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적 권력균형… 더 큰 위기 불러오나

보시라이 사건 이후, 중국공산당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권력투쟁이 표면으로 드러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18차 당대회 이후 정치개혁이 후퇴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인사들이 대거 등용됨에 따라 우려가 더 커지고 있다. 권력균형은 일시적이며, 더 큰 위기가 잠재돼 있다는 분석이다. (사진=대기원)

 

 

11월 15일 11시 45분,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強), 장더홍(張德江), 위정성(兪正聲), 류윈산(劉雲山), 왕치산(王岐山), 장가오리(張高麗) 7인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임됐으며 후진타오(胡錦濤)는 전면 사퇴했다. 중남해(中南海)는 보시라이(薄熙來) 사건 이후 저우융캉(中南海)이 개입된 ‘뉴욕타임즈 사건’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중국공산당 역사상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공산당을 지키자’는 공동의 인식을 바탕으로 타협점을 찾아 현재 일시적인 권력 균형을 이뤘다.

 

후진타오, 장쩌민파(江派) 위협에 대처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10년간 집권했다. 저우융캉 역시 그동안 정법위 서기로 두 번째 권력의 핵심에서 후진타오와 맞서왔다. 장쩌민(江澤民)이 물러난 이후 저우융캉의 권력은 더 커졌다. 하지만 올초 발생한 왕리쥔(王立軍)-보시라이 사건 이후 후진타오가 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며 사실상 후진타오가 최고 권력자에 올랐다.

 

그런데 이번 18차 중국공산당 대표자대회(이하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는 자리는 물려줘도 권력은 놓지 않았던 공산당 전례를 깨고 모든 권력을 내려놓았다. 이는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해 왔던 전 주석 장쩌민과 원로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관례를 없애고자 함이었다. 이로써 시진핑에게 완벽한 권력을 넘겨 주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동시에 상무위원과 정치국 위원 선출은 표면적으로는 장파가 더 많은 자리를 얻음으로써 우세해 보이지만 사실은 곳곳에서 견제를 받도록 배치가 돼 있다. 후진타오는 세가 약해진 장파에 대해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어 주며 타협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는 어렵게 안배를 해 놓았다. 일종의 타협이다.

 

후진타오 전면 사퇴 조건 2가지

 

11월 15일, 중국공산당은 시진핑이 중앙군사위원회(이하 군사위) 주석에 선출됐음을 공표했다. 이는 후진타오의 전면 사퇴를 의미하며 시진핑은 주석과 당 총서기, 군사위 주석의 3가지 최고 권력을 장악했다.

 

후진타오의 전면적인 사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군사위 주석을 포함하여 이후로 사퇴시기 연장에 어떤 예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는 결국 내부회의에서 공감을 얻어낸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朝日新聞)은 “후진타오가 내부규정을 새롭게 한 것은 당의 지도층이 사퇴한 이후 정치에 개입하는 관례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도 후진타오의 전면 사퇴의 목적을 장쩌민의 영향력을 완전히 막고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론이다.

 

18차 당대회 폐막 후 중국공산당 관영언론인 ‘신화망(新華網)’은 ‘중공은 법치(法治)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인치(人治)의 잔재를 제거하기로 결심하다’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서는 “당은 반드시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 어떤 조직과 개인도 헌법과 법률의 특권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당간부가 법 대신 권력을 행사하는 것과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어기는 행동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전면 사퇴는 집권이념 부분적 실현

 

장쩌민이 장악한 정권 아래서 후진타오는 지난 10년간 ‘왕세자’ 역할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최고지도자 자리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냈으며 많은 것을 학습할 수 있는 단련의 시간이었다.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溫家寶)가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이라는 기대도 많았다.

 

하지만 장쩌민 집권시부터 자행된 파룬궁 탄압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정법위 서기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고, 이런 관례는 18차 당대회 전까지 계속 됐다. 정쩌민은 파룬궁 탄압을 위해 임시 권력핵심으로 ‘610’ 사무실을 설치했고, 정법위를 통해 중국의 공안, 법원, 검찰, 무장경찰 등을 통제했다. ‘610’ 비밀권력기구는 언제든지 중국 외교부, 교육부, 사법부, 국무원, 군대, 위생부 등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또 다른 중앙 권력의 핵심이었다.

 

정법위는 후진타오-원자바오와 충돌이 많았다. 정법위는 국가의 세금을 써가며 무장경찰을 장악하고, 군권까지 장악함에 따라 중국의 외교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장쩌민의 ‘수렴청정’으로 후진타오-원자바오의 정책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후-원은 공개적으로 ‘전전긍긍’ ‘여림심연(如臨深淵 : 깊은 연못에 다다른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처신)’ ‘여리박빙(如履薄冰: 살 얼음판을 걷는 듯 조심스럽다)’ 등의 4자성어를 언급하곤 했는데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표현한 말들이다.

 

후진타오가 생각한 ‘이상적인 중국’은 그가 젊은 시절 봤던 정치적으로 강한 ‘중국’이었다. 그가 이끄는 ‘공청단(共青团: 공산주의 청년단) 역시 이상은 ‘강한 공산당’이었다.

 

당시의 중국은 정치적으로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강한 독재정치로 인해 분열은 없었으며, ‘문화대혁명’ 이후 경제개방으로 성장하던 때라 위기도 없었다. 후진타오의 이상적인 중국 역시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후진타오는 현재의 권력투쟁으로 중국공산당이 존폐위기에 처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그의 임기 내내 어떤 정치개혁도 시도하지 않았다. 안정을 추구한 것이다.

 

공산당 내 관료들의 부정부패 척결은 실제적인 진전은 없었다. 빈부격차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언론통제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빈번하게 일어났던 중국 내 민중시위에 대해서는 무장경찰을 동원하며 강력하게 진압했다. 중국공산당 체제를 안정적으로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반면, 경제적으로는 2006년 농업세를 폐지했고, 그 이후 민생개선을 시도했다.

 

후진타오의 ‘전면사퇴’는 시진핑을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시키고 아울러 모든 원로들의 정치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이상적인 중국’의 이념과 서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충칭사건 후 최고 권력에 오른 후진타오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서기 및 정치국 위원이라는 공직이 박탈당한 후 쿠데타를 함께 도모한 정법위 서기 저우융캉의 권력 또한 대폭 축소됐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중국공산당의 이론에 따라 군권은 정치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권력이었다.

 

18차 당대회 개회 전인 10월 25일, 후진타오와 시진핑은 해방군의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생부, 총장비부 등 4개 총부의 핵심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었다. 후진타오는 측근들을 군권의 핵심인 참모부와 총정치부에 배치함으로써 군권을 장악했다. 11월 1일에서 4일까지 중국공산당 17차 7중 전당대회에서 판창롱(范長龍), 쉬치량(許其亮)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됐다. 둘다 후진타오 사람이었고, 쉬치량은 시진핑과도 관계가 좋았다. 충칭사건 이후 후진타오와 태자당 시진핑과의 연맹은 후진타오의 군권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

 

후진타오가 전면 사퇴하기 전,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간부학교에서 후진타오가 군사위 주석직을 연임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모든 군사위도 후진타오가 연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공동 성명했다. 사퇴 후에도 후진타오의 영향력은 줄지 않을 것이란 예측은 그래서 나온다.

 

공산당 존폐위기 속 후진타오의 타협

 

차기 후계자였던 보시라이를 잃어야 했던 저우융캉, 쩡칭훙 등을 중심으로 한 장파의 세력은 갈수록 쇠약해졌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후진타오-원자바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했다.

 

저우융캉과 쩡칭훙은 올 4월 말 미국으로 망명한 천광청(陳光誠) 사건을 가지고 ‘미국이 중국을 내정간섭 한다’는 이유로 후진타오-원자바오를 압박했다. 이를 통해 후진타오의 타협을 이끌어냈으며, 정법위의 비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백지화 됐다.

 

이후 저우융캉 등 장파는 댜오위다오(釣魚島)문제를 집중 부각시켜 반일시위를 조장했다. 이는 민족주의를 부추겨 내부 분란을 격화시킨 정치적 수싸움으로 후진타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18차 당대회 개회 2주 전인 10월 26일, 저우융캉은 해외에서 허위자료를 유포해 뉴욕타임즈에 기사를 냈다. 원자바오의 부정부패에 관한 이 기사로 원자바오는 국민적 신뢰에 큰 타격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는 후진타오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후진타오가 저우융캉과 장쩌민을 체포하려 했다면 저우융캉 세력은 더욱 거친 방법으로 대응했을 것이고, 중국공산당의 붕괴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중국공산당 내부는 사분오열했다. 경제적으로는 추운 겨울을 맞았다. 5월부터 시작된 경제 경착륙으로 인해 중국은 대량실업, 공장의 줄도산이 이어지고 있으며 불안한 정서는 전국 각지의 민중을 동요시켰다. 국제적으로는 장기간 GDP 수치 조작이 드러나 미국과 유럽 등 서양국가에서는 중국 경제의 통계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삼퇴(三退, 공산당 3개 조직에서 탈퇴하는 것) 열풍은 18차 당대회 개최 즈음 이미 1억 2000명을 넘었다. 중국공산당의 대내외적인 불안한 상황 속에서 대권을 쥐고 있던 후진타오의 선택은 공산당의 안정이었다.

 

후진타오는 온갖 비리와 인권유린을 일삼아 왔던 장쩌민파를 제압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안정을 선택함으로써 정치개혁에 실패했고, 이는 더 큰 위기를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후진타오는 공산당 안정을 위한 권력균형을 맞추었다. 이미 권력을 잃은 장파에게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를 줌으로써 위기에 몰린 장파를 진정시켰으며, 더 이상 뉴욕타임즈 사건과 같은 분란을 막고자 했다. 이것이 후진타오가 모든 자리에서 전면사퇴하고, 정치국 상무위원에 장파의 인물들 다수가 임명된 내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