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싱, 엇갈린 운명

내 이름은 탈북자입니다 -1-

탈북자를 다룬 영화 ‘크로싱(엇갈림)’이 6월 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는 축구 선수 출신이자 탄광 노동자인 용수(차인표 분)가 아픈 아내의 약을 구하고자 탈북한 뒤 홀로 남은 아들을 위해 애를 쓰는 과정을 담았다. 탈북자 유상준씨는 영화 ‘크로싱’의 용수와 많이 닮았다. 그의 인생이 바로 한 편의 영화, 크로싱(엇갈림)이다.
▲ 2007년 12월 16일, 인천공항을 들어오는 유상준 씨.
그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고 했다. 어느날, 지하철에서 이 사진이 실린 신문을 주워서 스크랩 해 두었다. 그가 유일하게 보관하고 있는 신문 기사였다.ⓒ 연합뉴스
2007년 12월 16일, 그는 인천 공항을 빠져나왔다. 빡빡머리, 남의 것인듯 큰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조금 부끄럽다. 그러나 괜찮다. 출구를 따라 늘어선 마중나온 사람들, 그중에 그를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종종걸음을 쳤다. 순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는 사람이 보이지는 않는다. 섭섭한 마음을 누르며 다시 살펴보니 자신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뒤에 서있는 많은 사람들. ‘아…. 내가 살아 돌아왔구나. 그런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구나.’ 그는 벅찬 감정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들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웃는 사람처럼 그렇게 웃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는 그때의 사진을 보면 아직도 신기하다. ‘내가 이렇게 웃을줄도 아는구나.’
▲ 그의 기사가 실린 대기원시보.
그는 지금도 가끔씩 신문을 꺼내본다. 배우 수업을 받아도 이런 표정을 나올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자신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단다.ⓒ 이미경
굶주림
북한에서 배급이 끊긴것은 93년 부터다. 시골 농사꾼이었던 그는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가늠하지 못했다. 주민이 오천명 쯤 되는 리에 살았는데 그 중 70여 명이 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굶어 죽은’것은 아니라 ‘아파서’ 죽었다. 누가 굶어죽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반동이고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 먹을게 없었던 98년, 그는 아내와 작은 아들을 굶주림으로 잃었다. 그와 큰아들 철민이도 죽지못해 살았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나 보다 하는거예요. 하지만 옆에서 사람이 굶어죽는데 그 옆에 사람이라고 온전하겠어요. 옆에 사람은 죽는데…. 몇 걸음 차이인거예요. 약한 놈 먼저죽고 그 다음 죽고 이런 거예요. 산 사람이 온전해서 살고 그런게 아니예요. 다 그저 비실비실 한 사람들이…. 시간차죠. 네가 먼저냐 내가 먼저냐. 응, 네가 먼저 죽어. 그 다음 나는 어떻게 해가지고 쌀물이라도 입에 들어가면 사는거예요.”

그도 생사를 넘나들던 순간이 있었다.
“사람이 소변볼때 힘든거 모르죠. 그런데 사람이 소변보는 일도 엄청난 힘이 드는거예요. 우리가 건강하고 힘이 있으니까 못 느끼지는거지. 의식은 소변이 마려운 걸 알아요. 근데 소변 보자면 소변이 안나와요. 숨이 딱 끊어지면 소변이 나갈지 몰라도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소변이 안나와요. 나도 거기까지 갔다 온거예요.”

결심
언젠가부터 중국을 가면 살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죽어도 북한에서 죽는가보다 했던 그는 97년 여름 탈북을 결심했다.
“밖에 그런 세상이 있는거 모르는 거예요. 사람은 뭘 들어야 바깥 세상을 알지. 우리는 바깥세상 모르니까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한국 사람들한테 북한사람 어떻다 얘기하면 또 저 놈 거짓말한다 할거예요. 경험을 안해봤기 때문에 상상을 못하는 거죠. 이 곳이나 북한이나 다 사람사는 사회인데, 사람사는 동네 다 비슷하겠지 그렇게 아마 생각하는거 같아요.”
지금 그는 한국에 있지만 탈북할 땐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한국은 적대국가였기 때문이다.
“저쪽에서는 전 백성이 군사훈련하고 그래요. 북한 정치체제가 일원화 돼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요. 뭐 겨울부터 봄까지 노동자들은 겨울훈련 나가고, 일상시 강연이나 선전을 통해서 남조선이 우리를 먹으려한다, 미군 놈들이 도발한다 밤낮 전쟁이야기죠.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분석하고 그런거 할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가 받은 정보는 그게 전부니까 그걸 믿게되죠. 그래서 나는 한국 올 생각은 못해봤죠.”
▲ 국경 근처에서 수비중인 경비대
ⓒ GettyImages
모험
그는 중국에서 100Km 떨어진 청진에서 살았다. 국경지역도 잘 모르고 어떻게 중국을 가는지 들어본 적도 별로 없다. 그저 뜬소문에 중국가면 살만하다는 말만 믿고 98년 4월 그는 집을 나섰다. 큰아들 철민이와 함께 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무산에 도착했다. 집 떠난지 5일만에 두만강변에 도착, 3일 동안 강변을 따라 걸으며 정찰을 다녔다.
“강은 못 건넜지. 그거 잘못건너면 죽는데. 두만강 따라 계속 상류로 올라가면 두만강도 엄청 작아요. 돌이 보이고, 잘하면 징검다리처럼 밟고 넘어가도 되요. 그런곳이 있는데 나는 아이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건너는 그런 큰 곳은 못가지. 그저 잘못하면 군대한테 잡히는데 그거 어쩝니까. 계속 상류로 가면서 두만강 살펴봤어요. 두만강에는 군대 아이들과 인민들이 순찰을 해요. 그때 잘못하면 꼼짝 못하고 잡히니까 강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서, 여기 사람들 어떻게 행동하나 그거 살폈어요. 그래 계속 가다보니 잠복 초소 어디에 있고, 군대 어디에 있고 그렇게 걸어서 대홍당까지 갔어요”

감자를 줍는 척하며 강을 오르내리길 3일. 그러나 강을 건널 재간이 없었다. 그때 문득, 그는 경비대가 서 있던 자리가 생각났다. 경비교대 시간을 잘 맞추면 기회가 올 것 같았다. 교대시간을 얼추 짐작해 그는 올라오면서 봐 둔 경비대 가까이 갔다. 시간을 잘 맞춘 모양이다.
“근무서던 사람이 앞쪽으로 가고, 새로 근무 설 사람들이 아마 우리쪽으로 오는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쪽으로 오던 군인들은 그냥 우리랑 어긋나고…. 그 해 나무싹이 좀 빨리 났거든요. 그리고 두만강이 구불구불해요. 앞에 가는 군인들이 보이지 않을때 두만강에 뛰어들었죠.”

그때부터 생과 사의 갈림길이 시작됐다. 운이 좋으면 강 건너 중국땅으로 갈 것이고 운이 좋지 않으면 경비대에 잡힐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넜다해도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아침 일찍 해가 푸릇푸릇 올라올 때, 이슬비 내릴 때 건넜어요. 대강 없는거죠. 다른 선택의 여지 없으니까. 오죽하면 강 건너 남의 나라땅으로 가겠어요. 거기 강 건너가면 누가 나를 어떻게 맞아줄지 진짜 모르잖아요. 이건 완전히 담보도 없는, 쉽게 말하면 모험이죠. 돌아설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넘어가는거지.”

다행히 철민이도 그도 몸이 쇠약하지는 않았다. 탈북하기 일 년 전부터 죽이라는 걸 먹지 않았다. 중국에서 사료로 나온 옥수수가루가 북한에 많이 들어왔다. 그 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먹고 나물에 묻혀 쪄 먹었다.
“그때는 맛있었어요. 또 그것도 못먹는 사람도 많았어요. 못 먹었길래 사람이 죽어나가는거지 먹으면 왜 죽고…. 도망가겠어요.”
운이 좋았다. 그도 철민이도 무사히 강을 건넜다. 덤불이 보여 얼른 뛰어 들어가 몸을 숨겼다. 한숨 돌리며 젖은 옷을 벗어서 물기를 짰다. 조금씩 이슬비가 멎고 해가 난다. ‘아…. 살았구나.’

이미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