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10억, 명함도 못낸다.



3~4년 전 10억만들기 주인공들 ‘장삼이사’로 전락

해외부동산·펀드에 주목하고 골프보다 요트 즐겨


10억 부자의 시대가 가고 30억 부자시대가 도래했다. 각종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먹고살 만한’ 부자의 기준으로 자산규모 30억 원을 잡고 있다. 불과 3~4년 전 ‘10억 만들기’ 열풍의 주인공들은 이미 ‘장삼이사’가 된 셈. 해외부동산과 펀드에 주목하고 골프보다 요트를 즐기는 30억 신흥 부자, 그들의 투자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은 ‘서민’들과는 확연한 ‘다름’이 있다.

“몇해 전만 해도 재산 10억 원 정도면 은행 가서 부자 대접 받았는데 요즘에는 명함도 못 내미는 것 같다. ”

시중 한 은행 프라이빗뱅킹(PB) 담당자의 말이다.


이젠 30억 원이 부자의 기준이다. 벤처기업가, 전문인, 증권맨 등 젊은 부자들이 많이 입주했다는 도곡동의 타워팰리스 전경.


신흥부자.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세련과 차별화가 포인트다. 부유층 고객들을 대상으로 성형 및 피부미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강남구 신사동 ㅂ클럽의 호화로운 내부 모습. (강윤중 기자)


서민들의 기부액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오블리스 노블리제’는 부자들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몫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직원들이 사랑의 온도계 앞에서 기부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우철훈 기자)
그는 “30억 원 정도는 쥐고 있어야 부자들만의 차별화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10억 원이 부자의 이미지였던 시대는 갔다. 최근 조사 결과, 30억 원이 부자 기준의 대세로 등장했다. 몇 년 사이 큰 폭의 ‘상승’이 이뤄진 셈이다.

최근 신한은행이 20세 이상 고객 4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자메일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 6483명의 절반을 훨씬 넘는 수가 ‘자산(금융+부동산 자산)이 30억 원은 넘어야 부자’라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44%가 부자의 기준으로 30억 원 이상, 18%는 50억 원 이상이라고 답했고, 10%는 100억 원 이상이라고 했다. 10명 중 7명이 최소 30억 원 이상은 돼야 ‘부자’라고 생각한다는 결과로, 3년 전 같은 조사 땐 응답자의 64%가 부자의 기준을 ‘10억 원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앞서 메릴린치증권이 컨설팅회사 캡제미니와 공동으로 발간한 ‘아시아·태평양 연례 부자보고서’에 따르면 2005년 말 현재, 한국의 고액순자산 보유자(주거지와 소비재를 제외하고 100만 달러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사람)는 8만6700여 명으로 집계됐다. ‘100만 달러’의 기준은 뉴욕타임스가 설정한 ‘부자’의 기준으로, 부동산이 금융자산의 4배에 달한다는 자산구성 통계를 기초로 하면 이는 총자산 50억 원에 이르는 규모다.

이를 토대로 금융권에서는 금융자산을 포함한 30억 원대의 부자를 17만~18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가구원 수를 평균 3.5명으로 가정하면 ‘안심하고 먹고살 만한’ 환경에 있는 사람은 줄잡아 60만∼63만 명에 이른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2% 정도가 적어도 먹고사는 고민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의미다.

금융자산 포함 30억대 부자 18만명

시중은행의 ‘거액자산가 모시기’ 경쟁에서도 ‘부자’의 기준이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6월 1일 국민은행은 올해 하반기 여의도와 테헤란로에 30억 원 이상 자산 보유 고객을 겨냥한 프리미엄 PB센터를 건립한다고 밝혔다. 기존 5억 원 이상 자산 보유 PB고객들과 차별화해 부동산과 세무 관련 전문서비스를 하겠다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이미 PB고객들을 10억 단위로 등급을 나눠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있는데, 30억 원 이상 고객들에게는 해외부동산 설명회, 문화·스포츠 행사 초청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5억 원을 PB고객 기준으로 삼고 있는 하나은행의 경우도 내부적으로 PB고객 기준을 나눠 서비스를 차별화하고 있다. 자산이 30억 원 정도는 돼야 다양한 자산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어 종합적인 금융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부자의 기준이 단 몇 해 만에 10억 원에서 30억 원으로 급상승한 데에는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격이 크게 올랐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부설 동호회 ‘부자특성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국민은행 문승렬 차장은 “최근 심화된 양극화와 소득 증가가 주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문 차장은 “과거보다 풍부해진 유동성 덕분에 돈을 쥔 사람들이 주식과 부동산에서 수익을 올리면서 부자의 기준도 올라갔다”며 또한 “과거에는 5억 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부자로 여긴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 서울의 부동산 평균 가격이 4억 원을 육박하면서 그만큼 돈의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에 부자의 기준도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문 차장은 “부자의 기준에 대한 인식의 가이드라인이 향상되고 있으며, 때문에 30억 원이라는 기준은 언제든지 올라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 급등이 원인

부자학을 강의하고 있는 한동철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도 “참여정부 들어 부동산의 공시지가가 오르면서 부동산에 대한 평가액이 상승한 것, 최근 주식시장의 활황에 힘입어 ‘대박’을 터트린 신흥부자가 늘어난 것”을 그 이유로 꼽았다.

실제로 지난해 가을, 강남을 중심으로 한 아파트값 폭등은 재건축 아파트 한 채를 ‘여분’으로 보유한 사람들을 부자의 대열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른바 ‘강남 4대 꼭짓점’이라고 불리는 삼성동 I-PARK, 도곡동 타워팰리스, 대치동 동부센트레빌, 도곡 렉슬의 평당 가격을 최고 평당 7000만 원까지 끌어올리며 ‘재산 불리기’를 통해 30억 원대 부자들을 양산했다는 게 부동산업계의 중론이다.

2기 신도시 발표와 지방행정도시 조성계획에 따른 토지보상이 부자의 기준을 높이는 데 한몫 했다는 분석도 있다. 박종연 신한은행PB파이낸스센터장은 “참여정부 이후 서울, 수도권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각종 개발호재로 토지보상금 수령자가 급증하고, 또한 강남을 중심으로 서울 아파트가격이 폭등하여 10억 원만 가지고 부자라고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 정부 들어 토지보상금은 2003년 10조352억 원을 시작으로, 지난해에는 23조 원(잠정)으로 갑절 이상 늘었다. 올해도 울산·대구 등 전국 10개 혁신도시에 약 4조5000억 원이 보상금으로 풀리고, 최근 분당급 신도시로 발표된 동탄 지역에도 6조 원가량이 토지보상금으로 풀릴 예정이어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박 센터장은 또 “특히 자산관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PB들이 각 은행, 증권, 보험, 외국계까지 경쟁적으로 생기면서 체계적인 자금관리를 통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앞으로 상당히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최근 3~4년 사이 30억 원 부자대열에 올라선 이들은 고전적 의미의 부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선 거주하는 지역을 보면 부자 1세대가 성북동, 2세대가 압구정동에 부촌을 이뤘다면 3세대 격인 이들은 청담동 고급 빌라촌과 대치동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사교파티를 열 수 있을 만한 넓은 공간과 교육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에쿠스나 그랜저 등 국산 대형차량보다는 아우디 등의 수입차를 선호하며, VVIP 멤버스클럽으로 불리는 고급 매장에서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마크 제이콥스, 크리스티앙 디오르, 페라가모, 제냐, 휴고보스, 폴스미스 등 브랜드 상품을 주로 사들인다.

세계적 부호들의 취미를 반영하듯 이들 역시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많아 최근 한국미술시장의 호황을 주도하고 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저금리, 부동산 투자억제, 문화산업 붐, IMF 외환위기 이후 유동자금 증가, 부자들의 세대교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미술시장이 폭발했다”며 “예전에는 돈을 아끼는 게 미덕이었다면 지금 부자들은 멋있게 쓰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재테크 면에서는 전 세대 부자들보다 적극적이고 치밀하다는 평가다. 박종연 센터장은 “신흥부자들은 재테크에 대한 정보가 빠르며, 시장에 대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라며 “IT관련 업종투자, 주식실물투자, 금융상품, 펀드상품투자 등에 어느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라도 투자하는 속성이 강하고 부동산투자에도 매우 적극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고 전했다.

문승렬 차장도 같은 분석이다. “지식과 투자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판단이 설 경우 과감성이 돋보인다”는 그는 그 원동력으로 첫째, 각종 세미나와 정보를 중요하게 여기는 등 공부를 많이 한다 둘째, 해외펀드, 해외부동산, 해외 골프장 구입 등 해외투자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점을 꼽았다.

신흥부자들은 자기 관리에도 적극적이고 치밀한 편이다. 삼성증권의 ‘마스터PB’인 이애란 도곡렉스브렌치장은 “요즘 부자들은 성실하고 검소하며 무슨 일이든 신중하며 진지하다”고 평가했다. 식당에서도 음식을 남기는 법이 없고 티슈 한 장을 쓸 때에도 아까워할 만큼 부자가 된 이후에도 몸에 밴 습관대로 알뜰하게 산다는 것. 시간 관리에도 철저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종연 센터장도 이에 동감한다. “옛말에 ‘부자 3대 못 간다’고 하지만 요즘엔 그렇지 않다”는 그는 “재산이 1000억 원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는 70대 고객이 대학원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 매월 용돈을 50만 원을 주고 있는데, 용돈기입장을 제출해야만 다음 용돈을 줄 만큼 철저하고 꼼꼼한 경제교육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승렬 차장도 “요즘 신흥부자들은 비교적 나눔 활동을 잘하는 편이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부 일부를 공유하고 주변을 잘 돌본다”며 이는 나눔에 대한 학습이 상당히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부자들에게 대한 서민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우리나라의 백만장자 중 약 27%만 종합과세를 물고 있는 사실이 그 이유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2005년 금융소득 종합과세 대상자는 2만3184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같은 시기 메릴린치의 보고서에서 집계한 금융자산 10억 원 이상 8만6700여 명의 26.7%에 불과한 수치다.

금융소득 종합과세는 이자 등 금융자산으로 거둬들인 소득이 연 4000만 원을 넘을 경우 근로·사업소득 등 다른 소득과 합산해 누진 과세하는 일종의 ‘부유세’로, 10억 원 이상이면 연 금리 4∼5%인 정기예금으로도 4000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어 과세 대상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 부자들이 이자와 배당금 등 금융소득을 장기 보험이나 주식형 펀드 등의 절세방안을 활용해 과세 대상에서 빼내고 있다는 풀이다. 시중은행의 한 PB담당자는 “20억∼30억 원대의 금융자산가 대부분이 종합과세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며 “과세 대상에 포함되는 이들은 금융자산이 지나치게 많아 어쩔 수 없는 경우나 절세 지식이 없는 경우일 뿐”이라고 말했다.

‘탈세’ 버리고 부에 당당해야

절세가 아닌 사실상의 탈세 수법도 부자들을 향한 차가운 시선에 한몫한다. 금융소득종합과세는 가구별 합산이 되지 않아 부인, 자녀 이름의 차명거래를 이용하면 4000만 원 기준을 비켜갈 수 있다. 금융권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현상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부자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약 96억 원의 개인 재산을 남기고 나머지 460억 달러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라는 세계 1위 갑부 빌 게이츠 정도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벌고 쓰는 기준을 정할 때 ‘빌 게이츠 따라하기’ 만이라도 해야 한다는 주문이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는 “실제로 부자들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돈’으로, 자신이 가진 부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고 지적하며 “그들에게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된 만큼 서민들과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한 교수는 “우리나라 국민의 상당수는 반(反) 부자 정서를 갖고 있다”며 “선진국처럼 부자들이 국내에서 당당하게 돈을 쓰고 그들이 쌓은 부를 존중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라고 지적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