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윤회 여행(2)

동서양에서 보는 윤회설

미켈란젤로의 벽화 ‘마지막 심판’에서는 선한 사람은 천국에, 악한 사람은 지옥에 떨어지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대기원] 윤회를 말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불교의 육도윤회설을 연상할 것이다. 사람의 진짜 생명인 영혼은 천상, 지상, 지하 3개의 다른 공간의 다른 물질과 생명 사이를 전생 한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이 윤회는 불가 뿐 아니라, 도가에서도 전해져 왔다. '철봉을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인 수도자 ‘진무대제(眞武大帝)’는 윤회를 반복하면서 몇 세를 수행했다고 한다.

윤회는 '홍루몽'과 같은 고전 문학작품이나 민간에서 유전되는 이야기 속에도 많다. ‘진서(晋書) 열전 제4권’에는 서진(西晋)의 저명한 전략가이자 문학가인 양유(羊祐)가 옆집 이씨의 아들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양유가 다섯살 되던 어느 날 돌연 유모에게 자신이 놀고 있던 장난감인 금환을 찾아달라며 옆집 이씨의 뽕나무 옆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유모가 정말 그곳에 가보니 금환이 있었고, 옆집 주인 이씨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금환은 이씨의 죽은 아들이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당시 사람들은 모두 양유가 옆집 이씨의 죽은 아들이 전생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다른 종 안에서 차례차례 전생하고, 마지막에는 정화하여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이해했다. 플라톤도 영혼은 육체와 같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고 윤회 안에서 육체에 속박되므로 전생의 기억을 잊어 버리지만, 깨달음을 통해 처음으로 전생의 진정한 지혜를 생각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근대이후 실증주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어 표면적으로 기독교가 천국과 지옥 밖에 인정하지 않고 윤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초기 기독교에도 윤회설이 있었다. 3세기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성서학자인 오니게네스는 윤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선교했다.

그러나 553년 5월 제2 콘스탄티의 폴리스공회 석상에서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 영혼의 윤회를 주장한 오니게네스 교설을 이단으로 결정했다. 1500년에 걸친 반 윤회투쟁에 불을 지른 이후 기독교도가 윤회전생을 믿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역사상 이론가나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윤회 사상에 대해 제언해 왔지만, 1960년대까지는 윤회를 믿거나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점차 감소해 갔다. 하지만 20 세기 이후 서양 종교의 교조주의 쇠퇴와 사회의 문화 다원화에 따라, 서양인도 윤회에 대해 재차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60년대 이후 윤회 관련 학술 연구나 보도가 잇달아 발표되기도 했다. 몇 차례에 걸친 의식조사 결과에 의하면 적어도 서양인의 25%가 많든 적든 윤회전생을 믿고 있다고 답했다. 윤회 사상은 이미 동방문화뿐 아니라 서양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