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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전해준 문화로 돌아가는 것, 예술이 가야 할 진정한 길입니다”
2004년부터 국내에서 시작된 ‘진선인 국제미술전’이 벌써 80회를 넘었다. 그동안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등 여러 도시에서 열린 전시회에는 많은 시민과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미술전을 처음 제안했던 사람은 장쿤룬(68, 張昆侖) 전 산둥예술대학 교수이다. 그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예술가를 모아 2003년부터 전시회를 준비했다. 2004년 미국 워싱턴 D.C. 레이번하우스(하원의원회관)에서 처음 전시된 이후, 캐나다의회(오타와), 유럽의회(EP, 브뤼셀) 북미, 유럽, 인도에서 중국 내 인권탄압 실상을 알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 ||||
장쿤룬 교수가 그린 ‘붉은 벽’(2004)에서 혹형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파룬궁 수련생이다.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한 99년 이후 그림 속 이야기는 실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림 속 세 남자의 모습은 파룬궁을 수련하는 장쿤룬 전 교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쿤룬 전 교수는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로 손꼽힌다. 세계명인록에 이름이 오른 그는 조각뿐만이 아니라 중국화와 서양회화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항상 진정한 인생과 예술의 길이 무엇인지 찾아 헤맸다. 그에게 그림은 인생과 우주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발견하고 깨달은 진리를 예술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온갖 책을 섭렵하고 여러 가지 기공을 배운 것도 탐구과정의 하나였다. 중국을 떠나 여기저기 많은 곳을 다닌 것도 인생의 참뜻을 깨닫고 예술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 말 캐나다로 떠난 그는 1989년부터 1990년까지 캐나다 몬트리올 맥길대학(McGill University) 방문교수를 역임했다. “기공이든 수련이든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불교의 법리도 들어 봤지만 진정한 법리를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책 속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었죠.” 해답을 찾다 96년 그는 우연히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중국에 잠시 들어간 부인이 어느 날 전화로 재미있는 말을 했다. 중국에서 파룬궁이라는 걸 배웠는데 다른 기공은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 얼마 후 캐나다로 돌아온 아내는 여러 가지 파룬궁 관련 책을 가져왔고 그는 그동안 찾아 헤매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다른 기공은 법리(法理)가 없었는데 파룬궁은 법리가 있었어요. 수련서인 전법륜은 인생과 우주, 그리고 수련의 이치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 놓았더라고요. 진정한 수련의 책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건강에도 정말 좋았고요.” 그해 그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나이가 드신 장모님 때문이기도 했지만 파룬궁의 뿌리가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2001년까지 그는 산둥 예술대학 조각연구실 주임 교수를 맡았다.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마음도 넓어졌어요. 관념도 많이 바뀌었고요. 그리고 예술을 창작할 때 지혜도 열려요. 이전엔 작품을 구상하려면 다 써가는 치약을 짜내듯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 지금은 사물에 대한 인식이 깊어져서 조금만 마음을 집중하면 됩니다.” 관념이 변했다는 건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변했다는 걸 뜻한다고 그가 설명했다. “50년간 중국에 살면서 공산당 세뇌에 무신론자로 지냈어요. 그러나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많은 것을 체험했고 신불(神佛)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어요. 동시에 예술에서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어요. 예술이 가야 할 진정한 바른 길을 알게 된 거죠. 제가 느낀 건 예술은 신이 전해준 전통적인 문화로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
2000년, 그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불법 감금됐다. 잡혀갈 당시의 상황은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주 잔인했어요. 전기충격기로 때리는데 신음조차 못 냈어요. 전기봉을 입 앞에 대고서 소리를 내면 입 안에 넣으려 했어요. 당시 공안들은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생은 어떻게 고문해도 괜찮다. 고문하다 죽으면 자살한 걸로 치라고 했다’며 잔인한 고문을 계속했어요.” 그는 그를 고문하고 신문하던 사람 중엔 착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파룬궁이 좋고 파룬궁을 위해 좋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밥줄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저는 중공이 파룬궁을 탄압하면서 많은 중국 간부나 경찰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여러 사람이 발과 머리를 엇갈려 누워야 겨우 잘 수 있는 좁은 방에서 곰팡이가 슬고 딱딱해진 음식을 먹으며 한 달을 지냈다. 잠시 석방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또 세뇌반에 갇혔다. 단식으로 항의하자 9일째 되는 날 풀려났다. 하지만 곧바로 노동교양소에 갇혔다. 그가 도착하자 벌써 30여 명의 수련생이 갇혀 있었다. 그는 어떤 고문과 박해에도 파룬궁 수련생들은 진선인(眞·善·忍)에 대한 믿음과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캐나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그의 감금 소식은 곧 세계로 알려졌다. 캐나다 정부와 서명운동에 동참한 전 세계 시민의 압력에 중공은 그를 석방했고 2001년 1월 그는 캐나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중공은 그가 고문받은 내용을 발설할까봐 천방백계로 그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각종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예술가를 모아 미술전을 시작한 것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수련과정 중에서 신기하고 아름다운 체험을 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많은 수련생이 끔찍한 박해를 겪고 있어요. 그래서 2003년부터 이런 사실을 그림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11명의 작가와 함께 1년을 거쳐 40여 점을 창작했고 세계 순회전시도 시작했어요. 미술전 작품은 세계에서 아주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사람들의 도덕을 일깨우며 사회 안정에도 기여했고요. 중국인 관람객에게는 중공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됐죠. 그림을 본 많은 사람이 이런 사실은 널리 알려야 된다고 해서 전 세계 순회전시도 하게 됐습니다.” 그는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작가들이 수련을 통해 닦아낸 순정하고 착한 마음으로 창작해낸 작품이며 때론 피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른 경험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활발하게 미술전이 열린다는 걸 안다며 그는 한국 관람객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아마 더 인연이 있고 또 선량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림은 모두 작가가 체험하거나 감수한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는 한국 관람객과 마음의 교류가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나누며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작가 약력> 중국미술대학(China Fine Art University) 조각전공. 전 산동예술대학 조형학과장 및 주임교수. 맥길대학 방문교수 역임. 2008년 NTD TV 중국국제 유화인물대회 심사위원장. ‘조각 교육과 창조를 위한 탐구 시도’, ‘절대 공간과의 연결에서의 해방’, ‘초보 조각구성 소개’ 집필. 2006 & 2005 조상 ‘부처’, ‘우리(CAGE)’, 그림 ‘POSITIONING’, ‘사악한 경찰’, ‘붉은 벽’ 등 진선인 국제미술전 작품 출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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