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 - 로뎅

1880년 8월 16일, 로댕은 프랑스 행정부 조형예술국으로부터 단테(1265,피렌체에서 출생 - 1321,라벤나에서 사망)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은 저부조 장식문을 주문받았다. 이 문은 1871년에 화재로 소실된 회계검사원 부지에 신축될 장식미술관을 위한 것이었다. 현재는 이 자리에 오르세미술관이 있다. 『신곡』의 주제는 아마도 로댕 자신이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단테의 오랜 신봉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머니에는 항상 이 시인의 책 한 권이 꽂혀 있었다. 항상 열정적인 이 '적당히 무르익은 꿈을 가진 몽상가' 는 곧 높이 5미터가 넘는 거대한 문 작업을 착수했다. 그는 100명이 넘는 인물을 환조로 모델링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1877년 <청동시대>를 제작할 당시 실제 인물로부터 직접 석고주물을 만들었다고 받은 비난이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개조형예술국으로부터 주요 의뢰를 받을 경우 그러하듯이 국가에서 제공하는 작업실을 할당받은 로댕은, 샹 드 마르스 근처 유니베르시테가의 대리석 보관소에 위치한 이 작업실을 평생 동안 지켰다.

로댕은 '격렬하게' 작업에 착수했고, 조형예술국 감독관들의 보고서와 정기적인 급여 지급이 증명하듯<지옥의 문>의 형태가 곧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피렌체 세례당의 <천국의 문>처럼 문짝을 여러 개의 패널들로 나누려고 했으나 <지옥의 문>두번째 모형 시스티나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처럼 세부 구획을 배제했다. 그는 단테 시의 3분의 2를 버리고, 가장 절망적인 부분인 지옥편에 집중했다. 다양한 형태로 된 다수의 인물들 속에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 <세 망령> 그리고 단테 자신인 <생각하는 사람> 등 식별할 수 있는 몇몇의 인물들만 살렸다. 이 인물들과 인물군상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모델링되었으며, 종종 건축적 요소들을 대신하면서 전통적인 기본구조를 침범했다. 로댕은 목재틀을 사용한 문짝 위에서 이 인물들을 형상화했다. 카미유 모클레르는 1918년의 저서 『로댕』 속에서 "매 순간 그는 작은 인물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다."고 언급하며 "어떤 느낌, 생각 또는 형태에 대한 재빠른 판단을 표현하면서, 그는 그것을 다른 인물들과 함께 문 속에 위치시키거나 이동시켰다. 필요하다면 또 다른 생각들을 추구하기 위해 그것을 파괴하여 파편들을 이용한다."고 썼다. 이 중 많은 인물들은 더욱 중요하고 크게 분리된 그룹들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로댕의 야심은 창조하는 것이었다(…). <문>은 로댕이 의도했던 인물 모두를 포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 모형 가까이 놓여진 판자 위에 나열되어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물상들은 소위 '그의 조각 인생의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로댕 영감의 전체적인 변화를 표상한다.


1884년 로댕은 자신의 계획을 너무 확신한 나머지 1885년 8월 20일의 공식적인 주문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주조를 위한 견적서를 작성했다. 그는 1885년 말엽 아니면 1886년 초반에 제작된 듯한 모형에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펠리시엥 롭스, 에드몽 드 공쿠르, 펠리시엥 샹소르 등 가까운 친구에게 그것을 보도록 허락했다. 특히 샹소르는 1886년 1월 16일자 『르 피가로』지에 석고에 대한 묘사를 처음으로 기고했다. 그 당시 <생각하는 사람>과 <세 망령>이 있었으며,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그룹(나중에 <입맞춤>으로 불리게 된다.)도 왼쪽 문짝 중앙에 있었다. 다음 단계는 젊은 영국 여인 제시 립스콤이 1887년 9월 로댕에게 보낸 사진들 덕택에 알려진다. 단테의 시에 보다 접근한 <우골리노>와 새로운 <파올로와 프란체스카>가 이제 처음의 모델을 대체했다. 그러나 팀파눔과 좌우 문짝은 아직 최종 단계의 작품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로댕은 정해진 어떠한 계획에도 따르지 않고 자발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으로 <문>을 계속 수정하고자 했다. 그는 "나는 배치, 움직임, 구성에 관한 한 내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을 따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오로지 개인적 즐거움의 문제인 것이다."라고 1887-88년경 미국인 저널리스트 트루만 바틀렛에게 말했다.로댕은 <문>의 모형을 1889년 만국박람회에 전시하고자 했으나, <깔레의 시민>을 4년여 동안 제작하던 중 1888년 2월에 대리석 <입맞춤>을, 1889년에 <빅토르 위고 기념비>를, 1891년에는 <발자크 기념비>를 위촉받았다.


이러한 작품 주문으로 인해 19세기의 마지막 몇 해만이 남을 때까지 로댕은 <문>에서 떨어져 있어야 했다. <문>은 결국 1900년이 될 때까지 전시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로댕은 <문>의 파괴를 위해 <문>으로 되돌아 왔다. 외젠느 드뤼에가 1898년경 찍은 작업실 사진속의 석고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의 문> 석고주물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로댕은 1899-1900년 겨울 <문>의 계획했던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고, 파리의 첫 개인전을 위해 1900년 만국박람회 시기에 알마 광장에 지어진 전시장으로 그것을 옮겼다. 6월 1일 《로댕》전이 개막되었을 때, 이전에 그의 작업실에서 석고를 보았던 몇몇 친한 친구들은 모든 인물군상들이 제거된 <문>의 새로운 변형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솔직히 그들 대부분은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화로운 곡선들 속에서 부풀어오르고 굽이치다가, 솟아오르고는 다시 떨어지는 홍수'의 시를 감지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로댕이 의도했던 작업 계획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만들어진 형상들이 아직 <문>에 배치되지 않았지만, 관람객은 뛰어난 구성의 장대함과, 빛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교묘하게 배치된 오목함과 볼록함이 충만한 표면에 감화되어버린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상력의 뛰어난 상징이 된 <문>이 미완성인 채로 전시되었을 때, 그것은 로댕이 세부를 완성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문>은 그가 심혈을 기울인 공식 의뢰작품이었을 뿐 아니라, 파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결국 대중들에게 공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전시회 개막 이후 로댕에게 <세 망령>과 같은 작은 군상들의 배치를 막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댕의 이러한 선택은 분명 그의 태도변화 때문이었다. <청동시대>에서 창을 제거하고 <명상>에서 팔 을 없앴듯이 로댕은 이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제거했다. 그는 <문>을 너무 즉각적으로 이해시키는 모든 것을 고의적으로 없앤 것이다. 특히 <문>을 여는 사람은 시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부르델의 말을 고려한다면, 로댕은 오목함과 볼록함 사이의 대조가 너무 과도하다고 본 듯하다. 로댕은 베네디트에게 "<문>에는 너무 많은 구멍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고정된 팀파눔이나 테두리 또는 문짝 위로 튀어나온 형상들로 인해 너무 많은 돌출부와 함몰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닫혀 있는 채로만 존재하는 문이다. 그것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리라."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 르네상스로부터 전수된 법칙, 즉 환상적이면서 완벽하게 명확한 특성을 보여주는 부조의 법칙을 초월하여 단테의 '지옥편'에서 분명히 제시된 비물질적인 공간, 동시에 당대인들의 가장 소란스런 꿈들도 품을 수 있는 공간을 탐색한 것이다.

《로댕》전의 폐막 후 <지옥의 문>은 유니베르시테가로 되돌아 왔으며, 1904년 11월 29일 스칸디나비아 국회의원의 방문 때에 찍은 사진 속에서도 그것은 여전히 미완성 상태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마지막까지도 수정이 있었다. 분명 1880년대 문 하단의 저부조로부터 나온 <우는 여인>의 얼굴마스크는 <운명>(왼쪽 문) 아래로 드리워진 주름 부분 가운데 하나를 대체했다. 1911년에 모리스 귀모는 그것이 여전히 '유니베르시테가의 대리석 보관소의 작업실 속에 거대하게 서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이듬해 그것은 뫼동에 있었다. 분명 불필요하다고 간주된 <세 망령>은 그 위치를 상실했고 의문의 넓은 부분이 문 하단부에 남아 있었다. 뫼동을 점점 떠나지 않게 된 로댕은 비록 <문>을 결코 완성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두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1904년에 그는 건축적인 디자인, 특히 테두리이자 통로로 작용해야 할 장식몰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세뤼에게 말했다. "그의 생각에 몰딩은 본질적으로 창조자의 모든 생각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념물을 이해할 수 있다. 몰딩은 감미로운 교향곡이다."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던 로댕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민간 기념물과 종교적 기념상 다수를 드로잉하면서, 벽 기둥, 기둥머리, 소벽, 아치형 천장의 시작 부분들을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전체 작품에 완벽한 통일감을 주었을 불가사의한 디자인을 결코 찾지 않았다. <문>의 주형은 1885년에 의뢰되었다가 1904년에 취소되었다. 코키오는 1913년에 "모든 것은 기껏 한 달 안에 준비될 수 있었다. 로댕은 이 한 달을 <문>에 투자할 수 없었으며, 그것은 거의 틀림없이 미완성인 채로 있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이에 대해 로댕은 "고딕성당들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완성되었나?"라고 답했다.

정확한 참조 표시들이 1899-1900년의 작품 해체기간 동안에 드러났다. 이들 덕분에, 로댕미술관의 첫번째 큐레이터가 되었던 레옹스 베네디트는 로댕이 주의깊게 보관했던 거푸집으로 만든 주형을 이용하여 1917년 초엽에 완전한 석고 <문>을 재구축할 수 있었다. 이 석고모형은 파리의 로댕미술관 개막식 때 비롱관의 예배당에 설치되었고, 1986년에 오르세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쿠베르탱 주조공장은 이를 이용해 <지옥의 문>의 마지막 세 개의 주형(스탠포드대학, 시즈오카, 서울)을 제작했다.

그러나 알렉시스 뤼디에가 처음 세 개의 <지옥의 문>(필라델피아, 파리, 도쿄; 그러나 알렉시스 뤼디에가 1929년에 주형을 뜬 파리의 청동제 <문>은, 1937년이 되어서야 로댕미술관의 정원에 자리잡았다.)뿐 아니라 네번째 것인 1940년대 취리히의 청동주조를 위해 사용했던 것은 두번째 석고모형과 동시에 제작된 세번째 석고 <문>이었다. 슈모프는 임종 몇 개월 전 뫼동 석고 <문> 앞에 있는 로댕의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그 석고작품은 아마도 1917년 7-9월에 옮겨져 복구되었을 것이다. 아마 이 시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의 모습이 갖추어지고, <세 망령> 및 두 개의 직립부조 <신>과 <사이렌>이 도입되었을 것이며, 특히 문짝 밑부분의 미완성 부분들이 결국 '완성'되었을 것이다.

로댕은 중요한 첫번째 의뢰작품 <지옥의 문>을 비록 완성시키지 않았으나, 생존 기간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문>은 그의 전생애의 집약 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겠다. <문>은 로댕의 주된 관심사들, 고딕건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리고 단테와 보들레르에 대한 그의 감탄을 반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 신체에 부여한 로댕의 표현력의 정수이다. 1883년 1월 23일 조형예술국 시찰자 발리가 인정한 대로 "로댕의 작업은 최고로 흥미롭다. 이 젊은 조각가는 매우 놀랄만한 독창성과 고뇌스런 표현력을 갖고 있다. 그는 자세의 힘 이면에서, 그리고 흥미로운 포즈의 격렬함 이면에서 조각적인 양식에 관한 비웃음 또는 무관심이라 할 만한 것을 냉담하게 숨긴다. 미켈란젤로 양식 속에 있는 상상력은 로댕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는 놀라움을 줄 수 있다. 그는 관객을 무심하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로댕은 사실상 '한 조각씩, 그의 눈앞의 실물을 가지고'(특히 아브루제지 자매들에 따르면) 수백 개의 신체들을 모델링했으며, 그것들은 보여지자마자 '비틀림(…), 기대치 않았던 회전, 예기치 않은 굴곡, 휘어지고 굽어지고 흔들리고 뒤집힌 이 모든 인물 자세의 불안스런 독창성(…), 이전에 어떠한 조각가도 감히 표현하지 못했던 이 결합'에 의해 놀라움을 주는 것이다. <지옥의 문>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어감에 따라, 로댕은 몇몇 그룹을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는 1883년에 <돌을 진 여인>과 <젊은 이브>를 전시했으며, 1886년에는 <나는 아름답다>를 포함하는 세 점의 '인간 열기 습작', 세 점의 '지친 여인들', 즉 <안드로메다>, <웅크린 여인>, <돌을 진 여인>을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공식 살롱전에는 출품되지 않았으나, 인상주의 회화를 전시할 만큼 세기말 예술부흥기의 색다른 형식들에 보다 개방적이었던 화랑들(특히 조르주-프티화랑)에서 전시되었다. 1887년, <입맞춤>은 문짝으로부터 제거되자마자 <우골리노>와 함께 전시되었으며,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1888년 코펜하겐에서 전시되었다. 1889년 조르주-프티화랑에서 [모네-로댕]전이 열린 이후에야 더 많은 대중들이 로댕 작품을 새로이 체험했다. "모든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 이 작품은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 사실주의의 발견이며, 로댕 자신은 겸손하게 습작이라고 불렀으나, 그것은 소규모일지라도 사실상 혁명적인 당대의 조각이다."관객들은 로댕의 작품들 속에서 강렬한 열정을 인식했을지만 공식 살롱전에 출품된 조각들에 나타나는 일화들과 포즈들을 발견하지는 못해 당황했다. 의상과 배경이 제거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는 더 이상 그들로 보이지 않으며, 이 군상을 <입맞춤>으로 불러야 한다고 제안한 것은 관중들이었다. 로댕은 신체 자체를 중요하게 만들었는데, 뼈, 근육, 신경으로 표현되는 신체는 강렬한 묘사를 돕는 전체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 배고픔에 괴로워하고 자식들 시체 위에 굽히고 있는 <우골리노> 같은 군상에서처럼, 로댕은 프레오로부터 젊은 카르포에 이르는 낭만주의적 표현에 대한 탐색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강렬한 창조의 시기였던 1880년대에는 <문>의 완성을 위해 선택된 것이든 아니든 차후 새로운 구성의 시발점으로 사용될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또한 1880-95년은 로댕 작업 방식의 필수적 부분이 될 과정들이 그의 조각에 처음 나타난 시기이기도 했다. 로댕은 <세 망령>에서 단편화, 앗상블라주, 복합이라는 기능을 즉각 단행했다. 이 군상은 실상 세 개의 다른 각도에서 보여진 동일한 인물을 세 번 반복하여 제작한 것이다. 구성의 핵심인 빈 공간은 양감 자체만큼 중요성을 띠게 되었으며, 비문을 든 <망령>의 손이 잘렸으므로, 그 팔의 고집스런 수직성은 단테의「신곡」에서 따온 글귀 '여기에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Lasciate orni speranza, voich'entrate)를 향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시인, 단테 또는 아마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명상하는 로댕 자신을 향해 이끈다.

 전세계 7개 <지옥의 문> 소장처

1.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www.rodinmuseum.org
2. 파리 로댕미술관 www.musee-rodin.fr
3.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www.nmwa.go.jp
4.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www.kunsthaus.ch
5. 스탠포드 대학 www.stanford.edu/dept/SUMA
6. 시즈오카 현립미술관 로댕관
www.spmoa.shizuoka.shizuoka.jp

* 출처 - http://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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