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어도 와달라는 말 못하는 내 아들"



프롤로그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 국적의 파룬궁 수련생 32명은 지난 2004년 5월 법무부장관에게 난민인정신청을 제기했다. 2008년 1월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원고 2명이 승소 판결을 받으며 난민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지난 2월 26일 대법원이 모든 원고에 대해 기각판결을 내리며 5년 동안 지속한 파룬궁 난민소송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에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다 한국으로 건너왔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가슴에 묻은 채 긴 시간을 보냈다. 한국은 이들이 파룬궁을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법원은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가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의 진실한 이야기는 다르다.

난민 신청자들에게 진술 내용 공개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중공은 가족 간 전화 통화 도청, 집 주변에 공개수배 전단을 배포하는 등 중국에 남아있는 난민 신청자 가족들을 압박하고 있다.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가명으로 밝힌 이도 있다. 다만 그들은 철저하게 은폐되고 있는 중국의 잔인하고 무도한 탄압을 알리기 위해 어렵게 공개를 결정했다.

수련을 시작하다

중국 흑룡강성이 l고향인 박성홍씨(가명, 42세). 그는 냉면집을 경영했었다. 98년 당시 중국에선 파룬궁에 대한 입소문이 자자했다. 그도 친구에게 좋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어 후루도우시 아동 공원에서 연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매일 이른 새벽이면 150~200여명이 공원에서 함께 연공을 했다. 그에게는 함께 수련하던 수련생 스잉춘이 있었다.

참혹한 박해 속에서

1999년 7월 20일 새벽 5시. 후루도시 공안당국은 경찰과 무장 부대를 동원해서 강제로 연공장을 폐쇄하고 해산시켰다. 연공 하고 있는 수련생들은 그의 눈앞에서 강제로 끌려가 차에 실려갔다. 파룬궁이 좋다며 국가에서도 권장했던 수련을 하루아침에 탄압을 하겠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 해 10월 1일 새벽, 박씨는 수련생들 네 명과 공원에서 연공을 했다. 다음날엔 네 명이 더 합류했다. 하지만, 3일째 되던 날 그가 조금 늦게 공원에 나갔을 때 이미 10여명의 수련생들이 공안에 체포된 뒤였다. 석방을 요청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진상을 알려야 했다. 다음날 새벽 집에서 연공을 미리 하고 일찌감치 공원에 나섰다. 다른 두 명의 수련생도 함께 했다. 하지만, 후루도우 치툰 구치소에 30일간 감금 처분을 받았다. 박씨의 집은 수색 당했고, 파룬궁 관련 서적과 녹음테이프를 빼앗겼다.

감금된 동안 혹독한 고문이 계속됐다. 박해에 반대하는 의미로 단식도 했다. 하지만 악경들은 파룬궁 수련생을 범죄자로 취급했고, 오히려 범죄자보다 더 심하게 구타했다. 기다리다 못한 박씨의 아내는 200위안을 내고서야 겨우 면회를 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수련했던 스잉춘은 2년, 스잉춘의 아들인 왕줘는 3년 노동교양 선고를 받았다. 박씨도 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노동교양을 시키겠다는 위협을 받고 마음에도 없는 각서를 쓰고 1200위안을 내고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인정하지 않고, 파룬궁 관련사이트 '명혜망'에 무효성명을 올렸다. 스잉춘은 그 해 10월 공안당국에 붙잡혀 마산쟈 노교소에서 2년간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받고, 11월엔 후루도시 간수소에 감금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한국으로 건너오다

가족들은 안전을 염려해 박씨에게 외출을 자제시켰다. 하지만, 집수색의 공포가 계속되자 그에게 한국으로 피할 것을 권유했다. 중국에 있으면 언제 끌려갈지 모르고, 가정도 파탄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00년 1월 그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오자마자 서점에 들렀다.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일당직과 건설 현장일을 하며 파룬궁 박해 사실을 알리는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2003년 뜻밖의 소식이 들렸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박씨는 참담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조차 지켜드리지 못해 답답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보고 싶어도 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박씨도 가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감시와 탄압이 없어지는 때가 온다면, 마음 속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 그는 다시금 마음을 추스렸다.

희망을 이야기하다

난민 신청 기각. 이제 그는 한국에서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추방이 된다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비린내 나는 탄압의 굴로 들어가야 한다.

"언제 정부가 어떤 조치를 취할지... 막연하고 불안합니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돌려보내려고 하니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도 들고, 착잡합니다."

그는 한 가지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정부에서는 수련생들이 한국에 돈 벌러 왔다고 말해요. 돈 버는 일은 최소한 가정을 지켜야하기 때문이에요. 중국에서 파룬궁 탄압이 10년 됐어요. 같이 연공하고 같이 수련하던 사람들이 죽었거나, 아직도 감옥에 갇혀서 참을 수 없는 고문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돈 많이 벌려고 한국에 온 게 아니에요. 탄압이 끝날 때까지 저는 탄압 중지 노력을 계속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