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林원장과 함께 하는 삼자경三字經 이야기 (10)

融 四 歲 能 讓 梨
융 사 세 능 양 리
róng sì suì néng ràng lí

弟 於 長 宜 先 知
제 어 장 의 선 지
dì yú zhǎng yí xiān zhī

[해석] ‘(공)융은 네 살 때 배를 양보할 줄 알았으니 윗사람을 공경함은 마땅히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동한(東漢) 시기 공융(孔融)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네 살 때 이미 큰 배를 형들에게 양보할 줄 알았다. 이렇게 윗사람을 공경하며 우애 있고 겸손함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도리이다.

[주석]

1.융(融):화합하다, 여기서는 사람이름.
2.양(讓):양보하다, 다투지 않다.
3.리(梨):배, 과일의 일종.
4.제(弟):아우, 여기서는 공경할 제(悌)의 의미.
5.장(長):길다, 연장자.
6. 의(宜):마땅하다.

【관련 일화 : 공융이 배를 양보하다(孔融讓梨)】

공융(孔融 153~208)은 동한(東漢) 말기의 유학자이자 대문장가로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의 20대 손이다.
공융에게는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겨우 네 살 때부터 형들을 존경하고 겸양하는 도리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배를 한바구니 보내와 부친이 형제들을 불러 한 사람당 한 개씩 가져가게 했다. 그러면서 융에게 먼저 가져가게 하자 그는 선뜻 가장 작은 것을 골라 형들에게 양보했다. 부친이 이 모습을 보고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천진난만하게 “형들은 저보다 크니까 당연히 큰 걸 먹어야 해요. 저는 어리니까 작은 걸 먹어야 해요.”라고 대답했다. 부친이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맞다.”고 인정해주었다.
공융이 형들에게 배를 양보한 이 일화는 몇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와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공융은 12세 되던 해에 이미 총명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재주가 있었다. 한번은 부친이 경성(京城)에 있는 벗을 방문할 때 공융을 데려간 적이 있다. 당시 아주 거만한 한 관리가 있었는데 유명 인사가 아니면 아예 손님으로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공융의 부친이 이 사람을 만나고 싶었으나 혹여 문전박대를 당할까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융이 자진해서 부친께 “아버님 마음 놓으세요. 소자가 이 일을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융은 큰 걸음으로 당당하게 그 관원의 집 앞에 가서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이(李) 대관원(大官員)께 이 대인(大人)과 친밀한 집안의 자제가 일이 있어 찾아왔노라고 전해주시게!” 이 대인은 자신과 친밀한 집안의 자제라는 말을 듣고는 곧 공융을 안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혹시 자네 조부님이 나를 아시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공융은 침착하게 “그렇습니다. 저희 선조는 공자님이시고 어르신의 선조는 노자님(노자의 성이 이씨이다)이신데 두 분이 서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이었다고 하오니 저 공융과 어르신도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주변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이 아이의 장래가 촉망하리라 인정했다.
공융은 이들의 예측대로 성장한 후 과연 고위 관원이 되었고 고상한 품격과 뛰어난 재주로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설】 사서에 보면 공융(孔融 153—208년) 일가에게는 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한 시기에는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등극해 외척의 세력이 강했다. 외척의 세력을 누르고 황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로 황제 측근에 있는 환관(宦官) 세력을 이용했다. 그 결과 일부 외척을 제압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환관들이 정치에 개입하여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환관 세력들은 관료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는 죄목으로 여러 사람을 제거했다. 이를 ‘당고(黨錮)의 화’라고 하는데 이 당시 장검(張儉)이란 인물이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장검은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한 벗이었다. 장검이 수배를 피해 공포의 집을 찾아왔으나 공교롭게도 마침 집에는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고 당시 16세인 공융만 있었다. 장검은 공융의 나이가 너무 어려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공융은 장검의 형색이 당황스런 것을 보고 집에 머물게 해주었다.
나중에 장검을 집에 숨겨준 일이 탄로나 장검은 다른 곳으로 도주했고 공융, 공포가 대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공융은 사람들에게 장검을 머물게 한 것은 자신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형인 공포는 “그는 나를 찾아온 손님으로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공융의 모친 역시 가장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섰다. 결국 일가족이 서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며 죽음을 자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결국 나중에 황제는 공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을 통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공융의 명성이 더욱 커졌다.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융은 어릴 때부터 겸양의 도리를 알았지만 또 정의를 위해 결연히 나서는 단호한 모습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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