舞草의 춤


중국의 곤명(昆明) 박람회에서 선보였던 무초(舞草)가 우리나라에 보급된 것은 2002년 안면도 꽃 박람회 때이다. 풀이 춤을 추다니, 음파에 움찔거리다니, 움직이는 식물이 신기하다 못해 신령스러웠다.


떡갈나무는 하늘 다람쥐가 다가오면 파르르 떤다던가. 아낙의 손에 들려진 장바구니 채소는 지레 혼절한다던가. 제비꽃은 모짜르트 음악에 고운 꽃을 피우고 행진곡을 듣고 자란 벼이삭은 소출을 높인다던가. 식물도 감기를 앓고 사춘기를 겪는다니 나무의 깊은 속을 모두 알아보는 일은 바위에서 꽃을 피우는 일이리라. 더러 벌목되는 나무가 낙하할 때면 흐느적이듯 보였는데 지레 혼절했던 것이었나 보다.


한나절 마음을 풀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서울 대공원으로 향했다. 다륜작(多輪作), 현애작(懸崖作), 목부작(木附作) 등 다양한 국화로 축제가 열리고 있는 식물원은 만추의 무릉도원이었다. 사람 반 꽃 반인 식물원에서 볼품없는 무초를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현란한 화분 틈새에서 바랭이처럼 가녀리게 서 있던 풀, 버림받은 들풀인 듯 누렇게 바랜 무초는 길 잃고 헤매는 작은 소년처럼 애달파보였다.


“얘들아, 춤추는 풀이래.” 한 친구가 놀라서 부른다.


호기심과 신기함에 “아이고 불쌍한 것.”어르다가


“아, 어, 악!” 개구쟁이처럼 소리를 치며 반응을 지켜보는 친구도 있다. 그런데 정말 움직이는 게 아닌가. 온몸을 파르르 떠는 게 아닌가. 이건 영혼이 있는 거야. 생각이 있는 거야. 나도 덩달아 <그리운 아버지>를 소프라노로 읊조리니 깜짝 반응한다. 작은 풀의 떨림이 가슴을 파고든다. 솜털같은 진동이 마음을 울린다. 무초는 무엇이 그리워 사무치게 전율하는가.


언젠가 모 tv 방송에서 무초가 방영되었다. 사방이 막힌 진공 유리 상자에 잘 자란 무초화분을 넣고 외부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어 움직임을 관찰하는 실험이었다. 반응이 가장 예민했던 경우는 여성성악가의 <님이 오시는지>에서였다. 테너보다 소프라노에 훨씬 민감했다. 특히 경음악으로 베사메무초(키스해 주세요)가 나올 때는 발레리나를 연상하도록 잎새가 움직였다. 무초의 잎은 세상을 향해 ‘키스해 주세요’ 외치는 간절한 부르짖음 같았다. ‘포옹해 주세요’ 손짓하는 사랑의 절규같았다. 그것은 인간을 향해 애절하게 울리는 침묵의 수화였다.



무초는 동남아가 원산으로 2미터 정도 자라는 아열대성 관목이다. 동물의 관절같은 엽점이 소리에 춤추듯 상하운동을 하는 이국식물 앞에서 우리를 뒤돌아본다. 무초의 출현은 오염과 훼손으로 황폐해가는 지구촌에 내리는 침묵의 항변이 아닌가, 박노해 시인은 <꿈의 진리>에서 ‘정보다 문화다 서비스다 하면서 /너나없이 논밭에서 공장에서 손 털고 일어서는 / 바로 그 때가 인류 파멸의 시작이다 / 앞서간다고 착각하지 마라// ’시로서 예언한다. 정보와 문화와 서비스 산업의 오폐물이 해수와 오존층까지 위협하는데 앞서 얻은들 진정 소유인가. 무초의 춤은 태양으로만 다가가는 이 시대를 향한 무언의 삿대질인지 모른다. 상한 날개를 파닥이며 새들의 흉내를 내는 인간에게 내리는 눈물의 경고장인지 모른다.

-오길순-









무초가 일반에 알려진지는 10년도 채 안되는 기이식물중의 하나이다.

1999년도 중국곤명꽃박람회에서 소개되어 큰 반향을 불러온 바 있고

2002안면도꽃박람회에 전시되어 국내에서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무초의 학명은 Codariocalyx motorius 이고속명은 Hedysarum gyrans L.로 콩과식물이다.
영문명은 Telegraph tree이며 동남아시아 원산의 관목으로 온실에서 2m정도 자라며

무초의 특징은 소리에 반응하여 엽신이 움직이는 것으로 엽신의 기부에 엽점이라 부르는 부분이 관절처럼 움직인다.
25~30°c의 온도와 습도 70%정도에서 비교적 큰소리에 잘 움직인다고한다.

어린이와 여성의 노래 소리에 특히 잘 움직이며 9월경에 나비모양의 담황색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