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재발견 낙서장 2007. 8. 29. 16:39





아리랑에서 ‘십리’를 한문으로 바꾸어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十理'에서의 ‘십’은 남녀의 합일을 통한 완벽한 하나가 됨을 말하며, 숫자로써의 의미는 완성을 말한다. 앞의 내용에서 이어진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여기서의 고개는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간다는 말이며, ‘아’를 알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루게 된다.”는 그의 아리랑에 대한 재해석의 백미는 다음에서 나타난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나’ 즉 ‘참나’를 버리고 거짓 나를 위한 욕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여기서의 ‘십리’는 거리를 나타내는 의미가 아닌 다른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십’이라는 의미는 완성, 통합, 깨달음을 상징한다.

특히 이 민족에게 ‘십’은 숫자의 의미도 있지만 sex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남과 여가 만나서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십’은 음과 양이 만나서 비로소 완벽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는 그것을 넘어서 ‘참나’와 ‘거짓 나’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으로 표현했다.

‘발병’은 깨달음을 이루지도 못하고 장애가 생긴다는 뜻이며, ‘참나’를 깨닫지 못하고 세상을 살게 되니 결국에는 인간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도태가 되고, 아무리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도 그 사람의 중심에 있는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병들고 아프다는 뜻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리랑의 이런 의미를 알고 부르면 느낌이 아주 달라진다.”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수많은 갈등과 미움, 전쟁 속에 있다. 지금도 세계의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먹을 것을 놓고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의 생각의 차이, 정보의 차이 때문에 싸우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또한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는 토론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힘을 가진 자가 이길 뿐이라며 가치와 문화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아’를 아는 길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바로 “‘아’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서로 싸우고 미워한다.” 집단과 집단이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종교와 종교가 싸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를 찾아야 하며, 그것이 “곧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고, 모두의 ‘아’가 살아날 때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 라고 했다.

그렇다. 필자의 생각도 가치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숨어 있는 각 개인의 ‘참나’를 찾는 일이 시급하다고 믿으며, 더불어 우리의 아리랑이 갖고 있는 신비한 힘에 대한 이론의 틀을 세워,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 물질문명의 시대를 지나 곧 오게 될 정신문명의 시대를 이끄는 진정한 힘이며, 그 중심에 아리랑이 있는 것이다.


大馬不死 장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