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5월 18일 후야오방 사망을 계기로 베이징대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반부패·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이는 모습. CATHERINE HENRIETTE/AFP/Getty Images

“6월 3일 밤, 가족들과 정원을 거닐면서 쉬고 있을 때 거리에서 끊임없이 총성이 들려왔다. 마침내 전 세계를 경악시킨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1989년 ‘6‧4 천안문 민주화운동’에 대한 희생양으로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에서 물러난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은 6‧4의 시작을 이렇게 회고했다.


중국 근대사에서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은 우리의 5․18 광주민주화운동보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중국인들에게 ‘6‧4’는 중국이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지식인들의 열망을 정부가 무력으로 탄압한 중요한 사건이자 아물지 않은 상처다.


이 상흔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내면의 시한폭탄이 되어 중국인들의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하지만 중공당국은 아직까지도 ‘6‧4’를 민주화 항쟁이 아닌 ‘6․4 천안문 반란’이나 ‘학생과 시민들의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매도하고 있다.


22년 전 이날, 무력 진압에 의해 죽어간 학생과 인민의 수가 얼마인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영원히 복직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북경시장 천시퉁(陳希同)이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시위대사망자 200명, 부상자 3천 여명이며 군, 경 사망자 수십명, 부상자 6천 여명, 군, 경을 비롯한 공공기관 차량 파손 1천2백8십 대 였다.

물론 이 보고는 무기를 가진 군 경의 부상자가 시위대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까닭에 신뢰하기 어렵다.일부에서는 사망한 사람이 약 3000명, 부상자 약 5000명, 실종자 약 50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 피해는 은폐되고 축소되어 정확한 숫자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강경진압을 주도한 이들에 대해서는 당시 총서기를 지낸 자오쯔양의 회고록(국가의 죄수/ 에버리치 홀딩스刊)을 통해 그 전모를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6․4 이후 외국으로 도피한 많은 민주운동가들에 따르면 학생들은6․4 이전까지는 인민들의 요구에 대해 공산당이 좋은 방향으로 태도를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무력진압이 시작되면서 이들은 공산당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고 당과 대립하게 된다.


중국정부는 현재까지도 6․4를 촉발한 학생 시위가 첫째, 주동자에 의해 사전 모의된 ‘반당‧ 반사회주의적 정치투쟁’이며, 동란의 목적은 공화국을 전복시키고 공산당을 타도하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반혁명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유에서 이를 주도했는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자오쯔양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당국의 이런 주장은 근거 없는 억지라고 반박하면서 시위 기간 동안 학생들이 외친 구호와 요구를 예로 들었다.


당시에는 물가문제가 가장 민감한 사회적 이슈여서 만약 학생들이 공산당에 맞서려 했다면 이런 민감한 현안을 이용했겠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덩샤오핑이 추진하던 개혁개방 정책이나 공산당을 전면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학생운동의 시작은 1989년 4월 15일, 자오쯔양과 함께 덩샤오핑을 보필하던 후야오방(胡耀邦)의 죽음과 추모열기에서 시작됐다. 19일에는 약간의 시위가 있었지만 학생들은 과열되려는 군중을 향해 질서를 호소하고 통제해 큰 시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 중앙의 간부들이 이런 분위기에 미리 겁을 먹었다.


4월 22일, 천안문 광장에서 추도식이 개최됐을 때 학생 수만 명이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는 당의 동의를 얻어 이뤄진 것으로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몰려든 것은 후야오방이 생전에 보여 준 청렴하고 바른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는 과거 당국에 의해 억울하게 조작된 사건들을 바로잡았고 개혁개방을 주장했다.


사람들은 당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를 후야오방에 대한 추도를 통해 표현했다. 한편으로는 두 해 전에 일어났던 후야오방의 퇴진방식에 대해 불만과 분노도 갖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 같은 지도자 교체 방식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추모열기를 조성한 외에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추도식이 끝나고 화가 풀리지 않은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는 등 일부에서 과격한 움직임이 일기도 했지만 추도식은 조용히 마무리되는 듯 했다.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4월 26일, 인민일보는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학생시위가 커진 것은 바로 이 4‧26사설 때문이었다. 4월 19일 자오쯔양이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한 이후 24일, 리펑과 양상쿤은 상무위원회를 열어 학생시위를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사전에 모의한 반당. 반사회주의 정치투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군사위 주석인 덩샤오핑에게 보고했다.


25일 이들은 덩샤오핑의 말을 다시 수정하여 ‘인민일보’ 사설에 발표했다. 이후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사설이 발표되자마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하는 반응과 함께 공공기관을 포함한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4월 27일에는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 수가 10만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국가대사와 중국의 개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당 중앙에 문제를 제기한 것을 애국적인 행동으로 생각했다. 시위대의 증가는 정부가 이들에게 ‘반당, 반사회주의’라는 낙인을 찍고 적의를 보인데 대한 반응이었다.

이날 시위에 군중들은 환호했고 경찰조차도 폴리스라인을 허무는 등 형식적으로만 저지하면서 사실상 가두행진을 허용했다. 염려했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승리를 자축했고 당 간부들은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순진한 군중들은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개혁개방의 조류를 타고 공산당 지배 이후 피와 공포로 얼룩진 중국에도 봄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이날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는 자오쯔양처럼 자제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학생들을 달래자는 측과 리펑과 야오이린처럼 군대를 투입해 무력으로 강경진압하자는 측이 대립하게된다. 결론은 강경파의 승리로 끝났다.


5월17일, 베이징에 계엄을 선포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덩샤오핑의 집에서 상무위원회가 열렸다. 자오쯔양과 후치리는 시위대를 자극한 4‧26사설의 수정을 주장했고 야오이린과 리펑은 강하게 반대했다. 차오스는 중립을 지켰다. 덩샤오핑과 양상쿤은 상무위원이 아니었다.


투표는 없었고 덩샤오핑이 최종 결정을 내렸다. “사태의 확대는 4‧26사설에서 규정한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여기서 물러선다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

학생들은 국가대사와 중국의 개혁에 대해 관심을 갖고 당에 문제점을 제기하며 이를 애국적 행동으로 여겼지만 중공은 이들에게 ‘반당, 반사회주의’라는 낙인을 찍었다.

CATHERINE HENRIETTE/AFP/Getty Images


결정을 되돌리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자오쯔양은 다음날 덩샤오핑에게 편지를 보내 재고할 것을 요청하지만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 낙심한 그는 19일 새벽 천안문 광장으로 학생들을 만나러 갔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뒤 직위해제 되어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후 죽을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중공은 올해 들어 공안 당국을 통해 일부 6․4 민주화운동 희생자 가족을 찾아 보상문제를 제기했지만 이는 희생자 가족들의 반발로 진전되지 못했다.


희생자 유가족 단체인 ‘천안문 어머니회’에 따르면 중공 당국은 천안문 사건의 진상 공개와 법적 책임, 희생자 전체에 대한 보상은 거론하지 않은채 지난 2월과 4월, 일부 희생자 유가족을 찾아 개별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천안문 어머니회는 지난달 31일 인터넷을 통해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정부가 천안문 사건을 돈으로 덮으려한다”며 비난했다. 또 배후에서 자신들을 감시하고 추적할 게 아니라 공개적인 대화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지식인, 학생들은 끊임없이 ‘6․4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1989년 6․4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중국 역사에서 빈자리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