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건축기행 ] 암스테르담의'비잔티움'
'러' 구성주의 건축의 현대적 부활 '평범했다'

/글·사진=류혜숙 객원기자

암스테르담 비잔티움 전경. 비잔티움 모서리에 매달린 듯 공중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암스테르담 비잔티움 전경. 비잔티움 모서리에 매달린 듯 공중카페가 만들어져 있다.
리움과 서울대 미술관을 떠들썩하게 설계하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알려진 건축가 렘 쿨하스의 1991년 작품이다. 사진을 통해서 수 없이 봐왔던 건물인데도 실제 눈으로 확인한 비잔티움은 조금 실망스럽다. 피상적이고 얄팍한 기대감,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에 내가 너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까.

"쇼핑가에 가겠네. 유럽에서 한국의 전자제품이 꽤 유행인 건 알죠? 비싸서 잘 못 사요. 그래도 암스테르담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자제품은 좀 싼 편이어서 휴대폰 같은 기기들을 많이 사러 와요. 다른 도시에서 일부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홍등가에도 가 볼 거죠? 어두워지면 카메라 조심해요. 메고 있어도 뺏어 달아나는 사람들이에요. 가방에 넣는 게 제일 안전하겠네. 가방을 뺏어 가면 그건 운이라 생각하고."

도심으로 간다고 하니 주인 언니의 부연 설명이 길어진다. '유럽에서는 물 한모금도 돈'이라며 챙겨주는 작은 물통과 직접 구운 쿠키 몇 조각을 들고 차가운 아침을 나선다. 뺏어 가면 운이라니, 온 몸에 힘이 꽉 든다.

# 비잔티움(Byzantium)

하다 만 숙제처럼, 짜다 만 스웨터처럼, 꼭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마무리해야지 하면서도 몇 년간 직접 대면을 미루어왔던 건물이 있다.

비잔티움. 리움과 서울대 미술관을 떠들썩하게 설계하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알려진 건축가 렘 쿨하스(Rem Koolhaas)의 1991년 작품이다. 그것이 도심 한가운데에 있다.

렘 쿨하스는 90년대 이후, 네오 모던의 건축적 형태에서 가장 중요한 디자인 원천인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 건축의 추상적 디자인을 최초로 현대에 다시 부각시킨 사람이었다. 스스로 신 구성주의자로 분류하는 그는 구성주의가 추구했던 혁명 이상을 후기 산업사회의 대중주의와 결탁시키고, 그러한 대중적 공공성을 메트로폴리스의 밀집 문화에 기원을 둔 자신의 건축 언어와 결합시켜 표현했다. 구성주의의 건축적 표현이 새로운 계층인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집합주택, 노동자 클럽 같은 체제 수호를 위한 수단 내지는 도구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현실주의적 선언이었다면, 그의 신구성주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밀집문화가 야기시키는 집합적 쾌락의 공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변형이었다.

그에게 있어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쾌락적인 장소는 클럽이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후 새로운 에너지의 축적을 위한 휴식과 다양한 문화적 행위의 장소로 계획되었던 노동자 클럽의 현대적 변형이다. 비잔티움은 장방형건물의 꼭대기 모서리에 매달린 '공중 카페'라는 형태적 유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금빛으로 칠해진 고속도로 휴게소의 감자그릇 같은 그것. 이러한 형태는 1987년 지어진 헤이그의 국립 무용 극장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는데, 그곳 역시 극장 내의 레스토랑이다.

사실 비잔티움은 평범하다. 구성주의 특유의 자극적인 장면을 기대했다면, 그렇다. 사진을 통해서
댄스 씨어터. 1984년부터 시작하여 87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기하학적 블록에 둘러싸인 거꾸로 끝이 잘려진 황금빛 원추의 이 앗상블라쥬는 비잔티움보다 앞서 만들어져서인지 좀 더 저돌적으로 느껴진다. 헤이그 시청사 바로 앞에 있다.2
댄스 씨어터. 1984년부터 시작하여 87년에 완공한 건물이다. 기하학적 블록에 둘러싸인 거꾸로 끝이 잘려진 황금빛 원추의 이 앗상블라쥬는 비잔티움보다 앞서 만들어져서인지 좀 더 저돌적으로 느껴진다. 헤이그 시청사 바로 앞에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3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홍등가
수 없이 봐왔던 건물인 데도 불구하고 실제 눈으로 확인한 비잔티움은 조금 실망스럽다. 그의 신구성주의 어휘가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건물을 대하면 건물보다도 '렘 쿨하스'라는 이름이 더 크게 작용한다. 피상적이고 얄팍한 기대감, 아무래도 나는 깜짝 놀라게 하는 것들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 암스테르담의 도심풍경

반나절, 쇼핑거리를 느긋하게 걷고 홍등가를 기웃거릴 호사의 시간을 갖는다. 이 도시 중심부의 상점들은 13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 도심은 고도가 30m로 제한되어 암스테르담에서 용적률이 가장 높다.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겠지만 네덜란드에서도 기념비적인 건물을 허무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있던 그 자리 원형 그대로'라는 고집은 부리지 않는다. 건물을 분해하여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융통성은 개발을 위한 공간 마련, 즉 기존의 땅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대지 자체의 융통성을 의미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복잡한 쇼윈도, 고급 상점에서부터 인도를 점령하고 있는 싸구려 물건들까지 합세해 와글와글한 길을, 황금의 17세기에 몰려들었던 예술가들처럼 잔뜩 부풀린 멋으로 걷는다. 평화로운 운하를 따라 길게 이어진 화초와 꽃씨 가게들이 있는가 하면 마약을 파는 카페들이 공존하는 도시.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 이토록 쉽게 편리하고 진기한 물품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에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라는 데카르트의 말을 곱씹으면서.

# 네덜란드에서 性은 산업으로서 법적권리를 보장받는다

작은 운하를 끼고 붉은 빛의 긴 공간을 만들고 있는 홍등가는 차가운 날씨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누구하나 남 눈치를 살피는 사람 없이 모두들 당당한 걸음으로 유리창 속의 여인들을 본다. 쇼윈도의 휴대폰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빛과 다를 바 없다.

네덜란드에서 성이 산업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이들도 질병휴가나 세금 혜택, 임신 휴가, 월경 휴업 시 보상 문제, 연금 등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투쟁했고, 2001년 합법화를 이루어냈다. 그녀들의 노동조합인 '붉은 실'은 지금도 투쟁 중이다.

이곳의 여인들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당당하게 세금을 내며 정식 노동자로 인정받고 있다. 국가는 성 행위를 인간의 권리로 보고 있으며 그것을 박탈당할 위험에 처한 국민은 복지정책의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증 장애인에게 '섹스 도우미 여성 노동자(female sex aid worker)'를 방문할 비용을 지방당국이 지불하라는 판례가 있었다고 한다. 지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믿기 어려운 자유의 형태들 앞에서 잠시 당황한다. 아니, 믿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외면에 익숙한 풍경들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