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樂安邑城) - 근심 없이 살만한 평온한 고장

[대기원]전라남도 순천시의 외곽 벌교읍과 인접한 곳에 낙안읍성이 있다. 보통 우리나라의 성은 마을과 동떨어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나 산기슭,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곳 낙안읍성은 마을의 중심부에 있다. 해미읍성과 고창읍성과는 다르게 낙안읍성은 지금도 90세대 232명이 살고 있는 옛 모습이 잘 보존된 읍성이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사방에 4개의 성문이 있었다.

낙안은 백제 때는 분차군, 신라 때는 분령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인 낙안으로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군이었는데 이 고을에 불륜한 일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군으로 다시 승격되고 그 이후에 순천군으로 편입되었다.

▲ 90세대 232명이 살고있는 성 안
ⓒ 윤태화 기자
임경업 장군의 성 쌓기

낙안읍성은 조선태조 6년(1397년) 왜구가 많이 침입하므로 이곳 출신인 절제사 김빈길(金賓吉)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면서 성을 축조하였다. 그 후 인조 4년(1626년)에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큰칼로 낙안이 내려다보이는 금전산의 바위들을 내리쳐서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성 쌓기와 관련해서 또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임경업 장군은 왜구의 침입이 잦자 왜구를 무찌를 방도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임경업 장군의 누나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내기를 하였다. 동생이 성곽을 쌓는 동안에 누나는 병사들이 입을 옷을 만들기로 하였는데 누가 더 빨리하는가 하는 내기였다. 누나는 봄에 목화를 심고 가꾸어 수확하여 당시 2,000여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군복을 만들고 임경업 장군은 병사와 주민들을 동원하여 성곽을 쌓았는데, 누나가 옷을 다지어 놓았을 때 성곽은 아직도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개 아녀자가 일국의 장수를 이긴다는 것이 수많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까 염려가 되어 다지어 놓은 군복 중 한 벌의 옷고름을 풀고 달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성곽이 다 쌓아졌다는 소식이 들렸지만 누나는 옷고름을 달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두었다. 결국, 내기에는 졌지만 동생의 사기를 꺾지 않으려는 누나의 지극한 배려였던 것이다. 낙안읍성 한가운데는 지금도 임경업 장군의 선정비가 남아 있으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수호신으로 삼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제를 지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 익살스런 모습의 장승
가야금 병창의 명인 오태석

가야금 병창의 명인인 오태석(吳太石, 1895-1953) 명창은 이곳 낙안 출신이다. 가야금병창이란 한 사람이 가야금을 연주하며 소리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소리란 기존의 단가나 판소리 중의 한 대목, 또는 민요 같은 것을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판소리와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의 명인이었다. 오태석은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태어났는데 아버지의 공연을 보고 귀담아 들은 덕에 그 능력을 더욱 발휘하였다. 20세에 동편제의 대가인 송만갑(宋萬甲, 1865-1939)선생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1923년에는 전국에서 오태석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의 공연이 있는 날에는 공연장 앞이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오태석은 능란한 연기로 청중들을 금방 울리기도 하고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특히 무언극에서는 한쪽 눈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한쪽 눈으로는 싱글벙글 웃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봉사가 곽씨 부인을 안장하고 돌아와 탄식하는 장면을 노래하는 부분은 이것이 소리꾼의 소리인지 진짜 심봉사의 탄식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심봉사가 딸을 만나 눈을 뜨는 대목에서 마치 눈이 떨어지는 소리가 쩍쩍 하고 들리는가 하면 심청이가 뱃사공한테 팔려 가는 대목에서는 많은 사람을 울음바다로 만들기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생활의 어려움과 건강상의 이유로 낙안에 내려와 공연을 마치고 일본 공연을 가던 중 부산에서 타계했다.

윤태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