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仙小傳(34) 강태공, 여상(呂尙)(1)

ⓒ 삽화/박영철
[대기원]주 문왕, 사냥에서 강태공을 얻다

姜太公강태공, 呂尙여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인물이다. 일화도 많고 경세가, 병법가로 알려져 있으며 주나라를 도와 천하를 통일한 일등공신이다. 은나라 말기 東海동해 사람으로 四岳사악의 후손이다. 성은 姜강이고 이름은 尙상인데 그 윗대 조상들이 呂여 땅에 봉해졌으므로 呂尙여상이라고도 한다. 자는 子牙자아다.

때는 바야흐로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폭정으로 은 왕국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은나라 서쪽에 자리한 제후국 周주는 당시 훌륭한 군주인 昌창이 다스리고 있었다. 천자인 주왕이 너무 포악해 인과 덕이 없고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현실을 보고 한숨을 내쉴 때가 많았다.

어느 날 西伯서백 창은 사냥을 나가기 전에 이번 사냥에서 어떤 짐승이 잡힐 것인가 점을 쳐보았다. 역관이 산가지를 던지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백 창이 재차 “무엇이 잡히는가?”물었다. 이에 점술가는 “용도 아니고 뿔 없는 이무기도 아니며, 곰이나 범 따위의 짐승도 아닙니다. 사람이 잡힙니다. 천하의 으뜸가는 패왕의 보좌가 될 만한 인물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다.

강태공, 위수에서 세월을 낚다

이날 사냥에서는 토끼 새끼 한 마리도 못 잡고 渭水위수 강가를 지나는데 낚시하는 노인 한 분이 강가에 호젓이 앉아 있었다. 그림같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이 노인이 누구인가? 바로 동쪽 바닷가에서 생계능력이 없다고 아내에게 구박받다가 마누라도 떠나고 본인도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와 머물던 강상 노인이었다. 이때 강상의 나이가 거의 80세였다고 한다.

서백 창이 낚시하던 강상노인과 잠시 나눈 대화에서 그 인물을 알아보고 수레에 태워 돌아와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서백 창은 “일전에 우리 선고(先考 : 돌아가신 부친)이신 太公태공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이치를 통달한 분이 주나라에 와서 우리 주나라가 그로인해 일어난다.’고 하시더니, 선생께서 바로 그 분이 아니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래서 태공이 오랫동안 바랐던 사람이라는 뜻으로 太公望태공망이라 하면서 師父사부로 삼았기 때문에 師尙父사상보 또는 태공이라고 했다.

지금도 한가로이 낚시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낚시꾼을 姜太公강태공이라 한다.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다

강태공은 주 문왕 서백 창의 아들인 武王무왕을 도와 殷은의 주왕을 멸하고 천하를 얻게 했으며 그 공으로 濟제 땅에 봉해졌다. 강상을 시조로 하여 동쪽 산동성 일대 제나라는 800여 년의 역사를 열었다.

여기에서는 강태공이 벼슬하기 전 여러 가지 일화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강태공은 젊어서 仙道선도에 마음을 두어 32세 때 곤륜산에 입산하여 元始天尊원시천존의 문하에서 수도를 했으나, 道도를 이루지 못하고 72세 때 스승의 명에 따라 하산하였다. 40여 년 간 수도생활을 하다보니, 친척도 친구도 모두 없어지고 생계유지도 막연하였다. 생각 끝에 과거 결의형제를 맺었던, 殷은나라 수도인 朝歌조가에 살고 있는 宋異人송이인을 찾아 의지하게 되었다.

강태공의 홀아비 생활을 측은히 여긴 송이인은 馬氏마씨라는 여자를 소개하여 살도록 하였다. 강태공이 72세 때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꾸리고 송이인의 보살핌으로 1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으나 마냥 남의 신세만 질수도 없는데 도만 닦던 사람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 생계가 막연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일륜



어린 정조의 옅은 피부위로 태양이 따갑게 내리꽂혔다. 눈물로 범벅이 된 정조의 얼굴을 싸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영조는 매정하게 소리쳤다.


“세손을 빈궁 전으로 데려가라니까 무얼 하고 있어!”


정조는 영조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할바마마, 부디 아바마마를 살려주옵소서! 소손의 소원이옵니다. 제발.......부탁드리옵니다.”


“세자는 어서 뒤주에 들어가라니까 뭘 하고 있는 게야!”


사도세자는 절규하는 어린 아들을 뒤로한 채,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처참한 모습으로 비좁은 뒤주에 몸을 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어린 정조의 작은 주먹이 분노로 부르르 떨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오늘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아간 무리들을 언젠가 복수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모두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지고, 뒤주란 말도 안 되는 곳에서 이 나라의 세자가 갇혀 죽음을 당했다. 이 얼마나 비통하고 처참한 죽음이란 말인가!


아버지를 지킬 수 없었던 어리 세손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조용하고 은밀하게 복수를 진행했다.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11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지만, 세손이 왕위에 오르면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을까봐 두려워하던 노론 벽파들이 세손의 왕위 계승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그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줄 인물인 홍국영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홍국영, 나는 아직 힘이 없으니 당신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오. 내가 저들에게 당하면 나라가 무너지고, 왕실이 무너지게 되네. 어떻게 해서든 저들을 굴복시켜 내가 왕위에 올라야만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야.”


홍국영은 머리를 조아리며 정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정조를 죽이려는 세력들은 끊임없이 치고 올라와 정조는 권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세손의 외조부였던 홍인한과 세손의 친고모였던 화완옹주는 세손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사도세자를 가둬 죽이는데 공헌을 했던 영빈이씨의 딸인 화완옹주는 영조의 후광을 얻어 자신의 안전을 꾀하고자 했다. 결국 화완옹주는 정후겸이라는 인물을 양자로 삼아 세손의 왕위계승을 막고자 하였다.


“전하, 제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마는 일찍 죽고 자식도 얻지 못하였는데, 후겸이가 저를 기쁘게 해주고 있습니다. 부디 그를 총해하소서.”


이미 여든 살이 넘어 판단력이 흐린데다가, 천식까지 심해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영조는 기꺼이 정후겸의 뒷배경이 되어 주었다. 정후겸은 홍인한과 결탁하여 세손을 제거하려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세손은 이미 20대의 청년이 되었고, 홍국영은 굳은 충성심으로 세손을 죽이려는 정후겸과 화완옹주에게서 그를 지켜냈다. 영조의 병은 점점 깊어졌고, 영조는 마침내 세손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명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너무 늙어 나랏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 부디 세손이 나를 대신하여 정치를 펼치도록 하라.”


하지만 대리청정이 세손에게 주어진 복수의 기회라고 생각한 화완옹주는 온 몸으로 영조의 결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아바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리청정이라뇨. 아바마마께서는 아직도 10년을 더 사실 수 있을 것이고, 세손은 아직 어려 나라를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제발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영조는 이미 결심을 굳혔고, 마침내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게 되었다. 게다가 홍인한이 세손을 해치려 한다는 낌새를 눈치 챈 영조가 홍인한과 그 무리를 파직시켜, 세손은 그때서야 죽음의 그늘에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에 영조가 죽게 되어 마침내 정조가 조선의 제 22대 왕에 오르게 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충신인 홍국영에게 힘을 주기 위해 홍국영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자신을 죽음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그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드디어 내 아비의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구나.”


“전하, 전하를 호시탐탐 노리던 화완옹주를 극형에 처해 권위를 세우시길 청합니다.”


하지만 정조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내 그토록 아바마마의 원수를 갚으리라 다짐했건만 차마 할바마마의 총애를 받던 화완공주를 죽일 수는 없구나. 그건 곧 할바마마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짓임을...”


정조는 홍인한과 정후겸을 제거하고 이들과 함께했던 무리들을 모두 유배 보냈으나, 결국 화완옹주를 평민으로 전락시켜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걸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한 편 정조는 조선대계를 위해 규장각을 지어 조용히 인재를 양성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홍인한에게 모든 조정의 일을 맡겼다.


“홍국영, 자네가 몇 년 만 조정을 이끌어 주면, 나는 그동안 인재를 양성하여 조선의 힘을 마련해 놓도록 하겠네. 그렇게 해줄 수 있겠나?”


“전하, 이 홍국영, 천하의 악당소리를 듣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나라와 전하를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감수 하겠나이다.”


정조는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로 돌려놓은 다음, 자신의 권력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홍국영의 권력이 너무 커져 인사권을 마구 휘두르는 등 왕을 세력을 능가하게 되자 이곳저곳에서 상소가 빗발쳤다.


“여태 나와의 약속을 지키느라 고생했네. 자네가 내 힘이 되어주어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네. 허나 이제 자네와 헤어져야 할 순간이 온 것 같아.”


“전하, 저는 언제나 전하의 편입니다. 전하가 원하신다면 낙향하여 조용히 살겠으니, 슬퍼하지 마시고 저를 내쫓아 주십시오.”


정조의 복수와 은밀한 계획들, 그리고 규장각 내에서의 인재양성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정조의 심복 홍국영은 결국 평민으로 전락되어 지방으로 내쫓기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정약용을 만나 그에게 총애를 주었으나, 그가 천주교도라는 의심을 받자 그의 직위를 하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허나 정조의 뜻을 거스른 채 굳이 사퇴를 하고 낙향을 해버린 정약용에게 정조는 간절한 편지를 보냈다.


“정약용, 어찌하여 그대마저 나를 떠난단 말인가? 그대가 떠나면 조정은 온통 벽파의 세상이 되고 말 것이야. 더 이상 과인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 말고 제발 내 곁에 남아주게. 그대가 진정 나라를 생각한다면 즉시 올라오라!”


정조의 진심어린 편지를 받고 정약용은 다시 조정으로 올라왔으나, 이 때 정조는 심한 지병에 시달려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등에 난 종기가 매우 악화되어 고통의 신음을 흘리던 정조는, 1800년 6월, 49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지는 그의 마지막은, 사도세자의 죽음만큼이나 씁쓸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내게, 독기 가득한 복수심은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 초라하게 내던져 있던 조그만 뒤주도, 그 날의 강렬했던 태양빛도, 너무나 선명해서 잊을 수가 없어. 제 아비도 지키지 못했던 불효자로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다. 나 이제 늙고 병들어 과거를 돌아보니 내가 해놓은 모든 일이 그저 초라하게만 느껴지는 구나!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칭찬이나 충고의 말로 나를 보듬어 주셨을까? 나를 해하려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숨조차 쉴 수 없구나! 그저 가엾게 쓰러진 아버님이 그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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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륜보다 앞선 정쟁(政爭) -사도세자영혼이야기




나는 본시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동궁에 틀어박혀 사는 신세가 견디기 힘들었다.
“귀한 자는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려야 마땅하거늘… 귀한 자는 더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흔하디흔한 한량들이 즐기는 것도 못 즐겨서야 되는가.”
나는 부왕 몰래 평양을 가서 그곳 기생들과 한바탕 즐기고 돌아왔다.
이것을 알게 된 부왕의 진노가 심하였다. 이에 아랑곳없이 나는 동궁 후원(後園)에서 무술을 익히고 있었다.
과녁을 만들어 활을 쏘고 인형을 만들어 칼을 써서 베는 연습을 했다. 때로는 내 눈앞에 거슬리는 아랫것을 한 칼에 베어보는 실전연습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를 반대하는 당파는 내가 학문을 안 하고 무예를 닦으면서 역모를 꾀한다고 부왕께 고해바쳤다.
나는 부왕께 불려 나갔다.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죄를 기다리다 휘녕전(徽寧殿) 섬돌 아래 엎드렸다.
“동궁은 듣거라. 너는 내 허락도 없이 관서지방으로 나가 기생들과 방탕한 짓을 하였으며 심지어 여승을 궁중으로 끌어들여 중놈의 자식을 왕실의 혈통에 섞으려 하였고 근래에는 역모를 꾀하기 위하여 무술연마까지 하고 있다는데 모든 것을 이실직고 하고 추호도 거짓이 있으면 용서 안 하리라.”
“아바마마 소자 잘못한 일에 용서를 바라오나 역모라니 그것은 부당하옵니다.”
“너의 음모를 내게 고변한 자가 있고 중벌을 내리라는 대신들의 의견이 있도다.”
나는 계속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부왕의 문책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렇다면 왜 후원에서 칼을 쓰고 활을 쏘며 알지 못할 불순한 책동을 하는가.”
나는 우리 조선의 전통적인 문관 사회가 싫었다. 내가 왕이 되면 우리나라를 무관위주의 사회가 되게 하고 싶었다. 국가를 책임지고 지도하는 자들이 자기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자는 마음 자세를 갖춘 자들이 아니라면 그 나라의 장래는 알 수 없다. 문관들은 거의가 이론을 내세울 줄만 알지 자기 몸을 바치려는 마음을 갖는 자는 드물었다.
“소자는 화증병(火症病)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무술을 동작(動作)하곤 하였나이다.”
“나가 기다려라.”
나는 나가서 일단 부왕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윽고 부왕이 나를 불러 휘녕전에 다시 나아갔다.
부왕은 지의금(知義禁)과 판의금(判義禁)만을 입회시키고 있었다.
“자결하라.”
부왕은 칼을 내주었다.
이 때 영의정과 좌의정 등이 와서
“저희에게 죄를 주시옵소서.”
하고 이마를 섬돌에 부딪쳐 머리에 피를 내었다.
“영상! 시역의 음모가 있는데 과인을 보고 고정하라니.”
“하명하셔서 자세한 결과를 조사토록 하심이 가한 줄로 아뢰오.”
“경들은 물러가오 집안일은 내가 처리하겠소.”
“전하. 어찌 집안일이옵니까?”
“대신들은 물러가라”
할 수 없이 그들은 물러갔다.
부왕은 자기가 왕비는커녕 후궁도 못되는 무수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게다가 나 자신도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나의 정식 아내인 세자빈으로부터 세손이 태어나니 요즈음 세손만을 아끼고 있었다.
“어서 자결하라.”
부왕은 더욱 단호히 다그쳤다.
“전하 고정하시옵소서.”
이번에는 대신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오늘로 세자를 폐서인한다.”
부왕은 못 이겨 태도를 완화한 듯했다.
그것으로 자결은 면하나 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부왕은 시립한 군사들에게 큰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군사들이 뒤주를 가져오자.
“그 안으로 들어가라.”
나는 단지 형벌을 주는 것으로 알고 들어갔다.
밖에서 철커덕 자물쇠 소리가 나더니 쿵쿵 못질소리가 났다.
몇 시간이 지나도 밖에서는 아무소리도 없었다.
갈증과 허기가 났다. 처음에는 괴로웠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진맥진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윽고 잠이 들었다.
부인 홍씨의 웃는 모습이 나타나 차차 다가오더니 다시 멀어졌다.
잠이 깨도 그저 깜깜할 뿐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고 정신도 혼미하여 생시라고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언제 모르게 잠이 든 것인지 그저 환상이 보이는 것인지 여승 가선(佳善)이가 하늘 중에 떠오는 것이었다.
“동궁마마, 기생으로 평생을 살 뻔했던 저가 마마의 은혜를 입어 불문에 귀의하여 순사(殉死)하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으오리까. 소녀(小女)와 함께 영생극락의 길로 가시옵소서.”
가선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애는 평양기생이었으나 한번 나와 동침한 이후로는 더 이상 남자를 상대할 수 없다 하여 중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뒤주에 갇혀 있는 동안 나의 방행(放行)과 관계된 자들은 기생이건 노복(奴僕)이건 모조리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었다.
“그래 함께 가자.”
나는 가선이와 함께 떠나갔다. 나의 몸은 그 애보다 더 무거워 조금은 거북하였으나 그래도 세상의 육신을 벗어나니 홀가분하였다.
(사도세자)



고대 로마의 여인 중에서 가장 음란한 여자를 꼽으라면 단연 메사리나일 것이다.


창녀왕비로 유명했던 그녀의 음탕함은 황제이자 남편이었던 클라우디우스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메사리나의 이런 성적 음란함은 클라우디우스에겐 또 다른 매력이자 자랑거리였을지도 모른다.


성적으로 음란한 여자에게 남자는 끌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내면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본능적 욕구를 대리만족함으로써 음란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구나 교활한 남자의 경우 동시에 두 가지 타입의 여자를 선호하는데 한명은 정숙하면서 살림 잘하고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여자이며, 다른 한명은 분방하면서도 위태롭고 섹시하면서 음란함까지 갖춘 애인으로써의 적합한 여성이다. 물론 동시에 아내와 애인을 두려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남자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천부적으로 음란함을 타고난 메살리나는 악녀, 창부, 왕비였으며, 섹시하고 아름다웠다. 더구나 그녀는 황제보다 35살이나 어린 여자였다.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메살리나의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50세의 나이로 결혼을 한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섹시함에 반해 왕비로 들이고 자신도 그녀의 음란함을 엿보며 대리충족을 한 듯하다.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어릴 때 앓은 병으로 인해 다리는 제대로 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50대의 남자가 20대의 음란하고 성욕이 강한 메살리나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따라서 황제는 언제나 성적인 욕구불만 투정이었던 메살리나의 방종을 두고 모른 척 했다.


메살리나는 섹스파티를 열어 부부동반에 참석한 남자들 중 맘에 드는 남자를 물색하여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음란한 섹스를 하는 메살리나를 황제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것은 자신이 성적으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을 만큼 정력이 쇠락했기 때문이다.


메살리나는 이내 섹스파티에서도 만족이 되지 않자, 밤이 되면 얼굴을 가리고 궁전을 빠져나와 뒷골목 사창가에서 ‘뤼키스카’라는 기명을 내걸고 매춘을 시작했다. 가슴부위를 금빛으로 칠하고 자신의 음부엔 연지를 바른 후 낮선 남자들에게 연달아 몸을 맡긴 것이다. 사창가가 문을 닫을 시간이 되면 사내들과의 성적 놀음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남편인 클라우디우스 곁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녀의 모든 행동을 모른 척 했다. 이것은 아마도 늙은 황제가 어린 아내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메살리나는 미남 청년이던 집정관 실리우스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실리우스를 사랑하게 되면서 음란한 파티도 매춘도 사라졌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메살리나는 실리우스와 단둘이 있을 때는 왕비도 요부도 아닌 평범한 여자로 변했다.


하지만 실리우스는 평범한 여자로 변한 메살리나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와 자신 중 선택을 하라고 한다. 결국 실리우스의 사랑을 선택한 메살리나는 로마의 법률을 어기고 이중결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죽이고 자신의 어린 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삼아 섭정을 하려고 마음먹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클라우디우스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이중 결혼을 하고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것만큼은 용서하지 못 했다. 결국 메살리나는 실리우스와 함께 체포되어 죽게 된다. 그녀의 나이 불과 23살이었다. 황제는 그녀가 죽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어린 아내를 둔 황제의 비극 그리고 어린 여자가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한 후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해 벌어진 비극이라 생각한다.


메살리나가 실리우스같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더라면 그녀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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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林원장과 함께 하는 삼자경三字經 이야기 (17)

글/ 임영철(서울경희한의원장)
曰 仁 義 禮 智 信
왈 인 의 예 지 신
yuē rén yì lǐ zhì xìn
此 五 常 不 容 紊
차 오 상 불 용 문
cǐ wǔ cháng bǜ róng wěn

[해석] ‘인의예지신이라고 하는 이 오상(五常)은 혼란하게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常)이란 떳떳하다는 의미로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다섯 가지 떳떳한 도리를 말한다. 선인들은 인륜과 도덕이 없는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유가의 오상은 전통사회에서 도덕수준을 유지하는데 강력한 작용을 일으켰다.

‘인의예지’ 따라 사대문 (四大門) 만들어

전통사회에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인간 세상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인 북극에 대응하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져 왔다. 때문에 각 왕조의 수도, 특히 도성의 설계는 그 왕조를 건립한 사람들의 사상과 이념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은 유가(儒家)의 성리학(性理學)에 입각한 것으로 조선은 중국 역대의 그 어느 왕조보다도 유가 이념에 충실한 예악(禮樂)과 문물 제도를 갖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서울 사대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었다.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한뒤 이듬해부터 한양을 방위하기 위한 성곽을 쌓고 4대문을 축조했다.

한양의 4대문이란 흥인지문(興仁之門 동대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 숙정문(肅靖門 북대문)을 말한다. 그럼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동서남북(東西南北)에 어떻게 배치했을까?

東=인 西=의 南=예 北=지

인의예지는 각각 동서남북에 대응하여 사대문의 이름에 한 글자씩 들어가 있다. 음양오행사상에 의하면 동(東)은 오행 중에서 목(木)에 해당한다. 목은 사계절 중 봄에 해당하며 봄의 상승하는 기운, 자애롭고 인자한 기상 나타내기 때문에 어질고 사랑한다는 의미의 인(仁)이 대응된다. 반면 서(西)는 오행 중에서 금(金)에 해당하는데 금속의 기운은 날카롭고 예리하며 엄정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의(義)에 대응된다. 한편 예(禮)는 ‘화려한 예식’이란 말에서 보듯이 꽃처럼 화려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오행 중 화(火)에 해당하기에 방위로는 남(南)이 된다. 지(智)는 지혜를 말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에서 보듯이 오행 중 수(水)에 해당한다. 이를 계절로 따지면 겨울이 되고 방위로는 북(北)이 된다. 단 북문에 해당하는 숙정문(肅靖門)의 원래 명칭은 숙청문(肅淸門)으로 엄숙하고 깨끗하다는 의미가 있다.

‘흥인지문’만 네 글자인 이유
그럼 왜 4대문의 명칭 중에 유독 동대만은 흥인문(興仁門)이라 하지 않고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했을까?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풍수(風水)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한양(漢陽)이란 말은 한수(漢水 즉 한강)의 북쪽에 있는 도시란 의미로 예전의 한양은 지금의 사대문 안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한양의 풍수에서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서쪽의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左靑龍)인 낙산의 기세가 약한 편이다.

때문에 4대문을 명명(命名)할 때 한양 풍수의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목에 해당하는 동쪽의 기운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글자 이름에 지(之)를 추가해 다른 문보다 길게 지었고 또 현판도 세로로 달아 상승하는 목(木)의 기운을 강화시켰다.
그럼, 인의예지신 오상(五常) 중에서 나머지 하나인 신(信)은 어디에 해당할까. 대답은 간단한데, 바로 오행 중에서는 중앙(中) 토(土)에 해당하는 곳으로 풍수에서 말하는 혈(穴)자리이자 사방을 다스리는 주재자인 사람(구체적으로는 임금)에 해당한다.
한양의 4대문은 단순히 사람이 드나드는 성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유학을 숭상한 조선왕조에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4대 덕목을 4대문 이름에 하나씩 넣었고 도성 한가운데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워 오상의 마지막 덕목인 신(信)의 상징으로 삼았다. 즉, 사람들이 도성을 출입할 때마다 문 이름을 보거나 종소리를 들으면서 사람이 늘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五常)를 되새기도록 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종각에 믿을 신(信)자를 넣은 것도 깊은 의미가 있다.

ⓒ 삽화/박영철
[대기원]신선 안기생에게서 도술을 전수받다

이소군(李少君)은 제(濟)나라 사람이다. 이소군과 동시대에 살고 있던 한 무제(漢 武帝)는 도술(道術)에 푹 빠져서 법술이 높은 방사(方士)들을 널리 초빙하였다. 이때 이소군은 신선 안기생(安期生)에게서 화로(火爐)를 걸어 신선이 되는 신단(神丹)을 제련하는 비법을 전수받았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처방에 따라 단(丹)을 만들 방법이 없었다.

이소군은 제자들에게 “한 해, 한 해 가는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늙을 것이다. 재력이 부족한 데다 설사 전력을 기울여 논밭을 경작한다 하더라도 단(丹)을 만들 만큼 충분한 돈을 모을 수 없다. 지금 방법이 하나 생겼다. 현 황제인 무제가 도술을 좋아하니, 나는 부름에 응해 천자를 만나고자 한다. 분명히 만사가 뜻대로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 무제를 만나 신선술을 설파하다

이소군은 봇짐을 지고 장안으로 가서 연단(煉丹)의 비법을 한 무제에게 올렸다. 그리고 한 무제에게 “이 비방(秘方)은 단사(丹砂)를 황금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때 이것을 복용하면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일찍이 동해 바다 위에서 노닐 때 신선 안기생을 만났는데, 안기생이 늘 먹는 대추는 주먹만큼 큽니다. 안기생이 저에게 이 비법을 전수해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 무제는 이소군의 자초지종을 정중하게 경청하고는 그 말에 푹 빠져 이소군에게 벼슬을 내리고 곁에 머물게 했다. 또 이소군에게 무수한 금은보화를 상으로 내렸다.

이소군, 정황으로 보아 이미 수백 살을 살다

한 번은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이소군이 왕족인 무안후(武安侯)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노인 한 분이 있었는데 머리와 수염이 새하얗게 쇠었다. 나이가 이미 90여 세가 넘은 고령이었다.

이소군은 그 노인에게 성명을 묻고 난 후, “나는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의 할아버지는 이름이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다. 나는 당시 당신의 할아버지와 함께 밤에 놀러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은 그때 아주 어려서 할아버지 옆을 따라다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신도 이미 노인이 되었다.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은 이제야 내가 생각나는가?” 하였다.

그 노인은 이소군이 옛날 상황을 눈앞에서 보듯이 아주 생동감 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또 한 번은 어느 날 하루 이소군이 궁전에 들어갔다. 이소군이 궁전 가운데 청동기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청동기를 가리키면서 한 무제에게 “나는 내 눈으로 약 500여 년 전 춘추시대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일찍이 이 청동기를 침전 안에 놓아둔 것을 보았다.”하였다.

이 말에 한 무제는 반신반의하였다. 그래서 청동기를 자세히 관찰해 보니, 청동기 위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를 해독하고서야 비로소 옛날 제나라에서 사용하던 침전용 장식 그릇임을 알았다.

앞의 두 가지 사례에서 보듯이 이소군은 이때 이미 수백 년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보기에는 그저 50여 세로 보이는데 얼굴색과 피부가 윤기가 나고 광택이 있었으며 하얀 이빨이 가지런한 게 아이들과 같아 조금도 늙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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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직공도(梁職貢圖)에 그려진 백제인(左), 일본인(右)
↓ KBS 역사스페셜 방송분. 마치 귀족과 거지의 차이다.
신라인 김가기 고사 2007. 9. 7. 23:27

列仙小傳 (30) 신라사람 김가기(金可記)

ⓒ 삽화 박영철


당나라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대기원]김가기(金可記)는 통일신라시대 사람으로 당나라 경종(敬宗) 보력(寶歷)연간(825-826년)에 중국에 들어가 20여년 이상, 중원의 문물과 황노지학(黃老之學 : 도가와 신선지학)인 도가공부를 하였다.

김가기의 성격은 부드러우면서 조용하였고, 평소 도가학설에 심취하였으며 화려하거나 사치를 일체 구하지 않았다. 늘 조식하면서 양기를 길렀으며 심신 수련을 취미로 삼았다.

김가기는 널리 학문을 닦았으며 기억력 또한 비상했다. 그가 지은 문장은 내용이 맑고 고원하여 빼어났다. 외모도 당당하였고 행동거지, 언동 등 모든 것이 중국 사람을 뛰어넘는 풍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젊어서 당나라 진사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마다하고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종남산 자오곡(子午谷)에 풀로 엮어 집을 만들어서 거주하면서 세상과 왕래를 끊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몸소 많은 기화요초를 심어서 가꾸기도 하고 늘 향을 사르고 고요히 가부좌하곤 하였다. 때때로 도덕경과 기타 신선에 관한 경전(仙經)을 낭송하였다.

이렇게 3년이 지나, 문득 신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자 바로 배를 타고 귀국했다고 한다.

당나라 선종에게 승천을 알리다

신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라생활이 여의치 않았던지 김가기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김가기는 유가(儒家)복장에서 도가복장(道士)으로 완전히 바꾸어 입었으며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김가기는 사람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줄곧 좋은 일을 하여 음덕을 쌓았다. 무릇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도와주었다. 당나라 선종(宣宗) 대중(大中) 11년(857) 12월, 김가기는 갑자기 선종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 김가기는 옥황상제의 조칙을 받들어 영문대(英文臺)시랑(侍朗)으로 부임하는데, 내년 2월 15일 하늘나라로 승천하고자 합니다.”

당나라 선종은 이 사실을 이상히 여겨 사신을 파견하여 김가기를 궁중으로 불렀으나 결연히 사양하였다. 사신이 다시 김가기에게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하였으나 그 조서는 다른 신선의 손에 있으며 이곳 인간 세상에는 없다고 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선종황제는 김가기를 높이어 궁녀 4명과 많은 예물을 하사하고, 또한 신변의 잡다한 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도록 관리 두 명을 별도로 파견했다.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약속한 날짜에 승천하다

김가기는 이때 내실에 혼자 거주하여 파견된 궁녀나 관리들이 접근하기조차 어려웠다. 매일 밤마다 그 내실 안에서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느 날 몰래 다가가 훔쳐보았다. 방안에는 많은 남, 여 신선들이 앉아있는데, 각각 용이나 봉황을 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신선들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시위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관리들은 그저 깜짝 놀랄 뿐이었다.

승천하겠다는 2월 25일이 되자, 봄빛이 화창하고 봄꽃이 만발했다. 공중에는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가득한데 구름사이에서 선학소리가 들리고 봉황이 비상하였다. 화려하게 꾸민 정묘한 수레와 깃발이 출몰하였다. 그 순간 사방에서 음악소리가 울리고 아쟁과 퉁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신선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김가기는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나 천천히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이 기이한 일대 장관을 본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는 바,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구경꾼들은 이 희유한 광경에 몹시 놀랍고도 의아하였으나 다시없는 일생일대의 눈요기였다고나 할까?

【신전문화(神傳文化)】
글/육문(陸文)




【명혜망】 청나라 사람 기효람(紀曉嵐) 이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에서 한 신기한 도인이 명리를 언급한 내용을 적었다. 내용은 깊이가 있고 실제와도 부합한다. 지금 읽어도 아주 교육적 가치가 있으므로 주요 내용을 선택해 아래와 같이 번역해본다.

헌현(獻縣)에 한 현령이 있었는데 이름이 명성(明晟)이고 응산현(應山縣) 사람이다. 그가 한 가지 억울한 안건을 접수했는데 평민을 위해 누명을 벗겨주고 잘못을 고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또 상사가 허락하지 않을까 두려워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에게 문두(門斗)라는 이름의 부하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특이한 공능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명성은 문두를 보내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가르침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 친구는 문두에게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 “명성 현령은, 명색이 현 백성들의 부모로 불리는 관리이니 마땅히 백성들의 억울한 것만을 고려해야지 어찌 상사의 허락을 고려하는가? 그는 이위(李衛) 선생이 말씀하신 것을 잊었단 말인가?”

문두는 돌아온 후 명성 현령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명성이 듣고는 크게 놀라 이위가 오래전에 그에게 알려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문두의 친구는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을까? 너무도 신기했다.

원래 이위 제부대인(制府大人)이 벼슬하기 전의 일이다. 한번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한 도인을 만났다. 당시 한 승객이 운임을 적게 주려고 배 주인과 다투고 있었다. 도사는 한숨을 쉬면서 “한 사람이 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도 돈을 덜 내겠다고 다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로다!”

이위는 이 말을 듣고 도사가 말한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후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주인과 다투던 그 승객이 갑판에 걸려 넘어지면서 단번에 물에 빠져죽었다. 이때서야 이위는 이 도사가 너무나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배가 뒤집히려 했다. 도사가 갑판 높은 곳을 밟고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우자 강바람이 재빨리 멎었다. 배위에 있던 사람들이 구원된 것이다. 이위는 도사에게 구명해준 은혜에 거듭 감사를 드렸다. 도사는 말했다. "방금 물에 빠진 사람은 운명에 결정된 것이므로 내가 구할 수 없었지만 당신은 귀인이고 당신이 난을 만나 구원 되는 것도 명에 있으니 당신은 내게 감사할 필요가 없다."

이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았다. 이에 “당신의 가르침을 들으니 제 평생에 수익이 됩니다. 앞으로 저는 평생동안 분수를 지키고 명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재삼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도사는 말했다. “당신의 이 말은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영예와 치욕, 승강부침,빈부 등에서 응당히 본분을 지킨다면 곧 명을 지키는 것으로 역시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것이다. 명에 순종하지 않고 서로 의심하고 속이며 서로 알력이 생기면 어떠한 나쁜 일도 저지를 수 있다. 이리하면 곧 업을 짓는다. 예를 들면 이임보, 진회 등이다. 이들이 만약 명을 지키고 자연스러움에 따라도 역시 재상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위로 올라가려고 수단을 부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충신을 모해했지만 재상보다 더 큰 벼슬을 하진 못했다. 자신에게 죄악만 쌓았던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민생의 이해(利害)에 관련된 것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백성들의 질고와 민중의 억울한 일을 방임하고 자연스러움에 맞기면 안 된다. 모든 책임자들은 모두 책임을 다해야한다. 제갈공명은 ”신하는 죽을 때까지 허리를 굽혀 마음과 힘을 다한다. 일의 성공과 실패는 신하의 총명함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라고 말했으니 바로 이런 도리이다. 천지가 인재를 배양하고 국가에서 각급 관원을 설치한 목적은 국가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돕자는 것이다. 관직에 있으면서 권리를 장악하고서도 수수방관하며 운명에 맡긴다면 천하는 왜 이런 사람을 만들고 국가는 왜 하필 이런 관리를 두겠는가? 이상은 성현 입명(立命)학설의 완벽한 진리이므로 당신이 전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도사는 이 말을 마친 후 배에서 내려 어디론가 가버려 더 이상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신전문화(神傳文化)】


글/육문(陸文)
【명혜망 】 청나라 시대 학자이자 문학가인 기윤(紀昀)은 자가 효람(曉嵐)으로 직예헌현(直隸獻縣 지금의 하북성에 해당)사람이다. 건륭(乾隆) 황제 때 진사(進士)가 되어 관직이 예부상서(禮部尚書) 겸 협판 대학사(協辦大學士)에 이르렀다. 일찍이 서고전서관(四庫全書館)의 총찬관(總纂官 역주: 서적 출판 총책임자)을 역임했고 저 유명한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를 만들었다. 정말로 진리를 탐구하고 정화(精華)를 모았으며 심오한 진리를 드러냈다. 이를 통해 보건대 그의 독서가 얼마나 넓고 광범위하며 그가 들인 공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편집영역에서 가히 정교하고 뛰어난 작품들을 집대성했다고 할만하다. 그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견해로 사람됨에서나 저술 중에서 신불(神佛)을 믿고 공경한 이야기들을 선택해 누구도 뒤엎을 수 없는 확실한 것으로 관철시켰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는 무신론을 타파하는 예리한 무기이다. 그는 책속에서 대량의 사실(事實)을 들어 신불(神佛)의 존재를 입증했고 신불이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에 유리함을 선전했다.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 7권 제 61편(원서에는 따로 장절 표시가 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서는 독자들이 찾아보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이렇게 표시한다)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1) 첫 번째 일화:

“한수립(韓守立)의 아내 유씨(俞氏)는 평상시 고모 할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효성과 공경이 지극했다. 고모 할머니는 오래전에 두 눈을 실명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또 아주 경건하게 신불(神佛)께 기도를 드렸음에도 효과가 없었다. 이때 천성이 아주 교활한 한 사람이 그녀를 속여 “당신의 살을 베어 신등(神燈)을 밝히고 이렇게 신불에게 기도하면 당신 고모 할머니의 눈병이 나을 겁니다.”라고 알려주었다. 유씨는 충직한 사람이라 그 사람이 일부러 자신을 속이고 우롱하는 것임을 모르고 정말로 자신의 살을 잘라 등을 밝히고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 사기꾼은 밖에서 그녀를 크게 비웃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일이 발생했으니 고모 할머니의 두 눈이 다시 밝아진 것이다!“

기효람은 이 사건에 대한 분석과 평가에서 “유씨가 속임을 당해 살을 잘라 신에게 기도한 것은 우매한 행위이다(필자 주 : 기효람이 지적하는 것은 살을 잘라 신에게 기도드리는 것은 우매한 행위이니 다른 사람이 함부로 따라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 그러나 그녀의 우매한 속에는 신불에 대한 경건함과 윗어른에 대한 순수한 효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경건함과 효성은 끝내 신불을 감동시켰고 신불은 그녀를 도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고 무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지극한 이치가 감겨 있다!”
“신불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이론에 따라 말하자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확실히 존재하며 또 나타났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런 사실의 출현은 그것에 여전히 도리가 있음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신불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일부 사람들이 너무나도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할 뿐이다.”

2) 두 번째 일화:

“왕희성(王希聖)이란 이름을 가진 거지가 있었는데 두 다리가 마비되어 걷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조금씩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길에서 보자기를 하나 주웠는데 그 안에는 황금 200금이 들어 있었다. 그는 길가 풀이 우거진 속에 보자기를 감추고는 그곳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황금을 잃어버린 사람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이 흐른 후 장제비(張際飛)라는 이름의 상인이 황급히 달려와 무언가를 찾았다. 왕희성이 그에게 무엇을 찾는지 물었다. 확인 결과 그가 찾으려는 물건이 바로 왕희성이 주은 보자기였다. 이에 왕희성은 보자기를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장제비가 금을 반으로 나눠 그에게 주려 하자 왕희성은 받지 않았다. 장제비는 이에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평생 동안 그를 돌봐주겠다고 했다.

왕희성은 “내 몸이 불구인 것은 하늘이 내가 전생에 지은 허물에 근거해 내리신 징벌입니다. 내가 만약 하늘의 뜻을 어기고 이곳에 앉아 행복을 누린다면 앞으로 보다 큰 징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기어이 그곳을 떠났다.

나중에 어느 날 왕희성이 한 신묘(神廟) 안에 누워있는데 꿈속에 문득 한 취객이 와서 그의 두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을 보았다. 아주 아프게 잡아당겼는데 취객이 간 후 그의 다리는 곧 정상상태로 회복되었고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왕희성은 건륭 기묘년(己卯年)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기효람은 이에 특별히 “장제비는 우리 집 어른과 잘 아는 사이이며 나도 그를 본 적이 있다. 이 일은 바로 장제비가 직접 내게 들려준 것이다.”라고 썼다.

이어서 기효람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희성의 선행은 마땅히 선(善)한 보답을 받아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편안히 여기고 다른 사람이 주는 보응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신불(神佛)은 그의 선한 마음을 보고 아주 소중히 여겨 곧 취객이 다리를 잡아당기는 방식을 이용해 그에게 보응을 준 것이다. 이 일화는 앞에서 언급한 일화와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기에는 황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역시 지극한 이치를 내포하고 있다.”(기효람이 말하려는 의도는 바로 이런 신비한 일을 믿으려 하지 않으며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사실 이는 모두 사실이며 아주 큰 이치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선악에는 보응이 있음은 하늘의 이치이기에 당연히 지극한 이치이다.)

이어서 기효람은 갑자기 화제를 바꾸어 다른 이야기를 말한다.

“전에 과개주(戈芥舟)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 지역 『현지(縣誌)』편수관의 편집인원이 상술한 두 가지 일을 『현지(縣誌)』에 포함시킨 것을 비평했다. 황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으며 역사를 서술하는 방법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기효람은 이에 대해 “『현지(縣誌)』에는 우리 현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사실들을 적었다. 전체 서적은 체제가 근엄하고 사법(史法)을 구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은 바로 필부들로 하여금 신명(神明)에 감동케 하여 이를 통해 선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각박한 세속을 바꾸려는 것이다. 이는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며 교육적인 의미가 아주 풍부한 진실한 일을 쓴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기효람의 이 문장은 기술과 동시에 평가하는 방법을 사용해 신기한 일을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관점 즉, 무신론의 관점을 반박하고 있다. 과개주는 그의 선배이지만 기효람은 큰 시비 앞에서 양보하지 않고 조리 있게 힘써 반박했으니 이는 그가 유신론의 신앙과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구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바로 ‘선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각박한 세속을 바꾸려 한다(激發善心,砥礪薄俗)’는 것이다. 이 8자는 바로 선악에는 보응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악행을 하지 말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유신론자의 공동 소원을 밝힌 것이다.
“다 쓰러져가는 형세를 돌이켜 든든한 기둥이 되려하는데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라는 말과 “(현지(縣誌)에) 이 두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은 바로 필부들로 하여금 신명(神明)에 감탄하게 하여 이를 통해 선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각박한 세속을 바꾸려는 것이다."라는 기효람의 말은 아주 투철하면서도 힘 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기효람의 이 문장에서 그가 표현하고자 한 주제를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자면 바로 다음과 같다.

“엄연한 사실 앞에서 신불(神佛)을 믿고 불법(佛法)을 선전하는 것은 정확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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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집착심 고사 2007. 8. 28. 18:24

字의 존엄 자혜(23) -

[대기원] 인도에 흥미로운 ‘원숭이 잡는 법’이 있어서 소개해 본다.

인도에는 크고 납작한 종류의 호박이 있다. 이 호박이 다 익으면 바짝 말린 다음 구멍을 몇 개 뚫어놓으면 원숭이들이 그 속에 손을 집어넣는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말린 호박의 속을 파내고 여러 종류의 콩으로 채운 다음 원숭이들이 많은 숲으로 가지고 간다. 사냥꾼을 경계하는 원숭이들은 나무 위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사냥꾼들은 큰 호박의 주위를 둘러싸고, 안에 손을 집어넣어 콩을 한 움큼 꺼내 먹는 시늉을 한다. 실제로는 단지 콩 몇 알을 손끝으로 꺼내서 먹는 것이다. 사냥꾼들이 호박을 남겨두고 가면, 나무 위의 원숭이들은 그들이 멀리 떠난 것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호박 근처로 모인다. 처음에는 호기심 있게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동시에 호박 속으로 손을 집어 넣는다. 호박 속의 콩을 한 움큼씩 쥔 원숭이들은 기쁜 마음에 손을 빼려고 하지만, 구멍이 작아 주먹을 뺄 수 없다. 호박껍질 또한 매우 두꺼워서 손을 빼려면 주먹을 펴야 하지만, 원숭이들은 손안의 콩 때문에 아무도 손을 놓지 않고 서로 싸우거나 주위를 돈다.

이때 사냥꾼들은 밧줄을 가지고 와, 원숭이를 한 마리씩 묶어서 잡는다. 원숭이들은 손만 놓으면 살 수 있지만, 손목의 털이 뽑히고 피부가 벗겨져도 절대 손을 놓지 않는다.

이렇듯 원숭이들의 마음은 고집스럽고, 집착심이 강해 목숨까지도 돌보지 않는다. 옛 사람들은 이런 원숭이를 가리켜 ‘우(禺)’라고 하였고, 이런 원숭이의 마음을 ‘우심(愚心)’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어떤 것(물질적 혹은 비물질적)에 너무 집착하여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愚) 일은 없을 것이다. 늦지 않게 손을 놓는 것이 바로 자신을 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列仙小傳 (29) 서 복 (徐福) (2)

ⓒ 삽화 박영철
반신불수 환자, 신선을 찾아서

[대기원]진시황으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후, 당(唐)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때였다. 선비 한 명이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누어 있었다. 그 당시 어의로 이름을 날리던 장상용(張尙容)도 그 선비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반신불수가 된 선비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나의 신체는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견디기가 어렵고, 수명을 얼마나 연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듣기로는 동해바다 한가운데 신선이 있다고 한다. 신선을 찾아가서 신선에게 병을 보이면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가족과 친구들이 모두 만류하였으나 병자는 결심을 굳힌 듯 듣지 않는다. 반신불수인 선비는 자기를 돌보아줄 하인 한 사람과 함께 먹을 양식 등 생활필수품을 챙겨서 등주(登州)해변가로 갔다. 속도가 제법 빠른 배 한 척을 구해서 짐을 싣고 돛을 펴서 바람을 따라 배를 저어 나갔다. 이렇게 항해한 지 십여 일 만에 망망대해 가운데에서 섬 하나를 발견했다.

백발의 노인이 바로 신선 서복

멀리서 관찰해 보니 점점이 새까맣게 보이는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아침에 조정에서 조회를 하듯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배가 해안에 닿았다. 해안가에서는 여인네들이 바닷물에 약물을 씻고 있었다. 그 선비는 여인들에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섬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중 여인하나가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들 중, 가운데 침상 위에서 가부좌하고 앉아있는 수염이 하얀 노인을 보시오, 저분이 바로 서군(徐君)입니다.” 하였다.

선비는 서둘러서 “서군(徐君)이라면 누구를 말합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당신도 알겠지만 진시황 때의 서복(徐福)입니다.”하였다. 선비는 깜짝 놀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곳을 보니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막 자리를 떠나려 하였다.

그 선비가 하인의 부축을 받아 해안으로 올라가 서복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기의 병세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상세히 보고했다. 서복은 “너의 병은 나를 만나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서복은 먼저 선비에게 맛이 향기롭고 먹기 좋은 밥과 찬을 먹도록 하였는데 밥과 찬을 담은 그릇이 작아 그 양이 아주 적었다. 선비가 양이 너무 적다고 투덜대자 서복은 “이것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찬을 더 주겠다. 다만 이것조차 너는 다 먹지 못할까 염려스럽다.”하였다.

반신불수를 고치고, 동풍을 빌려 되돌아오다

선비는 그 말을 믿지 못하면서도 한 입, 한 입 먹기 시작하였는데 큰 밥그릇으로 몇 개를 먹은 것처럼 배가 불렀다. 그러나 그릇 안에는 하나도 먹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음식이 줄어들지 않고 남아있었다. 서복은 또 작은 술잔에 술을 따라 선비에게 한 잔 건넸다.

그날 저녁은 잘 자고 다음 날이 되었다. 서복이 약주머니에서 새까만 환약 몇 알을 꺼내어 선비에게 먹도록 하였다. 그 약을 먹은 선비는, 뱃속에서 전쟁을 치르는 듯 요동이 심하여 서둘러 화장실로 갔는데 시커먼 똥이 설사처럼 쏟아졌다. 그러자 선비의 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못쓰던 수족이 다시 원활하게 움직였다.

선비는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서복에게 이곳에 머물러 스승으로 평생 모시기를 간청했다. 이에 서복은 “너의 운명 중에는 아직 세속에서 누려야 할 복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아직 여기에 머물 때가 아니다. 네가 돌아가는 길은 걱정마라. 내가 한바탕 동풍을 불게 해서 너를 돕겠다.”하였다.

서복은 돌아가는 선비에게 약 한 포대를 주면서 “이 약은 진단이 어렵고 치료하기 힘든 난치병을 고칠 수 있으니 돌아가서 잘 사용하라.”고 하였다.

선비는 머리 숙여 감사하고 서복의 명을 좇아 배에 올랐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 수일 만에 처음 출발했던 등주로 돌아왔다. 장안으로 돌아온 선비가 그간의 일을 당 현종에게 보고하자, 선술(仙術)을 사모하던 당 현종은 오직 부러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서복이 준 약으로 선비가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고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호에는 신라사람 김가기 편으로 이어짐)



한의사 林원장과 함께 하는 삼자경三字經 이야기 (10)

融 四 歲 能 讓 梨
융 사 세 능 양 리
róng sì suì néng ràng lí

弟 於 長 宜 先 知
제 어 장 의 선 지
dì yú zhǎng yí xiān zhī

[해석] ‘(공)융은 네 살 때 배를 양보할 줄 알았으니 윗사람을 공경함은 마땅히 우선적으로 알아야 한다.’ 동한(東漢) 시기 공융(孔融)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네 살 때 이미 큰 배를 형들에게 양보할 줄 알았다. 이렇게 윗사람을 공경하며 우애 있고 겸손함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도리이다.

[주석]

1.융(融):화합하다, 여기서는 사람이름.
2.양(讓):양보하다, 다투지 않다.
3.리(梨):배, 과일의 일종.
4.제(弟):아우, 여기서는 공경할 제(悌)의 의미.
5.장(長):길다, 연장자.
6. 의(宜):마땅하다.

【관련 일화 : 공융이 배를 양보하다(孔融讓梨)】

공융(孔融 153~208)은 동한(東漢) 말기의 유학자이자 대문장가로 유학을 창시한 공자(孔子)의 20대 손이다.
공융에게는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겨우 네 살 때부터 형들을 존경하고 겸양하는 도리를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집에서 배를 한바구니 보내와 부친이 형제들을 불러 한 사람당 한 개씩 가져가게 했다. 그러면서 융에게 먼저 가져가게 하자 그는 선뜻 가장 작은 것을 골라 형들에게 양보했다. 부친이 이 모습을 보고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천진난만하게 “형들은 저보다 크니까 당연히 큰 걸 먹어야 해요. 저는 어리니까 작은 걸 먹어야 해요.”라고 대답했다. 부친이 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말이 맞다.”고 인정해주었다.
공융이 형들에게 배를 양보한 이 일화는 몇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와 여전히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 있다.
공융은 12세 되던 해에 이미 총명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재주가 있었다. 한번은 부친이 경성(京城)에 있는 벗을 방문할 때 공융을 데려간 적이 있다. 당시 아주 거만한 한 관리가 있었는데 유명 인사가 아니면 아예 손님으로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공융의 부친이 이 사람을 만나고 싶었으나 혹여 문전박대를 당할까 근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융이 자진해서 부친께 “아버님 마음 놓으세요. 소자가 이 일을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공융은 큰 걸음으로 당당하게 그 관원의 집 앞에 가서는 문지기에게 말했다. “이(李) 대관원(大官員)께 이 대인(大人)과 친밀한 집안의 자제가 일이 있어 찾아왔노라고 전해주시게!” 이 대인은 자신과 친밀한 집안의 자제라는 말을 듣고는 곧 공융을 안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혹시 자네 조부님이 나를 아시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공융은 침착하게 “그렇습니다. 저희 선조는 공자님이시고 어르신의 선조는 노자님(노자의 성이 이씨이다)이신데 두 분이 서로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이었다고 하오니 저 공융과 어르신도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주변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이 아이의 장래가 촉망하리라 인정했다.
공융은 이들의 예측대로 성장한 후 과연 고위 관원이 되었고 고상한 품격과 뛰어난 재주로 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설】 사서에 보면 공융(孔融 153—208년) 일가에게는 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한 시기에는 황제들이 어린 나이에 등극해 외척의 세력이 강했다. 외척의 세력을 누르고 황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주로 황제 측근에 있는 환관(宦官) 세력을 이용했다. 그 결과 일부 외척을 제압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환관들이 정치에 개입하여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두 차례에 걸쳐 환관 세력들은 관료들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비방한다는 죄목으로 여러 사람을 제거했다. 이를 ‘당고(黨錮)의 화’라고 하는데 이 당시 장검(張儉)이란 인물이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런데 장검은 공융의 형인 공포(孔褒)의 친한 벗이었다. 장검이 수배를 피해 공포의 집을 찾아왔으나 공교롭게도 마침 집에는 어른들이 아무도 없었고 당시 16세인 공융만 있었다. 장검은 공융의 나이가 너무 어려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공융은 장검의 형색이 당황스런 것을 보고 집에 머물게 해주었다.
나중에 장검을 집에 숨겨준 일이 탄로나 장검은 다른 곳으로 도주했고 공융, 공포가 대신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공융은 사람들에게 장검을 머물게 한 것은 자신이니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형인 공포는 “그는 나를 찾아온 손님으로 동생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공융의 모친 역시 가장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나섰다. 결국 일가족이 서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며 죽음을 자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결국 나중에 황제는 공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을 통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공융의 명성이 더욱 커졌다.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공융은 어릴 때부터 겸양의 도리를 알았지만 또 정의를 위해 결연히 나서는 단호한 모습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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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존엄 자혜 (22) - 군자는 절대 원망하지 않는다.



[대기원] 어릴 적 잘못을 저지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난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잘못할 당시에는 모르지만, 혼나고 나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꾸지람에 불만을 품고 선생님을 미워하고, 고의로 반항하는 행동을 자주 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선생님도 점점 그를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나중에 일이 크게 벌어지고 말았다. 마음속에 앙심을 품은 친구는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집안이 부유한 편이 아니어서, 퇴학 후 그는 일을 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시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만약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을 때 감사함을 느낀다면, 그는 잘못을 고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지혜와 광명을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벌을 받으면 원한을 품고, 원한이 쌓여 원수가 된다. 이런 사람은 머릿속이 혼란해져 비이성적인 상태가 되기 쉽고, 이로 인해 수많은 원한과 누명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럴수록 우리는 순리적으로 판단하고, 원한과 누명을 풀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원수를 갚고 복수를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이를 더욱 선동하였다.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근대 무협소설이 유행하면서, 비이성적인 사유로 인해 이런 행동들이 정상화되었고, 심지어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더욱이 중공은 이런 기회를 틈타 사상을 날조하고 빈부 사이를 이간질하여, 수많은 원한을 만들고 수억의 생명을 살해하였으니, 그 죄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고 죄악의 구렁텅이로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원한을 가진 사람은 절대 군자가 될 수 없다. 옛 사람들은 자혜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恨’자를 구성하는 ‘艮(간)’자는 ‘어긋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이런 심리작용은 인성과 이성에 어긋난다는 것을 말한다.

역사상 많은 살인마들은 대부분 원한이 병이 되어,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악마로 변하였다.

고대 중국에는 아홉 가지의 형벌이 있었다. 죄가 가벼우면 채찍, 곤장, 유배를 보내고, 죄가 무거우면 다리를 자르거나, 사형시켰다. ‘仇(수)’자는 “사람(人)에게 아무리 복수를 한다 하더라도 이 아홉(九)가지 형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수와 원한을 쌓는다면 마귀가 될 것이고, 너그럽게 용서하고 인자할 수 있다면 그는 곧 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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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小傳 (28) 유안(劉安) (7)

ⓒ 삽화 박영철


[대기원]한 무제, 신선을 동경하였으나

신선이 되어 승천한 회남왕 유안은 수하들이었던 좌오(左吳) 등 다섯 명을 신선세계로 데려와 구경시켰다. 좌오 등이 인간세상으로 되돌아 온 후 선계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회억해서 기록으로 남겼다.

한 무제(武帝)가 이를 알고 좌오 등을 불러 들였다. 좌오로부터 선계의 이모저모를 듣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부러워한다. 그리고 한 무제는 "만약 회남왕 유안처럼 그렇게 해서 신선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제왕의 자리를 버리는 것을 신발을 벗듯이 그렇게 할 수 있으며 조금도 애석해 하지 않을 것이다."한다.

한 무제는 명령을 내려 뛰어난 선비들을 백방으로 불러들였으며, 자신 또한 회남왕이 스승으로 모신 팔공(八公)과 같은 신선(仙翁) 만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신선들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공손경(公孫卿), 난대 등 방사(方士)들에게 속임을 당해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 무제는 자신이 신선이 되지 못한 것을 그저 통탄할 뿐이었다.

닭과 개도 승천(昇天)하다

그런데 회남왕 유안이 득도하여 신선이 된 후, 유안의 집에서 기르던 닭과 개가 무의식중에 단약(丹藥)을 담은 그릇 속에 남아있던 단약 찌꺼기를 핥아먹었는데 뜻밖에도 승천했다고 한다. 하늘위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고, 구름 가운데 개 짓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바, 닭과 개가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이로부터 나왔다.

유안이 득도 승천하고 닭과 개도 승천했다는 고사는 후세에 많은 시인들이 시문(詩文)가운데 이를 인용하곤 하였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등왕정자'(騰王亭子)란 시에
“춘일앵제수죽리(春日鶯啼修竹裏) 봄날 꾀꼬리는 무성한 대나무 숲 속에서 울고 있는데
선가견폐백운간(仙家犬吠白雲間) 신선가의 개 짖는 소리는 흰 구름사이에서 들리더라..... ”하는 등 수많은 시가 있다.

유안이 신선된 것을 모반사건으로 감추다

역사에서는 회남왕 유안이 모반을 꾀하다가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 신선이 어찌 보통사람들처럼 자살해서 죽을 수 있겠는가 ?

신선전(神仙傳)에서는 유안의 모반사건에 대해서 숨기고 감추었다. 그 책임을 수하인 뇌피(雷被), 오피(伍被) 등의 무고로 돌렸으며 한 무제의 손을 빌려 유안과 그 일당을 죽였다. 그러나 유안은 명백히 득도하여 승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특별히 " 한나라 역사가 이를 숨기고 있는데, 유안이 신선의 도를 얻은 것을 말하지 않았는바 후세의 임금들이 제왕의 일(萬機)을 소홀히 하고, 편안한 도를 다투어 구할까 염려해서이다. 이에 유안이 죄를 지어 자살했다고 하였으며 신선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관들이 '유안이 자신의 모반사건이 폭로되자 자살함으로서 몸을 망친 일'을 명확히 기재했다하더라도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날조한 것이었다. 신선 가에서는 응당 '한 사람이 득도하면, 닭과 개조차도 승천한다.(一人得道, 鷄犬昇天)‘는 고사를 믿어야 하지 않을까 ?
토사구팽(兎死狗烹) 고사 2007. 8. 11. 09:10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 사람을 풍자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전국시대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멸하고 나서 두 명의 공신에게 공을 돌렸으니, 문관인 범려와 무관인 문종이 바로 그들이다.

오와 월이 전쟁할 당시, 범려는 월왕에게 잠시 항복한 후 시기가 무르익으면 다시 공격하자고 권하였다. 그는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미녀를 찾았고, 완사의 시냇가에서 서시를 발견하였다. 그는 서시를 오왕에게 보내 그를 미혹시켜 국사에 전념하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 결국 오왕은 미색에 매혹되고, 오의 국력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월은 구천의 통치하에 국력이 점차 강해졌고, 결국 오를 멸하고 당시 신하로 불렸던 치욕을 갚게 되었다.

당시 범려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이에 연연치 않고 시골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렸다.

그는 또한 문종에게 편지를 써, 황궁을 빨리 떠날 것을 충고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을 숨겨버리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 그 의미는 “당신과 나 모두 월왕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다. 오와의 전쟁시기와 지금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월왕과 고난을 같이한 사이이고, 그는 우리를 지극히 존경하였다. 하지만 오를 멸한 후 빨리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에게 참혹한 화를 당할 것이다. 사냥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아무리 좋은 활이라도 숨기게 되고, 약삭빠른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는 쓸 곳이 없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 바로 이 도리와 같지 않는가!”

이로 인해 ‘토사구팽(兎死狗烹)’, ‘조진궁장(鳥盡弓藏)’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는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 누릴 수 없는 사람을 형용하고, 좋은 물건도 쓸 데가 없으면 버려진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한잔의 술로 병권을 놓게 하다.

송태조 조광윤은 많은 공신들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은 후, 언젠가 그들이 방대한 군사력으로 자신을 배신한다면, 황제의 보좌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매우 심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공신들이 아무런 원망 없이 수중의 병권을 그에게 바치게 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석수신, 왕신기 등 개국공신을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모든 사람들의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한 노고를 치하하였다. 하지만 술을 마시기 직전, 태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록 내가 황제이긴 하나, 황제에 오른 후 이제까지 편히 자본 적이 없다.” 석수신은 이상하다 싶어 그에게 물었다. “천하는 지금 태평성대입니다. 허나 전하께서 아직 마음에 두신 일이 있으시면, 저희에게 알려주시지요” 태조는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여러분의 충심에 매우 감격하였다. 하지만 당신들이 여전히 군사와 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누군가가 딴 마음을 품고 대신들을 선동해 나를 배반한다면 어떡하겠는가? 석수신 등 대신들은 황망히 꿇어앉아 말했다. “신들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태조는 온화하게 말했다. “눈깜짝하면 수십 년이 지나가니, 인생은 매우 짧은 것이다. 당신들은 병권을 내려놓고, 한가한 관직을 누릴 수 있다. 몇 마지기 논을 사서, 자손들을 자립시킬 준비를 하고, 가희들을 불러 매일 꽃을 노래하고 달을 희롱하며 천수를 누리니, 이것이 인생의 큰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공신들은 감히 거슬리지 못하고,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이 것이 역사상으로 유명한 ‘술잔으로 병권을 놓게 하다.(杯酒釋兵權)’의 고사이다. 태조는 작은 술잔으로 그를 위해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던 개국공신들의 병권을 회수하였다. 이 것이 바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狡兔死, 走狗烹)’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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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선소전 유안4 고사 2007. 7. 22. 14:43

列仙小傳(28) 유안(劉安) (4)

ⓒ 삽화/박영철



[대기원]백발 노인들, 팔공(八公)이 십사오세 아이들로 변하다

“늙은 우리들이 젊은이로 변하는 것이 어찌 대단한 일이겠는가!”하는 말이 끝나자마자 팔공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어린아이로 변했다. 많아야 십사오세에 불과하게 보였다. 머리는 새까만 머리칼로 덮여있고, 머리카락은 잘 빗어 묶었고, 얼굴은 복숭아꽃처럼 발그레 하고, 하얀 살 속에서 붉은 빛깔이 배어 나오는 투명한 피부를 하였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문지기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이 광경에 깜짝 놀라면서 두 눈을 비볐다. 마치 꿈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문지기는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 회남왕에게 보고하였다.

회남왕, 팔공을 스승으로 모시다

회남왕 유안이 이 사실을 듣고는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손님들이 거처하는 객청으로 달려가 팔공을 영접하였다. 회남왕 유안은 여덟 늙은이들이 일제히 사선대(思仙臺)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유안은 사선대의 비단 장막을 걷어 올리며 팔공이 상아로 만든 침상과 의자위에 앉도록 하고, 금과 옥으로 만든 소반위에 백가지 향내가 나는 향을 피우고, 정성을 다해 공손하게 제자의 예의를 차렸다. 이에 남쪽을 향해 앉아 있던 팔공이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유안이 팔공에게 “소생 유안은 범속한 재주에 불과하여 밤낮으로 천지신명께 목마른 듯이 기원하였습니다. 이제 신선들(道君)께서 존귀함을 굽혀 이렇게 강림하셨으니 유안은 삼생(三生:과거, 현재, 미래)의 행운입니다. 원컨대 오직 신선들께서 미천한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하였다.

유안이 절을 마치고 막 머리를 드는데 조금 전까지 십사오세 동자였던 여덟 명이 갑자기 백발이 성성한 늙은이로 변하였다. 팔공은 유안에게 “우리들은 당신이 어진 이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는데 당신이 어떤 요구조건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하였다.

이에 유안은 “스승님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유안은 도를 배우기를 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팔공의 경천동지할 재주들

그러자 팔공 중에서 서쪽에 앉아 있는 분이 한 사람씩을 가리키며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도술을 하나씩 소개하였다.

일공은 앉아서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르고, 일어서면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며, 땅을 한번 그으면 강과 내를 만들 수도 있고, 한 움큼의 흙을 가지고 능히 산을 이룰 수도 있다.

이공은 높은 산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깊은 샘물도 막을 수 있으며, 사나운 호랑이와 표범도 부릴 수 있고, 교룡(蛟龍)도 마음대로 하고, 귀신조차도 조종할 수 있다.

삼공은 뜻에 따라 몸을 천만으로 나눌 수 있고, 용모를 마음대로 바꾸고, 맑은 하늘을 깜깜한 밤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수만의 군대도 은신시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다.

사공은 구름을 타고 공중을 밟고 갈 수 있으며, 바다를 뛰어넘고 파도를 마음대로 탈 수 있으며, 숨 한 번 쉬는 찰나지간에 천리 먼 길을 갔다가 되돌아 올 수 있으며, 아무리 앞을 가로막아도 어디든 갈 수 있다.
신선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깊고 깊은 도술을 하나씩 소개해 나가는데 유안은 그 경천동지할 재주들에 대해 망연자실한 채로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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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仙所傳(27) 하상공(河上公) (2)

ⓒ 삽화 박영철

도덕경 주해서는 네 사람에게만 전해지다

하상공이 한 문제(漢文帝 : BC180-BC157)에게 도덕경 주해서 두 권을 전해주면서

“내가 도덕경(道德經)에 관한 이 주해서를 저술한 지 이미 1,700여 년이 되었다. 그 사이 다만 세 사람에게 전했다. 황제인 당신에게 이번에 전하면 네 번째이니 당신은 이 책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하상공은 돌연 공중으로 꺼진 듯 종적도 없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잠깐 사이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가득 차 천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에 문제도 그곳을 떠났다. 문제는 도덕경 주해서를 얻고 그 책들을 귀중히 여겨 애지중지하였다. 그리고 일심으로 공부하여 도덕경의 심오한 뜻을 투철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동굴 속에 펼쳐진 이상향

하상공이 이때 한번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고 사라진 후 수백 년 동안, 하상공을 보았다는 소문이 없었다. 그러나 600여 년이 지난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 송(宋) 원가(元嘉), 어느 해에 하상공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호남성 진계현(辰溪縣) 북쪽 ‘등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원가(元嘉) 26년(449), 어느 날 들판에 돼지 한 마리가 나타나 농작물을 훔쳐 먹어 마을사람 문광통(文廣通)이 활을 쏘아 상처를 입혔는데 상처 입은 돼지는 피를 흘리면서 달아났다.

문광통이 돼지 핏자국을 따라 10여 리를 추적했는데, 핏자국이 어느 동굴 속으로 이어졌다. 동굴 속으로 추적해 300여 보쯤 들어가자, 눈앞이 탁 트이면서 푸른 산, 맑은 물이 잘 어우러진 들판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는 수 백호의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무릉도원(武陵桃園)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었다.

하상공, 그곳에서 도덕경을 강의하다

이 마을의 어느 한 집에서 노인 한 분이 나와 문광통을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집안 대청 위에는 10여 명 공부하는 서생들이 앉아 있고, 노인 한 사람이 평상위에서 남쪽으로 앉아 그들 학생들에게 노자의 도덕경을 해설하고 있었다.

서쪽 곁채에는 열 사람이 둘러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는데 뜻밖의 조화를 이루어 신선 세계의 음악(仙樂) 그 자체였다. 동자 한 명이 그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데 그 노인이 문광통에게도 술을 따르라고 하였다.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마시자 속이 편안하고 몸이 가벼워져 마치 신선이 된 듯하다. 노인과 한참 이야기하다가 작별을 하려고 하자 젊은 남자 한 명을 시켜 전송하게 하였다.

이상향을 다시 찾았으나

문광통이 젊은 남자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떠나면서 이곳의 내력을 물었다.

그 젊은 남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수천 년 전 은나라 말기 걸주의 잔악한 폭정을 피해 숨어 들어왔다. 이곳에서 도술을 닦아 모두 신선이 되었다. 조금 전 남쪽 침상에 앉아 도덕경을 강의하던 사람이 바로 한 문제에게 도덕경 주해서를 전해준 하상공(河上公)이다. 나는 한나라 산양왕(山陽王)의 후예이며 이곳에서 마당 쓸고 잔 심부름 한 지도 어느덧 1,200년이나 되었다. 이제야 겨우 문하생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직 선도요결(仙道要訣)을 전수받지 못해 문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젊은 남자는 문광통을 동굴 입구까지 데려다 주고 되돌아갔다. 문광통이 동굴 입구에서 자기가 가져왔던 활을 찾았는데 이미 썩어서 쓸 수가 없었다. 동굴 속에서 그 잠깐 사이에 세상은 이미 12년이나 흘렀다.

고향에 돌아오니 노인들 중, 세상을 달리 하고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신비한 이야기를 해주고 마을사람들과 다시 그곳을 찾았으나 동굴 입구는 큰 바위로 막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이후, 다시 하상공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도 도덕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하상공본’이라 전해지는 도덕경 주해서를 필독의 책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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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경三字經 이야기

[원문 및 따라 읽기]

苟 不 教 性 乃 遷
구 불 교 성 내 천
gǒu bù jiào xìng nǎi qiān

教 之 道 貴 以 專
교 지 도 귀 이 전
jiào zhī dào guì yǐ zhuān

[해석] 만약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잘 가르치지 않으면 선량한 본성이 변하게 된다. 가르치는 방법은 온 마음을 기울여 전일(專一)하게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긴다.

[주석] 1.구(苟):만약, 가령.
    2.불(不):아니다, 하지 않다. 뒤에 오는 자음이 ㄷ,ㅈ이면 부(不)로 발음.
    3.내(乃):이에.
    4.천(遷):옮기다,바꾸다.
    5.교(教):가르치다, 교육.
    6.도(道):방법, 도리.
    7.귀(貴):귀하다, 소중하다.
    8.전(專):오로지, 온 마음을 기울이다.

[관련 일화-철봉을 갈아 바늘을 만들다(鐵棒磨成針)]      

옛날에 이백(李白)이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었다. 그는 타고날 때부터 아주 총명하고 머리가 좋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기만 하면 늘 따져 묻길 좋아했다. 이백은 매일 학당(學堂)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타고난 총명함 때문에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그를 매우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늘 칭찬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이백은 점점 교만해졌고 한 동안 수업을 빼먹고 놀러다녔다.
어느 날 이백이 수업을 빼먹고 밖으로 놀러나갔는데 갑자기 앞에 한 할머니가 큰 돌 옆에 쭈그리고 앉아 철봉을 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든 이백은 “할머니 지금 뭐 하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얼굴에 자상한 미소를 띠고 부드러운 말로 “지금 바늘을 만들고 있는 거란다.”라고 알려주었다. 이백은 놀라서 “이렇게 두꺼운 철봉으로 어떻게 그런 가느다란 바늘을 만들어요?” 하고 물었다. 할머니는 “세상에 어려운 일이란 없단다. 단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열심히 한다면 철봉은 반드시 바늘이 될 수 있단다.”라고 말하면서 이백에게 꾸준하게 나태하지 않고 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도리를 가르쳐주었다. 이백은 이 말을 듣고 나서 크게 깨달았다.
이날 이후 그는 각고의 노력으로 학습에 힘써 마침내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흔히들 이태백으로 부르는 이 사람이 바로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대(唐代) 최고의 대시인 이백이다.

[해설] 가르칠 교(敎)를 풀어보면 ‘본받을 효(爻)+아들 자(子)+칠 복(攴=攵)’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본받을 효(爻)는 셈을 가르치는 ‘산가지’ 또는 학생을 다스리는 ‘회초리’로 볼 수 있다. 즉 자식(子)을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회초리로 때려서 고쳐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귀한 자식일수록 ‘사랑의 매’가 더욱 필요한 법이며 매를 아끼면 아이가 방종하거나 교만해지게 마련이다.

한편 효(爻)를 본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교(敎)’란 ‘아이들에게 본떠서 닮도록 한다’는 의미가 된다. 즉, 필요할 경우 매를 들고 때려서라도 어른(스승)을 따라 배우게 한다는 의미가 된다. 한나라 때 나온 가장 오래된 한자 풀이서적인『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가르침(敎)이란 사람더러 모방하게 하는 것이며 배움(學)이란 모방하여 닮는 것이라고 했다.
이백은 타고난 천재였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학습했기에 비로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었다. 공부를 가르칠 때에도 일관성 있게 꾸준히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들은 순진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잘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가르침에 일관성이 없다면 혼란만 부추길 뿐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여기서 특히 강조할 내용은 전통문화에서 교육의 중점은 지금처럼 영어나 수학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성(心性)을 도야하는 것과 기본적인 인륜도덕을 강조했다. 수학문제를 잘 풀거나 영어 단어를 잘 암기하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인륜과 도덕을 알고 몸소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공부를 중시했다. 이런 교육의 배경에는 사람이란 후천적인 이기심과 관념에 의해 오염되면 선량한 본성이 변질되어 타락하기 때문에 반드시 잘 가르쳐 본성을 기르고 심성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깔려 있다.
이 과정에서 훌륭한 스승은 단순히 문자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인격적인 가르침을 통해 아이들의 모범이 되는 인격자여야 한다. 옛 서당 교육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이 아니며 아이의 실력과 수준에 따라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 가르쳐주는 일종의 전인적인 교육체계이다. 학동들은 스승의 집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각자 배울 부분을 배우는데 한마디로 진도가 전부 다른 셈이다. 또한 단순한 지식의 전수에 그치지 않고 스승의 일상적인 언행을 통해 행동의 귀감으로 삼고 따라 배우게 된다. 아이들이 처음 공부에 입문할 때 가장 중시한 교육은 바로 스승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로서 문을 드나들거나 혹은 자리에 앉거나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의 예의범절은 물론 손님을 맞이하고 청소하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방식을 가르쳤다. 선인들은 이처럼 학문이란 가까운 곳에서 배움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킨 후에 보다 멀고 어려운 것을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몽학(蒙學) 교재인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요즘 사람들은 학문이 일상생활에 있는 줄은 모르고 망령되어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까닭에 특별한 사람에게 미루고 자기는 자포자기(自暴自棄)한다. 이 어찌 불쌍한 일이 아니랴. 내가 해산(海山)의 남쪽(해주의 석담을 가리킴)에 거처를 정하자 한두 학도가 추종하여 학문을 청해 왔다. 내가 스승이 될 수 없는 것이 부끄러웠으나 또한 초학(初學)이 향방을 모를 뿐 아니라, 굳은 뜻이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배우면 피차에 도움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염려되었다. 이에 간략하게 책을 하나 써서 대략 마음을 세우는 것, 몸가짐을 단속하는 일, 부모를 봉양하는 법, 남을 접대하는 방법을 서술하고 이를 「격몽요결」이라 이름 하여 학도들로 하여금 이것을 보아 마음을 씻고 뜻을 세워 즉시 공부에 착수하게 하고, 나 역시 오랫동안 구습에 얽매어 괴로워하던 차에 이것으로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코자 하노라.”
바로 이런 까닭에 전통문화에서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거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스승을 몹시 공경하고 존중해온 것이다.

필자 소개

임영철(林永喆) : 서울대 물리학과 및 경희대 한의학과 졸. 現 서울경희한의원 원장.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한 전통 한의학을 연구하는 모임인 '동의보감 연구회' 창립 멤버로 수유 연구실에서 '동의보감' 강좌를 열기도 했다. 2003년부터 대기원에 연재된 ‘의산야화’ 시리즈 번역을 시작으로 현재 전 세계적으로 공산당 탈당 열풍을 일으킨 ‘9평 공산당’ 과 공산당 당문화의 본질을 파헤친 '해체 당문화'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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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덩어리


어떤 구두쇠가 금괴를 좋아하여 재산을 모두 팔아 금덩어리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몰래 숨겨 놓았는데 마음을 온통 거기에만 쏟았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몰래 금덩어리를 확인해 보곤 했습니다.

이걸 몰래 지켜보던 사람이 그 금덩어리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구두쇠는 다음날 금덩어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크게 한숨을 쉬며 뉘우쳤습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광경을 보고 왜 그리 슬퍼하는지 이유를 알고 나서 말했습니다.

“그렇게 슬퍼하지 말아요. 금덩어리가 있을 때도 가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잖소.

돌덩이를 대신 그 자리에 묻고 금덩이라고 생각하시오.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가 아니오.

금덩이가 있을 때에도 보기만 하였지 아무짝에 소용이 없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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