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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 우리나라에 살았던 미국인 아담씨가 찍은 생활상입니다.

대구매일신문에서 전시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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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정확히 1970년도 잡지에 실린 광고들입니다.

현존하고 있는 업체도 있으며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기업들도 있습니다, 그시대의 생활상을 보고자해서 올립니다

업체와는 무관함을 밝히는 바입니다..

(작은 글자는 사진 떠블클릭 크게보세요)

이때부터새색시들은 꼭 다홍치마를 입었나봅니다

커피 두잔값으로.....

판박이 껌 무척 추억이 깃든 껌이죠?

당시에 광고에 얽힌 정보나 이야기 거리를 알고 계시는 분은 뎃글로

달아 주시면 최종 정리때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미지 훼손이나 상업용으로는 사용하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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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초등학교 입학식. 
코흘리게가 아니면 아이도 아니었던 그 때,
가슴의 손수건은 '학년표시'이기도 했다.
2학년들은 코를 흘려도 가슴에 손수건을 달지 않았다.
한참 쌈박질로 크던 그 때
이 손수건은 종종 코피도 닦아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일반 소비자들은 지정된 판매소에서 
한정된 양만을 구입 할 수 있었다.
재고가 바닥이 난 설탕 진열장 위에
품절 표지판을 올려 놓았다.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한남동에서 강남 신사동을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나룻배였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 "제1, 제2, 제3 한강교는
각하의 영도력의 상징입니다."고 나오듯이
한강다리는 새 문명의 도래이기도 했다.




명절이면 객지 나간 청년들도 마을 어르신들도 
'콩쿨대회'에 나가 '폼' 한번 잡는 소박한 꿈들이 있었다.
"땡-" 소쿠리(참가상) 갖고 가세요.




겨울 방학이 끝나고 

천막 학교에도 간만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시끌하다.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애국가(교가였나?)를 부르며 새학기를 시작한다.




얼어붙은 한강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썰매는 재산목록 1호였다.



불을 떼서 밥도 하고 난방도 하다 보면 
굴뚝이 막힐 때가 있었다.
꽹가리를 청소도구와 함께 메고 다니며 '나 왔소'를 알리던
아저씨들의 "뚫어~" 소리는 '똥퍼'와 '찹쌀떡'보다
훨씬 오래 전에 우리 동네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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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한 한국사의 천재 이율곡★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 우리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 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사상가이며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정치적인 얘기는 접어 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일본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 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 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 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조선왕조 실록에 3000번이상 등장하는 송시열★
송시열 그는 선조임금부터 숙종 임금때까지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은진이며 호는 우암[尤庵]이다. 그의 전성기는 효종때이며 효종임금의 오른팔이 되어 정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정계의 명망 때문에 교우관계가 넓었고 방대한 저술도 남겼다. 그러나 우암은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 때문에 교우관계가 끝까지 화합하지 못한경우가 많았는데 이점이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으로 철저히 무장된 학자였으며 흙탕물같은 정치판에는 끼어들지 말아야했다. 그는 83세로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압송되어오던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때까지 당쟁과 파벌의 투쟁을 벌인 전형적인 외골수 선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오는 사람은 오직 송시열 뿐이며 또 전국 42개 서원에 배향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역사적 비중을 가늠할수 있다.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증★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 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한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 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 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채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천재 가문에 또하나의 천재(이율곡의 아우) 이우★
"왕대밭에 왕대난다" 조선왕조 천재가문인 이율곡, 신사임당 가문이 배출한 또 하나의 천재 가 있다. 바로 이율곡의 동생 이우. 그는 조선조 통털어 시,서,화,금[詩,書,畵,琴]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여 4절로 불려지는 유일한 인물이다. 천불여이물[天不與二物]이라 하여 하늘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용모가 뛰어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어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어나면 지성이 모자라고,...이렇듯 여러 재능을 겸비하기란 천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그림은 물론 시와 글 가야금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고 특히 어머니의 화풍을 따라 초충[草蟲], 사군자 등을 잘 그렸으며 초충을 그려 길에 던지면 닭이 벌레인줄알고 와서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그의 아들 경절도 書,畵,琴에 뛰어난 삼절이었으며 신사임당의 삼절과 자신의 사절을 합치면 십절이 탄생되어 불세출의 기록을 역사속에 남겼다. 신사임당 家의 천재적 재능은 오늘날에도 살아숨쉬며 역사속의 거울이 되고 있다.

★과거급제 60년만에 판서가 된 윤경★
인간은 불평등 한 것일까? 앞장의 정태화 같은 인물은 판서란 직책은 모두거치며 정승도 여러차례 거쳤는데, 누구는 급제 60년만에 겨우 판서에 올랐으니 말이다. 관료들의 경노당 최고령 기록을 갖고 있는 윤경은 30세에 급제하여 90세가 되는 60년만에 공조판서가 되는 불가사이하고 유일무이한 진기록을 갖고있다. 90이 될 때까지 인내하고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며 버텨낸 그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는 인간승리의 전형을 보여 준 예라 하겠다. 마음이 너그럽고 욕심이 없는 것이 장수의 비결일까? 윤경은 98세까지 살다 간 장수인물이며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83세에 과거급제한 인간승리 박문규★
조선왕조 최고령 과거 급제자 박문규. 83세의 나이에 노익장을 과시하며 당당하게 최고령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박문규는 최고령 급제라는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기고 떠난 인간승리의 표본이었다. 도대체 학문의 끝은 어디이며 인간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초월한 나이에 자기도전에 성공하여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연출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조선조에 있어서 과거란 무엇이길래 80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시험에 집착하는가? 그 답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는 문신중심의 사회이고 문관에게 가문의 영광과 명예가 주어지며 부의 축적은 물론 부인의 축첩 등 수많은 특전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시험은 양반들의 유일한 출세길이었으며 가문의 흥망성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83세의 박문규는 과거시험을 몇 번이나 보았을까. 약 50여년을 시험에 매달렸으니 아마도 수 십 번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87년에 급제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병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지상과제의 한을 풀어서인지 그 이듬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76세에 처음 장가 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 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인공은 홍유손.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 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시습, 남효온, 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 있다.

★섹스심벌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 어우동,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어우동은 성종 때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도 책마다 다른데 ,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 이라고 되어있다. 어우동의 시댁은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였다. 어우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시 그 자리에서 본능적인 행동을 하였고, 특히 근친 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몸에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기를 강요하였다. 한국의 3공화국때 정인숙 LIST처럼 그는 어우동 LIST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인해 신세를 망친 관리들이 많았으며 나중에는 도승지 김계창의 줄기찬 탄핵으로 의금부의 문초 끝에 삶의 여정을 끝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조선왕조 최연소 급제자[만14세] 이건창★
조선시대 20세 미만 급제자는 30명이며 그중 최연소 급제자는 1866년[고종30년] 강화도별시문과에서 6명중 5등으로 뽑힌 만14세의 이건창[전주이씨]이다. 이건창은 판서 이시원의 손자로 강화출생이며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조정에서도 너무 일찍 급제하였다 하여 4년뒤인 만18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의 벼슬을 주었다. 이건창의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성격으로 암행어사 때는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낱낱이 들쳐 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여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저술에 몰두하여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당의통략]을 저술하는 등 조선말기의 대문장가로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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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박문수가 겪은 이야기
 
거지에게 온정을 베푼 박문수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꼴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었는데, 봉놋방에 턱 들어가 보니 웬 거지가 큰 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본 체 만 체,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거, 댁은 저녁밥을 드셨수?”
 “아, 돈이 있어야 밥을 사 먹지.”
 그래서 밥을 한 상 더 시켜다 먹으라고 줬다. 그 이튿날 아침에도 밥을 한 상 더 시켜다주니까 거지가 먹고 나서 말을 꺼냈다.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 게 아니라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 게 어떻소?”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꼴이니 그런 말 할만도 하다. 그래서 그 날부터 둘이 같이 다녔다.
 
 
 세 사람 살려주고 사례로 받은 백 냥
 제법 큰 동네로 들어서니 마침 소나기가 막 쏟아졌다. 그러자 거지는 박문수를 데리고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왓집으로 썩 들어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잔말 말고 나 시키는 대로만 하시오.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 깔고 머리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시키는 대로 했다.
 
 그 때 이 집 남편은 머슴 둘을 데리고 뒷산에 나무 베러 가 있었다. 저희 어머니가 나이 아흔이라 미리 관목이나 장만해 놓으려고 간 것이다.
 
 나무를 베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오자 비를 피한다고 큰 바위 밑에 들어갔다. 그 때 저 아래서‘아이고 아이고’곡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얘들아, 어서 내려가자.”
 머슴 둘을 데리고 부리나케 내려오는데 뒤에서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사정을 듣고 거지한데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내 재산을 다 달란대도 내놓으리다.”
 “아,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7대독자 구해주고 사례로 받은 백 냥
 며칠 지나서 어떤 마을에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가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우리 집에 7대독자 귀한 아들이 있는데, 이 아이가 병이 들어 다 죽어가니 어찌 안 울겠소?”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 가지고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 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거 바람벽에서 흙을 한줌 떼어 오시오.”
 
 바람벽에 붙은 흙을 한줌 떼어다 주니 동글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말짱해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을 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대도 드리리다.”
 “아,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또 백 냥을 받아 가지고는 다시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거요.”
 
 묘자리 봐주고 사례로 받은 백 냥
 며칠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 깨나 하는 집에서 장사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해?”
 하고 마구 소리를 쳤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그래,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배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송장 든 관이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석자 세 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 곳을 파 보니, 아닌게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명당인데 도둑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묘자리를 이렇게 잘 보아 주셨으니 우리 재산을 다 달란대도 내놓겠습니다.”
 “아,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약속대로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냥을 받았다. 받아 가지고는 또 박문수를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백일 정성 끝에 마련된 삼백 냥
 그리고 나서 또 가는데, 거기는 산중이라서 한참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이 없었다. 그런 산중에서 갑자기 거지가 말을 꺼냈다.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되겠소.”
 “아,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고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 하나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을 한 그릇 떠다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한시 바삐 제 아버지를 살려 줍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비느냐고 물어보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이온데, 심부름 중에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드리는 중입니다.”
 
 박문수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줬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지마는 가만히 살펴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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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모쓴 어린이들

어른들은 왜 싸울까?
전투 중인 미군 아저씨들로부터 철모를 얻어쓴
두 꼬마 아가씨가 대포 소리가 너무 무서워 귀를 막고 있다. 난리통에
부모를잃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유명한 사진기자 David D. Duncan이
찍은 보도 사진이다.




이게 유토피아?인천 상륙작전이 끝난 뒤한 해병이 파괴된 인천 시내를 순찰하다가 어린 아이와 만난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행운아들이다. "유토피아"(이상향)이라는 다방 간판이 폐허가 된 거리 풍경과 아이러니칼한 대조를 이루고있다.
(미국 국립 문서보관소 사진)


고집불통 노인


"피난을 가더라도 갓은 써야지" 미군 찦차에 실려 두 손자와 함께피난 가는할아버지와 할머니.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사진인데, 사진 설명을 보면, 중공군과전투가 있으니 동네를 떠나달라는 미군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동네 이장인 이 할아버지가 피난 가기를 거부, 할수없이 찦차로 모시고 가는 길이라고 적혀있다.(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방향이 다른 두 행렬

군인은 북쪽으로, 피난민은 남쪽으로 6.25가 터진지열흘이 지나서 미군은 처음으로 오산 죽미령에서 인민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계속 남하하는 북한 침략군을 저지하기 위해 북으로 행진하는 미군들과 그정반대 방향으로 피난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겁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아이와 탱크

탱크도 무섭지 않은 아이들 하도 많이봐서 이제는 탱크가 지나가도
마차가 지나는것 처럼 무관심한 어린이들.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식량 구하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아줌마들

아줌마는 강하다! 머리엔 무엇인가 잔뜩 이고 지팡이를 짚고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아줌마...아마도 식량을 구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 것이다.길 옆에서는 미군들이대포를 쏠 준비를 하고 있다
.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엄마는 위대하다

엄마는 위대하다 피난길에 걸어가면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이 아기가 지금은 56세쯤
되었을 것이다.어디선가 8순 할머니가된 어머니를 잘 모시고 살고 있을 것이다.
(LIFE잡지 사진)




탱크와 피난민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 북진하는 탱크에 방해가 될세라 얌전히 길 한쪽에 한줄로 서서 걸어가는 피난민 대열. 자세히 보면 젊은 사람은 없고 노인들과 아녀자들 뿐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초컬랫

헬로! 땡큐!
미군으로부터 초컬랫을 받고있는 어린이. 처음 보는 것이라 과자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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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주변에는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어진 것이 너무나 많다.

가까운 들판에만 가면 들천지가 황새로 가득했는데,

농약을 많이쳐서

들판에는 메뚜기가 없어지고, 미꾸라지가 없어지고, 논고둥이 없어지고, 개구리도 자취를 감추면서

우리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집주변에서

그많던 잠자리거미가 없어지고,

하루살이가 줄어들고

못이 메워지고, 하천이 복개되고, 개울이 포장되고, 초가집이 양옥집으로, 헌집이 아파트로 바뀌면서

제비도 오지않는다.

밭에도 농약을치고 비료로 갈아엎으니

매미애벌레가 살지 못하고 전멸되어

예전의 큰매미는자취를 감췄다.

깨끗한 개울물이 있어야 산다는 여름에는 흔하던 반딧불은 개울 없어진후

자취도 없고, 무슨 郡에서 반딧불 몇마리를 날려 반딧불축제를 반짝할뿐이다.

과일을 수확할때면 나무마다 몇개씩 남겨 까치밥이라며 귀염을 받던 까치는 국민은행의 반가운 손님의 심벌이었는데, 과일을 파먹는다고, 電柱에 집을 지어 정전사고를 일으킨다는 핑계로

이것마저도 까치소탕전에 희생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많이 남아 생존하는 맷돼지는 농작물을 해친다고

산탄총으로 소탕작전에 희생된다.

온산에 각 종가 즐비하게 지저귀고, 집뒤 울타리에 굴뚝새가 날고,

뽕잎에는 누에가 뽕잎을 먹고 있었는데

이젠 누에는 잠농원에서 길러져 명주실을 생산할 뿐이다.

들판 보리밭에 노고지리, 강가에 물새찌르레기가 잡아먹는 조차도 없는데도 사라지고

산에 피는 방망이꽃,조리꽃들이 가까운산에 가도 자취도 없고,

산과 들에 떠다니는 노랑나비도 구경하기 힘들다.

집주변의 잠자리도 자꾸만 줄어들고

늘 보던것들이 없어지고 나니 만 이세상에 아직도 살아남아 숨을 쉬고 있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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