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박해, 파룬궁 도왔다

대기원시보 특별보도

2005년 파룬궁 수련자들이 대만에서 단체로 연공하고 있다.ⓒ 명혜망
중국의 수련단체 파룬궁은 현재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공산당의 본질을 파헤친 대기원시보의 사설 ‘9평 공산당’은 20004년 발표 이후 중국 전역에 널리 퍼졌다. 뉴욕에 본부를 두고 있는 션윈예술단은 불과 2년 만에 세계적인 공연 브랜드로 올라섰다.

중국 공산당은 이 현상들을 줄곧 방해하면서 저지하려 했지만 역으로 확산을 돕는 역할을 했다. 10년째 파룬궁을 탄압하고 있는 중공이 오히려 파룬궁을 도와 파룬궁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줄곧 공산당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공산당이 적이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10년의 과정에서 파룬궁 수련자와 중국 공산당은 진실 대 거짓, 평화 대 폭력, 선량 대 잔혹으로 대비됐다.

중공은 동서고금의 갖가지 사악하고 잔인한 수법을 동원해 파룬궁 수련자를 탄압했고, 파룬궁 수련자들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국제사회에 중공의 추악함을 폭로했다. 이 총성 없는 전쟁에서 중공은 결과적으로 파룬궁 수련자들의 도덕을 부각시켰다. 악순환의 수렁에 빠져든 중공은 현재 스스로를 해체하는 과정에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과 세계인들에게 이 10년의 과정 중에서 드러난 진상을 직시하길 바라는 바이다.

더 이상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합리화할 필요 없이, 잔혹하고 심각한 탄압에 대해 바른 목소리를 내고 저지하는 행동을 즉각 취해야 할 것이다.

중공의 잔혹한 탄압과 파룬궁 수련자들의 평화적인 탄압 반대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지 말아야 하며, 양자가 정치적인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피해를 받는 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파룬궁 수련자들이 탄압에 대한 평화적인 대응은 지금 시대의 소중한 정신적 가치이자 인류의 미래라 할 수 있다.

1999년 4월 25일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평화롭게 청원하고 있는 파룬궁 수련자들ⓒ 명혜망
4.25 사건과 탄압의 시작

10년 전 ‘4.25’ 사건은 파룬궁이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사건의 발단은 파룬궁 탄압을 주도한 당시 법률위원회 서기 뤄간과 그의 동서인 어용과학자 허쭤슈에 의해서였다. 허쭤슈는 4월 11일 텐진교육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 ‘청소년박람’에 허위사실을 바탕으로 파룬궁을 비방하는 칼럼을 기고했고, 톈진의 파룬궁 수련자들은 잡지사를 찾아가 진상을 알렸고 잡지사는 정정문 발표를 약속했다. 하지만 곧바로 도착한 특수부대는 노인과 임산부를 비롯해 45명의 수련자를 구타한 뒤 체포했고, 톈진시 당국은 베이징에서 명령을 받았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뒤 각지의 파룬궁 수련자 1만여 명이 베이징 중난하이 국가청원사무실로 모여들었고 주룽리 총리는 현장에 도착해 “톈진 수련자 석방, 수련의 자유 보장, 파룬궁 서적의 합법적인 출판”을 약속했다. 이후 파룬궁 수련자들은 평화적인 시위를 마무리한 뒤 귀가했다. 일련의 과정을 취재한 외신들은 물리적 충돌이나 구호 등이 전혀 없었고 해산 뒤에도 거리에 휴지 하나 없었다고 보도하면서 비폭력 평화시위를 진행한 파룬궁 수련자와 민주적으로 협상에 임한 주룽지 총리를 극찬했다.

하지만 국가주석 장쩌민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파룬궁 수련자의 숫자가 공산당원의 2배에 달하는 1억 명을 넘어서자 경계심을 드러냈고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신앙하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 무신론이 파룬궁을 싸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상무위원들에 알린 뒤, 7월 20일부터 국가기구와 언론을 총동원해 파룬궁 탄압에 착수했다.

2001년 4월까지 베이징에서 상방(민원 제기)하다 체포된 파룬궁 수련자는 약 80만 명으로 알려졌다.ⓒ 명혜망
‘드러나는 거짓말’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탄압은 항상 여론을 조성한 뒤 시작됐다. 본보 시리즈 사설 ‘9평 공산당’의 5평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중국 공산당의 절대적인 통제 하에 있는 2천 개의 신문사, 일천여 개의 잡지사, 수백 개의 지방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국은 하나같이 총동원돼 전력을 다해 파룬궁을 모함하는 선전을 해나갔다. 그런데 이런 선전은, 다시 관영통신인 신화사(新華社), 중신사(中新社), 중통사(中通社)와 해외 중공매체 등을 통하여, 해외 모든 국가들에까지 퍼져 나갔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그 당시 짧은 반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 매체가 중국과 국외에서 파룬궁을 모함보도하고 비판한 문장이 놀랍게도 30여만 차례에 달한다. 외국에 주재하는 중국 대사관과 영사관에도 이른바 파룬궁을 비판하는 화보, CD, 단행본을 비치했으며, 중국 외교부 사이트에도 전문적으로 파룬궁을 비판하는 전문코너를 만들었다.

중공의 파룬궁에 대한 비판은 문화대혁명의 ‘대비판’ 장면을 연상시킨다. 공산당의 정치운동 패턴을 잘 알고 있는 서방 언론과 전문가들은 중국 공산당의 극력한 대처에 의구심을 가지고, 파룬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균형보도는 생명과 같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 이후 파룬궁 수련자의 목소리가 서방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고, 누가 탄압을 가했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점차 알려지게 됐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사는 알트씨는 1999년 CNN 보도로 파룬궁이 탄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파룬궁 수련자들이 연공하는 장면을 보도했는데,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셀 수 없이 많다.

확산되는 파룬궁 지지

중국 공산당의 전방위 선전에 대응해 각국의 파룬궁 수련자들도 자발적으로 진상 규명에 나섰다. 웹사이트, 신문, 방송국이 차례로 설립됐고, 파룬궁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파룬궁 수련자도 증가해 1999년 세계 30개국에서 수련했지만 현재 80여 국가로 확산됐으며, 관련서적도 40여개 언어로 번역됐다.

중국 공산당의 의도와는 반대로 탄압 10주년을 맞은 현재 파룬궁은 오히려 더 알려지게 됐고, 공산당 당국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비방 선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만에서 파룬궁 수련자 숫자는 1999년 탄압 이전 3천명에서 현재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미국 의회에서는 탄압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수차례 통과시켰으며, 각국 정부와 의회는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1500부 이상의 표창장을 수여했다.

각국 정부와 의회, 언론이 파룬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중공 지도자들과 관영언론의 ‘중시’ 때문이다. 1999년 9월 장쩌민은 뉴질랜드에서 열린 아태정상회의(APEC)에서, 중국 공산당이 제작한 파룬궁을 모함하는 소책자를 십여 개 국가 원수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각국 지도자들로 하여금 ‘동의’보다는 ‘실소’를 자아내게 했고, 공산당의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했다.

무리수가 부른 역효과

워싱턴 타임즈에 따르면 2001년 3월 9일,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국가안보 보좌관은 백악관에서 전 주미대사 주치천, 리다오위와 전 주캐나다 대사 장원푸를 면접했다. 이 날 회담의 주제는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을 비롯한 중미관계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중공측 대표는 파룬궁이 중국 정부를 어떻게 위협하는지에 대한 장문의 연설문을 꺼내 20분간 읽었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배후에서 파룬궁을 지원하고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격분한 라이스 보좌관은 회담을 중단했다. 이후에도 중공의 무리수는 많은 논란을 일으키면서 ‘역작용’을 일으켰다.

중국 공산당은 파룬궁 탄압과 함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자원을 동원했으며, 그 영역은 언론, 첩보전, 외교, 문화, 경제를 아우른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비방 선전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파룬궁 수련인들이 진상 알리기에 나섰고 시시비비를 가렸다. 2001년 ‘톈안먼 분신자살 사건’, 2006년 파룬궁 수련자 장기 적출 사건, 2008년 뉴욕 플러싱 사건 등이 모두 그렇다.

2편에서 계속

대기원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