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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가볼만한 곳 검색하니 호암이병철생가, 솥바위,탑바위,정암루,의령관문,충익사등이 나왔습니다. 여러곳을 가서 글쓰기도 몇개로 나누어야 하지만 한곳에 사진을 모아두면 보기 쉬울거 같아서 한페이지에 이렇게 올립니다.
생가 주차장에 내리면 이런 안내판이 있습니다. 뭐 삼성창업자이신 호암선생을 뵌적도 없고 하지만 사람마음은 다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번 보기로 했습니다.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창한 저택이 왼쪽에 담너머로 보이는데 이집이 호암선생 신혼집이랍니다.
여기가 생가입니다.
도서관처럼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요즘은 7시넘어 해가 지는데 해가 떠있다고 5시 넘어가면 보지 못합니다.
들어가면 우물이 보이고 너머로 ㄱ자 집이아닌 일자로 된집이 보이는데 이게 바깥채라 마을사람들이 이 우물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우물은 잘살아야 팔수 있는 것으로 없는 사람들은 호암선생댁의 우물을 공짜로 길러다 먹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바깥채에서 대문쪽을 본 모습입니다.
이건물이 안채입니다. 안채앞 우물은 이집 식구들만 사용하는 우물입니다.
목련처럼 보이는 꽃이 피었는데 아주 힘이 있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목련은 질때 꽃이 지저분한데 이꽃은 깔끔했습니다.
대문 입구들어가면 보이는 왼쪽 담장부분을 대문을 보며 찍은 것입니다.
생가대지 배치도 입니다. 안채는 바깥채보다 오른쪽으로 불거져 나왔습니다. 아마 집안에 누가 들어오는지 살피기 위한 것 같기도 합니다. 뒷쪽에 있으니 집안에 누가 들어와도 전혀 몰라서는 답답할 거니까요.
마당에도 코스모스가 피었지만 큰길가에도 많은 곳에 코스모스가 피어 한창입니다.
대문이 보이는 이집은 생가 담넘어 옆집인줄 알았는데 생가 대문을 나와 옆집으로 가보니 도로까지 나있는 길건너 집이었습니다.
대문을 막 나오면 마주 벽화담장이 보입니다. 시멘트로 된 담장이라야 벽화를 그릴수 있습니다.
건물이 탐이 나서 돌아오는 길에 신혼집을 또 봤는데 돈 갖고 갔더라면 사가지고 오고 싶은 그런 저택입니다.
지나는 길에 탑바위 안내판이 있었지만 예정에 없어 지났지만 가보고 싶어 다시 유턴하여 600미터가면 나온다길래 표시한대로 농로를 따라가니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합니다. 직진해 다리를 일단 지나 비탈에 차를 세워두고 낮은 산허리를 오르니 제대로 온듯 안내판이 나타났습니다.
산허리에서 20미터정도에 이 간판이 나오고
안내대로 10미터를 더가니 탑바위가 나옵니다.
탑바위는 한자로 탑암입니다.
탑바위는 남강가 비탈에 남강을 보고 서있습니다. 이 남강이 바로 진주까지 흐르는 모양입네다.
여기까지 온김에 불양암 바위를 안볼쏘냐 갔더니
안내따라 내려가니 불양암은 바위가 아니라 암자였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지도 않고 돌아왔습니다. 내가 보려는 것은 바위라면 보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왠 모노레일이 설치되었을까 했더니 그제서야 암자에 물건을 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을 알았읍니다. 바위라면 모노레일이 왜 필요할것입니까. 한글전용으로 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바위라면 巖또는 岩자가 암자라면 庵자가 쓰여 바로 알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하면 한글학자들이 부린 고집이 밉습니다.
부자가 3명이 나온다는 솥바위가 있다는데 안 가볼쏘냐 갔더니 -
주차장옆에 안내간판이 있고
이길은 길일뿐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길중 아래쪽에 난 좁은 길을 가니 솥바위라는 것이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봐도 솥같지는 않는데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또 왜 이게 조선시대이전부터 있었을텐데 왜 지금와서 부자가 난담!
바로 보이는 철교는 사람만 다닐수 있는 인도교이고 저멀리 보이는게 차다니는 도로입니다.
멀리서 보면 솥바위는 이렇고
가까이서 보면 이렇고
이 강이 남강이 맞다는 안내퍈
솥바위 안내판과 남강 안내판
솥바위때문에 이름붙여진듯 고개위에 선 정암루
제목이 정암루가 아니고 왠 안내말씀이야?
계단을 올라가 멀리서 보면 정암루는 이렇게 생겼다.
다시 절을 찾아 나섰는데 다리가 의병교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본거지라 그런가 생각하면서..
이 다리를 건너야 충익사가 나온다길래..그런데 막상 다다르니 절이 아닌 사당이요.
충익사 연못은 연꽃이 피고있고
다 핀 연꽃은 매우 아름다운 자태였어요. 온통 연꽃뿐인 연못이라면 이게 돋보이겠습니?
충익사는 절이 아닌 사당 곽재우의병장을 모신 사당이었습니다. 이것도 한글전용 때문에 발생한사람을 당혹하게 만든 사건이었죠.
절이라면 寺자라야 하지만 사당이라 祀자로 한자로 썼습니다. 우리도 딴나라처럼 한글뿐이면 한글로 한자에서 나온말이면 한자로 표기하는게 좋겠는데 들리나요?
'나는 간다'는 한글밖에 표시 못합니다. '問題없다'는 문제는 한자로, 없다는 한글로 한글학자들은 필기해두세요. 그리고 이렇게 쓰도록 해주세요.
사당앞의 소나무 참 보기 좋아요
조선시대 관직은 양반이라 문관과 무관으로 나누는데 문관은 글로만 하지만 무관은 칼과 활과 총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칼로 남을 벤다는 것, 활로 남을 직접 쏜다는 것, 총이나 포로 적진을 공격한다는 것 참 할짓이 못됩니다. 상대적군도 처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고 나와 똑 같은 사람인데 죽인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눈을 딱 감고 아무데나 되는 대로 쏘면 모를까 물론 그러다간 적한테 자신이 죽겠지요. 죽기살기로 싸워야 합니다. 요즘은 전쟁이 없으니 군인들은 태평시대 지요 옷벗을때 까지 적에게 총 한번 못쏴보고 제대합니다. 조선시대는 자주 외적의 침입을 받고 백성들은 늘 겁을 먹고 살았습니다.
장한 의병장에게 당시 선조임금께서 관직내린 교지입니다.
이것도
교지는 의병박물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변색을 고려해 사진찍을때 카메라후래쉬를 사용하지 않고 촬영했습니다.
우리나라 국화 무궁화꽃 이제 피기 시작하나 봅니다. 들은 얘기인데 딴나라 國花나라꽃은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우리나라 무궁화는 지금은 좀 깨끗해 졌지만 에전엔 거미줄치고 벌레가 많이 달려들어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은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적 있습니다.
충의각은 곽재우장군 휘하의 활약하여 공을세운 장수들 17명 존함을 모신 곳입니다.
충의각내 들여다보면 곽재우장군을 비롯한 17명의 의병장하여 18명의 성함과 본관,호와 증직을 표시했습니다. 공의 다소에 따라 관직을 사후에 내린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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