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의 가요이야기 .27] 신민요 '노들강변'을 부른 가수 박부용
콧소리 절로 나는 가락에 恨 담아 삭이다
가사·고전무 등 技藝 능한 기생 출신 가수…'노들강변' 5대 민요곡에 꼽혀
'조선미인보감'에 소개된 박부용
'조선미인보감'에 소개된 박부용
따스한 봄기운이 감도는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련한 노랫소리가 있습니다. '노들강변'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곡을 듣는 주변 환경이 낙동강이나 한강 주변이면 더욱 좋을 듯하고, 그 강가에는 물오른 버드나무가 파릇한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계절이라면 금상첨화겠지요. 그냥 부르는 노래도 무방하지만 만약 장구 반주가 곁들여진다면 더욱 이상적인 분위기라 하겠습니다.


노돌강변 봄버들 휘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칭 동여 매여나 볼가/

에헤요 봄버들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긔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돌강변 백사장 모래마다 밟은 자죽/ 만고풍상 비바람에 멧번이나 지여갓나/

에헤요 백사장도 못 미드리로다/ 푸르른 저긔 저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노돌강변 푸른 물 네가 무슨 망녕으로/ 재자가인 앗가운 몸 멧멧치나 데려갓나/

에헤요 네가 진정 마음을 돌녀서/ 이 세상 싸인 한이나 두-둥 실구서 가거라


이제는 경기민요의 대표곡이 된 신민요 '노들강변'의 가사 전문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른 가수를 환히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부용(朴芙蓉: 1901∼?)이란 이름의 기생 출신 가수가 불렀는데, 봄날 오후의 나른한 시간에 라디오 전파를 타고 들려오던 '노들강변'의 애잔한 여운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약간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가락으로 가수가 구성지게 엮어가던 이 노래에는 고단하고 힘겹게 살아온 우리 겨레의 강물과도 같은 역사의 내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고단한 역사 속에서도 자기 앞에 휘몰아쳐온 아슬아슬한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 환한 얼굴로 강바람 맞으며 우뚝 서 있는 강가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같은 우리 민족의 듬직한 표상을 느끼게 합니다.

민요와 신민요가 어떻게 다른가 하면 전래민요는 작자가 따로 없고, 지역마다 그 특수성을 담아내고 있지요. 하지만 신민요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부러 만들었고, 그 때문에 지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잡가와 판소리, 민요 등의 영향 속에서 생겨난 신민요는 직업적인 가수가 국악기와 양악기 반주에 맞춰 부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930년대로 보면 가수, 작곡가를 겸했던 김용환이 조자룡이란 예명으로 신민요 작품을 많이 발표했습니다.

신민요를 부른 가수들을 곰곰이 살펴보면 대개 기생 출신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권번에서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친 그녀들이라 발성이 이미 신민요를 부르기에 적합한 목청을 지니고 있지요. 1933년 평양기생 출신으로 가수가 되었던 왕수복이 첫 테이프를 끊으면서 기생 출신 가수들은 마치 봇물이 터진 듯 떼를 지어 식민지 가요계에 나왔습니다.

낱낱이 호명해보자면 박채선, 이류색, 이은파, 선우일선, 박부용, 김복희, 김인숙, 한정옥, 미스코리아, 김운선, 왕초선, 김연월, 김춘홍, 이화자 등이 바로 그 꽃다운 이름들입니다.

기생들의 경우 직업적 이유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나 이력을 드러내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들이 언제 어디서 태어나 활동하다가 어느 때에 생을 마감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노들강변'을 불러서 만인의 연인이 되었던 가수 박부용!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도 그동안 뚜렷하게 밝혀진 자료가 없었습니다. 이 박부용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는데, 마침 어느 일본인이 20세기 초반에 펴낸 '조선미인보감'(1918)이란 책에서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쪽찐 박부용의 사진과 약력을 발견하고 너무나 감격에 찬 나머지 혼자서 커다란 환호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도합 4개의 권번이
'노들강변' 포스터2
'노들강변' 포스터
'노들강변' 작사자 신불출3
'노들강변' 작사자 신불출
'노들강변' 가사지4
'노들강변' 가사지
'노들강변' 작곡가 문호월5
'노들강변' 작곡가 문호월
'노들강변' 취입시절의 박부용6
'노들강변' 취입시절의 박부용
있었는데 한성권번, 대정권번, 한화권번, 경화권번이 그것입니다. 이 가운데 한성과 대정이 200명 가까운 기생을 거느린 대표적 권번이었지요. 박부용은 한성권번 소속으로 17세 때 찍은 얼굴 사진과 소개 글이 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소개하는 글은 박부용의 이력에 관한 최초의 서술입니다. 기생 박부용은 1901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로 이주해서 살았지만 부친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은 기울었습니다. 그 때문에 박부용은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돌보는 소녀가장으로 모진 고초가 많았던 듯합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박부용은 1913년, 불과 12세의 나이로 서울 광교조합에 기생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부터 독한 마음을 품고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서 가곡과 가사, 경서잡가를 비롯하여 고전무용의 영역인 각종 정재무, 춘앵무, 검무, 무산향까지 모두 익혔습니다. '조선미인보감'에 그려진 박부용의 자태는 마치 선녀같습니다.


'단정한 용모에 성품은 온유하다. 어여쁜 귀밑머리는 한 덩이 새털구름이 봄 산을 휘돌아 감도는 듯한데, 발그레한 두 볼은 방금 물위에 피어난 한 송이 부용화를 떠올리게 하는구나.'


한창 레코드 보급에 대한 열망으로 부풀어 오르던 1933년, 박부용은 오케레코드사로 발탁이 됩니다. 맨 처음 서도잡가인 '영변가'를 최소옥의 장구 반주로 홍소옥과 함께 병창으로 불렀고, 긴 잡가인 '유산가'를 박인영의 장구에 맞춰 불렀습니다. 이후 민요 '사발가' '신개성난봉가' '범벅타령' '오돌독' '산염불' '흥타령' '창부타령' '신양산도' '신청춘가' '신애원곡' '한강수타령' 등을 취입했습니다. 잡가로서는 '신고산타령' '선유가' '수심가' '엮음수심가' '신닐니리야' '신창부타령' '신담바귀타령' '신오봉산' '신경복궁타령' '신방아타령' '제비가' '신산염불' '신천안삼거리' '풋고치' '신노랫가락' 등을 취입했습니다. 서도잡가로는 '공명가' '자진난봉가' '난봉가', 가사로는 '죽지사' '수양가' 등을 불렀습니다.

박부용이 오케레코드사를 대표하는 신민요가수로 활동했던 시기는 1933∼35년까지 약 3년입니다. 이 시기 모든 신민요의 황제라 할 수 있는 '노들강변'은 34년 1월에 신불출 작사·문호월 작곡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 창립1주년 기념 특별호로 발매되었습니다.

노들은 '노돌(老乭)'에서 변화된 말로 서울의 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노들강변은 노량진 일대의 한강 지류 강변으로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운 뱃놀이가 번창했지요.

당시 오케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문예부장 김능인, 전속작곡가 문호월 등에게 전국의 민요를 발굴·수집하도록 했습니다. 문호월(1908∼53)은 어느날 만담가 신불출(본명 신상학: 1907∼69)과 함께 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오던 길에 노량진 나루터에서 뱃사공의 구성진 노랫소리와 한강의 푸른 물결 위로 드리워진 봄버들을 바라보며 작곡의 착상을 얻었다고 합니다. 창작의 흥을 이기지 못하고 곧장 강가의 선술집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각각 곡조를 흥얼거리며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문호월이 악보를 엮으면, 이를 지켜보던 신불출이 노랫말을 다듬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노래는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요.

'노들강변'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과 제국주의 통치로 말미암은 가슴 속 울분을 이 노래를 부르며 달랬습니다. 작사·작곡자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신민요 '노들강변'은 이제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천안삼거리'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5대 민요곡의 하나로 영원 불멸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시인·영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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