처란 말인가?” 사원의 금불상들을 녹인다면 사원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걸인들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을까. 티벳 뿐이랴. 한국 불교의 가장 큰 문제도 자비의 부족이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자비가 곧 부처라 했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말씀은 자비가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은 악한이고 무자비한자라도 본성에는 불성인 자비심이 있다는 말씀이다. “선남자여, 모든 성문과 연각과 보살과 부처님께서 가지신 선근은 자비가 근본이 된다. 선남자여, 보살이 자비심을 닦아서 한량없는 선근을 능히 낼 수 있나니 말하자면 모든 신통과 부처님의 지혜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법은 자비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자비는 진실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무엇이 일체 모든 선의 근본입니까? 하고 물으면 마땅히 자비라고 대답하리라. 그러므로 선남자여, 능히 선을 행하는 자는 진실로 사유하고 진실로 사유하는 자는 자비로운 자이고, 자비로운 자는 곧 여래이며, 대승이다. 대승은 곧 자비이고 자비는 여래이다. 선남자여, 자비는 보리도이고 보리도가 여래이며 여래는 곧 자비이다. 선남자여, 자비는 곧 천주(天主)이고, 천주가 곧 자비이며 자비가 곧 여래이다. 선남자여, 자비는 능히 일체중생들을 위하여 부모가 되니 부모가 곧 자비이며 자비가 곧 여래이다. 선남자여, 자비는 가히 사의(思議)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이며,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경계가 바로 자비이니 마땅히 자비가 곧 여래인줄 알아야 한다. 선남자여, 자비는 중생의 불성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성이 오랫동안 번뇌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불성이 곧 자비이며 자비가 곧 여래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중략) 선남자여, 자비는 일체보살의 위없는 도이며 도는 이 자비이며 자비가 여래이다. 선남자여, 자비는 모든 부처님의 무량한 경계이며 무량한 경계가 곧 이 자비이니 마땅히 이 자비가 여래인줄 알아야 한다....” (대반열반경 권 제14 pp.436~438) 가난하고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자비다. 가난한 자를 섬기라던 예수의 말씀이 곧 부처가 말씀하신 자비다. 자비가 곧 예수고 부처다. 인간에 대한 자비심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그러나 종교들은 창시자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언젠가 혹독한 영적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젊은 스님과 이야기 나눈 적이 있다. 부처님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인간 해방을 선포하신 분인데 당신네 교단은 어찌 그리 여성 수행자에 대해 차별적인가. 그는 불교란 불평등을 인정하는 종교라고 단언했다. 그는 자신이 더 오랫동안 더 많은 불교 공부를 했으므로 자신이 전문가라 자처했다. 참으로 그는 부처님을 곡해하고 있었다.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의 비구니 8경계가 부처님이 만드신 계율이 아니라는 연구도 있지만 설령 그런 것을 부처님이 만들었다 해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구니를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구니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율이었다. 고대 인도사회에서 여자란 남자의 소유물이고 재산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지위란 카스트의 최하층인 수드라 계급, 불가촉천민과 같았다. 처음 부처가 자신을 길러준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 파자파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출가를 허가하지 않았던 것은 여성을 차별해서가 아니다. 출가한 여성들이 남자들의 공격을 받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재산인 여자가 출가를 하게 되면 재산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어떤 보복을 가할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출가를 했더라도 비구니들은 여전히 뼛속까지 보수적인 비구들의 차별과 공격을 받을 것이 염려됐다. 처음부터 비구의 비구니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제거하기 위해 만든 계율,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계율이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비구니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는 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여자든 남자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은 카스트 제도로 차별을 당연시하던 인도사회에 부처님이 던진 인간해방의 선포였다. 그 젊은 스님은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인습에 젖어 있었다. 그가 자비심도 없이, 문자에만 매달려 방편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무명에 빠져 있다면 옴마니밧메훔을 부지런히 외우고 한 순간도 염주 돌리는 손을 멈추지 않은들 무슨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교회가 사는 모습을 볼 때에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흔히 이렇다. “교회를 보지 말고 예수를 보라.” 나는 이런 말이 교회 역사상 가장 감상적이고 가치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표현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 중심 자리에서 밀어내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 속에서 구체적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복음에 가장 기초가 되는 부분 -육화-을 부인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것을 보고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예수가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짐 윌리스, ‘교회를 다시 세우기' (참 사람 되어) - 이는 단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거대한 불사에만 여념이 없는 사원들, 부유한 사원과 가난한 신자들. 같은 질문에 불교도들은 이렇게 답한다. ‘스님을 보고 절에 가는 가? 부처님을 보고 가는 것이지!’ 하지만 그 답 또한 불교 역사상 가장 감상적이고 가치 없는 답이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원은 부처님의 사원이 아니다. 예수님이 부자를 죄인이라 탓하고 무조건 가난한 이들과 나누라 하신 복음 말씀은 부처님이 자비가 곧 부처라 하신 경전 말씀과 같다. 나눔과 자비를 모르는 교회와 사원. ‘저 세상의 문제를 다루는 관청’으로 군림하기만 하는 교회와 사원. 세계 도처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이 있는데 부자가 되는 것은 분명 죄악이다. 사람들 개개인도 그런데 하물며 교회와 사원이겠는가. 부자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영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진 것을 나누지 않는, 자비의 실천 없는 영적 추구는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나누지 않는 교회와 사원이 사랑과 자비를 말하고 거룩한 삶에 대해 떠드는 것은 기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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