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처녀와 아내
작자:이자건(李子健)


이것은 매우 흔한 화제인데 그리 신선하지도 않고 오래된 가르침을 재차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말로 확실히 정해진 법칙이 배후에 있다. 일찍이 어떤 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괴상하구나! 괴상해! 손자가 할머니에게 장가가고 딸이 어머니의 살을 먹으며 자식이 부친의 엉덩이를 때리는 구나. 돼지가 부엌에 앉아 육친을 솥에 끓인다. 그럼에도 뭇 사람들이 와서 축하하니 내가 보기에는 정말로 고통이로다.”

이는 인간의 육도윤회(六道輪廻)를 가리킨다. 한 가족은 곧 이와 같이 생명의 윤회 중에서 역할을 바꾸고 있다. 유감스런 것은 세상에 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꿈속에 있으며 단지 생명이 끝나는 그 때에 가서야 큰 꿈에서 깬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전생에 대해 알거나 심지어 내생에 대해 알지만 이런 사람들은 대다수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며 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게 된다. 내 친구 A군이 바로 이런 사람인데 다음에 그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적어본다.

나는 1980년대 말 아내와 함께 미국에 건너와 텍사스의 아주 외진 소도시에 정착했다. 그곳에는 대학이 하나 있었는데 중국인은 매우 드물었다. 당시 막 미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함께 공동으로 집을 얻고자 했다. 하지만 찾아보니 모두 적합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내가 인근에 있는 작은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계산대에서 한국 처녀를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마치 오랫동안 아는 사이처럼 느꼈다. 마침 그녀도 집을 함께 사용할 다른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아내는 이 말을 듣자마자 장소와 가격을 물어보았는데 모든 것이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적합해 즉시 그리로 이사가기로 결정했다.

이사하자마자 한국 처녀와 아내는 곧장 서로 잘 어울려 가깝게 지냈고 매일 소근 거리며 수다를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의 생활에 대해서도 매우 관심이 많았다. 때로 우리 부부가 생활상 자질구레한 의견차이로 다툴 때도 있었는데 그 처녀는 그때마다 매번 나에게 불평을 하며 아내를 옹호했다. 처음에 나는 그리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갈수록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보통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이미 수련한지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늘 일부 초상적인 상태가 나타나곤 했다.

하루는 정공 중에 눈앞에 한 폭의 화면이 펼쳐지더니 점점 화면을 볼 수 있었다. 침상에는 한 여자가 누워있었다. 보아하니 병이 깊었고 그녀의 옆에는 딸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젊었음에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소녀는 마른 체격의 남자가 안고 있었는데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편이었다. 아이는 알 듯 모를 듯 했다. 그러자 장면이 한번 바뀌더니 점점 더 똑똑히 보였는데 세상을 떠난 그 여인은 바로 우리와 함께 사는 옆방의 한국 처녀였다. 또 원래 그녀 옆에 있던 어린 소녀는 지금의 아내였다.

아내는 다섯 살 때 어머님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모친이 사망하기 전에 가장 마음 놓지 못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십 년 후 이들 모녀는 뜻밖에도 이런 방식으로 재회한 것이다.

그 한국 처녀는 당시 결혼 적령기였는데 늘 우리를 찾아와 생각을 묻곤 했다. “나는 도대체 어떤 남자 친구에게 시집을 가야 좋을지 모르겠어?”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은 사위와 딸에게 혼처를 묻는 군요!’ 하면서 웃었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살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나는 아내에게 이 일을 알려주지 않았다. 전생에 마치지 못한 소원과 인연이 금생에 떨어지는 것으로 절대 인연 없는 사람이나 일이 찾아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기왕에 사람과 사람 사이가 인연이라면 선연(善緣)과 악연(惡緣)이 모두 존재하게 마련이며 무슨 일을 만나든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이 바로 생생세세의 인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