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남북 정상회담 개최 소식은 햇볕정책의 효율성을 입증했지만, 햇볕정책을 좀더 넓은 맥락에서 본다면 반쪽 성공 이상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북한과 평화 공존의 기초를 잘 닦아 놓았지만 전반적으로는 한국의 대미 종속은 지난 10년 동안 심화됐을 뿐이다. 미국이 이라크, 아프간 침략에 주력하는 상황이어서 동아시아에서의 위기를 여태까지 모면할 수 있었지만 미국과의 예속적 관계가 달라지지 않는 한 햇볕정책의 성과들은 외부 충격으로 쉽게 무너질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한국과 같은 격의 미국의 하위 파트너인 사우디파키스탄이 각각 이라크 침략과 아프간 침략 직전에 미국을 비공식적으로 말렸다고 해서 미국이 침략을 접었던가? 북-미 2·13 합의가 한국의 노력이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이란에 주력하겠다는 미국 의지의 결실이었던 것처럼, 대미 예속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대북 도발에 대한 미국의 결정을 역시 한국의 노력으로 바꾸기가 힘들 것이다.

‘미국 문제’의 핵심은, 세계적 일극 체제 안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에는 미국 자체로서 힘이 달린다는 것이고,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지금으로서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유일한 부문은, 세계 전체 군비의 46%나 먹어버리는 군수 복합체뿐이다. 미국이 이 유일한 특장을 활용하여 2003년부터 유전지역 점령을 시도해 봤는데, 그 결과는 참패였다. 침략군과의 ‘비대칭적 전투’에서 쓸 수 있는 현대적 무기가 이제 전세계 곳곳으로 보급돼 이라크 침략과 같은 식민지 전쟁의 성공률은 낮아졌다. 그러나 미국 금융권의 부실이 노출되고 지속적으로 가치가 하락하는 달러화의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치가 약화되는 등 금융에 의한 미국의 세계 지배력이 계속 상실돼 가는 만큼, 앞으로도 자원지역에 대해 직간접으로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 고갈돼 가는 원유값이 안정적으로 배럴당 60달러를 상회하는 요즘 상황에서는, 유전에 손을 뻗치는 것은 미국 지배자들에게 계속 ‘남는 장사’로 인식될 듯하다.

이렇게 되면, 아프간, 이라크, 레바논에서 ‘높은 나라’의 부름에 이미 순순히 응한 대한민국은 또 언제, 어느 전장으로 불려갈지 미지수다. 미국이 다르푸르에서의 종족 갈등과 인권 문제를 핑계로 삼아 수단이라는 중국의 ‘기름줄’을 자르려 해도, 석유 대금을 달러 대신에 이제 유로화로 받는데다 중-러 중심의 상하이협력기구와 가까워진 이란을 ‘핵무기 개발’과 같은 핑계로 치려 할 때도, 대한민국을 당장 호출할 확률이 높다. 대한민국이 이와 같은 호출에 바로 달려가는 자세를 견지할 경우, 미국과 중-러 블록의 군사 충돌과 한반도 전장화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까지 가지 않아도, 이슬람권에서의 한국인들을 피랍위험에 노출시키는 일부터 북한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의 협력을 어렵게 만들어 햇볕정책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까지 온갖 불이익을 다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보수 정계와 관료집단한테는 미국의 심부름에 응하는 것은 반사작용에 가까운 일이다. 저들이 ‘국익’을 들먹이지만, 사실 자기 집단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동일시하여 행동하는 듯하다.

살육 이외에 ‘리더십’을 행사할 도구가 없는 초강대국의 들러리가 되는 것은 망국적 재앙을 초래할 일이다. 우리가 진정 ‘동아시아의 이스라엘’이 되려고 하는가? 햇볕정책의 목표인 한반도 평화공동체 구축을 달성하자면,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초강대국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지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