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불가사리 중국 코앞에서…

50년 전인 1958년 4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인류 역사상 국가 지도자가 저질렀던 失政(실정) 중 가장 어리석은 결정’으로 꼽히는 바보 같은 명령을 내린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다. ‘강철 생산을 4배로 늘려라’는 지령 한마디에 곧바로 1억 명의 인민이 멀쩡한 일터를 팽개치고 철강 생산에 동원됐다.

전국 마을 곳곳에 무려 60만 개의 속칭 ‘뒤뜰 용광로’가 급조됐다. 그러나 갑작스레 증설한 60만 개의 용광로에 들어갈 막대한 철광석 원료가 제대로 공급될 리가 없었다. 목표 달성에만 혈안이 된 지방 黨(당) 간부들은 맨 먼저 집집마다 쇠냄비와 프라이팬 같은 주방기구부터 거둬다 용광로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조리기구가 부족해지면서 취사가 힘든 지경이 되자 인민의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택동은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집단으로 하고 개인이 음식을 만드는 것은 금지한다’는 해괴한 지시를 하달했다. 취사도구가 바닥나자 60만 개의 용광로는 농민들의 곡괭이, 쇠스랑, 도끼, 호미를 삼키기 시작했다. 목장과 축사에는 철망을 걷어가 가축이 도망가는 등 목축업까지 엉망이 됐다. 그러나 미친 약진운동은 계속됐다.

열성 당 간부는 농업용 차량까지 뜯어 녹여가며 실적 올리기에 급급했다. 트랙터 같은 농기계 생산 등을 위해 벌인 철강 생산 증강 운동이 거꾸로 이미 만들어진 농기구 기계를 되녹여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운동으로 변질된 것이다. 거기다 석탄 연료가 떨어지자 木炭(목탄) 생산을 위해 나무를 무차별 벌목하고 들판에서는 과수나무까지 베어내 과일값이 폭등했다. 추수기가 됐지만 추수 일꾼이 용광로에 매달리느라 들판에는 농작물이 그대로 썩어갔다.

그래도 단위농장 간부들은 ‘수확이 예년의 곱절’이라고 허위 보고를 했다. 어느 누구도 바른말을 하지 못했다. 온 나라가 미쳐 있는 3년 동안 3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갔다. 결국 덩샤오핑(鄧小平) 세력의 비판과 반발에 밀린 마오쩌둥이 마지못해 권력을 넘겨주면서 대약진운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덩샤오핑 파가 캐나다와 미국으로부터 곡물을 긴급 수입, 인민의 기아를 멈추게 했지만 마오쩌둥은 기다렸다는 듯 서구 부르주아 사상 논리로 딴지 걸어 문화 혁명을 일으킨 뒤 실용파를 다시 숙청시키고 재집권했다. 현대 중국의 발전을 수십 년 후퇴시켰던 좌파적 문화 혁명의 뿌리는 결국 철저히 실패한 제철사업에서 비롯된 셈이다.

그 뒤 50년이 흐른 지금 중국은 다시 제철에 국력을 집중하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거기다 조선과 자동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엄청난(한 해 4억 2천만t) 철이 소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중국 고철 수출량도 21만t으로 2004년 대비 2배로 늘었다. 거대 중국이 불가사리처럼 인근 국가들의 쇠붙이를 빨아들여 삼키면서 고철 값도 두 배 이상 뛰고 덩달아 고철 도둑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일본은 중국 고철 값이 오르면서 길거리 가드레일 등을 뜯어다 파는 고철 도둑이 설치자(5천700건) 경찰청이 ‘고철 도둑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마오쩌둥의 ‘뒷마당 용광로’ 60만 개는 기껏 자기나라 농민들 부엌에 프라이팬이나 녹이다 끝났지만 50년이 지난 지금의 중국은 저네들 프라이팬 대신 한국, 일본 등 이웃나라의 전선, 맨홀, 가드레일을 빨아들여 녹이고 있다. 세상이 무섭게 바뀌고 있는 것이다. 물난리만 좀 나도 1천만 명에서 8천만 명이 수해를 피해 움직이는 거대 중국.

그런 중국을 어리석은 뒷마당 용광로 시절의 중국으로만 생각하고 가드레일 몰래 떼다 돈 몇 푼에 팔아먹는 정신과 야당 후보 주민 초본 몰래 떼다 팔아넘기는 분열 정신으로는 경제주권도 국가 자주권 어느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불가사리 중국의 코앞에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딴 정신을 팔고 있는지를 곰곰 생각해 봐야 한다.

김정길 명예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