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사기·유리···잘라 붙여 만든 섬세한 조형

타이완의 타이난(臺南)시 중시(中西)구의 보안궁(保安宮) 지붕에 있는 젠녠. 공예가 예진루(葉進祿)가 제작하고 예밍지(葉明吉)가 복원했다.

타이완의 유명한 사당에는 하늘로 솟은 지붕 용머리에 젠녠(剪黏)이 있다.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듯하고, 세인들을 굽어보듯 신선이 웃고 있다. 화려하게 채색된 작품이 살아있는 듯 생생해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든다. 젠녠은 밋밋한 지붕을 장식하는 조형물이지만, 보이지 않아 믿기 어려운 천상의 세계와 전설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미혹(迷惑)을 일깨우기도 한다. 젠녠을 직역하면 ‘잘라 붙인다’는 뜻으로 구도(構圖)를 잡은 후 스테인레스강 와이어로 만든 골격에 재단한 조각을 묶고 시멘트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를 물로 반죽한 것)로 모양을 잡으며 끼우고 붙여 채색한 작품이다. 중국 전통 예술이지만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타이완에서만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젠녠을 3대째 가업으로 이어가고 있는 예(葉) 씨 일가를 만나봤다.

예진루(葉進祿) 부자의 백년 전승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에 전해진 젠녠은 원래 칸츠(崁瓷)나 전화(剪花)라 불렸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소실되어, 지금은 타이완 일부지역에만 남아있다.


타이완에서 손꼽히는 타이난 소재의 한 사당에는 용마루에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젠녠을 볼 수 있다. 용, 봉황, 짐승, 복록수(福祿壽) 삼성, 보탑(寶塔), 충효, 신선 전설 등이 담겨 있다.


일반 전통 공예와 달리 젠녠은 제작기간이 더 오래 걸린다. 구조 역학, 건축, 토목, 채색, 중국 남방지역의 독특한 도자기 공예예술품인 쟈오즈타오(交趾陶) 등 많은 공법을 내포하고 있는 복합 예술이기 때문이다.


타이완 젠녠은 타이난(臺南) 안핑(安平) 예(葉)씨 가족으로부터 3대째 전승되고 있다. 백년 가업으로 이어받은 예술은 타이완 사찰 지붕에 다채로운 장엄함을 더했다. 할아버지 예중(葉鬃) 씨는 타이완 본토에서 젠녠을 시작한 대사 훙화(洪華) 문하의 제자이다. 그의 아들 예진루(葉進祿) 씨가 바통을 이어 받고, 손자인 예밍지(葉明吉) 씨에게 전해진 것이다.

젠녠(剪黏) 공예가 예밍지(葉明吉)씨가 그의 작품 '하늘을 뒤덮은 신룡(神龍)' 앞에 섰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일


4년 전 14회 글로벌중화문화예술 신촨상을 수상한 예진루(81) 씨는 어릴 때 부친 예중을 따라 젠녠을 배웠다. 아버지 문하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유독 예중 씨는 아들 진루 씨에 대해 특별히 엄격했다. 다른 학생들이 매일 저녁 중국의 전통 인형극인 포대희(布袋戲)나 가자희(歌仔戲)를 보면서 긴장을 풀었지만 예진루 씨는 휴식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가 놀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따라 끊임없이 그림을 그리게 했다. “먼저 필법을 잘 연습해야 공예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실수를 세 번 반복하면 뺨 한 대를 맞을 정도로 엄격했다. 높은 요구에 타고난 소질, 노력하는 태도로 예진루 씨는 탁월한 회화 기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젠녠을 하려면 반드시 그림을 잘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예진루 씨. 그의 회화 실력은 매우 뛰어나다. 몇 년 전 초우둔(草屯)진 난푸(南埔)촌 천푸(陳府)장군 사당을 짓기 위해 그가 그린 젠녠 설계도를 보고 한 문화재위원은 다른 화가가 대필한 줄 알고 믿기지 않아 현장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게 했다가 예진루 씨가 직접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말 위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자책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한 듯 작품을 제작할 기회가 많았다. 타이베이 신디엔(新店) 비탄밍성궁(碧潭明聖宮)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진루 씨는 다른 사공 백여 명과 경쟁하게 됐지만 제비뽑기에서 연속으로 9번이나 뽑히면서 순조롭게 기회를 얻었다. 그가 얻은 기회는 벼락에 맞을 확률보다 더 낮다며 다들 놀라워했다고 한다.

예 씨의 타고난 운명도 그렇지만, 젠녠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누구보다 깊다. 그는 30년 전 제작된 타이난 젠안궁(建安宮) 젠녠 작품이 버려진 것을 알고 50만 위안을 내고 사온 뒤 깨끗이 씻고 정리한 후 다시 원래 모양으로 복원시켰다. 복원된 작품이 매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사당 측은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공무원, 뒤늦게 가업을 떠안다


어릴 때부터 젠녠 작품과 자료, 공구 속에서 자랐던 예밍지 씨. 그는 공예 도구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지만 가업을 이으려고 하지 않았다. 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했던 그는 결혼해 자녀도 낳으면서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예진루 씨는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가업을 잇지 않으면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며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밍지 씨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뒤늦게 시작했기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예밍지 씨는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하지 못하고 미루는 사이 점점 적응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접한 터라 배우는 과정이 익숙했기에 배우는 속도는 빨랐다. 예진루 씨는 아들 밍지 씨와 작업실을 만들고 고적 복원 공사 등 젠녠 전승에 전력을 다했다. 예밍지 씨는 혼란했던 젠녠 관련 용어, 유래, 역사과정을 정리하고 글로 작성해 문화계, 정부기관에 소개하고, 젠녠 안내 해설을 가르쳤다.

예진루 씨가 제작한 젠녠 작품. 호랑이가 배불리 먹고 산으로 돌아가면서 돌아보고 있는 장면이다. 패기와 기세를 펼쳐 보이고 있다. 호랑이의 골격과 표정이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다. 몸에 난 털은 유리 천여 개를 붙여 제작했다.

박쥐가 머리를 내밀자 재물, 자손, 장수 등 세 신선이 날아와 재(財), 자(子), 수(壽), 복(福)을 모두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재자수복(財子壽福)이 모두 내리다’라는 작품. 예밍지 제공

입체 젠녠 고안해 전시장 입성


보통 사당에 있는 젠녠 작품은 모두 벽에 박아 넣은 반쪽 신체만 있었다. 예밍지 씨는 젠녠 작품을 더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전례에서 벗어나 입체 작품을 만들었다. 아들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예진루 씨는 작품이 사당이 아닌 전시장에 들어 가게 되자 아들이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 기관에 더 널리 보급할 수 있게 되자 예진루 씨도 입체 젠녠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예 씨 부자가 두각을 나타내자 주위 사람들의 비방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밍지 씨는 잇따른 오해와 비방을 듣지 않고 해석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할 뿐이었다.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안다’고 함께 일한 사람들은 점차 그의 됨됨이와 능력을 알게 됐다. 동료들이 이해해주기까지 예밍지 씨는 7~8년을 견뎌내야 했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일거리를 맡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뒷거래를 하고, 어떤 사람은 사례금을 받고 방탕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당시 저를 비방하며 뒷거래를 했던 사람들은 점차 몰락해갔지만, 도덕을 지키고 향상하기위해 노력했던 저는 일거리가 많아 다 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작품은 소실될 수 없기에 그들의 작품은 오점으로 남을 것이고, 결국 상처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늘은 눈이 있거든요.” 그는 인과응보의 순리를 믿었다.

젠녠 재료 만들기. 옹기 조각을 칼로 자르고(①) 펜치로 조각을 내거나(②) 필요한 모양을 만든다.(③) 시멘트 모르타르로 모양을 잡는데(④) 재료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⑤) 사기 조각은 전통 젠녠 재료다.(⑥)

전통재료와 기법을 대체한 린탕


청나라 말기에는 물자가 모자랐다. 젠녠을 제작할 때 필요한 재료가 부족하자, 당시에는 파손된 기와나 도자기를 깨끗이 씻어 색칠한 후 가마에 간단히 구운 재료를 사용했다. 그러나 너무 무거워 재단하기 어려웠고 퇴색이 잘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광복 후 전쟁으로 파괴된 사당이 복원작업이 필요했는데, 당시 예중 씨가 복원해야 할 사찰은 20개에 달했다. 기와 조각이 모자라 제작이 어려웠던 그는 신주(新竹)에 있는 유리공장을 직접 찾아가 다양한 색깔의 대형 유리구 제작을 요청했다. 완성된 유리구를 깨어 재료로 썼는데, 재단하기 쉽고 색깔이 화려해 당시 큰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두께가 얇아 온도에 의해 변형되는 폭이 커서 끼워 넣은 유리가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었다.


기와 조각처럼 두껍지 않으면서도 유리처럼 잘 파손되지 않는 옹기 조각은 색채도 풍부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재료다.


젠녠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제작시간이 길고 어려운 전통 재료 대신 린탕(淋塘)이 선보이게 되었다. 린탕은 빠른 속도로 다양한 크기와 색깔을 만들어낼 수 있고 잘 파손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가격이 낮아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빨리 제작할 수 있기에 20여 년 전엔 젠녠의 재료로 가장 널리 쓰였다. 그러나 재단이 불가능하고 다른 색을 칠할 수 없어 멀리서 봤을 때 작품은 풍부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딱딱하게 굳어 있고 혼란스러워 수장가치가 없었다. 린탕으로 만든 작품은 기본 형틀에 붙이기만 할 뿐 다른 젠녠 작품처럼 잘라 붙일 필요가 없었다.


린탕이 성행하면서 수요가 줄자 시장은 가격 경쟁을 시작했다. 업자들은 가격을 낮추다 더 낮출 수 없게 되자 시간을 줄이거나 재료를 적게 넣는 등의 방법을 썼다. “린탕은 대체할 재료였지만, 결국 젠녠의 명맥을 끊기게 한 선례가 됐죠. 당시 스승과 제자들은 린탕 시기를 거치면서 연령이 많아져 다시 전통 젠녠을 배우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예밍지 씨는 저렴하지만 전통 수공예품에 비해 차이가 많이 나는 린탕으로 더 어려워진 현실에 개탄했다.

전승할 사람 찾기 어려워

업계에서 예진루 씨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의 문하에 있던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대부분 힘들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배우는 기간이 7~8년 정도로 다른 공예보다 훨씬 길고, 늘 기울어진 지붕을 오르내리며 일해야 하기에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젠녠을 계승할 사람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천히 실력을 키워간 예밍지 씨는 후임자가 없어 맥을 잇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다. 그는 “지금 일부 미술과목에 젠녠 과정이 개설돼 있지만 선택 수업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얕은 지식만 배우고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는다”며 “고등학교부터 훈련을 시작하고, 이를 평생 목표로 삼아야 새 사람을 배양할 수 있고, 전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업실에 놓인 작품은 생동감이 넘쳤다. 인물 표정은 예사롭지 않고 동작은 활기찼다. 예진루 씨는 서점에 가서 소재를 모으고 화가의 그림을 참고하면서 영감을 얻는다. 어떤 소재와 방법으로 만들면 생동감이 넘칠지 고민하는 시간은 즐겁기만 하다. 두 사람은 이미 젠녠의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자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주 겸손했고 차분했다. 그들의 모습에서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바른 심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교훈을 이어받은 겁니다. 공예를 배우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장점은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고 자신이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을 수 있고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글/사진=주리리(朱莉利) 기자 (대기원시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